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How I Became a Chaebol RAW novel - Chapter (8)
나는 이렇게 재벌이 되었다-8화(8/589)
< 008 : 재야의 고수 >
“어?”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눈앞에 증류탑 같은 구조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허름한 공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첨단 구조물이었다.
‘증류탑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배치(batch)식으로 좀 구식이긴 하네.’
자세히 보니 원형 금속 통은 일체형이 아니라 각기 분리되어 있었다.
원유를 증류하는 설비는 아니었다.
20세기 초반에나 썼을 법한 고분자 화합물 합성 실험 기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구신가?”
“안녕하세요, 사장님. 대세 실업의 우찬수라고 합니다. 간판보고 들어왔습니다.”
어디선가 머리 허연 할아버지가 나타났기에 인사부터 했다.
“나 사장 아니야. 사장은 내 아들이고, 난 여기 경비원이야.”
“예에?”
경비원 분위기가 아닌데?
비쩍 마른 몸에 번쩍이는 눈빛은 괴팍함을 넘어 비범함마저 느껴지는 할아버지였다.
“여하튼 뭣 때문에 왔다고?”
“원사 업체를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일론 원사를 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죠.”
“뭐, 나일론을 구해? 젊어서 그런가, 남들이 안하는 짓을 다 하는군.”
“여기 간판에 나일론 전문점이라고 적혀 있던데요?”
“그래, 알았어. 이왕 왔으니 밥부터 먹어. 그 담에 원사를 보든지 해.”
“예?”
할아버지는 나보고 대뜸 밥부터 먹으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점심때가 한참 지났다.
“왜, 이런데서 밥 먹기 싫어?”
“아뇨, 싫은 게 아니고요…”
“그럼 안으로 들어가. 보아하니 돌아다닌다고 밥도 못 먹은 것 같은데, 금강산도 식후경이야.”
영감님이 무심한 손짓으로 나를 툭툭 밀며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여보, 그 총각 누구에요?”
“몰라, 원단 파는 장사꾼이래. 나일론 구하러 왔다는데 밥을 안 먹었다는구먼.”
“밥은 먹어야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말만 하지 말고, 퍼뜩 자리 하나 내줘.”
“이리와요. 배곯으면 병나요.”
“오늘은 시래기 국이여. 고기 좀 썰어 넣었으니 먹을 만 할 거여.”
가족끼리 운영하는 공장인 모양이다.
밥상 앞에 나이가 지긋한 부부에, 비슷한 얼굴의 청년이 앉아 있는 걸로 봐서 거의 확실해 보였다.
식사라고 해봐야 별다른 건 없었다.
커다란 양푼에 보리밥을 넣고 온갖 나물과 고추장을 얹고 참기름을 듬뿍 뿌려서 쓱쓱 비볐다.
그런 비빔밥을 그릇에 한가득 덜어주면, 국과 함께 먹으면 끝이었다.
양이 많아 보였는데 하도 돌아다녀서 그랬는지 끝도 없이 들어갔다.
“곱상하게 생겨가지고 복스럽게 잘 먹네.”
“… 아, 예. 정말 맛있네요. 감사합니다.”
꿀꺽. 꿀꺽.
“신입 길들이는 거죠? 어디 상회(商會)에요?”
“예?”
아들로 보이는 이가 보리차를 따라주며 물었다.
할아버지가 말한 사장이라는 아들이 이 사람인 것 같았다.
“선배가 무슨 원사를 찾아오라고 하던가요? 규격 따윈 안 가르쳐줬을 테니, 대충 원하는 사양이나 읊어 봐요.”
내가 원사를 구하러 다니는 모양이 신입사원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하긴 6, 70년대는 각 기업들이 신입사원에게 교육을 핑계로 물건을 팔게 한다든지, 밑도 끝도 없이 거래처를 개발하라느니, 대리점 알바를 시킨다든지, 계열사의 보험을 들게 한다든지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120데니어 나일론 면 혼방 원사입니다. 면 혼방률은 10%에서 45%까지 다양하게 받고 싶어요.”
“음… 신입치곤 제대로 배웠네요. 좋은 선배 만났나보네요.”
“여기서 취급하는 원사는 어떤 게 있나요?”
“원사 따윈 없다. 밥 먹었으면 돌아가라.”
“아버지!”
응? 아들과 얘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화를 냈다.
어이가 없었다.
자신은 경비원이라고 했으면서 사장과 하는 얘기를 끊어 먹었다.
심지어 나일론 원사 공장에서 원사가 없단다.
오늘 하루는 참으로 다이내믹했다.
밥 사주고 공장 얻고, 일본 회사 지점에서 밀수 방법이나 배우고, 이젠 밥 얻어먹은 집에서 쫓겨나다니 말이다.
“왜? 내 말이 틀렸냐? 실도 제대로 못 뽑는데, 팔 물건이 어디 있다고?”
“면 45%짜리 혼방은 몰라도 10%짜리 혼방실은 팔만 합니다. 품질 괜찮단 말입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누렇게 떠가지고 툭툭 끊어지는 나일론을 어디다 팔아? 다 집어치워라.”
“여보, 그리 말하면 손님이 오해하시잖아요.”
펄쩍 뛰는 할아버지를 할머니가 달래기 시작했다. 옛날 시트콤을 보는 느낌이었다.
“뭔 오해!! 아무리 요즘 세상이 돈 때문에 미쳐 돌아가도 나는 그리 못한다! 팔 거 없다. 가라!”
할아버지는 내 엉덩이를 툭툭 치며 닭 쫓듯 밖으로 내몰았다.
“어머니, 아버님 모시세요. 어서요.”
“그래, 알겠다. 총각, 오해 마세요. 이 영감탱이가 노망기가 좀 있어요.”
“오해라뇨, 아닙니다.”
“아이고, 마. 내가 빨리 죽어야 하는데. 미안해요, 총각.”
할머니가 가슴을 치며 한탄했다.
할머니가 죽고 싶은 이유와 내게 미안하다는 것 어느 하나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냥 오래된 코미디 극을 보는 것 같았다.
“임자가 죽기는 왜 죽어?”
“당신이 이 지랄하니까 죽겠다고요. 이리 와요. 아들 장사 방해하지 말고요, 어서요!”
“어허, 이 사람이. 팔 안 놓나.”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어디론가 끌고 갔고, 아들은 나를 보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당황하셨죠? 원래 제 아버님이 별거 아닌 걸로 화를 잘 내십니다.”
“아, 예. 이해합니다.”
“저래 봬도 제 아버님은 경성직업학교 기계과 출신입니다.”
“기술자셨군요.”
어라, 꽤 대단한 영감님이었네.
경성직업학교면 일제 강점기에 몇 없던 고등 교육 기관 아니었나?
그 당시 건축/기계/전기/토목/철도 분야에서 최고의 수재를 끌어 모은 곳이었다.
“예, 이 나일론 중합로도 직접 제작하실 정도로 실력이 좋으신 분입니다. 일본 공장에서 어깨너머로 보신 것이 전부인데 말이죠.”
‘응? 이 구조물이 나일론 중합로였어?’
어쩐지 원유 증류기와 닮았더니, 중합로였다.
석유 화학 기계는 서로 통하는 게 있나보다.
여하튼 할아버지가 수재였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나일론 중합로를 눈썰미만으로 흉내 냈다는 건 더욱 놀라웠다.
‘정말 여기가 초창기 혜성 그룹이 맞나본데?’
혜성 그룹의 총수 일가가 모두 공학자인 것은 꽤 유명한 일이다.
20세기 후반 섬유 사업이 저물면서 그룹 사세가 줄어서 그렇지 한때는 끗발 좋은 그룹이었다.
“이 공장에서 나일론을 직접 뽑으시나요?”
“예, 이 설비로 나일론 덩어리를 만들고 저기 방사기로 분사를 해서 실을 뽑는 겁니다. 혼방 원사를 만들 때는 면사는 따로 구매해서 우리 나일론과 꼬아서 최종 원사를 감아냅니다.”
장비에 나일론이 걸려 있지 않았지만, 손짓만으로 실 뽑히는 과정을 설명했다.
고객에게 한두 번 설명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사장다웠다.
“샘플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이쪽으로 오시죠.”
공장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정리정돈이 깔끔했지만 돌아가는 장비는 없었다.
원사 샘플도 예전에 뽑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뽑은 지 오래되었나요? 나일론 원사가 변색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은백색이어야 할 나일론이 약간 누리끼리했다.
꼭 때탄 것 같이 말이다.
“변색이 아니라 저희 제품이 원래 그렇습니다.”
“원래 색이 이렇다고요?”
“아직 저희 중합 기술이 부족한 탓입니다. 제 아버님이 팔만한 물건이 없다고 한 이유죠.”
바이어에게 창피를 많이 당했던 모양인지, 설명하는 사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보단 믿음이 갔다.
“염색하면 괜찮을라나요?”
“짙은 색이면 문제없지만, 밝은 색이면 채도가 썩 좋지 않습니다. 만약 구매하신다면 가격은 파운드당 150원까지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
파운드당 150원이면, 환율이 270원이니까… 어라, 파운드당 60센트가 안될 것 같은데?
상당히 싼데?
“가보네 제품보다 싸네요.”
“예, 저희가 직접 중합하니까 그리 팔아도 조금은 남습니다. 하아… 여하튼, 염색은 몰라도 원단을 짤 때 얼마나 자주 끊어지는 지는 미리 시험해보셔야 할 겁니다.”
굉장히 양심적인 양반이었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원사가 잘 끊어진다고 털어놓았다.
“가보네 실보다 잘 끊어지나 보군요.”
“예, 인정합니다. 제 아무리 연사 조건을 달리해도 가보네 실의 강도를 따라갈 수가 없더군요.”
“연사라면 실을 꼬는 겁니까?”
“맞습니다. 저기 보이는 것이 연사기입니다. 새끼 꼬아보셨죠? 실도 지푸라기처럼 서로 꼬면 강해지거든요.”
사장이 양손을 비비며 새끼 꼬는 손짓을 했다.
이상했다. 실을 그리 꼬면 안 되는데?
새끼 꼬는 건 몰라도 실을 꼬는 건 나도 안다.
건설에서도 현수교를 세울 때 쓰는 강선 케이블이라면 철선을 꼬아서 만들고, 플랜트에서 쓰는 해저 케이블도 외부 피복을 꼬아서 만든다.
절대 끊어져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 만들 때 절대 새끼 꼬듯이 하면 안 된다.
새끼 꼬듯 꼬아놓으면 강선이든 피복 재료든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복원력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강선을 제대로 만들려면 서로 비비 꼬는 게 아니라, 강선 하나는 중앙에 둬서 중심으로 삼고 나머지 강선들로 그 주변을 감아 돌려야 한다.
중심 줄이 하나라도 있어야 시간이 지나도 풀리거나 강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그마저도 부족하면 감을 때 열을 가하기도 한다.
“이 설비도 눈썰미로 카피한 설비인가요?”
“예, 제 아버님이 직접 만드셨습니다.”
이걸 손수 만들었다는 게 대단하긴 했지만, 핵심 노하우가 부족했다.
“실 강도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네에?”
“실 좀 걸어보세요. 제가 설비를 손 좀 볼게요.”
“손을 보신다고요?”
“하하, 망가뜨리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나는 연사기(실을 꼬는 기계)의 실 꼬는 디스크에서 실 한 개를 빼냈다.
이러면 이 실이 중심을 잡아줄 것이다.
사람이든 실이든 ‘기준!!!’하고 손을 들어줘야 주변이 척척 정리되는 법이다.
너무나도 간단해서 할아버지의 눈썰미를 벗어났던 모양이다.
사장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나는 사장에게 어서 장비를 돌려보라고 손짓했다.
위이이이잉.
“그쯤이면 됐어요.”
“이게 손을 다 보신건가요?”
“그럼요. 이게 전부에요.”
나는 꼬인 실을 뽑아내서는 사장에게 건넸다.
내가 실을 건넬 땐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실을 몇 번 잡아당겨보고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몇 번을 잡아당겨보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빨로 끊어보기까지 했다.
“뭐죠? 무슨 마술을 부리신 겁니까?”
“마술 아니고요. 그냥 논리적인 접근입니다. 중심에 실 하나를 두고 꼬아야 제대로 꼬이죠. 모든 실을 회전시키면 쉽게 풀리잖아요.”
“아! 그렇구나! 이런…”
내 말이 이어질수록 사장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강도가 부족하면 열을 가해봐요. 실을 거는 드럼 온도만 좀 높여줘도 될 겁니다.”
“박사님이셨군요. 몰라 뵀습니다.”
“박사까진 아니고요.”
박사가 아니라 21세기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보고 온 엔지니어라 웬만큼 아는 거다.
“나일론 중합로도 좀 가동시켜 보실래요? 내가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예, 물론이죠.”
사장은 신이 나서 달려갔다.
멈춰있던 중합로에 파우더 재료를 집어넣고 온도를 올리고, 이것저것 버튼을 눌러댔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수동으로 하는 것 같았는데, 나름 숙련된 솜씨였다.
한참을 지켜보니 중합로가 뜨끈해진다고 느꼈을 무렵, 싸구려 시리얼처럼 나일론 플레이크(flake)가 쏟아져 나왔다.
투명한 은백색이어야 할 나일론 플레이크가 누리끼리 했다. 이런 플레이크로 실을 뽑으니 그따위 색이지.
반응 속도가 과하게 설정된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이 설비는 중합, 추출, 건조의 방식을 띄는 것 같았다.
아주 기초적인 플랜트나 다름없었고, 촉매와 반응 제어 물질만 최적화하면 될 것 같았다.
“몇 가지만 물을게요. 촉매는 뭘 쓰나요?”
“촉매라고요?”
“중합할 때 그냥 온도만 올리나요?”
“예, 나일론 원재료인 카프로락탐 파우더를 쏟아 넣고 초산과 물을 적당히 섞은 뒤에 150도를 거쳐 190도에서 한동안 유지한 후에 260도까지 쭉 올려서 서서히 식히면 됩니다.”
사장이 아예 내게 중합 조건을 줄줄 읊었다.
이런 공정 조건은 기밀이나 다름없는데, 나를 믿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초산을 쓰시는 군요. 그럼, 반응 안정제는 뭘 쓰시죠?”
초산을 반응제로 쓰면 순수한 물을 만들기 때문에 변색을 일으킬 소지가 없었다.
그럼 변색의 범인은 반응 안정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반응 안정제라고요?”
“보아하니 150도에서 190도로 올리면 반응이 시작되는 모양인데, 그때 안정제를 투입해야죠.”
우리가 흔히 ‘반응이 폭발적이다’라는 말을 쓰는데 그게 다 화공 플랜트에서 나온 말이다.
좋은 의도로 쓰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 산업 현장에서는 반응이 폭발하듯 급격하게 일어나면 위험할 뿐더러, 균일한 품질의 물질을 얻는데 방해가 되므로 의도적으로 반응속도를 낮춰야 한다.
그때 투입하는 소재가 소위 반응 안정제다.
“모… 몰랐습니다. 중간에 다른 재료는 섞지 않습니다.”
반응 안정제라는 개념이 없는 거네.
이 또한 기초 지식이 부족한 결과였다.
“좋아요. 그럼 산화티탄 파우더를 좀 섞어 봐요. 총 중량의 0.5% 정도 섞으면 될 겁니다.”
반응 안정제로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싶으면 산화티탄을 넣으면 된다.
어떤 물질과도 잘 섞이는데다 내열성이 뛰어나고 산화물의 특성상 유기물의 불순물을 걸러주는 필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정확하게 하려면 화학식을 감안해 0.1 몰%를 넣어야 하지만 이런 소량 플랜트는 대충해도 된다.
“산화티탄이라고요?”
“약품상을 뒤져보면 쉽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구해서 실험해보겠습니다.”
젊은 사장의 목소리에 희망이 넘쳤다.
어째, 나일론 원사는 구한 것 같은데?
그것도 일제 밀수품보다 싼 가격으로 말이지.
< 008 : 재야의 고수 > 끝
ⓒ 푸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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