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How I Became a Chaebol RAW novel - Chapter (3)
나는 이렇게 재벌이 되었다-3화(3/589)
< 003 : 절묘한 타이밍 >
“이야, 60년대 싱가포르는 이런 느낌이었군.”
영화에서 보면 6, 70년대의 싱가포르는 아편굴, 갱들이 활개 치는 항구, 더러운 개천가에 늘어선 빈민가, 실직자가 넘쳐나 불안한 사회 등등으로 묘사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싱가포르는 독립을 원한다」
라는 현수막이 사방에 걸려 있었고,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바삐 움직이는 걸음걸이 독립에 따른 불안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묻어나온다고나 할까?
행인들 마음이 실상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이때가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와 갈라서던 때였구나. 우 회장이 절묘한 타이밍에 비행기를 탔네. 아, 이제 내가 우 회장이지?”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은퇴한 대세그룹 OB들로부터 전설 같은 무용담을 듣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싱가포르 주재원들의 무용담은 독특했다.
60년대 싱가포르에선 무역인지 밀수인지 헷갈리는 장사를 했다는 말 때문에 기억이 선명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할 시기에 닥친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치적인 불안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타격이 컸는데, 그 첫 번째는 기존 내수 시장으로 작동하던 말레이시아 시장이 관세를 물어야 하는 해외 시장으로 바뀐다는 뜻이었다.
두 번째가 더 큰 문제였는데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하는데도,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시아와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싱가포르의 중계 무역까지 싸잡아 금지해버린 것이다.
졸지에 싱가포르는 주변의 거대 시장을 동시에 놓쳐버린 셈이 되었다.
그렇다고 무역으로 먹고살던 이들이 장사를 그만둘 순 없었고, 결국 택한 것은 밀수였다.
더욱 웃긴 건 수입 금지를 한 인도네시아조차 밀수 없이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기에 밀수 단속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려 필요할 때만 간간이 밀수 단속을 펼쳐 물가조절을 하는 도구로 삼았다.
세 번째 문제는 아마 베트남 전쟁이었지?
올해가 1965년도니까 지금이야말로 미군이 수렁으로 빠지기 일보직전이라고 하겠다.
한마디로 동남아 전역이 혼란스러울 때 싱가포르를 방문하게 되다니, 우 회장에겐 천운이 따랐던 모양이다.
“자, 서두르자. 시간이 없단 말이다.”
경유 환승을 핑계로 싱가포르에 들어온 것이라 후다닥 출국해야 런던행 비행기 표의 절반을 환불 받을 수 있었다.
이때의 항공료는 서울 런던간이 편도 2천불일 때니까, 중간 경유지에서 다시 돌아가면 대략 7백 불… 한화로 30만원이 수중에 들어올 거다.
즉, 싱가포르에서 쓸 수 있는 경비는 30만 원 정도라는 뜻이다. 거지꼴로 다닐 필요는 없겠군.
딸랑. 딸랑.
“어서 오십시오. 손님.”
“양복 한 벌 맞추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공항을 나와 시내로 들어서며 제일 먼저 발견한 양복점으로 들어갔다.
재수 좋게 인도계 주인이 하는 가게였다.
“이리 오십시오. 치수부터 재겠습니다.”
한때 영국의 지배를 받던 곳이라 싱가포르엔 신사복을 취급하는 양복점이 많았고, 자연스레 원단 시장이 발전한 곳이었다.
“키가 크시고, 어깨도 아주 넓으시군요. 품을 넉넉히 넣고 양복을 맞추려면 대충 1000불은…”
“아쉽지만 기다릴 시간이 없군요. 저기 걸린 양복이 마음에 드는데 얼마인가요?”
나는 진열장 마네킹에 입혀진 양복을 가리키며, 지갑을 꺼내는 척했다.
“오, 눈이 높으시군요. 저 양복은 영국제 120수짜리 프레스티지 원단을 쓴 옷이지요. 어느 신사 분께서 900불에 맞춘 옷인데 급히 영국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저리 남게 되었답니다.”
어째 입만 열면 거짓말이 줄줄 흘러나오는 양복점 주인을 만난 것 같았다.
딱 봐도 폴리(폴리에스테르) 혼방인 원단이 프레스티지 원단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런 어이없는 사람을 봤나. 폴리 혼방이 무슨 프레스티지라고!”
나는 어이없는 표정과 함께 지갑을 도로 집어넣으며 휙하니 뒤돌아섰다.
어라, 내가 연기를 이렇게 잘했나?
아니, 21세기 인간으로 60년대를 바라보니 뭐든 단순해보였다.
오랜만에 쓰는 영어도 술술 풀려 나왔고 말이다.
“헉! 손님. 제가 잠깐 착각했습니다. 이 양복은 100수짜리 이탈리아 까니리코 원단입니다. 폴리가 좀 섞이긴 했지만, 구김이 적고 세탁도 아주 쉽지요. 고객님처럼 젊고 잘 생긴 분이 선호하는 원단이죠. 당장 필요하시다니 더도 말고 딱 599불에 드리겠습니다.”
“이탈리아 까니리코? 아니, 베트남 원단인 걸 뻔히 아는데,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겁니까?”
“……”
베트남 원단이라는 말에 양복점 주인이 얼어붙었다.
어수룩한 외국인 한 놈 물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 밖이지?
내가 베트남 원단인 걸 어찌 아냐고?
당연히 알지.
대세 그룹 신입사원때 주야장천 주입받았던 우 회장의 무용담이니까.
60년대 싱가포르 옷 장사들이 주로 썼던 베트남 원단을 한국산으로 대체했던 것이, 대세 그룹이 태동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거든.
“100불. 인건비로는 충분하죠?”
“100불이라고요? 이 양복이 그렇게 허접하게 보이십니까?”
“싫어요? 그럼 말고요.”
나는 100불을 꺼내 들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단박에 뒤돌아서니 내 바지를 후딱 잡아챘다.
“에이, 손님. 누가 싫다고 그랬습니까? 딱 원가를 부르시니까 놀랐을 뿐이죠. 좋습니다. 싱가포르에 자주 들리시는 분 같으니, 단골가로 모시죠.”
“양복은 바로 입을 테니 포장 필요 없습니다. 서비스로 베트남 산 원단 샘플 좀 가져오세요.”
“샘플이라고요? 원단 사업하시는 분이신가요?”
“예, 원단 장사꾼입니다. 오늘 하이 스트리트에서 비즈니스 미팅이 있는데 공항에서 내 짐이 사라졌어요. 덕분에 원단 샘플을 잃어버린 건 물론, 입을 양복조차 없어졌지요.”
나는 당당하게 샘플을 요청하며 10불짜리 지폐를 양복점 주인의 윗주머니에 꽂아 주었다.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양복점 주인이라면 원단 장사들에게 원단 샘플을 수두룩하게 받거든.
조그만 천 쪼가리를 겹쳐 놓은 앨범 책자라 몇 권씩 쌓이면 처치 곤란이기도 했다.
“하이 스트리트 미팅이라고요?”
가게 주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싱가포르 무역상은 크게 두 세력이 경쟁하고 있었다.
한곳은 파고다 스트리트를 거점으로 두고 있는 중국계 상인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하이 스트리트를 거점으로 둔 인도계 상인들이었다.
21세기엔 결국 중국계가 인도계를 밀어내지만, 이때는 엄연히 경쟁관계였지.
그리고 신규 시장을 뚫을 땐 약한 쪽에 붙어서 시작하는 게 답이다.
밀리는 쪽에선 제 3자라도 끌어들여 세를 키우려는 노력을 하기 마련이거든.
“인도 상공회의소였던가? 여하튼, 거기 소장님과 오늘 저녁 약속이 있습니다.”
“헉! 라자크 님과 저녁 약속이 있단 말입니까?”
인도 상공회의소장 이름이 라자크야?
라자크, 라자크… 외워두자.
“크흠,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군요.”
“라자크 님의 손님이라면 뭐든 도와드려야지요. 잠시만요, 와이셔츠도 필요하겠군요.”
“와이셔츠까지는 필요 없…”
“서비스입니다. 라자크 님을 뵙게 되시면 입고 계신 양복은 인딜란 양복점 물건이라고 한 번만 언급해주십시오.”
인도 상공회의소를 들먹인 것만으로 가게 주인이 와이셔츠와 원단 샘플을 안겨주며 자기 가게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하긴 나처럼 새파란 놈이 싱가포르의 양대 무역상 중 한곳을 뚫으러 왔다고 생각하긴 힘들겠지.
기존 거래 선의 아들쯤 된다고 여길지도…
“그러죠.”
양복점 이름을 말할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노력은 해주지. 와이셔츠에 원단 샘플까지 챙겨주는 양반인데 말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게 주인은 연신 고개를 숙였고, 나는 양복 값을 치르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양복을 걸치고 나니 그럭저럭 봐줄만 했다.
구두도 새 것을 신으면 좋았겠지만, 먼지만 털어주면 그다지 흠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째 키가 좀 큰 것 같은데?”
길거리 쇼 윈도우에 비치는 내 모습이 달라졌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양복을 입으니 확연히 환생 직후와는 틀려진 것 같았다.
특히 얼굴이 달라지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고나 할까?
우 회장의 얼굴에 원래의 내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각이 생기기 시작했고, 어깨도 넓어지고 있었다.
정신이 달라지니 육체도 달라지나 보다.
내가 나 같아지는 것이라 친근함마저 들었다.
“이쪽이 하이 스트리트 쪽이지?”
하이 스트리트는 근처에 국립 박물관과 국립 갤러리가 있을 정도로 상류층이 활동하는 곳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예로 들면 한남동 정도라고나 할까? 여하튼 상류층이 모인 거리라는 뜻으로, 하이 스트리트라는 이름을 대놓고 쓰고 있었다.
「아델피 호텔」
하이 스트리트를 상징하는 최고급 호텔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라자크 상공회의소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나는 호텔 프런트로 가서 대뜸 라자크를 찾았다.
인도 상공회의소장을 호텔에서 찾는 게 웃기긴 하지만, 틀린 일은 아니었다.
그 양반이 사무실 겸 자택으로 이 호텔의 스위트룸을 이용하고 있었거든.
외국에서 활동하는 인도인을 물로 보면 안 된다.
그 많은 인구 중에 중간 이상의 카스트 계급이어야 하고, 그중에서 정규 교육을 받아야 하며, 그중에서도 능력이 출중해야 하고, 그중에 집안에 웬만큼 재력이 있어야 하고, 그 중에 인도 중앙 정치권이나 영국과 연줄이 있어야 겨우 해외로 나와 활동할 수 있는 거다.
동남아 무역의 허브인 싱가포르에서 인도 상공회의소장을 하고 있는 양반이라면, 상위 0.1%에 속한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이때 싱가포르는 1인당 국민소득이 500불 수준으로 대한민국보다 5배나 더 잘 살았고, 인도는 60불 수준으로 우리보다도 못살았다.
그런 인도 출신의 인물이 싱가포르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산다면 얼마나 부자이겠나?
‘그런 부자가 지금 엄청 당황하고 있거든. 나 같은 사람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지.’
대뜸 라자크를 만나러왔다는 내 말에 당황하는 프런트 직원을 똑바로 쳐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믿어라, 할 수 있다.
원래 역사의 수레바퀴도 이렇게 굴러갔었다.
“라자크 님과 약속이 되어 있으신지요?”
“아뇨. 약속 못 잡았어요.”
“그럼 만나실 수 없…”
“미리 전화도 못했을 만큼 급한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베트남 건으로 찬수가 왔다고 전해주시오.”
“베트남이요?”
“그래요. 내 이름이 찬수 우입니다. 이름은 몰라도 베트남 건으로 온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게 바로 나란 말입니다!”
나는 여권을 펼쳐 보이며 소리쳤다.
“자… 잠시만요… 전화 넣겠습니다.”
베트남 건이란 말에 프런트 직원이 쫄았다.
정말 내가 라자크가 기다리던 사람이면 어쩔 건가?
VIP 고객에게 결례를 범하는 꼴이 되는 거다.
반신반의했지만 직원은 라자크에게 전화를 넣을 수밖에 없었다.
뚜루루. 뚜루루…
60년대 호텔 특유의 부드러운 전화벨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여보시오.>
“예, 프런트입니다. 라자크 소장님을 뵙겠다고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오늘 내가 미팅 약속이 없는데…>
“베트남 건으로 찬수 우님이 오셨다고 전해달라고 합니다.”
<베트남 건? 찬수 우?>
“예. 그리 전하면 알거라고 하십니다. 여권으론 사우스 코리아에서 오신 분입니다.”
<… 올려 보내게.>
“아, 예. 예.”
프런트 직원은 연신 수화기를 든 채로 허리를 굽혔다.
나는 직원을 뒤로 하고 최상층으로 향했다.
따로 길을 안내받을 필요도 없었다.
**
최상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던지,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멋지게 수염을 기른 인도 할아버지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라자크님. 찬수 우라고 합니다. 편하게 찬수라고 불러주십시오.”
건넬 명함도 없었기에 호기롭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시오. 미스터 우. 악수는, 베트남을 들먹인 이유부터 듣고 난 뒤에 하든 말든 하겠소.”
“베트남에서 수입이 끊긴 원단을 제가 공급해 드리죠. 코리아산으로 대신해서 말이죠.”
“!!!!”
라자크의 눈이 커졌다.
< 003 : 절묘한 타이밍 > 끝
ⓒ 푸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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