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How I Became a Chaebol RAW novel - Chapter (11)
나는 이렇게 재벌이 되었다-11화(11/589)
< 011 : 전쟁과 기회 >
종로 은행거리.
나는 을지로를 벗어나 종로의 은행 거리로 나섰다. 데이비드가 나를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고, 그때까지 업무는 봐야지 했다.
싱가포르 거상, 라자크가 안심할 수 있게 신용장부터 개설해야 했다.
“참나, 이때는 외환은행도 없었어?”
한참 외환은행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아직 외환은행이 등장하기 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황스러웠다.
삼복이가 왜 수출 계약서를 들고서도 조홍은행에서 그런 수모를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수출입 업무를 전담하는 은행이 아직 나타나기 전이라면, 한국은행으로 가야할 것 같았다.
신용장(信用狀, letter of credit, L/C)이란 국제 무역에 있어서, 은행이 수출업자와 수입업자 사이에서 거래의 안전을 보장하는 증서다.
신용장을 부동산 중계업자를 끼운 계약서에 빗대기도 하는데, 그것보다는 온라인 거래에서 쓰이는 안전거래 시스템이 더 적절한 비유다.
예를 들어 비싼 명품 가방을 거래한다고 하면, 판매자나 구매자나 사기를 피하고 싶을 것이다.
이때 우리들은 중계 거래 사이트를 이용한다.
즉, 중계 거래 사이트가 미리 가방의 거래대금을 받아두고, 구매자가 가방을 수령하고 이상 없다고 확인해주면 그때서야 판매자에게 거래 대금을 이체해주는 것이다.
수수료가 들지만 양쪽 모두 사기를 안당하려면 이만큼 안전한 방법도 없다.
특히 국제 무역은 물리적 거리가 멀어 사기에 매우 취약하기에, 은행이 물품 대금을 받아두고 통관 서류를 모두 확인한 뒤에 물품 대금을 지불하는 것이 국제 표준이다.
서로 믿을 수 있도록 은행이 수출입 내역을 파악한다는 의미로, 신용장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신용장 개설한다고 한국은행을 찾아야 하다니, 어이가 없군.’
위압적인 느낌의 정문을 통과하니 ‘한국은행 외환부’라는 팻말이 한쪽 구석에 있었다.
제일 구석자리에 외환업무를 배치하다니, 정부는 수출 진흥책을 펼치고 있는 게 맞나 싶었다.
정부의 다급함과는 다르게 60년대의 금융권은 수출 절차조차 제대로 정립 못했던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대세 실업에서 나왔습니다. 싱가포르 수출 건으로 신용장 통보 계좌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신용장 개설 신청서를 작성해주세요. 상업 신용장 약정서, 수출 매매 계약서, 법인 등기, 인감도 필요하고요. 신청 서류 양식은 건너편에 있습니다.”
창구 여직원은 딱딱한 어투로 관련 서류를 달라고 했다. 친절함이란 1도 없네.
옛날엔 은행 업무를 보려면 은행직원에게 알사탕이라도 건네야 비로소 일이 처리됐다고 했던 선배들의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기 있습니다.”
신청 서류를 작성해서 창구로 건넸다.
다행히 삼복이가 법인 등기는 마쳤기에 신청 서류를 작성할 수 있었다.
“기다리세요.”
기다리라더니 열심히 타이핑을 시작했다.
신청 서류를 또다시 타이핑으로 옮기다니, 60년대의 비효율을 상징하는 업무 형태였다.
지겨운 시간이 흘러갔다.
***
“손님, 다 됐습니다.”
“아, 예. 고맙습니다.”
드디어 신용장이 개설되었다.
2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다.
금융권에 빨리빨리 문화가 적용되기 전이었다.
‘이걸로 어찌어찌 IDA 차관을 얻고, 그 차관을 근거로 산업은행에서 내자를 얻고, 물건을 만들고, 수출 승인을 받고, 선적하고, 선적 확인서를 얻어 은행에 가져다주면, 그제야 내손에 40만 불이 들어오는 거지. 복잡하네.’
첫 단추 끼우는 게 가장 어려웠다.
21세기라면 투자 회사를 돌아다녔겠지만, 60년대는 기회는 많았던 반면 시중에 돈이 없었다.
그리 보면 60년대가 낭만시대이긴 하다.
돈보다 대박칠 기회가 많다니 말이다.
“이만 돌아갈까? 언제고 데이비드가 공장으로 날 찾아오겠지?”
날 찾아온 그에게 이 신용장을 내밀면 IDA 차관 중 몇 십만 불은 땡길 수 있으리라.
나는 그리 희망하며 은행을 벗어났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꺼먼 관용차가 내 앞에 섰다.
“찾았군! 미스터 우! 납니다, 데이비드.”
“데이비드. 당신이 어떻게 여길.”
“타세요. 어서.”
“타라고요?”
“갈 데가 있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후회는 무슨? 당신을 기다렸는데.
“좋습니다.”
나는 차에 올라타 악수부터 나눴다.
“찾아서 다행입니다. 종로 은행가로 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이 맞았군요.”
경제를 예측하는 양반답게 내가 은행가로 갈 것도 예측했다는 거네. 똑똑하네.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용산 미 8군 공병단으로 갈 겁니다.”
“거긴 왜… 아! 거기 컴퓨터가 있죠.”
“…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미국의 엔지니어들이나 경제학자들은 이때부터 컴퓨터를 이용하고 있었다.
21세기 기준에선 공학용 계산기 수준이지만, 인간보다 수백 배는 빠르게 계산한다는 측면에선 꽤 쓸 만했다.
“뭣 때문에 제가 필요하십니까?”
“베트남 전쟁과 미국의 인플레이션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죠.”
역시, 내가 명함 뒤에 적었던 문구를 봤군.
데이비드는 해당 문구를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을 것이다.
데이비드 같은 경제학자는 국가 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할 때 주목을 받기 마련이고, 그 경고가 현실로 이어질 때엔 큰 명성을 얻게 되니까.
‘음, 베트남 전쟁 때 미국 인플레가 몇 %였다더라? 대충 6% 수준이었겠지?’
추측이 딱히 어렵지는 않았다.
괴로운 기억이었지만 중소 건설사를 운영하던 전생을 떠올리면 되는 문제였다.
인플레는 늘 반복되었고, 그 주기도 늘 10년 정도였다.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경제 위기라고 할 때마다 물가 상승폭이 6% 수준이었다.
90년대 IMF 때가 유독해서 물가가 8%이상 폭등했던 기억이 났다.
***
용산 미 8군 공병단.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하는 와중에, 어느새 용산에 도착했다.
“정지! 멈추십시오.”
“세계은행 사무관 데이비드입니다. 컴퓨터를 쓰려고 왔습니다.”
“사용 승인은 받으셨습니까?”
“여기 증명서가 있습니다.”
“옆엔 누구입니까? 한국인 같은데.”
“내 조수입니다. 내가 신원을 보증합니다.”
“통과!”
“감사합니다. 수고하시오.”
미 8군 공병단의 검문을 아주 쉽게 통과했다.
검문 초병과 데이비드는 서로 얼굴을 익히 아는 사이로 보였다.
차가 멈춘 곳은 아주 멋진 건물이었다.
마치 작은 돔 구장을 닮은 현대식 건물이었다.
“놀랍군요.”
“놀랍지요? 나도 올 때마다 감탄합니다.”
“키보드와 모니터가 있군요.”
키보드와 모니터를 발견해 더욱 놀랐다.
60년대 컴퓨터는 종이에 천공을 뚫어 데이터를 입력하는 방식이라고 들었는데 말이다.
“하하, 당연하지요. 이건 자그마치 15만 달러나 하는 최신 컴퓨터입니다. 돈이 있어도 못 구하니, 그보다 더 비싸다고 해도 되겠군요.”
공학용 계산기가 15만 불이나 하다니 우스웠다.
“여기에 인플레이션 모델이 있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베트남 전쟁이 얼마나 간다고 보시는 겁니까?”
데이비드가 훅하니 질문을 했다.
내겐 매우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데이비드로선 몇 시간 전엔 생각도 못했던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이때 미국 정부는 물론 다른 나라들도 베트남 전에 미군이 참전하면 금방 끝날 줄 알았거든. 세계 최강 군사 대국과 조그마한 동남아시아 공산당 떨거지가 맞붙는 싸움이었으니까.
허나, 베트콩 뒤에는 중국 공산당과 소련이라는 거대한 공산진영이 있었다.
“못해도 8년 이상 가겠지요. 한국전쟁에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둘 다 대치전(對峙戰)에 대해서는 충분히 학습했으니 말이죠.”
“대치전이라고요?”
“당연하죠. 베트남엔 지옥 같은 열대 밀림이 있습니다. 한 달에 전선을 1km 전진시키기도 어려울 겁니다.”
미국의 패착은 동남아시아의 밀림과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시간은 베트콩 편이었거든.
전쟁이 길어질수록 원래부터 가난한 베트콩이야 잃을 게 그다지 없었지만, 잘사는 미국은 잃는 게 너무 많았다.
젊은 군인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 남의 나라 전쟁에 퍼붓는 돈이 무지막지했거든.
“열대 밀림이 변수!!! 그렇군요.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인플레가 일어난다고 했군요.”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군사적으로 패배한 게 아니라, 전비(戰費)조달로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급격한 인플레 때문에 발을 뺀 거다.
미국은 인플레 여파로 금본위제도를 폐지할 수밖에 없었고, 덩달아 유럽과 중동의 경제가 휘청거렸고, 결국 오일쇼크까지 촉발하는 등, 베트남 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온갖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당연합니다. 미국이 아무리 부유해도 전쟁이 길어지면 위험합니다. 영국이 2차 세계대전을 승리했음에도 미국에 세계 패권을 넘겼던 역사를 아시지 않습니까.”
데이비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말로만 인플레 리스크를 떠드는 것보다 역사적 사실을 들이밀면 더욱 믿음이 가기 마련이다.
“…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허면, 베트남 전쟁이 길어지면 미국이 겪을 인플레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합니까?”
데이비드는 나를 엄청난 석학처럼 대했다.
일반인이 절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답을 알고 있지.
“글쎄요. 어림짐작해도 미국의 대외 적자는 연간 50억불 이상 상회하게 될 겁니다.”
“연간 50억불!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어째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전을 펼치게 된다면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겁니다.”
한창 베트남전이 격화되었을 땐 미국은 한해 전비로 200억불에 가까운 돈을 퍼부었다.
“전면전이라뇨!”
“대치전은 결국 전면전을 유발시킵니다. 북(北) 베트남, 아니 공산진영이 확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
이 시대에 공산진영이 확장을 멈출 리가 없지.
한창 이데올로기 싸움을 하던 시대 아닌가.
미군은 안일한 생각으로 베트남에 발을 들였다가 삽시간에 수렁에 빠져든 꼴이었다.
“그… 그래요. 옳은 말이에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라 사실이 된다니까.
‘더욱이 우리에겐 대박 기회가 되었지.’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쟁 특수로 50억불이라는 외자를 벌어들였다.
우리나라 건설사들이 60년대 말부터 해외 진출을 하게 된 계기도, 미군이 동남아시아로 작전 범위를 넓히는 와중에 대규모 토목 공사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전쟁이 8년 이상, 연 평균 전비가 최소 50억 달러라면… 인플레는…”
데이비드는 데이터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수학적 모델로 미국의 인플레를 계산해보려는 것이었다.
“대충 암산해보면, 미국의 달러 가치는 20% 이상 폭락하고 인플레는 연간 6%에 육박하겠죠.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짐짓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미국에 태어났다면 펀드 회사에 취직해 숏 포지션에 올인 해서 단박에 거부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헉! 이럴 수가, 그걸 어떻게 암산으로…”
데이비드는 연신 컴퓨터 모니터와 나를 번갈아보며 놀라워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벌컥 벌컥 냉수를 들이켰다. 속이 탔다기보다는 흥분한 것 같았다.
“미스터 우, 당신이라면 어찌할 겁니까? 뭔가 방법이 있습니까?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별수 있습니까? 한국으로부터 값싼 양질의 물건을 수입해야죠. 그럼 물가는 안정되고 어느 정도 연착륙은 하겠지요. 그게 제가 볼 때 유일한 리스크 헷지 방법입니다.”
“한국 제품을 수입해야 한다고요?”
“그럼요. 값싸고 품질 좋은 제품을 수입하면 일본과 독일 제품마저 덩달아 값이 내려갈 테니까요. 미국은 전략적으로 한국을 내수용 생산 기지로 삼아야 합니다.”
“… 놀라운 식견입니다.”
놀라운 식견이 아니고, 원래 역사가 그랬다니까.
미국이 베트남에서 고전을 겪었어도 미국 본토 사회는 그럭저럭 안정되었던 게 한국에서 값싼 일상품을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2000년대 초반, 중국 제품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전 세계 물가가 극도로 안정되었던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하겠다.
싸구려 제품은 소비자로선 짜증나는 일이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선 나름 의미가 있다.
값싼 제품은 그 자체로도 물가를 떨어뜨리지만, 기존 업체도 가격 경쟁에 합류해 물가가 싸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거든.
“물론 선결 조건이 있죠. 한국이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려면 미국이 투자를 좀 해줘야죠. 석유화학 단지 건설 자금이 최우선이겠군요.”
“IDA 차관 말씀이군요.”
“아, 말이 그리 되나요?”
나는 싱긋 웃었다.
길고 긴 대화 끝에 결국 차관 얘기가 나왔다.
솔직히 이 정도 컨설팅이면 차관 좀 얻어 가도 되지 않겠어요?
< 011 : 전쟁과 기회 > 끝
ⓒ 푸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