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the law RAW novel - Chapter (2273)
재판이 시작되고 나자 검사는 먼저 자기네 증인들을 불렀다. 가능하면 이슈가 되는 걸 자신들이 선점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들이 실수한 것이 있었다.
있는 걸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없는 걸 증명하는 것은 어렵다는 걸 말이다.
“그러니까 증인의 말대로라면 고영진은 학창 시절 상당한 모범생이었다는 거죠?”
“네. 물론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에게 피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자칭 고영진의 절친이라는 친구.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던 친구다.
‘이쪽 사람들의 증인 목록에는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지.’
성진호가 그를 뺀 것은 그가 이야기하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가 지금 이런 증언을 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라는 거다.
‘멍청하게 그걸 계좌 이체로 줬을 리는 없지.’
이제 와서 그에게 진실을 말하라거나 고발해서 돈을 추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여기서 위증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절친이라면 생일 정도는 알고 있겠네요?”
“네. 10월 11일입니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이거군.’
아니, 그 정도는 사실 인터넷만 뒤져도 나온다.
“그러면 고영진 씨와 얼마나 친한가요?”
“어…… 불알친구라고 할 수 있지요.”
“불알친구라.”
노형진은 피식 웃었다.
“이상입니다, 재판장님.”
어차피 이 남자를 공격해 봐야 의미가 없다.
그는 모든 걸 외우고 준비했을 테니까.
“재판장님, 고소인인 고영진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네?”
“뭐라고요?”
남자가 증인석에서 내려가자 갑자기 노형진은 고영진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당연히 현장에 나와 있던 고영진은 당황해서 노형진을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피고인 측 변호인?”
“확인해 볼 게 있습니다. 어차피 고영진 씨를 증인으로 신청해 뒀으니 지금 불러도 상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고영진은 처음부터 불편한 얼굴이었다.
실제로 고소하고 그 재판에 출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노형진이 고영진을 증인으로 신청해 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와야 했다.
“인정합니다. 고영진 씨, 증인석으로 올라오세요.”
고영진은 앞으로 벌어질 일이 뭔지 예상을 한 듯 상당히 창백한 얼굴로 올라왔다.
‘여기서 우리 쪽 피해자들에 대해 이야기해 봐야 모른다는 소리밖에 안 나오겠지.’
노형진은 떨떠름한 고영진을 보며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고영진 씨, 방금 내려간 친구를 아십니까? 증인 말로는 아주 절친이라고 하던데요.”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요.”
“그래요? 그러면 저분 생일은 언제입니까?”
“그건…….”
고영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잘 모릅니다.”
“아까 그분은 아시던데요?”
“제가 기념일을 잘 챙기는 타입이 아니라서요.”
“아아, 그렇군요.”
노형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니까.
“그러면 다른 걸 여쭤보죠. 그분 집이 어딘지는 아십니까?”
“아니요.”
“그러면 좋아하는 건?”
“그건 잘…….”
뭘 물어도 대답을 잘 못 하는 고영진.
“그러면 그에 대해 잘 아는 거 몇 개만 말씀해 보세요.”
고영진은 말을 하지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르니까.
사실 같은 반이기는 했지만 그와는 전혀 친하지 않았다.
둘 다 서로 소 닭 보듯 하던 사이였으니까.
‘이럴 줄 알았다.’
위증을 할 때 대부분은 자신이 도움을 줘야 하는 사람에 대해 달달달 외운다.
하지만 반대로 도움을 받는 사람은 그 상대방에 대해 잘 외우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많이들 하는 실수지.’
보통 증인의 말실수를 노리지 그 인과관계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건 오래돼서 생각이 안 날 수도 있습니다, 재판장님!”
검사가 일어나서 버럭 외쳤다.
노형진은 그런 검사를 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변호사님, 소속이 어디십니까?”
“저는 검사입니다. 호칭 제대로 하세요. 그리고 왜 그걸 물어보십니까? 당연히 검찰청이지요.”
“아, 죄송합니다. 열심히 변호하시기에 변호사님인 줄 제가 착각했네요.”
방청석에서 큭큭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자 검사는 창피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
“좋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잘 모를 수도 있지요. 아까 증인이야, 고영진 씨가 스타가 되었으니 기억을 더 잘할 수도 있고요.”
노형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수도 있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러면 두 분의 우정을 증명할 수 있는 물증이 뭐가 있나요?”
“우정을 증명할 수 있는 물증요?”
“네, 그렇게 절친이라면 사진 한 장 정도는 있으시겠죠?”
“그건…….”
“증인, 잠깐 핸드폰을 좀 주시겠습니까?”
노형진이 뜬금없이 핸드폰을 요구하자 고영진은 눈을 찌푸리면서 핸드폰을 건넸다.
“그러면 증인, 아까 그 증인의 전화번호를 말씀해 보세요. 단축 번호라도.”
“그건…….”
노형진의 말에 고영진은 아차 싶었다.
“저…… 그게 딱히 단축으로 저장하지 않아서……. 이름을 찾아서 하는 타입이라…….”
“그렇군요.”
노형진은 피식 웃으며 아까 증인의 이름을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았다.
그러자 저장된 전화번호가 화면에 나타났다.
‘물론 저장은 되어 있겠지.’
하지만 노형진이 원하는 건 저장 여부가 아니었다.
노형진은 통화 기록에 가서 이름을 찾았다.
요즘 핸드폰은 통화 기록에 몇 번 통화했는지, 또 언제 통화했는지도 뜬다.
“이상하군요. 절친이라고 하는데 그 통화 시기가 요즘이군요. 어젯밤에도 하셨고. 그런데 정작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아예 통화 기록 자체가 없네요?”
“…….”
고영진은 당황스러워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럴 수밖에 없지.’
어찌 되었건 친구로서 대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하지만 언론의 눈이 있으니 서로 만날 수는 없다.
결국 방법은 하나, 통화뿐이다.
“아니, 요 근래에만 집중적으로 통화하셨네요?”
“그건 증언을 부탁하기 위해서…….”
“그래요?”
노형진은 오늘 검찰 측이 제출한 증인 명단에 있는 이름을 하나씩 고영진의 핸드폰에서 찾아보았다.
그러자 그 모든 이들과 요 근래 집중적으로 통화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연치고는 참 재미있는 우연이네요.”
노형진은 씩 웃으며 핸드폰을 다시 고영진에게 내밀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입니다만. 위증죄는 증인석에서 증언을 했을 때 성립됩니다. 그러니까 아직 증언을 하지 않으신 분들은 위증죄도 성립되지 않는 거죠.”
“피고인 측 변호인!”
검사가 비명을 질렀지만 기다리던 증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술렁거리는 차가운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 * *
“그들이 가짜를 내세울 거라는 걸 어떻게 아셨죠?”
“뻔한 거죠. 없는 걸 증명하려면 가짜를 내세우는 수밖에요.”
노형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리고 거기서 제가 멈췄다면 아마 언론을 이용해서 이슈 몰이를 했을 겁니다.”
아무리 재판을 빨리한다고 해도 모른 사건을 공평하게 처리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이쪽에서 내놓은 증인의 숫자는 여든 명.
결국 저쪽은 소수의 자기들의 증인을 앞쪽에 밀어 넣음으로써 일종의 여론 몰이를 하고 그 후에 이쪽 증인들의 신빙성을 떨어트리려고 할 거라 노형진은 충분히 예상했다.
“하지만 실패했지요.”
노형진이 위증 사실을 알아내자 당연하게도 그들은 서둘러서 도망갔다.
“그리고 검사는 그들을 잡을 수 없죠.”
왜냐하면 증언을 하라고 했는데 거부하는 경우 처벌을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처벌을 면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죠.”
증인석에 올라 진짜 증언을 하는 것.
그렇다면 나올 증언은 뻔하기에, 검사와 판사는 그들을 강제로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중요한 건 그들을 막았다는 겁니다.”
“확실히 여론이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MKS의 언론 플레이로 인해 성진호는 기레기로, 피해자들은 거짓말쟁이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여든 명에 달하는 증인의 숫자가 드러났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MKS 측 증인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사람들은 MKS와 고영진에게 의심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은 의심 정도가 아니라 거의 확신 단계였다.
“고영진은 이 정도만 해도 재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고영진이 출연한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시키라는 청원이 빗발치고, 시청 거부 운동이 벌어졌다.
이미 그를 모델로 쓴 많은 기업들이 심각한 이미지 타격을 입고 있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이번 고소는 고영진이 먼저 한 거죠. 그러니 완벽한 자폭인 거죠.”
노형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 고영진이 망해도 MKS와 최양렬은 망할 리가 없다.
그들이 벌어 둔 돈도 있을 테고, 고영진 말고도 소속 스타들은 많으니까.
하지만 그 회사의 인성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알았으니 장기적으로 질 좋은 지원자를 찾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질 게 뻔했다.
“남은 건 이제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서 돕는 거군요.”
“자살한 분들의 가족 말이군요.”
그래도 낙태한 사람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영진은 왕따의 가해자로서 피해자를 자살까지 몰아갔다.
“MKS와 고영진이 망해야 끝나는 일이지요.”
“맞습니다.”
기본적으로 연예인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연예인은 이미지로 먹고산다. 그리고 광고는 그 이미지를 빌려서 물건을 팔기 위한 것이다.
연예인들이 보통은 갑이지만, 광고주를 대상으로는 을일 수밖에 없다.
“그 광고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이건 음주 운전 같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형 사고다.
더군다나 이 모든 걸 알면서도 MKS와 고영진은 광고주들을 속이고 비싼 광고를 찍었다.
인터넷에서는 이미 고영진이 출연하는 모든 광고 물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이 경우는 업체가 손해배상을 안 걸 리가 없죠.”
아무리 고영진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수십 개의 광고를 물어 주고 나면 파산을 면할 길이 없다.
그건 MKS 역시 마찬가지다.
“씁쓸하네요. 사람들은 기회를 줘도 그걸 못 잡는다더니.”
“모든 사람들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건 아니죠.”
노형진은 시선을 돌려서 모니터 속 영상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로 다급하게 자신의 소속사로 들어가는 고영진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아귀처럼 달려드는 기자들을 피할 수 없을 듯했다.
“모든 사람이 기회를 가질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노형진이 보기에 고영진은 기회를 가질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걸 찾아가야지요.”
이제는 누구도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노형진은 차분하게 영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를 잡아 주세요
“네? 자수요?”
“네. 제가 사람을 죽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납니다.”
노형진은 여러 사건을 담당한다.
변호사를 찾아가 자수를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들 생각하지만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자수 때문에 변호사를 찾아온다.
물론 그들이 진짜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라기보다는, 자수를 하는 경우 그 처벌을 경감해 주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경찰에는 갔다 오셨나요?”
“장난하지 말고 가라고 하더군요.”
“허어, 참.”
노형진은 입맛을 다셨다.
자수는 많지만 지금처럼 애매한 경우는 두 번째였기 때문이다.
‘전에는 진범이 자수하러 왔었지.’
진범이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서 자수하러 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은 이미 가짜 범인을 강제로 만들어서 처벌을 한 후였기에, 노형진은 진범이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소송을 거는 등 복잡한 싸움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런 거야?’
경찰에서 인식하지 못한다는 건 처벌도 피할 수 있다는 소리고, 그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수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방은 자수 의지가 확고하다.
한 가지 문제만 빼고 말이다.
“진짜로 본인이 죽인 거 맞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라는 말은 확실한 게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기억상실증이라…….”
‘아니, 기억상실증이 여기서 왜 튀어나와?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튀어나와야지.’
기억상실증.
말 그대로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아주 드문드문 기억이 나기도 하는 등 증상이 다양하다.
픽션에서는 뇌가 충격을 받아 생기는 것으로 표현되지만 그건 극적인 효과를 위한 연출일 뿐, 실제로 충격에 의한 기억상실은 통계적으로 아주 적다.
당연히 기억을 잃은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친다고 해도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보다는 상해나 살인미수로 잡혀갈 가능성이 더 높고 말이다.
“하아.”
노형진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자수라니.
“뭐가 생각납니까? 개인적인 부분은 어디까지 기억나세요?”
기억상실은 이상하게도 생활 전반에 대한 기억은 다 잃어버리지 않는다.
자신과 주변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지만 버스를 타거나 은행 업무를 보는 등 자연스러운 사회적 행동은 잊어버리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러니까 제 기억은 제가 스물한 살 때에서 멈춰 있습니다.”
“대략 군에서 제대한 시점이네요.”
“정확하게는 제대하고 세 달 뒤예요.”
그 뒤부터 기억이 안 난다.
어느 날 눈떠 보니 지방 호텔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 정보를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테고요.”
“네, 그건 다행히…….”
주머니에 신분증도, 통장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걸 가지고 경찰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고, 신분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설진만이라는 이름이었다.
문제는 그것과 주소 불명이라는 기록 말고는 찾은 게 없다는 거다.
“나이가 54세더군요.”
무려 33년간의 기억이 사라졌다.
“그런데 왜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착각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기억상실도 정신적 질병이니 착각이 올 수도 있지요.”
“저도 그러면 좋겠지만…….”
밤마다 꿈에 시체가 나타난다.
그냥 누군가를 저주하는 유의 악몽이 아니다.
밤마다 자신이 사람을 죽인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 땅을 파고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묻는다.
“그런데 거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어요.”
장소도 모르고 시간도 모른다.
오로지 자신이 피 흘리는 사람들을 묻는 끔찍한 꿈뿐이다.
“단순 악몽이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속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달라집니다.”
“매일같이요?”
“네.”
지금까지 그의 꿈에 나타난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서른 명.
이 정도면 역대급의 살인마다.
“그런데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요?”
“네.”
노형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변호사님?”
“잠시만요.”
노형진은 그의 손을 붙잡고 기억을 읽었다.
그의 목적이 진짜로 자수를 하려는 건지, 악몽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관심받고 싶은 건지 알아보기 위해였다.
그런데 그의 기억을 읽은 노형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기억이 없어?’
어떤 기억이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노형진의 예상과 다르게 실제로 어떤 기억도 없었다.
마치 컴퓨터를 포맷하듯이 모든 기록이 사라졌다.
‘기억을 읽을 수가 없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노형진도 솔직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에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기억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저기, 이 손을 좀…….”
“아, 죄송합니다.”
노형진은 얼른 손을 놨다.
어색한 상황에 설진만은 헛기침을 했다.
“어찌 되었건 그런 꿈을 꾼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신과 의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단순한 악몽. 기억을 잃게 한 사건이 변질되면서 꿈에서 그러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
다른 하나는 억눌려 있던 그 기억이 꿈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드러나는 것.
“후자라면 분명 현실이겠지요.”
그런데 현 상황을 보면 후자에 가깝다.
전자라면 때마다 꾸는 꿈이 달라질 가능성이 크지만 후자라면 비슷할 테니까.
그런데 설진만의 꿈은 분명 후자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 말은 억압된 기억이라는 거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네요.”
“어떤 거 말이죠?”
“그런 꿈은 무의식중의 죄책감 때문에 꾸게 되는 거겠죠?”
“그렇지요.”
“그런데 설명을 들어 보면, 시체를 묻는 부분에 대해서만 계속 꿈꾸실 뿐, 정작 살인을 하는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요?”
“네, 그런 꿈은 꾼 적이 없습니다.”
“죄책감을 느낀다면 살인 자체에 대해 더 크게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노형진이 인간의 심리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시체를 묻는 것보다는 살인을 하는 게 더 큰 범죄라는 건 상식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꿈은 꾸지 않으신다는 게 이해가 안 가서요.”
“그건 저도 잘…….”
설진만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아무런 기억도 없는 사람이 뭘 설명할 수 있겠는가.
“혹시 최면술은 써 보셨나요?”
아직까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말이 많기는 하지만 최면술은 이러한 경우에 종종 쓰는 기술이다.
실제로 노형진도 한 번 써먹어 봤고 말이다.
“네, 써 봤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 떠올라요.”
“그래요? 혹시 다른 건 없나요? 같이 있던 사람이라든가.”
“그게,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문제는 그게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다.
꿈에서 보이는 것도 아니다.
어렴풋하게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요? 흠…….”
노형진은 이런 사건은 처음 겪어 보기 때문에 뭐라고 하기 참으로 애매했다.
‘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막혔단 말이지.’
그렇다면 남은 것은 추적뿐이다.
‘경찰이 해 준다면 좋겠지만…….’
사실 추적을 한다면 경찰이 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개인의 신상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기억, 그의 모든 움직임은 현대에 와서는 다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걸 추적하면 어쩌면 꿈에 나온 부분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경찰이 그걸 해 줄 리가 없지.’
노형진은 기대를 접었다.
그런 경찰이라면 세상이 얼마나 깨끗해졌겠는가?
“일단 이 부분은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한 부분이 사실이라면 설진만 씨는 최소 무기징역 또는 사형이 언도될 수 있습니다. 진술대로라면 최소한 열 건 이상의 살인에 연관되신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저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단 하루도 깊은 잠을 잔 적이 없다.
정신과 의사가 주는 수면제도 점점 안 통한다.
처음에는 한 알이면 되던 약이, 지금은 세 개 이상 먹어야 잠이 온다.
“제가 기억을 잃은 사이에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처벌을 받아야지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그 의뢰를 받아들이지요.”
노형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마음 한곳에서 왠지 호승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