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How I Became a Chaebol RAW novel - Chapter (29)
나는 이렇게 재벌이 되었다-29화(29/589)
< 029 : 컨테이너 >
땡땡땡땡.
나는 망치를 들고 진달래 철공소에 매달린 종을 울렸다. 주변 철공소 사람들이 뭔 일인가 싶어 힐끗힐끗 쳐다봤다.
“한 달에 8만원씩 벌고 싶으시면 다들 이리 모이세요.”
“한 달에 8만원?”
“뭐여? 무슨 일이기에 한 달에 8만원이나 준다는 겨?”
평균 임금의 5배를 훌쩍 넘은 돈이기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몰려든 사람들의 눈빛이 곱지는 않았다.
최근 유행한다는 곗돈 사기꾼을 보듯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믿기는 어렵지만 궁금하니 들어나 보겠다는 마음일 것이다.
“지금 베트남에 큰 전쟁이 난 거 다들 아시죠? 거기서 일할 사람을 뽑는 중입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서 우리 국군들을 보호할 군 시설을 만들어야 하는데, 용접, 중장비 운전, 건설, 하역 등등 온갖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으잉? 전쟁터로 가는 거여?”
“파독 광부 같은 건가봐.”
“그럼 파월 기술자라 불러야 하는 건가? 파독 광부보다 몇 배는 위험하겠네.”
“당연히 위험하지. 총알이 빗발친다잖아.”
과장스럽게 소리를 쳤더니 외려 내 말에 솔깃한 표정들을 지었다.
그래요, 동네 아저씨들.
내 아버지와 함께 부자 되시라고요.
“딱 2백 명만 뽑을 거고 지원자는 전국에서 몰려올 테니 시험을 볼 겁니다.”
“무슨 시험입니까? 쌀가마 들어 올리면 되는 겁니까?”
파독 광부를 뽑을 때 쌀가마 들어 올리는 시험을 봤다더니 정말이었나?
여하튼 힘쓰는 일도 많으니 그것도 괜찮겠지만, 내가 원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단순 노무자가 아니라 정말 기술자여야만 했다.
장차 내 아버지의 동료 직원들이 되어줘야 하는 양반들이거든.
“그리 간단한 시험은 아닙니다. 항구를 비롯해 온갖 시설을 짓는 일이라, 힘보다 기술이 더 필요하거든요. 다들 컨테이너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컨테이너?”
“컨테이너가 뭐여? 새로 나온 통조림인가?”
이땐 컨테이너라는 개념이 없었다.
“제가 잘 알죠. 선박에 짐 싣는 철제 박스 아닙니까.”
“하하, 김춘석 사장님은 이미 합격이고요. 사장님은 다른 사람들 뽑는 시험관입니다.”
“예에? 제가 벌써 합격?”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내가 아버지 때문에 여기 왔다는 걸 알면 얼마나 더 놀랄까? 아마, 평생 모르겠지?
“용접 실력이 아주 좋더라고요. 슬러그도 꼼꼼히 뜯어내시고 용접 필렛 모양도 최적이고요.”
난 아버지가 용접한 철제 구조물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이 볼 시험은 특수 컨테이너를 만드는 겁니다. 자재는 대드리는데, 합격한 분들께만 인건비를 쳐드릴 겁니다. 자신 없는 분은 시도하지 마세요. 인건비는커녕 손해 배상을 청구할 테니까요.”
“손해 배상?”
“특수 컨테이너가 뭡니까?”
손해 배상을 언급하니 몇몇은 뒤로 발을 뺐고, 누군가는 용접에 자신이 있는지 질문을 해댔다.
“40피트 컨테이너인데 이중벽에 단열재를 채웁니다. 자재비와 설계도는 여기 김춘석 사장님한테 드릴 테니, 감독 받으세요.”
“헉! 이렇게나 많이요?”
나는 준비해 온 돈뭉치를 아버지에게 건넸다.
고액권이면 더 편했을 테지만, 5백 원짜리가 최고액 지폐였을 때라 어쩔 수 없었다.
돈뭉치의 두께에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 돈 좀 봐. 허풍이 아닌가봐”
“허풍은 무슨… 그보다 튀면 어쩌려고 저 큰돈을 막 줘?”
뭘 그리 놀래? 내 아버지는 정직한 양반이야.
이 정도 가지고 튈 사람이 아니라고.
우습게도 돈뭉치 덕분에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훅 바뀌었다.
“착수금입니다. 자재 사서 컨테이너 납품하시면 개당 3만원을 쳐드리죠.”
“개당 3만원씩 사주신다고요?”
아버지가 아직 감이 없어 놀라는 거다.
컨테이너는 비싼 물건으로 21세기엔 웬만한 사양의 컨테이너면 개당 300만원은 훌쩍 넘어간다.
6t짜리 철제 기둥을 뼈대로 삼고, 2t짜리 강판으로 꼼꼼하게 벽을 만들어야 하는 구조물이거든.
심지어 내가 만들려는 컨테이너는 단열재까지 들어간 특수 사양이다.
60년대 기준으로 단열재와 철판 가격만 해도 25000원은 족히 나갈 거다.
“제대로 만들어 오셔야 값을 치를 겁니다. 설계도는 지금 그려드리죠.”
설계도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수첩에 컨테이너 치수와 단열재 두께를 지정하고, 옆면에 창문을 어디다 뚫어야 할지를 그려 넣었다.
‘물건도 싣고 여차하면 사람 사는 집도 된다고 하셨던 거 맞죠?’
‘맞아요.’
내가 수첩을 찢어 간이 설계도를 그려주자 아버지가 대뜸 귓속말로 물었다.
역시 내 아버지!
일머리가 남달랐고 눈치도 빨랐다.
뭐든 한번 들으면 까먹는 법이 없었고, 해당 설계는 기밀 사항임을 대번에 눈치 챘다.
“모두 김춘석 사장님의 작업 지시를 받으십시오. 김 사장님은 직접 컨테이너 품질을 확인하시고 합격자를 골라내세요. 컨테이너는 완성되는 대로 부산항 6번 부두로 가져오시고요.”
“합격자는 어디로 가면 됩니까?”
“합격자는 한 달 뒤에 집합시간과 장소를 따로 알려드릴 겁니다. 명심하세요. 딱 2백 명입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파월 장병이든 파월 기술자든 모두 부산항에서 출항했다.
6번 부두로 부르면 될 것이다.
“한 달 뒤라고요?”
“합격자 분은 최소 1년은 가족과 떨어져 전쟁터로 가는 겁니다. 각오 단단히 하고 오십시오.”
“정확하게 월급이 얼마입니까?”
“최소 8만원은 맞춰 드리죠. 위험수당은 따로 정산해드립니다.”
“수당까지 준대!”
“와아아아아!”
다들 전쟁터로 간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이때 한국인에게 베트남은 전쟁터가 아니라 ‘엘도라도’ 같은 곳으로 여겨졌다.
70년대 초엔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라는 가요가 유행할 정도였으니까.
‘동식이 아버지, 석대 아버지, 영호 아버지… 다들 부자 되게 해드릴게요.’
이들을 데려가면 나비 효과로 어릴 적 내 친구들이 태어나지 못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나 또한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지…
뭐, 어떤가?
난 이미 모든 걸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나비 효과 따윈 겁내지 않는다.
나는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이 선택을 할 거다.
전생 같은 삶을 반복하느니, 차라리 먼지로 사라지는 게 낫다.
“김 사장, 언제 시험 치는 거야?”
“내 용접 실력 잘 알지?”
“다들 줄서. 자재 구해서 시험 볼 거니까, 참가할거면 여기 이름 적어.”
아버지가 벌써부터 시험관 행세를 했다.
그래, 그렇게 자세 잡고 더 큰 사장이 되시라.
“사장님, 더운데 단술 한 잔 드릴까요?”
“아, 예. 고맙습니다.”
엄마가 싹싹하게 어디선가 시원한 식혜를 가져와 내게 권했다.
아버지가 멀리 돈 벌러 간다는 데도 걱정보다 기대가 큰 표정이었다.
‘기대해, 엄마. 원했던 대로 2층짜리 양옥집에 살게 해줄게. 정원 딸린 대궐 같은 집말이야.’
나는 식혜 값을 아주 비싸게 치러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잘 마셨습니다. 그럼 믿고 갑니다.”
“중간에 점검 안하십니까?”
“제가 시간이 없어서요. 컨테이너 적당히 완성되면 명함의 연락처로 전화 하세요. 그때 자재비도 채워드릴게요.”
아버지라면 믿어도 된다.
아니, 아버지가 첫 번째 조직을 구성하는 일이니 간섭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면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할지 많이 경험하면 할수록 좋으니까.
“살펴 가십시오. 부산항에서 뵙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나는 부랴부랴 발걸음을 옮겼다.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
부산 연지동 근처로 택시를 타고 갔다.
「미 8군 제4구역 제20지역지원단」
정식 푯말은 아주 복잡했지만 하야리아 부대라고 불렀던 미군 캠프였다.
“이때도 하야리아 부대는 번쩍번쩍 했군.”
미군 캠프는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내의 미국이지만, 이때의 미군 캠프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꾸려가던 삶의 현장이었다.
후문으로 나아가면 온갖 미제 보세 의류, 액세서리, 화장품 가게가 즐비했고 그 맞은 편 도로가에는 UN클럽이라는 이름의 바(BAR)가 미군을 상대로 영업하고 있었다.
군부대 매점이나 물류 창고에서 빼돌린 통조림, 캔 맥주, 군복, 군화, 의약품등은 한국인에겐 특급 품질의 제품이었다.
“그중에서도 불꽃놀이가 최고였지.”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야리아 부대에 일반인들이 입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일 년에 딱 두 번.
미국 독립 기념일과 추수 감사절이었는데, 그때는 한참이나 지속되었던 불꽃놀이, 낙하산 시범, 장교 부인들의 바자회, 햄버거를 비롯한 온갖 미국식 군것질 거리 등등으로 하루 종일 놀아도 아쉬웠었다.
조금이나마 미국의 풍요로움을 느껴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서울의 용산 기지에 비해 하야리아 부대는 부산사람들에겐 그럭저럭 인식이 좋았다.
하야리아 부대는 후방 기지답게 주한 미군의 보급품을 수령하고 발송하는 터미널 역할이었거든.
부대 최고 지휘관도 소령에 불과했고, 그만큼 군기도 느슨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랬다.
TV며 양주, 심지어 버터까지 부산의 모든 사치품은 하야리아 부대 PX를 통해 흘러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 들어가 볼까.”
나는 성큼성큼 후문으로 향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하고, 이왕이면 혼자서 잡는 게 낫다.
호랑이 가죽은 멀쩡해야 가치가 있지, 서로 나눠가지면 아무 소용없으니까 말이다.
“정지! 멈추시오.”
“오케이. 오케이.”
나는 초소병이 내 몸을 마구 뒤적거릴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무슨 일로 왔나?”
덩치 큰 흑인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후문으로 이렇게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이들은 대부분 미군 PX에서 물건을 빼돌리는 지게꾼이라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난 대세 실업 찬수 우라고 해. 여기 방문한 VIP가 날 불렀어.”
“VIP?”
“밴 플린트 장군 말이야.”
나는 명함을 초병에게 건넸다.
“으잉?”
“전화로 보고해봐. 그럼 들어오라고 할 거야.”
“… 잠시만 기다려.”
“그래.”
밴 플린트를 들이대니 초병이 바짝 쫄았다.
나는 초소 앞에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옛설! 옛설!”
초병이 전화기 너머로 옛설을 반복하더니 후다닥 초소 밖으로 뛰어 나왔다.
“미스터, 들어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초병은 내게 절도 있게 경례를 하더니 기지 안으로 안내했다.
“여기입니다.”
도착한 곳은 헤븐 클럽이라고 하는 장교 전용 클럽이었다. 초병의 경례에 답한 뒤 나는 클럽 안으로 뚜벅뚜벅 들어갔다.
백 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둥근 홀이었다.
천장에 실링팬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고, 60년대 특유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온갖 양주가 장식장을 채우고 있었으며, 저 멀리 밴 플린트가 바텐더를 앞에 두고 시거와 위스키를 즐기고 있었다.
시카고에라도 있을 법한 고급 바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퇴역 장군이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거야?
하긴, 여긴 대한민국이 아니라 미국 땅이다.
“어서 오시게. 미스터, 우.”
“안녕하십니까? 밴 플린트 장군님.”
“이리와 앉아. 그렇지 않아도 보고 싶었어.”
느긋하게 시가를 즐기며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혼자 계셨습니까?”
“그럼, 혼자지. 이쪽은 내 전용 바텐더야. 그의 칵테일은 언제나 나를 만족시켜 주지.”
캠프 바텐더를 개인 바텐터마냥 소개했다.
여기선 무슨 말을 해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퇴역 장군임에도 캠프에선 VIP로 대접받고 있었다. 거물급 정치인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솔직히 세계은행 사무관 시절의 데이비드가 내게 소개시켜준다는 양반이 밴 플린트인줄 알았다면 굳이 갈프사 지사장을 만나지 않았을 거다.
인연을 거절했던 게 외려 이 양반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되다니, 이번 생엔 확실히 운이 좋았다.
“그건 그렇고, 자네처럼 바쁜 로비스트가 여긴 웬일인가?”
“저는 로비스트가 아니라,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일 뿐입니다.”
“하하, 괜히 둘러댈 필요 없어. 피차 우린 서로의 진면목을 알고 있지 않나.”
“전 로비스트가 아닙니다. 장군.”
로비스트라니, 나는 정계의 앞잡이 노릇은 안한다. 언제나 내 이득을 위해 일할 뿐이다.
“예편 한지가 언제인데, 자꾸 장군이라 부르나?”
밴 플리트는 훅하니 화제를 돌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양반다웠다.
“그럼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한국 전쟁의 마지막 총사령관이셨고, 상공부를 주무르는 거물 정치인이자, 주한 미 대사를 능가하는 외교관이며, 작가로도 활동하시는데 말입니다. 아! 코리아 재단 의장님이기도 하시네요.”
나도 농담조로 장단을 맞췄다.
미국인은 유독 유머에 점수를 준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나면 거리감이 있던 관계도 훅하니 친구가 된다.
물론 이 양반이 역사적으로 존경받았던 군인이었고, 인종차별을 경멸하던 성향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하하하하. 좋아, 좋아. 맘대로 불러.”
특히 밴 플리트의 한국사랑은 유난해서 코리아 소사이어티(Korea Society)라는 재단을 만들어 죽기 전까지 활동했다.
한국 전쟁에서 아들을 잃었기 때문인지 유난히 한국에 대해 애착을 보였고, 한미간 비공식 대사로 여러모로 한국을 도왔다.
미국 내부뿐 아니라 유럽의 고위 인사와도 친분이 두터워 재벌들의 해외 진출을 도왔다던데, 이렇게 울산 석유 화학단지 투자나 월남전 파병에도 영향을 끼친 것은 처음 알았다.
“그건 그렇고 내가 여기 있는 걸 어찌 알았나?”
한껏 웃다가 뚝 멈추더니 불쑥 질문을 했다.
“그보다 먼저 왜 왔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 그래, 순서를 좀 바꿔보지. 왜 왔나?”
“한국군 파병이 타결 직전이라 들었습니다. 수많은 젊음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와중에 저라는 장사꾼은 돈을 벌려고 합니다. 다만, 그 장사가 군인들에게도 제 조국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밴 플린트는 내 말이 이어지자 술잔을 내려놨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내 아들이 목숨을 바쳤던 한국 땅은 내 아들의 못 다한 미래만큼 위대해져야 했다. 그것이 내가 한국을 사랑했던 이유였고, 이제 그걸 보고 죽을 수 있어 여한이 없다.’
90년대 초 밴 플린트가 죽을 때 남겼다는 유언이었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 029 : 컨테이너 > 끝
ⓒ 푸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