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993
58화 연회의 시작
필리언 제라르는 다가온 카사 노바 남작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 카사 남작, 오늘 바쁘다면서?”
“예. 다른 쪽 연회에 임무를 맡아서 말입니다.”
카사 남작의 대답에 제라르가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여기보단 그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하, 하하하.”
제라르의 솔직한 대답에 카사 남작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어딘가 어색했다.
짧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이 쏘다녔던 이가 바로 카사 남작이었다.
그의 어색함을 모를 제라르가 아니었다.
“무슨 일 있나?”
“조금 이상합니다.”
“응?”
“살롱에서 들어온 아가씨들을 데리고 온 이들 중에 제가 아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공작가에서 사람을 붙였다고는 하는데 복장이 마치…….”
재빠르게 말을 내뱉던 카사 남작의 입은 울려 온 목소리에 의해 닫혔다.
“카사 남작, 오늘 수고가 많아.”
“아, 고, 공작 각하. 아닙니다. 이번 소임을 맡겨 주셔서 감사드릴 뿐이옵니다.”
일리언 버튼 공작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 곁에는 듀란 페이서 백작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쪽 준비는 다 되었는가?”
“아, 예.”
듀란 백작의 질문에 카사 남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재빨리 소개를 했다.
“여기 계신 분은 우리 필리어리 왕국 공신가의 가주이시며, 공작의 직위에 계신 일리언 버튼 공작 각하이옵니다. 오늘의 자리를 주최하셨지요.”
“오! 이제야 얼굴을 봅니다?”
제라르가 편히 웃으며 인사말을 건네자 일리언 공작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우리 쪽 인사들이 실수가 많아서 한동안 자중했습니다. 이렇게 가우리의 고위 귀족을 만나 봬서 반가울 따름입니다.”
“하하핫!”
제라르가 호탕하게 웃었지만 카사 남작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었다.
역시나 이상했다.
일리언 공작은 계승귀족들의 수장으로서 나름 그 위치에 걸맞은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대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졸렬한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행동을 보면 꽤 대범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포장한 행동도 아니었다.
뭔가가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계기가 있다든지…… 앞으로 생길 것이라든지 말이다.
“이런,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연회를 주최하는 입장이다 보니 말입니다.”
일리언 공작의 말에 제라르가 웃으며 대꾸했다.
“이따가 보지요.”
“카사 남작, 그래 준비는 잘 되고 있는가?”
이때 듀란 백작의 질문이 이어졌고, 카사 남작이 긴장감을 숨기며 대답했다.
“예. 준비는 거의 마쳤습니다. 여기 제라르님께 인사나 드리려고 잠시 들렸던 것입니다.”
“자네의 역할이 중하네. 이곳은 우리가 신경 쓸 터이니 가우리의 무장들을 잘 신경 써 주게. 사실 우리 쪽에서 하려다가 아무래도 평소 친분이 있는 자네가 더 나을 것 같아 부탁을 한 것이네.”
듀란 백작의 말에 카사 남작은 의심이 더 커졌다. 아마도 자신의 역할은 방심을 키우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등을 돌리고 사라지는 일리언 공작의 모습 역시 이상했다.
오히려 이 자리에 딱 붙이 었어도 모자랄 사람이 분주히 사라진다는 건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사 남작은 듀란 백작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전 다시 가 보겠습니다.”
제라르에게도 다시 인사를 올리던 카사 남작은 그가 한쪽 눈가를 찡긋하는 모습에 복잡한 심경을 조금은 떨쳐 낼 수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카사 남작은 발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냥 자신의 기우이길 빌었다. 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 심장이 벌렁거렸다.
제라르는 멀어지는 카사 남작의 뒷모습을 보며 픽하니 웃었다.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신경을 써야겠어.”
사실 별다른 생각 없이 온 자리였다. 하지만 카사 남작의 언질을 듣고 나니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수하들과 자신을 이렇게 떨어트려 놓은 것도 이상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카사 남작에게 들었을 때는 매일 자신만 나가 노는 게 미안한 마음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는데, 조금 아까 카사 남작의 언질을 듣고 나니 뭔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거 그나저나 꽤 고민했을 건데 말이지.
카사 남작의 불안했던 모습에 제라르는 기분이 좋았다.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전우들은 있었지만 같은 취미를 공유할 친우는 없었다.
페일이야 동반자적 입장일 뿐이고 말이다.
고진천과 새로운 세상을 다녀오며 새로운 취미에 눈뜬 그에게 카사 남작은 마음이 잘 맞는 친구였다. 그 덕에 직위와 상관없이 함께 돌아다니기를 즐겼다.
여자도 좋았지만 함께 노는 게 좋았다.
그런 그가 자신을 위해 저렇게 뭔가를 알려 주려 했다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제라르가 옆에 있는 수행원 중 하나에게 입을 열었다.
“애들에게 뭔가 있을 수 있으니, 정신줄 놓지 말고 즐기라 해.”
“예.”
수행원은 바로 마법사였다.
이곳과 묵갑귀마대가 있는 곳에 각기 한 명씩이었다.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는 몽류화를 향해 걸어갔다.
뭔가 벌어진다면 그걸 좋게 활용하는 방법은 그가 더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남자. 그게 나지.”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제라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카사 남작의 발걸음은 다시 묵갑귀마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쪽에도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라르에게는 제대로 알리지 못했지만,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뭔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왕가에다가 알려 볼까도 생각했지만 지레짐작으로 행동했다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면 자신만 우스운 꼴이 된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연회의 주체는 바로 일리언 공작가였다.
곳곳에 공작가의 눈이 있었다. 이런 때에 왕가의 인물과 접촉을 한다는 건 자신이 뭔가 눈치챘다는 걸 알리는 꼴이 된다.
그러면 역시 최선은 바로 가우리 인물들이었다.
시에라 제국의 습격자들을 일방적으로 무너트린 그 무력에 얼마나 놀랐던가.
그것을 보고했을 때 귀족파는 자신들을 바보 취급했다.
오히려 사신단으로 다녀온 이들에게 자중하라며 징계 아닌 징계를 내렸다. 그나마 자신은 제라르와 친했고, 또 실질적으로…….
“쓸모없는 인간 취급인 건가? 징계조차 필요 없는.”
쓴웃음이 머금어졌다. 스스로 영지의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는 했지만 이런 취급이 좋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걸 한다.”
카사 남작은 눈을 빛내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헤머튼 리어 2세는 다른 때와 달리 센시아 리어 공주와 함께 등장했다. 그동안 제라르가 그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은 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듯했다.
센시아 공주 역시 못 이기는 척 나왔다.
물론 이후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서로 약간은 서먹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업을 한 것은 제라르였지만 그녀 역시 거기에 놀러갔던 것 아닌가.
일단 서로 찔리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로잔과 류화가 나름 신경을 써 주었던 것이다. 물론 자기들 연애질을 하면서 의무적으로 조금씩 말이다.
제라르가 헤머튼 왕과 센시아 공주를 맞이하는 동안 류화는 로잔에게 다가갔다.
“오늘 내 곁에 있어 주오.”
“훗. 너무 노골적이십니다.”
“언제는 아니었소?”
류화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하자 로잔이 눈웃음을 쳤다. 그러면서도 류화의 시선은 주변을 훑었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일단 곁에 있으란 말을 한 것이었다. 아직까지 특별한 변화를 느끼지는 못했다.
그때였다.
“일리언 공작은 아직인가?”
“뭔가 준비하느라 바쁘다더군요.”
제라르의 대답에 질문을 했던 헤머튼 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비?”
연회의 주체인이라지만 왕이 오기 전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정작 헤머튼 왕이 도착했을 때 없다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때, 주변을 살피던 류화가 헤머튼 왕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슬쩍 턱짓을 했다.
제라르가 그의 턱짓을 따라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음식을 내오는 이들의 행동거지가 왠지 느낌이 달랐다. 그것을 느낀 것은 류화나 제라르뿐만이 아니었다.
“잠깐.”
“예.”
연회장을 지키는 왕실기사가 음식을 나르는 이들 중 하나를 잡았다. 왠지 평범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속이 어디지?”
“일리언 공작가입니다.”
“그래? 그런데 요리사나 하인 같지는 않은데?”
왕실기사의 추궁에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합니다. 일리언 공작가문의 수호 기사단 소속이니까.”
“뭐?”
왕실기사의 눈이 커지는 순간, 그의 벌어진 입을 통해 피에 번들거리는 검날이 쑤욱 하고 튀어나왔다.
왕실기사의 눈은 더욱 커졌고, 두 손은 뒤통수를 뚫고 앞으로 나온 검날을 붙잡았지만 이내 다시 두 손을 추욱 늘어트렸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이, 이런!”
카사 남작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막 도착해서 부여기율에게 뭔가 사고가 있을지 모른다는 언질을 해 주는 도중에 무장을 한 이들로 인해 사방이 막혀 버렸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비명을 내질렀고, 가우리의 묵갑귀마대와 교류를 하기 위해 모였던 젊은 귀족들은 벌게진 얼굴로 목청을 높이다가 칼에 맞고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묵갑귀마대원들은 일제히 삼삼오오 뭉쳤다. 하지만 비명은 시작에 불과했다. 연회장 내에서 갑자기 돌변한 귀족들과 기사들이 사방으로 검을 뿌렸기 때문이다.
“미, 미쳤어!”
카사 남작은 이를 악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명백한 반역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늘 연회를 위해 모인 병력은 기존 공작가문이 입성할 때의 숫자에 비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 왕가와 귀족파벌은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물론 완전 배타적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고작 이 숫자만으로 이런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떻게 된 일 같소?”
기율의 질문에 카사 남작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대답했다.
“계승귀족 파벌이 일을 벌인 듯합니다. 장내에서 무기를 쥔 자들은 모두 계승귀족 파벌이니까요.”
물론 처음부터 무기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숨긴 곳을 알고 있었는지 갑자기 무기들을 찾아서 빼들었던 것이다. 그들의 암습은 필리어리 왕가를 향하지만은 않았다.
“어헉!”
카사 남작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이 기생오라비 같은 새끼, 어디서 나불거리느냐!”
평소 그를 마음에 들지 않아했던 귀족파벌의 귀족 하나가 그를 향해 롱소드를 휘둘러왔기 때문이다.
카사 남작은 절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기가 될 만한 것이라도 챙겨 올 걸 하는 후회도 했다.
물론 무기를 챙겨 와봐야 그의 실력으로는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그랬다면 최소한 여기 있는 가우리의 무장들에게는 조금이나마 활로를 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카사 남작의 머리 위로 롱소드가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