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How I Became a Chaebol RAW novel - Chapter (10)
나는 이렇게 재벌이 되었다-10화(10/589)
< 010 : 명함의 뒷면 >
“어서 오십시오, 반도 화랑입니다.”
“그림 좀 보려고 왔습니다.”
“예, 편하게 돌아보십시오.”
일반인이 반도 호텔에 편하게 들어가는 방법은 그림을 보러 왔다고 하는 것이다.
호텔 1층에는 반도 화랑이 있었다.
그 유명한 박근수 화백이 그림을 내다 팔았다는 화랑 말이다.
21세기가 되면 수억 원을 호가할 그림이 무심히 걸려있는 상황이 낯설었다.
외국인들에게 후진국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는 꼴인데, 판가마저도 단돈 몇 달러에 불과해 작가의 예술성 따윈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었다.
역시 문화 사업은 국력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사두면 돈이 되겠지만, 일단 내 일에 집중하자.
“멋진 그림이죠?”
“예, 그렇습니다. 코리아 특유의 토속적인 미감과 정서가 잘 나타난 그림이지요.”
나는 그림을 감상중인 외국인에게 말을 걸었다.
화랑에서 제공해주는 커피를 마시며 산책하듯 거니는 모습이 여간 무료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하긴, 어디 놀러 나갈 데가 없을 것이다.
초호황기를 누리던 60년대 미국에 비하면 이때의 한국은 폐허나 다름없었고, 관광지를 돌아봐도 반도 호텔보다 더 불편할 뿐일 것이다.
21세기 한국인도 동남아나 인도양 근처로 해외여행을 가면, 이국적인 풍광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수영장이 딸린 리조트에서 빈둥거리게 되지 않나.
“놀랍군요. 외국인이 한국인의 미적 감각을 읽어내시다니 말이죠.”
“하하, 놀랍긴요. 외려 이런 정서를 가진 한국인들이 야망마저 가득하다는 게 놀랍지요. 직접 겪어보지 못한 외국인들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응? 한국인들이 야망이 가득해?
어째, 말하는 폼이 데이비드 박사 같은데?
데이비드는 세계은행 시찰단 중에서 가장 친한파였다.
시간이 흘러 다들 8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를 때, 데이비드는 대한민국의 성장은 기적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대한민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은 한국인의 비상한 두뇌와 결연한 의지의 총합이기에, 행운과 우연의 조합인 기적이라는 단어로 감히 폄하하지 말라고 말이다.
해외 플랜트 건설 현장에서 각국의 국민성을 숱하게 겪었던 내 감상과 유사해서 데이비드의 말은 내 머릿속에 확실하게 새겨졌다.
‘그러고 보니, 생긴 것도 비슷하네. 내가 봤을 땐 풍채 좋은 할아버지였는데.’
TV 다큐멘터리에서 본 데이비드 박사는 맥주 통처럼 통통하고 푸근한 인상의 할아버지였는데, 내 눈 앞에 있는 양반은 말쑥한 신사였다.
젊은 시절의 데이비드 박사를 알지는 못했기에 확인해봐야 했다.
“대세 실업의 우찬수라고 합니다. 커피 한잔 하시겠습니까? 고견을 듣고 싶군요.”
“오, 사업가였나요?”
내가 명함을 내밀자 그가 살짝 거리를 벌렸다.
잡상인 보듯 나를 경계했다.
“선배 사업가들이 말하길 경제 동향을 보려면 반도 호텔을 드나들어야 한다더니,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하하, 재미있으신 분이군요. 여하튼 반갑습니다. 데이비드라고 합니다.”
‘재수!! 데이비드를 단박에 찾았어!’
데이비드는 명함은 주지 않고 악수만 했다.
상관없었다.
난 데이비드를 찾은 것만으로도 기뻤다.
“누구신가 했더니, 세계은행 사무관님이셨군요. 고생 많으십니다. 모쪼록 대한민국에 석유화학단지가 빨리 들어설 수 있게 힘써 주십시오.”
“…어떻게… 혹 한국 정부에서 나온 분입니까?”
데이비드는 눈빛을 달리하며 더욱 경계했다.
당연했다. 그는 세계은행 사무관으로 국제 차관을 다루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국제 기금을 어떤 나라, 어떤 산업에 빌려줘야 하는지 검토하는 것이 주된 업무라 뇌물 공세나 로비를 수도 없이 겪기 때문이다.
“설마요. 제 나이로는 한국에선 정계에 명함도 못 내밉니다. 전 화학섬유를 취급하는 무역상이라, 우연찮게 정부의 석유화학단지 조성 계획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아직 확정은 아닐 텐데요.”
경계는 했지만 내 말에 호기심은 생겼나보다.
내가 워낙 고급 정보를 말해서 그랬겠지.
내 말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이때 대한민국 정부는 이미 석유화학단지를 짓기로 방침을 정했고, 언제, 어디에, 어떤 공장을, 무슨 돈으로 지을까? 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공단을 지을 돈도 없었고, 타당성 조사도 하기 전에 국가 정책부터 확정된 셈이었다.
정부 정책치고는 주먹구구식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볼 땐 이 시대 정부는 나름 똑똑한데다 추진력마저도 강력했던 것 같다.
개발도상국을 벗어나려면 석유화학단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던 거다.
정쟁(政爭)보다 국민들을 잘살게 해주는 경제 정책이 정권 유지에 훨씬 유리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곧 확정하겠지요. 세계은행도 곧 화답할 예정이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정책 결정과 동시에 미국에 차관을 요청하고, 미 정부는 거리 벌리기를 시전하면서 세계은행 시찰단을 보내서 상황 파악부터 하는 게 이시절의 수순이었다.
데이비드는 그런 세계은행 시찰단의 선봉 역할이었다. 한국 전담 가이드로 삼으려고 말이다.
“확정이라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음? 정말 모르시나요? 세계은행 본부에 텔렉스를 넣어보면 단박에 확인 가능할 텐데. 이상하군요. 본부에서 한국 전담 사무관님을 건너뛴 것도 아닐 테고…”
“!!!”
데이비드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 자기 업무에 대해 배제된다면 극도로 기분이 나빠지기 마련이다.
‘역시! 정보를 모르고 있었어! 이 양반이 친한파가 되었던 이유가 이거였던 거야!’
순간, 난 천재야! 하고 외칠 뻔했다.
나는 어젯밤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었다.
‘데이비드가 어째서 석유화학단지 조성에 있어서 한국 편을 들었을까? 어떤 의도로 미 정부에 독단적으로 보고서를 보냈을까? 그 보고서엔 무슨 내용이 있었기에 미 정부가 단박에 차관을 내놨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서 말이다.
결국 나는 데이비드와 세계은행 본부 간에 모종의 알력이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생각해보라.
고작 파견 사무원인 주제에 미 정부에 독단적으로 보고서를 올리는 경우가 흔하겠나?
분명 세계은행 본부엔 데이비드보다 높은 양반들이 수두룩했을 텐데 말이다.
결국 옷 벗을 각오를 하고 보고서를 던진 거다.
“어쩐지 본부에서 내가 보낸 보고서에 회신도 없고, 업무 지시도 없고…”
“무슨 보고서를 내셨는데 그러십니까?”
“공단 부지로 어디가 유리한 지 비교하는 보고서를 보냈는데 회신이… 이런, 내가 무슨 말을…”
순간 데이비드가 내게 기밀을 말해버렸다.
당연했다.
여태 모든 업무를 혼자서 고민했잖아.
내가 물어봐주자 무의식적으로 불만이 터져 나왔던 거다.
“비교가 왜 필요합니까? 당연히 울산이죠.”
나는 기밀임을 모르는 척 말을 이어갔다.
“… 어떻게 그리 확신하죠? 비교 대상이 어딘지나 알고 하는 말입니까?”
“제가 데이비드님이라면 인천, 여수, 서산, 울산 정도를 검토했을 것 같군요. 그 중에선 당연히 울산이죠.”
“헉! 4군데를 어떻게? 아직 한국 정부도 모를…”
내가 제대로 짚으니 깜짝 놀랐다.
당연하지 21세기에는 규모에 차이가 있을 뿐 4군데 모두 석유 화학 단지가 있거든.
울산 공단에 비해 인지도면에서 쨉이 안되니까 일반인들이 잘 모를 뿐, 플랜트 업계 종사자인 내겐 너무 뻔한 일이었다.
“어떻게라니요? 가용토지, 공업용수, 항만시설, 교통 및 전력 사정 등을 감안하면 그 4군데 말고는 적당한 곳이 없지 않습니까.”
“놀랍군요. 허면, 울산이 최적지라는 건 어떻게 추론한 겁니까?”
“인천은 땅값이 너무 비싸고, 서산과 여수는 연약지반이라 기반 조성이 어렵죠. 그에 반해 울산은 토질이 암반이라 기반 공사비가 적게 들고, 가까운 태화강에서 공업용수를 끌어들이기도 쉽죠.”
“토질을 어떻게…”
“울산 주변이 모두 야트막한 야산이거든요. 제 고향이 그쪽이라 잘 압니다. 더군다나 기반을 다질 때 나오는 흙과 바위는 울산 항구를 만들 때 쓰면 좋겠죠. 석유화학단지는 필히 유조선을 접안시킬 항구가 필요하니 말이죠.”
“헉!!!”
“땅값을 제외한 기초 유틸리티 공사비만 따져도 인천은 50억 정도, 여수나 군산은 35억 수준이겠지만, 울산은 17억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
데이비드는 놀라다 못해 말을 잇지 못했다.
나야 어려울 게 없었다.
우리나라 플랜트 건설사에서 논쟁이 되었던 일을 읊었을 뿐이다.
“데이비드님도 솔직히 울산을 점찍고 계시죠?”
“잠깐, 말씀 중에 미안합니다. 내가 회의가 있다는 걸 깜빡해서 말이지요.”
“바쁘시군요. 만나 뵈어 영광이었습니다.”
“영광까지야… 여하튼, 감사합니다.”
데이비드는 날 경계하다 못해 부담스러워졌는지 회의를 핑계로 자리를 떴다.
나도 이쯤이면 만족했다.
명함을 건넸으니까 말이다.
데이비드는 나를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지금 세계은행 사무관이지만 세계은행 본사로부터 왕따를 당한 셈이거든.
그도 그럴 것이 이때 세계은행이 검토하던 차관은 겉으론 국제개발협회 차관(IDA 차관)이었지만, 실상은 미국 정부의 대외원조 정책에서 나온 기금이었다.
즉, 세계은행으로선 객관적으로 지원대상국을 비교하기보다는 미국 정부가 어디를 지원하고 싶은지 정치적 의중을 파악하는 걸 우선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지원 순위는 인도, 대만, 태국, 말레이지아 뒤였다.
심지어 파키스탄마저도 중국과 인접한 국가라는 이유로 한국보다 선순위였다.
물론,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참전하기 전의 상황이다. 나는 알고 있다. 이 때의 세계정세는 베트남 전쟁 한방으로 모든 것이 바뀐다는 사실을.
‘데이비드, 내 명함을 잊지 마. 그럼 당신은 단박에 세계은행 임원이 될 수 있을 거야!’
나는 멀어지는 데이비드의 뒤통수에 대고 간절한 마음으로 암시를 걸었다.
***
반도 호텔 3층 사무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사무실로 오자마자 두꺼운 서류철을 꺼내들었다.
한국의 석유 화학 단지 부지 검토 자료였다.
“기초 유틸리티 공사비… 여기군.”
데이비드는 목차를 뒤져 한참 만에 관련 데이터를 찾을 수 있었다.
「인천 : 1814만달러(한화 약 49억원)
여수 : 1407만달러(한화 약 38억원)
군산 : 1222만달러(한화 약 33억원)
울산 : 629만달러(한화 약 17억원) 」
“헉!”
데이비드는 놀라서 자빠질 뻔했다.
미스터 우가 말했던 숫자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울산의 공사비는 17억 원이라고 정확하게 맞췄다.
“이럴 수가, 컴퓨터로 계산한 값인데.”
해당 금액은 단순히 주판을 튕긴다고 추론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복잡한 수학적 모델을 이용해, 한국에서 한대뿐인 미 8군의 컴퓨터를 이용해 뽑아낸 데이터였다.
심지어 각 지역의 지질을 분석했던 미 8군 공병단의 보고서를 참조하면, 유독 울산의 지질이 두꺼운 사암층(砂岩層) 위주이며 표면은 연암질(軟岩質)로 되어 있어 다른 지역대비 지반 기초 공사에 유리하다고 적혀 있었다.
그 또한 미스터 우의 말과 딱 맞아떨어졌다.
토질 분석용 굴착기도 한대 없는 한국이 그걸 어찌 알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놀랍군. 어디라고 했지? 대세 실업이라고 했던가? 섬유 수출업자라고 하기엔…”
데이비드는 힐끗 보고 안주머니에 꽂아 넣었던 명함을 꺼냈다.
이름 밑에 사무실 주소가 적혀 있었지만, 어이없게도 전화번호는 없었다.
이게 전부인가 싶어 명함 뒷면을 보았다.
「Vietnam War -> Inflation Risk Hedge」
‘베트남 전쟁, 인플레이션 위험 회피’라니.
경제학자인 데이비드는 그 문구를 보자마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사람 천재야! 천재라고!”
데이비드는 우찬수라는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얘기를 더 듣고 싶었다.
아니, 꼭 들어야만 했다.
미 정부에 자신의 의견… 아니, 우찬수의 선견지명을 잘 취합해서 전달하기만 해도 엄청난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다닥 계단을 타고 내려가 1층 화랑과 로비를 둘러봤지만 우찬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반도 호텔을 벗어난 것 같았다.
‘굴러온 행운을 내 발로 걷어찼군. 이런…’
데이비드는 다급해졌다.
‘우찬수… 화학섬유 수출상이라고 했지? 그럼, 그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데이비드는 후다닥 차를 몰고 거리로 나섰다.
< 010 : 명함의 뒷면 > 끝
ⓒ 푸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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