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How I Became a Chaebol RAW novel - Chapter (1)
나는 이렇게 재벌이 되었다-1화(1/589)
< 001 : 프롤로그 >
나는 누구처럼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태어나자마자 수저를 손에 쥐었다.
내 부모님이 수저를 찍어내는 분들이셨거든.
6, 70년대 부산의 전포동 기계 골목은 코딱지만 한 철공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이었다.
온갖 철물을 자르고 붙이고 찍어 대는 곳이라 골목마다 용접 불꽃이 튀고, 밤새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었지만 내겐 재미있는 놀이터이자 내 부모님에겐 고마운 삶의 터전이었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술래잡기도 재미있었지만 철공소 아이들에겐 특별한 놀이가 있었다.
어스름하게 노을이 질 무렵이면 또래 애들이랑 커다란 자석을 줄에 매단 채 동네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게 최고로 재미있었다.
한바탕 돌고 나면 자석에 붙은 온갖 쇠붙이를 떼어내 고물상에서 엿이나 뻥튀기로 바꿀 수 있었으니까.
우리가 주전부리를 즐기고 있을 때면 어른들은 연탄불에 구운 노가리 안주에 소주 한잔하면서 일과를 마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버지!! 나 또 시험, 100점 맞았어.”
어느 날 나는 하교하자마자 10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아버지께 달려갔다.
100점을 맞으면 언제나 상으로 50원을 주셨기에, 그날도 과자 사먹을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하하하, 잘했다. 내 새끼.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무슨 소리에요, 여보! 아들, 열심히 공부해서 돈 많이 버는 부자가 돼야 한다. 그래서 예쁜 마누라랑 큰 집에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아야지.”
아버지의 말씀보단 어머니의 말씀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랑 결혼할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둘 다 될게.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부자가 되면 되잖아.”
“하하하, 우리 아들 똑똑하구나.”
부모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즐거워했다.
그 말씀이 유언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름 재미났던 철공소 생활은 다음 날 새벽 트럭이 우리 집을 덮치면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우리 집은 현관문을 열면 곧바로 도로였기에 새벽녘 졸음운전을 하던 트럭엔 속수무책이었다.
난 고작 11살에 부모님을 모두 잃었고, 그 뒤로 이모 집에 얹혀서 살았다.
철공소는 임대였고 기계도 임대였기에 부모님이 내게 남긴 유산 따윈 없었으리라.
70년대 트럭 운전사가 보험 따위를 들었을 리 없었기에, 사람이 둘이나 죽었는데도 그 어떤 보상금도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어린 나에게 돌아올 리 만무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끝나버렸고, 그 뒤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미친 듯이 공부하는 게 전부였다.
이모님은 와중에 날 안쓰러워하기라도 했지만, 이모부는 달랐다.
가뜩이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업둥이를 데려왔다며 술만 마시면 내게 발길질을 해댔고, 그럴 때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책상 밑에서 꼬마전구 하나 켜놓고 밤새 교과서를 외우고 또 외우는 것이 유일한 나의 희망이자 안식이었다.
다행히 어린 시절의 나는 무작정 가출하면, 굶어 죽거나 양아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다.
공부에 흥미 따위는 없었지만, 흥미가 굳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이 집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나의 원동력이자 최고의 가정교사였다.
오로지 외우고 또 외우는 것.
참고서를 살 돈도 없었기에 교과서를 외우고 필기한 내용을 외우고 수업 시간엔 초집중했다.
그 결과 중고등학교 시절을 통틀어 전교 1등을 놓쳐 본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83년도 학력고사에서 305점을 받아 당당히 K대 기계 공학과에 입학했다.
딱히 K대 기계과가 좋아서라기보다, 학력고사 점수 300점 이상인 입학생에겐 4년 전액 장학금과 기숙사까지 제공해 준다는 조건에 고민할 것도 없었다.
S대에 진학한들 등록금과 서울 유학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거든.
이모야 날 아끼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겠지만, 이모부는 나보고 어서 돈 벌어서 키워준 값을 갚으라는 식이었으니까.
상고나 공고에 진학하지 않은 걸 못마땅해 하는 차에 미래의 내 월급을 담보로 더 이상 신세를 질 순 없었다.
여하튼, 그 뒤로 나는 완전히 독립했다.
장학금으로 등록금은 문제없었고, 과외를 뛰며 한 달에 50만 원 정도를 벌었다.
그 정도면 생활비로 충분했다.
어렵게 학업을 마치고 졸업할 시기가 되자, 교무과에는 대한민국 4대 재벌의 입사 원서가 쌓여 있었다.
내가 졸업한 80년대 중반은 공대생이라면 400% 취업률이 보장되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 원서 중에서 그룹의 사훈이 ‘창조, 도전, 희생’이라고 적혀 있는 <대세 건설>에 지원했다.
사훈이 맘에 든 게 아니고, 그 밑에 ‘해외 출장 빈번, 영어 능통자 우대’라는 말에 혹해서였다.
혹시나 회사 돈으로 비행기 한번 타 볼 수 있나 싶어서 말이다.
어수룩한 선택이었지만, 그 당시엔 어느 재벌 그룹에 입사해도 먹고 사는 데는 전혀 문제없던 시절이었다.
입사해서는 연신 ‘예! 알겠습니다.’, ‘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를 외치며 열심히 일했다.
끝물이긴 했지만 중동 건설 특수도 맛봤고, 동남아 플랜트 현장 소장을 거쳐, 신규 사업인 해양 플랜트 사업부 부장으로 승진하는 영광도 얻었다.
그렇게 15년쯤 근무했을 때였을까?
느닷없이 대세 그룹 전체가 해체되어버렸다.
아무리 IMF 외환위기 여파라지만, 어이가 없을 정도로 와르르 무너졌다.
한국재계 서열 2위 그룹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고, 빚이 89조원에 달했다. 대한민국을 넘어 인류 역사상 역대급 파산이었다.
세계 경영을 외치며 샐러리맨의 우상이었던 우찬수 회장은 한순간에 사기꾼이 되었으며,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직원이었던 나는 사훈에 따라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창조와 도전은 빛바랜 과거의 영광이 되었고 남은 것은 희생뿐이었다.
너무도 억울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것도 모자라 15년이나 근무했음에도 퇴직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전대미문의 국란이라 어디 가서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또다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을 모아 작은 건설 회사를 만들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내리막길만 달리던 건설업이 2천년대 들어서며 신도시 건설과 서울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며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
그런데 말이다.
이제야 좀 살만하다 싶었더니, 또다시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2022년 1월 11일.
우르르르. 콰쾅.
<속보, 경기도 A시 신축 아파트 붕괴>
뉴스에서 속보를 보자마자 달려왔는데 현장은 난리였다.
아파트의 외벽이 통째로 뜯겨나갔다.
콘크리트와 단단히 붙어 있어야 할 철근이 생선뼈처럼 드러나 있는 꼴이라니… 딱 봐도 콘크리트 양생 부족이었다.
“예… 사장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흐흑.”
“아무리 원청에서 닦달해도 절대 공구리(콘크리트)치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했잖아. 요즘 날씨가 계속 영하라고! 아무리 온풍기를 틀어도 6일 가지고는 택도 없어. 최소 10일은 양생했어야 한다고.”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굳을 때까지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평생 공사판을 전전했지만, 이번 공사처럼 콘크리트 양생 시간이 부족한 경우는 없었다.
12월 초순부터 1월 중순인 지금까지 영하의 날씨가 줄곧 이어졌기에 아무리 온풍기를 틀어도 콘크리트가 제대로 양생되지 않았다.
심지어 코로나 사태로 건설자재 수급이 어렵고, 공사 자체가 수차례 중단되면서 작업 시간을 온전히 할당받을 수가 없었다.
8월에 분양이라는데, 1월 중순인 지금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있으니 원청 입장에선 공기(工期)가 부족해도 이만저만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공기 단축이 지상과제인 공사판이지만, 이번만큼은 그 정도가 과했다.
“원청에서 오늘까지 공구리 안치면 계약 해지하겠다고 강짜를 놓기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여태 6일 간격으로 공구리 쳐도 전혀 문제없었는데 왜 이번에는 지랄하냐고 말이죠.”
“지난번까진 비상 대피층인 20층이 버텨주니까 와중에 가능했던 거지. 그 위쪽으론 아파트 설계상 내력벽이 없단 말이야. 뭘 알고서 작업 지시를 해야지.”
“… 으흐흑, 이걸 어쩝니까? 사장님.”
화를 내봐야 아무 소용없었다.
한마디로 X된 상황이었다.
원청이 뭐라고 했건 간에 콘크리트 타설은 우리 회사가 작업한 거 아닌가.
이 정도 대형 사고면 앞으로 우리 회사가 이 바닥에서 발붙이기 힘든 것은 물론, 자칫하면 건설 면허가 취소될 수도 있었다.
“김 부장, 작업 지시서 가지고 있지?”
“예.”
“우리가 이런 날씨엔 공구리 못 치겠다고 작업 거부한 증거도 있지?”
“예. 통화 내역도 다 녹음되어 있습니다.”
발악은 해봐야지 싶었다.
멍청한 변명이지만, 원청이 시키는 대로 작업을 했을 뿐이라고 항변은 해봐야 했다.
“들어가자!”
“예? 사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들어가서 사진이라도 찍어야지. 동바리(가설 지지대)도 보강하지 않고 그냥 공구리 치라고 한 거 아냐.”
“아! 그렇군요.”
무너진 곳을 보니 가설 지지대가 거의 없었다.
양생 중인 콘크리트 기둥과 슬래브만으론 위에서 때려 붓는 콘크리트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파트는 건설사 이윤보다 분양 고객의 편의와 안전이 우선인데… 우 회장의 욕심때문에 무너져버렸던 대세 그룹을 보는 것 같았다.
또다시 옛 악몽이 떠올랐다.
내가 그 옛날 대세 그룹에 입사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우 회장이 그 따위로 회사를 말아먹지만 않았더라면… 안타깝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보이는 대로 사진 찍어! 양생 중인 콘크리트 기둥도 시료 채취해서 강도 측정해야 해. 우린 공구리치는 하청업체지, 원청 건설사도 아니고 감리 회사도 아니라고.”
우리 회사는 레미콘과 펌프카 끌고 다니면서 콘크리트 타설을 전문으로 하는 하청 업체였다.
콘크리트 양생 기준을 무시하고 타설을 지시한 것은 물론, 콘크리트 타설시 거푸집이 무너질 가능성이 큰데도 지지대를 보강하지 않은 것은 명백히 원청의 잘못이었다.
근거를 남긴다면 독박만은 면할 지도 몰랐다.
나는 스마트 폰을 치켜들고 더 깊숙이 들어갔다.
20층까지는 내력벽이 있으니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가며 사진을 찍으면 될 것 같았다.
“헉! 사장님, 위험합니다.”
“이런…”
그런 나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은 3층 정도를 올라갔을 때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쩍. 쩍. 후두두둑.
이미 천장은 움푹 꺼져서 콘크리트 조각이 우박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 또한 안전 불감증이었을까?
아니면 또다시 맨땅에 헤딩해야 한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왜 내가 이런 사지에 뛰어들었단 말인가?
‘차라리 잘 된지도…’
김 부장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지만 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러질 않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고나 할까?
솔직히 내가 죽는다 한들 안타까워할 사람이 누가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집사람과 딸아이도 3년 후면 돌아온다는 약속 따위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핑계로 몇 번째 기한만 늘이고 있지 않나.
이 나이에 다시 맨땅에 헤딩하는 것도 싫고, 기러기 생활도 싫고, 무엇보다 살만하다 싶으면 꼬꾸라지는 이따위 삶에 신물이 났다.
“… 아버지, 어머니, 죄송해요… 더 이상은 …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무너져 내리는 아파트 벽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하늘나라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말했다.
설명할 길 없었지만 너무나도 억울했다.
평생에 걸쳐 노력했지만, 두 분이 남기신 유언을 이룰 방법이 더 이상 없었다.
부모님 말씀에 따라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지도 못했고, 돈도 많이 벌지 못했고, 가장 쉽다고 여겼던 가족끼리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것조차 이루지 못했다.
권리 따윈 없고 책임과 의무만 있는 삶 따윈 이만 하면 충분했다.
신이 있다면 욕이라고 하고 싶었다.
누가 금수저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했나?
아니면 로또 당첨이라도 바랐나?
내게서 부모님을 일찍 뺐어갔으면, 30년 넘게 열심히 일한 나에게 평온한 삶은 줄 수 있지 않나.
콰콰쾅!
머리 위로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가 쏟아졌다.
사방이 무너져 내렸고, 나또한 무너졌다.
< 001 : 프롤로그 > 끝
ⓒ 푸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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