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Germany needs a Führer RAW novel - Chapter (40)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 40화(40/246)
21세기의 망령
카이저 알현은 참으로 힘 빠지는 행사였다.
단순히 접견만 하려 해도 온갖 정치적 고려를 해야 했는데, 대중 앞에서의 빅 이벤트다. 일단 이것만 해도 혹시 협상국의 암살자나 미친 빨갱이 테러리스트나 미치광이 아나키스트가 나타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행위인 셈.
거기다 국내 정치적 고려.
푸르 르 메리트 훈장 두 개를 동시에 받는 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육군에서 이런 사람이 나타나는데 해군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걸 받아먹으면 나중에 내가 팔켄하인을 손절할 때 뒤에 질척거리는 일이 없을까, 등등등.
그러니 내가 한밤중 집에 돌아왔을 때 물 먹은 미역마냥 흐물흐물해져 있는 건 실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왔어요?”
“응.”
얼마 만에 들어오는 집인지 모르겠다.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부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집보다는 회사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당장 면도칼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비품들이 하나둘 방에 늘어나지 않았던가.
– 거짓말 좀 하지 말게.
거짓말이라니. 집에 한번 들르면 대체 몇 시간이 사라지는지 뻔히 아는 사람이 저러네.
그 시간이면 대체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 회사 직원 한 명을 저 서부의 참호선에서 공장으로 빼올 시간일지도 모른다. 비행기 한 대를 더 튼튼하게 만들 시간일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아이들은 징병될 일이 없잖은가.
그래. 이래서 결혼을 미뤘다.
귀천상혼이니 뭐니 되도 않은 소리쯤, 이 악물고 들이댔으면 약간의 뒷감당은 했을지언정 사실 결혼하는데 어마어마한 지장까진 아니었겠지만 나는 모른 체하고 결혼을 미루는 핑계로 삼았다.
덜컥 애가 너무 일찍 생기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멋대로 자원 입대하겠다고 뛰쳐나가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어느 풀밭에 나자빠져서 죽을지 대관절 누가 알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꽤 늦게 태어났다.
내가 싸대기 풀스윙 맞고 귀신 들릴 나이 때쯤 첫째 페르디난트가 1차 대전의 광풍을 목도하게 되었으니, 절대 전쟁터로 갈 일은 없다. 1918년이 되어도 애들은 징병 연령에 못 미친다.
“괜찮아?”
“응?”
“생각이 많아 보여서.”
겉옷을 벗어 에르나에게 건네주던 도중 문득 목구멍에서부터 무언가 치밀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몇 년째 그놈의 사업이다 정치다 뭐다 하면서 온 유럽을 싸돌아다녔는데, 너도 혹시-
– 그만해 이 자식아. 왜 엄한 네 부인한테 지랄을 떨려고 해, 지랄을. 가정교육 못 받은 티 그만 내고 발 닦고 잠이나 쳐자! 빨리!
이놈의 AI 비서가 이제 사람 감정도 통제하네.
“애들은?”
“자고 있지.”
그때였다.
문이 빼꼼 열리더니 코딱지 둘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 아빠다. 야. 아빠 왔어.”
“어? 아빠? 아빠 집에 온 거야?”
“어머, 얘들아. 아빠 피곤한데 방해하면 안 돼.”
“아냐. 괜찮아.”
날이면 날마다 쑥쑥 커가는 아이들.
난 문득 두 아이들을 힘껏 끌어안았다.
“와. 아빠, 훈장 보여줘요 훈장!”
“아빠 너무 멋져요. 영국놈들이 그렇게 비열하다면서요? 저도 아빠처럼 파일럿 되고 싶어요. 저도 크면 런던을 불태우고 싶어요.”
“그럼 밤에 푹 자야 한단다, 얘들아.”
– 아르민 이 친구야. 명심해. 잃어버린 뒤에 울어봐야 아무 소용 없어. 있을 때 잘해.
“으아. 아빠 수여어엄.”
“이제 자러 가렴.”
“아빠 새벽에 바로 출발해요?”
“내일 아침 같이 먹자. 그때까진 있을게.”
“그럼 잘래요.”
그래. 푹 자렴.
나는 쿡쿡 쑤시는 가슴께를 꽉 누르며, 양손에 짐덩어리들을 하나씩 부여잡고 침대로 수류탄 까넣듯 애들을 휙휙 던졌다. 이제 첫째는 무거워서 좀 많이 힘들었다. 아, 망할. 허리 삐끗했어.
나는 눈을 감고 정신없이 잠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옆에 온기가 느껴졌다.
***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럴 일은 희박하겠지만.
내게 조범석 씨가 흘러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매우 비참한 유년기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놈이 저 엉망진창 집안 환경에서 참 잘도 컸겠다. 물론 이 시대에 저런 집은 허다하지만, 그런 집이 허다했으니 독일이란 나라가 막장으로 흘러간 것 아니었겠나.
가화만사성이라는 옛말을 역으로 돌리면 곧 온 나라의 가가호호에 불화가 가득하니 모든 게 막장이 되었다고도 해석할 수도 있겠지.
범석이의 페르소나를 방패 삼아 나는 정신줄을 부여잡고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21세기 한국인 조범석의 자아가 득보다는 실이 되었을 때, 마치 그렇게 되기로 예비되어 있었던 것마냥 자연스럽게 내 안의 아르민 로젠바움과 조범석은 딱 알맞게 분리되었다.
스스로 쿠데타 수괴니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의 무리네 뭐네 구차하게 떠들어대봤자 이 매콤한 20세기의 세파 앞에선 그냥 사회 부적응자에 불과하잖은가. 나약한 빨갱이 같으니.
이렇게 조스비가 쪼개지고 난 뒤, 나는 미래 지식이 흐릿해졌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지식에 비해 그의 기억을 떠올리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의 기억을 알면 알수록 나라는 자아를 유지하기가 더 힘들어지잖은가?
그러니까 지금 이 광경은 꿈이 틀림없었다.
1915년 지금 이 시점에서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는, 대한민국의 풍경이 내 눈앞에 보이고 있었으니까.
– 오, 범석이.
21세기 형광등 밑에서 보니 머리가 더 반짝반짝해.
나는 내 앞에 보이는 조범석을 보고 재빨리 손을 흔들었지만 그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내가 흔든 손은 그의 몸통을 그대로 쓱 통과했다.
대충 알았다. 여기선 구경만 하란 말이지. 조스비와 내 상태가 반대가 된 꼴이군.
열 명쯤은 너끈히 앉을 법한 널찍한 식탁에 깔려 있는 수십 종의 한식.
조범석은 맞은편에 한 남자를 둔 채 식탁만을 빤히 바라보며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 조범석 씨의 심경이 마치 내 감정인 것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긴장감.
울화.
그리고···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끈적하고 지독한 감정.
“대통령님.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잘 왔어요, 조 중장.”
“어째서 이런 곳에서 은밀하게 국가원수를 만나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용건만 듣고 일어나겠습니다.”
대통령이라.
프랑스나 미국 놈들이 국가 원수를 투표로 뽑았지. 그리고 프랑스의 꼬라지를 보자면 딱히 대통령제가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진 않았다.
선거에서 이긴 덴 다 이유가 있는 듯, 이 한국 대통령이란 남자는 꽤나 얼굴값 좀 하고 다니게 생겼다. 물론 내게 미치진 못하다. 나이깨나 잡쉈으면서도 태에서부터 기생오래비 같은 느낌이 남아 있잖은가. 으음. 역시 선거는 얼굴빨인가. 두렵다. 나는 어쩌면 태생부터 선거를 하기 위해 태어난 건가.
“자자. 그러지 말고 일단 수저부터 들어요. 여기 음식이 기가 막힙니다. 술도 이거, 지방 경제 활성화를 위한 겁니다. 한산소곡주라고 풍미가 기가 막힌데-”
“죄송합니다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길게 잡고 있진 않을 테니 그냥 앉아요.”
대통령은 그를 멈춰 세운 뒤, 앞에 놓여 있던 정체불명의 괴음식 – 산낙지를 게걸스럽게 뜯어먹었다. 으, 세상에. 저게 뭐야. 저걸 먹는다고? 실시간으로 꿈틀대는데?
“알다시피, 우리의 이웃 나라가 화가 좀 많이 난 모양이에요. 당장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펄펄 뛰고 있는데, 허허. 참 난처해졌단 말이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란 사람이 짱개를 모조리 가스실에 처넣겠다고 공식석상에서 지껄였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쩝. 결과적으론 잘 풀리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생각하고 한 말입니다. 솔직히 내가 제일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전쟁위기를 조성해도 미군이 기어이 철수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천조국 황상이 나보다 더 미친놈인 건 예상외였다 이 말입니다.”
“그럼 책임을 지세요.”
“그래서 책임을 져볼까 하고 당신을 불렀습니다.”
그는 입에 남은 낙지를 몇 번 더 으적대더니, 술도 한 잔 쭉 들이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구국의 결단. 어떻습니까?”
조범석의 반응은 몇 초 뒤에야 나왔다.
“···혹시 지금을 무슨 쌍팔년도로 생각하십니까?”
“뭘 새삼스레. 난 지극히 제정신입니다. 옆집 식구들이 당신에게 군사 반란을 제안한 사실을 듣고도 당장 귀관을 체포하는 대신 이렇게 독대까지 가졌잖습니까. 감히 불경한 소리를 지껄여댄 나를 날려버리면 침공하지 않겠다면서요? 나쁘지 않은 제안 같던데.”
“전 그딴 웃기지도 않는 수작에 놀아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아. 그러시겠죠. 하지만 나는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범석이를 향해, 대통령이란 남자는 조곤조곤 떠들어댔다.
“지금 이 나라가 정상으로 보입니까? 이 나라가 제정신이었으면 나 같은 놈을 청와대로 보내줬겠어요? 개돼지한테 투표를 시켜도 이것보단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 것 같습니다만. 이런 놈들에게 국가의 주권을 맡겼다간 나라가 결딴나지 않겠어요?”
“미친놈.”
“비상한 시국엔 비상한 대책이 필요해요. 법이다 인권이다 같은 샌님들 헛소리 말고,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지금은 누군가 총대를 메고 나라를 좀먹는 좀벌레들을 일광소독 좀 시켜줘야 한다 이 말입니다.”
조범석은 대답 대신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신경질적으로 들어 올렸고, 그는 그것을 긍정적 제스처로 받아들였는지 더욱 웅변하듯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내 생각에 이건 위기가 아니라, 아주 좋은 기회에요. 컴퓨터가 먹통이 되면 제일 먼저 뭘 합니까. 리부팅이지요. 이 나라가 그래서 5년마다 리부팅을 하잖습니까. 그런데 리부팅으로도 안 되면 고장이 났으니 포맷을 해봐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한번··· 포맷을 좀 해줘야 한다고 봐요.”
“지금 당신은 자신이 이 나라의 국가원수인 이유를 부정하고 있어요!”
“왜 이러실까. 갑갑하게 굴지 마세요. 이 나라 국민들은 나를 뽑음으로써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한 거예요. 개인의 권리를 약간 깎아서라도 남의 권리도 깎고 싶다! 아주 조금 자유를 포기해서라도 나라에 질서와 안정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와장창창!
거대한 목제 밥상을 단 한 방에 뒤집어엎은 조범석은 홀라당 반찬을 뒤집어쓴 대통령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방금 당신이 지껄인 거, 전부 녹음했어.”
“공표하시게요?”
“당연하지!”
“그럼 탄핵정국이 벌어질 테고, 여당은 날 지키려고 총력전 태세에 나서고, 나는 나대로 당신이 옆집에 포섭된 반역자라고 주장할 테고··· 그러다 옆집 군대가 침공해 오겠군요. 어쩌면 대만 망할 때보다 더 빨리 망할지도 모르겠는데.”
“호로새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자. 우리, 시간이 별로 없어요.”
“어째서 나야.”
“어째서냐고요?”
그는 입술 근방에 묻은 초고추장을 혀로 슬쩍 닦고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이 나라 장군들 중에 당신이 가장 이 나라를 싫어하거든.”
“뭐?”
“술 처먹고 조 중장님 가족 치여 죽인 그 친구, 재벌 3세라서 집유 받고 풀려났죠? 지금 그룹 계열사 물려받고 회장님 소리 들으며 떵떵거리며 살잖아요. 어때요. 이 사회의 좀벌레들을 싹 소독할 때 겸사겸사 그 친구도, 그놈의 아들딸도 마누라도 전부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준다면 천국에 있을 가족들도 행복해하지 않을지?”
“내 가족은 그딴 거 안 바래. 미친 새끼.”
조 중장은 다시 한번 식탁을 걷어찼다. 시뻘건 장과 양념이 사방팔방에 튀어 마치 살인 현장처럼 붉은 빛이 흩뿌려졌다.
접시 엎어지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그는 곧장 코트를 챙겨 입곤 바깥으로 뛰쳐나오듯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김 대위! 집에 가자!”
“아니, 무슨 10분 만에 밥을-”
“가자고! 출발해!”
“예예. 갑니다, 가요.”
바깥엔 끝없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성판 없는 95년식 구아방 한 대가 잠시 노인네 학대당하는 곡소리를 토해내더니 달달대며 출발했다.
시대를 한참 거슬러 USB도 CD도 아닌 카세트 테이프 물린 카오디오에서 트로트 메들리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들은 음악과 빗소리, 그리고 끽끽대는 와이퍼 소리만을 들으며 관사로 향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그래. 별거 아니다. 밥 한 끼 먹자고 해서 왔더니 보증 좀 서달래서 그냥 나왔다.”
“지끼미 뜨그랄.”
다시 침묵.
마침내 차는 관사에 다다랐고, 운전석에 있던 김 대위는 얼른 나와 재빨리 조 중장에게 우산을 받쳐주었다.
“야.”
“대위 김-”
“관등성명 됐고. 하나만 물어보자.”
“옙.”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는 말을 잇다 말고 안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김 대위는 얼른 한 손으론 그대로 우산을 든 채 다른 손으로 자신의 담뱃갑을 꺼내 최대한 불경하지 않은 자세로 이를 진상했다.
빗방울이 튀어 살짝 눅눅해진 디스 플러스 한 대를 입에 문 그는 살짝 어눌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에. 가족의 원수에게 복수할 기회가 있다 치면, 넌 어쩔 것 같냐.”
“7년 동안 저한테 행복하게 잘 사는게 최고의 복수라고 떠들어놓고서 지금 갑자기요?”
“아, 그러니까 만약이라잖아 이 자식아! 짜식이 어른이 물으면 째깍째깍 대답이나 할 것이지.”
“지금이야 그냥 참는데, 눈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치면 솔직히 일단 배때기에 사시미 꽂고 빙글빙글 돌린 이후에 생각하겠죠? 레토나에 치여서 대가리라도 깨지지 않는 이상 그걸 어떻게 참아요.”
“그치? 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갈 거니까 우산 넘기고 들어가 봐. 월요일에 보자.”
“알겠습니다. 충셔엉.”
아반떼는 다시금 흙탕물을 철퍽철퍽 튀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이제 남은 사람은 조범석뿐.
그는 갑자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아르민. 남의 기억을 엿보니 좀 재밌든?”
그 순간.
세차게 비 떨어지는 대한민국의 밤하늘은 사라지고, 내 눈엔 천장과 잔뜩 놀란 채 나를 흔들어대는 에르나만이 한가득 보였다.
유리창에 비친 조범석은 뒤돌아선 채 바깥의 베를린만을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