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Germany needs a Führer RAW novel - Chapter (245)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 외전-245화(245/246)
(중략)
혁명전쟁이 이강석 일가의 몰살과 혁명군의 승리로 종결되자, 자연스럽게 정권의 향방을 놓고 승리자들 사이에서도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당시 조범석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혁명의 일등공신으로 우뚝 섰으나, 젊다 못해 어린 나이와 군에서의 서열 문제로 인해 최고권력자가 되기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유럽연방과 독일민족혁명당이 조범석이 최고지도자로 취임한다는 전제하에서 신생 대한민족혁명공화국을 승인하겠다는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고, 소련 또한 물밑으로 조범석을 지지한다는 시그널을 보내며 전세가 급변했다.
빅 3 중 두 국가의 지지를 확보한 그는 혁명의 주역이라는 브랜드를 활용해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한편, 자신이 최고지도자가 된다면 국왕에 버금가던 이전 대통령들과 달리 실권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며 중진들을 설득해나갔다.
마침내 혁명 유공자들의 합의하에 조범석은 초대 총통으로 추대되었으나, 그는 장식품 바지사장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지속적인 숙청과 정쟁 끝에, 약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범석은 유일무이한 진짜 총통으로 거듭났다.
이미 중동, 아프리카, 남미 등 거의 모든 신생독립국에서 표준화되다시피 한 로젠바움식 정권 장악의 정석을 밟은 그는 특이하게도 군부 독재 정권을 공고히 굳히지 않았다.
본인의 권력이 정점에 이른 시점, 조 총통은 <유럽식 민족혁명주의로의 도약>을 외치며 대대적인 민주화 작업에 착수했다. 총통과 지방자치단체 단체장의 직선제가 도입되었으며,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야당의 정치 활동이 해금되었···.
–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총통을 떠나보내며> 中
반중전쟁 종전과 88혁명을 전후해, 한반도의 모든 이들은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충격을 몇 번씩 맞닥뜨렸다.
중화민국은 해방이래 제1의 우호 국가였고, 가상적국인 만주 중공 공산비적과 신뢰할 수 없는 이웃 일본에 맞서는 혈맹이기도 했다.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는 자연스럽게 중국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며 양국의 협력은 갈수록 늘어만 나고 있었다.
독-중 결렬과 중국의 독자 노선 천명, 그리고 장개석 사후 중화민국이 점차 중화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주변국들에 중화질서의 복원을 요구하면서 양국 간 관계가 급속도로 얼어붙었지만, 반중전쟁 개전 직전까지 중공이 아닌 중국과의 전쟁을 예상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었다.
개전 당시 정부는 ‘중공이 피부병이라면 중국은 나병’이라는 논리하에 중공과의 군사동맹과 참전을 결의했지만, 여론은 한국이 미국의 압력에 의해 참전을 강요당했다고 여겼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한국은 미국의 용병으로 전쟁에 휘말렸고, 국내의 친중파들이 이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숙청당하며 자유당 내부에서도 거대한 분열이 발생했다.
전후 상황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과 평양에 투하된 핵폭탄은 태평양 전쟁기에 투하된 핵폭탄보다도 약했기에 그 물질적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무수한 사상자와 훨씬 더 많은 이재민을 발생시켰고, 이 이재민들은 거대한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혁명 전부터 이들은 반정부 운동을 벌이고 있었고, 혁명이 발발하자 곧바로 무장하여 혁명군의 주력이 되었다.
80년대까지 중화민국과의 무역은 국가 경제에 대단히 큰 영향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아시아 국제 경제 체인은 일거에 붕괴되었다.
전시 자유당 정권은 국유화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위아래를 가리지 않는 거대한 부정부패로 인해 본래 의도하였던 규모의 경제는 성립되지 않고 국유화된 기업들을 자유당 권력층이 제멋대로 사유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실업자들을 대규모 징병으로 흡수하였는데, 당시 국방부 장관은 ‘전쟁을 통해 인간쓰레기를 만주에 투기할 수 있다’고 발언해 충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