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the law RAW novel - Chapter (2355)
오광훈은 노형진을 만나서 이야기 중이었다.
검사로서 다른 검사의 사건에 끼어드는 것은 명백한 월권이다.
하지만 아무리 권력자가 감시한다고 해도 다른 검사가 사건 이름과 개요 정도만 확인하는 것까지 다 알아낼 수는 없다.
“심탁수 검사 사건 기록을 대충 알아봤거든.”
“설마 컴퓨터로 검색하는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았지?”
“그럴 리가 있나?”
그는 실실 웃으면서 손가락을 말아서 동그란 모양을 만들었다.
“내 검사 사무실에 있는 여직원한테 카드 줬다, 거기 여직원이랑 가서 밥 좀 먹으라고. 다행히 그쪽 여직원도 동기라고 하더라고.”
“잘했네. 역시 조폭. 편법 겁나 잘해.”
“칭찬 같지가 않다?”
컴퓨터로 검색하면 나오겠지만 그랬다가는 걸릴 수도 있다. 감시 시스템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사람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는 건 감시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대일로 감시를 붙여야 하는데, 검찰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감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의심 가는 거 있어?”
“조호국 사건이 제일 의심스러워. 아니, 그거 말고는 다른 것일 수가 없지.”
“조호국?”
노형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게 누구야? 국회의원이야? 아니, 이 정도 일을 저질렀다면 1선이나 2선은 아닐 테고 3선 이상일 텐데, 그러면 내가 이름을 모를 리 없는데.”
혹시나 재벌가인가 해서 기억을 뒤적거렸지만 재벌가도 아니다.
재계의 큰손인 노형진이다.
한국의 어지간한 재벌가의 이름은 알고 있다.
“나도 처음 들어 봤다. 하지만 그 사건일 수밖에 없어.”
“어째서?”
“지금 심탁수가 하는 재판 중에서 국민 참여 재판 사건은 이것뿐이거든.”
그러면 확실히 이 사건이다.
하지만 조호국이라는 이름 자체를 처음 들어 본다.
재벌도 정치인도 아닌 존재.
“방향을 잘못 잡았나? 혹시 가해자가 조호국? 그러면 내가 모를 수도 있지.”
“아니야. 피해자가 조호국이야.”
“그러면 정말 방향을 잘못 잡았나?”
노형진이 살짝 걱정하는 걸 본 오광훈은 그의 실수를 지적해 줬다.
“아닐걸. 조호국은 죽은 사람이야. 죽은 사람이 음모를 짤 수는 없잖아.”
“흠, 그러면 그 보복을 하는 건 그 아버지나 다른 사람인가?”
노형진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맞는다면 모를 수도 있다.
“듣기로는 배심원이 아홉 명이라고 하더라고.”
“살인 같은 경우는 강력 범죄잖아. 규정상 사형이나 무기가 나올 만한 사건은 배심원을 아홉 명으로 해. 실수를 줄이기 위해 말이지.”
한국의 국민 참여 재판은 강력 범죄일 경우 배심원 수에 차등을 둔다.
그리고 아홉 명이라는 것은 그 형량이 무기징역이나 사형까지 갈 수 있다는 소리다.
“그 이후에는?”
“애석하게도 그게 한계야. 알다시피 너무 깊이 알려고 하면 부담스럽잖아? 아무리 동기라지만 그 사건을 파고들면 그쪽 직원이 의심할 수도 있고.”
“그건 그렇지.”
만일 그걸 보고라도 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노형진은 무리해서 알아보라고 하지는 않았다.
“조호국에 대해 알아볼까?”
“아니, 그건 네가 알아보면 안 돼. 너랑 나 사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네가 알아보면 알아차릴 거야.”
“그러면?”
“이럴 때 쓰라고 새론이 정보 팀을 만든 거야.”
그들이라면 좀 더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노형진은 생각했다.
* * *
“간단한 정보였습니다. 조호국의 아버지가 조만용이더군요.”
“어디 핵심적인 권력자인가요?”
조만용이라는 이름도 여전히 처음 듣는다.
그런데 그의 존재는 상상을 초월했다.
“조만용은 건물주입니다.”
“네? 건물주요? 뭐, 정치적 자리를 가진 건요? 아니면 기업을 운영한다든가.”
“아니요. 건물주입니다.”
“고작요?”
물론 한국에서 건물주의 위상은 고작이라는 말로는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건물주라는 것이 재판부와 언론까지 틀어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노형진은 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네. 서울에 여러 채의 빌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자유신민당의 당사도 있습니다.”
“아……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하더니.”
“자유신민당이 당사를 팔았죠.”
모종의 사건으로 자유신민당은 자신의 건물을 팔아야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건물을 사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살 수가 없었다. 사는 순간 그 돈이 문제가 되니까.
그 당시 그 뇌물 사건 때문에 어마어마한 돈을 빌려야 했고 건물까지 팔아서 갚아야 했는데, 아무리 정치자금이 많이 들어온다고 해도 그 빚을 갚기에는 벅차다.
‘공식적으로는 말이지.’
그래서 그 이후로 자유신민당은 부자 정당의 이미지를 감추기 위해 세 들어서 살고 있었다.
“한 달에 월세가 2억 3천이라고 하더군요.”
“끄응…… 대충 알겠네요.”
조만용이 그 돈을 가지고 거래를 걸었을 것이다. 그걸 받지 않을 테니 보복을 해 달라고 말이다.
자유신민당으로서는 손해 볼 게 없었다.
“1년만 안 받는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돈이니까요.”
1년이라고 해도 거의 28억에 육박하는 돈이다.
그 돈을 당에서 몰래 비자금으로 쓸 수도 있고, 권력자들끼리 나눠도 된다. 절대 작은 돈은 아니다.
“그리고 그건 경비 처리로 잡겠지요.”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정당이라는 작자들이 조폭도 아닌데 의뢰를 받아서 보복을 해 준다는 거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그 사건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노형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조만용에 대해 알아본 것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제가 변론을 할 게 아니니까 지금 알아봐야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건을 예단하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보복이라고 할지라도요? 지금 상황 자체가 의심스럽습니다만.”
고문학이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압니다. 하지만 저라도 그런 자리에 있다면 보복할 겁니다.”
아들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해서든 보복을 하려고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걸 탓할 수는 없다.
“물론 그게 합법적인 것이냐 법을 농락하고 과도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냐가 관건이지요. 어찌 되었건 대한민국의 법이 너무 물렁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미묘하군요.”
“미묘하지요.”
거기에다 상황이 애매하기도 하다.
어떤 경우는 사람을 죽여도 3년인데 어떤 때는 라면을 훔쳤다고 1년형이다.
“상황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예단은 피해야지요. 진짜 살인 사건이고 그 원한 때문에 움직인다면 저는 막을 생각이 없습니다. 복수는 아버지의 권한입니다.”
“권력자의 자식이라고 해도요?”
“권력자라고 해서 다 미운 존재가 아닙니다. 제가 그들을 싫어하는 건 그들이 권력을 올바르게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걸 올바르게 쓰려고 한다면 노형진은 그걸 말릴 생각이 없다.
“그건 현장에 가서 보면 알겠지요.”
노형진은 차분하게 말했다.
“결국 그걸 판단하는 게 배심원이니까요.”
* * *
손채림은 예정대로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건의 전말을 듣고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다.
‘보복 맞네.’
사건 기록을 보면 살인이다.
가해자는 주영우라는 청년이었고 피해자는 조호국이었다.
그리고 검사 측, 즉 심탁수의 주장은 간단했다.
사건 당일, 조호국과 싸우던 주영우는 조호국을 도로로 밀었다. 그리고 때마침 달려오던 8톤 트럭에 치여서 조호국이 사망했다.
‘사건 자체는 간단한데 말이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양측의 주장이다.
주영우 측의 주장은 평소 조호국이 주영우를 괴롭혔으며 심심하면 폭행을 했다는 것이다.
주영우는 조호국과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닌 사이로, 주영우는 내내 조호국에게 왕따를 당했다는, 아니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늦은 밤, 주영우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술에 취한 조호국과 마주쳤다는 것.
과거의 버릇을 고치지 못한 조호국은 그를 때리면서 낄낄거렸고 주영우는 저항하려고 했다.
문제는 이 ‘저항’이다.
‘민 것이냐, 아니면 휘두른 것이냐.’
피고인, 즉 주영우 측의 말에 의하면 때리면서 괴롭히는 조호국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들고 있던 봉지를 휘둘렀다고 한다.
그 안에 든 것은 삼각김밥 세 개와 종이 상자로 포장된 열 개짜리 계란 한 판.
정상적으로 본다면 위험물로 판단될 수는 없는 물건들이다. 거기에 맞는다고 해도 죽기는커녕 어디 기스도 안 날 테니까.
하지만 조호국은 그걸 피하기 위해 뒤로 서둘러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게 하필이면 도로였다 이건데, 애매하기는 하네.’
술에 취해서 방향을 잘못 본 건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되었건 봉지를 피해서 뒤로 물러났는데 그곳이 하필 도로였고 길 저편에서 달려오던 트럭에 치였다는 것.
‘극단적 상황이군.’
만일 주영우 측의 말이 맞는다면 이건 무죄다.
일단 상해를 한 적도 없고 협박이나 공갈을 한 적도 없다.
자기방어 차원에서 물건이 든 봉지를 휘두르기는 했지만 그가 휘두른 물건은 아무리 강하게 표현해도 위험물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걸 맞았을 때 최악의 상황은 그저 깨진 날계란이 묻는 정도였다.
‘하지만 밀었다고 하면?’
과실치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검사 측 주장에 따르면 트럭이 오는 걸 보고 밀었으니까 명백하게 살인의 고의가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극단적 상황이다.
무죄 아니면 살인.
‘그리고 심탁수는 후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고. 아니, 당연히 살인으로 몰아갈 거라고 했지.’
손채림은 마음을 다잡았다.
배심원으로 들어가면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건 노형진에게서 미리 들은 이야기다.
‘정황상 보면 살인이 되는 건 무리야.’
밀었다고 해도 과실치사 정도다.
그런데 공소는 살인으로 되어 있다.
이미 작심했다는 소리다.
‘그나저나 이 중 누가 포섭되어 있는 걸까?’
재판을 보면서 손채림은 살짝 다른 배심원들을 살펴보았다.
자신과 함께 참석한 여덟 명의 배심원들.
그중에서 과연 누가 포섭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이야기가 다 되었다고 생각한 건지 손채림은 어렵지 않게 배심원으로 뽑혔다.
물론 뽑힌 이후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자를 수 없다.
손채림은 그 이유를 제공할 생각이 없고 말이다.
‘중요한 건 일단 사건을 정확하게 확인하는 거야.’
노형진이 힘들 거라고 경고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정황상 가장 적당한 죄명은 과실치사야. 피고인 측 말이 맞으면 무죄이고. 하지만 조만용은 보복을 원하고 말이지.’
그래서 조만용은 자유신민당을 움직여서 보복을 청탁했을 것이다.
‘상황은 이해가 가는데.’
손채림은 눈을 찌푸렸다.
사건의 전반을 알고 나니 대충 상황이 이해가 갔지만 사건 자체가 호락호락한 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녀가 변호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번 사건은 비극적인 사고일 뿐입니다. 비록 두 사람의 싸움으로 벌어진…….”
손채림은 변론을 하는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반론도 준비하지 않았어.’
그럴듯한 말을 하기는 하지만 딱히 준비한 변론은 아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이거네. 하긴 배심원까지 손써 놨는데 변호사를 그냥 둘 리 없지.’
주영우는 돈이 없어서 국선변호인을 선임했다.
그리고 국선변호인 하나쯤 주무르는 건 조만용에게는 아주 쉬운 일일 것이다.
당장 자기 건물에 사무실 하나만 만들어 준다고 해도 바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흠…….’
“이상입니다.”
피고인 측의 최후진술이 끝나자 주영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도 이 사건에서 자신이 얼마나 불리한 상황인지 아는 듯, 인생을 포기한 얼굴이었다.
‘이거 갑갑하네.’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건 대충 알 것 같다.
그런데 질문도 직접 할 수 없다.
진짜 질문할 내용이 있으면 판사를 통해 해야 한다.
당연히 제대로 질문이 진행되지도 않았다. 기회가 주어지긴 했지만 살짝 곡해된 질문이 나왔다.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법정 모독으로 쫓겨 나갈 테니까.
그녀가 나가도 그 뒤에는 예비 배심원들이 기다리고 있다.
까딱 잘못하면 저들에게 기회를 주게 되기 때문에 절대 적대적으로 보여서는 안 되는 상황이어서 적대적 질문도 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질문이 없습니까? 그러면 평결 부탁드립니다.”
판사의 말에 배심원들은 우르르 일어나서 회의실로 들어갔다.
정확하게 말하면 평의실. 그곳에는 의자와 간식 등이 비치되어 있었다.
일단 여기에 들어오는 순간 외부와 접촉은 금지된다.
심지어 평의 전에는 같은 배심원끼리 사건 이야기를 하는 것도 금지되며 화장실도 내부에 따로 있다.
당연히 밥도 구내식당의 정해진 곳에서 자기들끼리 먹어야 한다.
그게 힘들면 아예 평의실로 배달시켜 주고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작이야.’
여기에 들어온 순간 자기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자신을 자를 수는 없다.
손채림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부터 누군지 모를 적과 싸워야 하니까.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드러냈으니까.
“천하의 개썅놈이네. 저런 새끼는 죽여야지. 아니, 사람을 죽여 놓고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하네.”
들어오자마자 거칠게 말하는 한 남자.
손채림은 그런 그를 힐끔 보았다.
아니,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사람을 죽였으면 그 죄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지. 피해자한테 죄송하다는 말도 안 하잖아요?”
“그건 그런 것 같아요. 사람이 죽었는데.”
떨떠름하게 이야기하는 어떤 여자. 손채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포섭된 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말하는 투도 좀 자신이 없고, 슬쩍 의견을 얹는 스타일이다. 기본적으로 포섭하기에는 소심해 보인다.
저런 타입은 잘못하면 그걸 경찰에 신고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포섭 대상이 안 된다고 들었다.
‘대신에 저런 타입은 누군가 강하게 말하면 거기에 쓸려 가지.’
소심해서 자신의 의견이 강하지 않다. 강하게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주류에 따라가는 타입이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아니다.
‘포섭의 첫 번째 조건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이끌 수 있는 리더.’
척 봐도 남자는 아까부터 적극적으로 재판에 나섰다.
심지어 다들 꺼리는 배심원 대표 자리도 자신이 하겠다면서 나섰다.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공정한 판결을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포섭된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지금 저 남자는 자기가 하려는 짓이 뭔지나 알까?’
질문도 피고인에게 불리한 것뿐이었고 지금 상황도 그렇다.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극단적인 표현을 하며 의견을 제시했다.
‘한국 사람들은 대놓고 싸우는 걸 꺼린다고 했지?’
누군가가 이렇게 강력하게 의견을 내놓으면 거기에 대항해서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누군가는 심지가 약해서 그 의견에 끌려들어 간다.
순식간에 그러한 세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바로 저 여자처럼 말이다.
“길게 갈 필요 있겠습니까? 저런 살인자 새끼가 우리 가족을 죽였다고 생각해 보세요.”
노형진이 손채림에게 경고한, 포섭된 자의 두 번째 방법.
바로 배심원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거다.
가족처럼, 가족같이, 가족을 위해 같은 식으로 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미 일어난 일을 자신의 가족에 대입해서 판단하면 누구도 공정한 판결은 불가능하다.
어떤 가족이든 사고가 날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런 식이면 세상이 무서워서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이 나오고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이 나오면 확정적이라고 했지?’
그리고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세 번째 방법이 튀어나왔다.
“더군다나 이거 길게 끌어 봐야 우리한테 좋은 게 뭐가 있겠습니까? 사실 여비를 준다고 하지만 그걸로 먹고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배심원들이 입는 피해를 입에 올린다.
명백하게 법적으로 이들에게 지급될 여비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생계에 피해를 입는 부분은 보장되지 않는다.
미국 같은 경우는 배심원이라는 게 권리이자 의무로 확실하게 못 박혀 있어서 그 때문에 쉬는 걸 가지고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직장의 경우는 오로지 손해만 생각해서, 그렇게 잘났으면 그만두라고 비아냥거린다.
가게 같은 경우는 더하다.
일단 피해가 문제가 아니라 쉰다는 것 자체가 가게에 타격을 준다.
“빨리 끝내고 갑시다. 그래야 우리도 생활을 하지요.”
남자는 마치 리더처럼 분위기를 이끌었다.
물론 그가 배심원 대표이기는 하지만.
“하긴…….”
“그러지요. 뭐, 사건도 명확한 것 같고.”
‘명확하기는 개뿔. 분위기가 거기에 쏠려 있으니까 그렇지.’
명확한 건 하나도 없다.
이쪽 경험이 없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경험이 많은 손채림은 안다, 명확한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사고 현장에는 CCTV도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날 밤은 아주 어두웠고, 늦은 시간이라 주변의 가게도 불이 다 꺼져 있었기 때문에 그 트럭의 블랙박스에도 나온 게 없었다.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조호국이 도로에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뿐이다.
애석하게도 인도 쪽에 있던 주영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다 증인도 있지요.”
‘증인이 있기야 하지.’
문제는 그 증인이 조호국의 친구들이라는 거다.
쉽게 말해서 학교에 다닐 때 같이 몰려다니던 일진들이었다.
조호국과 함께 길을 가던 중 학창 시절 먹잇감이었던 주영우를 발견하고는 버릇처럼 다가간 거다.
그런 놈들이 과연 조호국이 스스로 뛰어들었다고 진술해 줄까?
그럴 리 없다.
“그러면 빨리 평결하지요.”
여론을 계속 이끌어 가면서 리더 노릇을 하려고 하는 남자.
손채림은 이쯤에서 그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눈치 볼 이유가 없었다.
“글쎄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뭐요?”
손채림에게 눈을 부라리는 남자.
안 봐도 뻔하다. 저렇게 겁을 줘서 의견을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거다.
보통 저런 식으로 행동하면 여자들은 겁먹고 의견을 말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손채림은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런 게 무서웠다면 애초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지 못했다.
“웃어?”
“웃지요. 상황이 웃기지 않습니까?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는데요.”
“아니, 증인이 있잖아!”
이제는 반말을 하는 남자. 어떻게 해서든 손채림을 억누르기 위해서다.
손채림은 그런 그를 보면서 똑같이 반말을 했다. 이건 기세 싸움이다.
“증인이야 있지. 그런데 그 증인들, 다 피해자의 친구들이야. 그리고 피고인 측의 주장에 따르면 다들 학교에서 피고인을 괴롭히던 일진 패거리고.”
“어따 대고 반말이야, 나이도 어린 년이?”
“네가 먼저 반말을 시작했는데 나는 하지 말라는 법 있어?”
“어린놈의 새끼가!”
“너보다는 어리지만 너보다는 똑똑할 것 같은데?”
“뭐?”
남자가 발끈하자 사람들은 당황했다. 시작부터 싸움이 날 줄은 몰랐으니까.
그리고 그게 바로 손채림이 노린 바였다.
싸움을 일으킴으로써 그의 리더십을 붕괴시키고 그녀를 동일한 힘을 가진 존재로 각인시키기 위해서.
“아이고, 그만 싸워요.”
“아니, 우리 싸우자고 온 거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다른 배심원들이 손채림과 그 남자를 말렸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아까 박정남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뭐? 넌 내가 누군지 알아?”
“그건…….”
“피차 모르는 사이에 그런 건 뭐 하러 물어? 아니면 나가서 대판 하게? 나도 지금 일 못 하고 나와서 디게 빡치거든? 어디 한번 대판 해 볼까?”
박정남이라고 호칭된 남자는 움찔했다.
‘그럴 줄 알았다.’
이익을 위해 넘어간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 안에 자신이 피해를 입은 가능성이 있으면 사람은 움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증거가 명확하잖아!”
“그래서 증거가 뭐가 있는데?”
“아니, 사고 현장 봤잖아?”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
그들은 그걸 봤다. 그리고 그게 함정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사고 현장=살인 사건’이니까.
“그게 사람이 죽은 현장인 건 맞아. 하지만 밀었다는 명확한 증거 있어? 미는 장면이 있다거나 가슴에 상처가 있다거나 하는 거 있느냐고.”
“그건…….”
사건 현장에 대한 증거는 많았다.
하지만 살인에 대한 증거는 증언 말고는 없었다.
박정남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법률적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이다.
설사 있다고 해도, 그걸 구분해서 명확하게 특정할 능력은 안 된다.
‘이제 남은 건 아까 그가 한 말을 모조리 부정하게 하는 거지.’
그가 반박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의 리더십은 위협받는다.
그의 말이 부정당하면 그 순간부터 박정남은 이 사건을 끌고 가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가족을 생각해 보라고. 그런 놈들에게 죽었다고 생각해 봐.”
‘그럴 줄 알았다.’
한국은 가족이니 정이니 하는 것에 약한다.
그러니 가족을 대입하면 격분하는 부분이 있다.
노형진에게서 그런 식으로 반격이 들어올 거라 이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파훼법 역시 이미 들어 둔 후였다.
손채림은 슬쩍 고개를 돌려서 아까 박정남에게 동조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저기 아줌마, 혹시 아이 있어요?”
“에? 저요?”
은근슬쩍 박정남을 편들어 줬던 여자는 당황해서 물었다.
갑자기 자기한테 불똥이 튀었으니 심지가 약한 그녀 같은 타입이라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그러면 제가 여기서 나가서 그 애 인생 망쳐도 되나요? 제가 오늘 강제로 끌려온 데다가 진짜 빡치거든요? 어디다 화를 풀지 않으면 제가 못 버틸 것 같아서요.”
“뭐야?”
“이년 미친 거 아냐?”
“아니, 당신 미쳤어?”
다들 뜨악한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왜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인생을 망치겠다고 한단 말인가?
‘간단한 거지.’
사람은 상대방에 대해 모르면 가차 없다. 어차피 남의 일이니까.
하지만 좀 아는 사이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실제로 이에 대한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을 모아 두고 기네스 기록에 도전한다며 차에 많이 들어가기를 시도했다.
물론 기네스 기록이 목적이 아니라 심리학적 실험이었는데, 처음에 그 차에는 서른여덟 명이 들어갔지만 30분간 휴식 시간을 주고 두 번째 시도했을 때는 서른두 명밖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30분의 짧은 시간 동안 서로 대화하면서 인간적 감정이 쌓여서 자신도 모르게 밀어 넣는 힘이 약해진 것이다.
처음이라면 모를까 배심원으로 만나서 이야기한 이상 감정적 동조가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은 손채림의 말에 발끈할 테고.
그리고 그건 감정적인 부분이지만, 그걸 깨는 건 논리적인 부분이다.
“그래요? 무슨 상관이 있지요? 나랑 상관없는 일인데? 어차피 여기서 나가면 서로 안 볼 거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왜 엉뚱한 사람한테 화를 풀어?”
“아무리 저 사람이랑 같은 의견이라고 해도…….”
그것 때문에 협박하는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뭐라고 하려는 찰나, 손채림이 한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남의 인생을 박살 내는 것에는 엄청 신경 쓰면서 남의 목을 자르는 건 쉽게 생각하시네요.”
“뭐?”
“어차피 저분 아드님이나 오늘 피고인이나, 모르는 사이인 건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여기서 유죄 평결하는 순간 판사가 사형을 선고할지도 모르죠. 직접 죽이지 않는다고 사람을 안 죽이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직접 칼로 찌르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지 않는 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그 사람의 목을 매달지 말지 결정하는 중이라고요. 그 정도도 생각 못 하고, 단순하게 귀찮으니까 집에 가려고 빨리 평결하겠다고요? 그 사람이 죽어서 억울하다고 귀신이 되어서 나타나면 어쩌려고요? 뭐, 굿이라도 하시려고요? 그러면 제가 용한 분을 소개해 드리고요.”
다들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물론 대한민국은 실질적으로 사형 폐지국이지만.’
어차피 그런 건 일반 국민은 잘 모른다.
중요한 건 이들이 이번 사건이 얼마나 무거운 건지 느껴야 한다는 거다.
“우리는 지금 사람 목을 매달 수 있는 버튼에 손가락을 올려 둔 상태인 겁니다. 그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사람은 즉시 목매달려서 죽어요.”
구체적인 그림까지 그려 주자 다들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제야 자신들의 상황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오케이. 이제 귀찮다고 쉽게 판단을 하지는 않겠지.’
손채림은 그렇게 말하면서 박정남을 바라보았다.
박정남은 확실히 당황한 눈치였다.
‘이런 식으로 갈 줄은 몰랐을 테니까.’
아무리 그가 리더 노릇을 한다고 해도 생명이 걸린 거라는 걸 각인시켜 두면 사람들은 쉽게 선동되지 않는다.
그가 손채림이 자기편을 들어 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아니, 모를 가능성이 높다. 미리 이야기했다면 손채림에게도 이야기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리더십은 흔들렸고, 이제는 제대로 이야기해 볼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니, 유죄 아니야? 우리가 못 봤다고 해도 결국 사람은 죽었잖아.”
“그럼 길을 가는데 길가의 사람이 심장마비로 죽으면 그건 길을 지나가던 사람의 잘못입니까?”
“아니, 밀었잖아!”
“그러니까 밀었다는 증거가 없잖아요!”
박정남의 말에 확실히 수긍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물론 그런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인범이 빠져나가는 건 안 좋을 것 같은데요.”
“정황상 살인일 가능성이 높기는 합니다. 검사도 아까 그랬잖아요, 원한이 쌓여서 살인을 했을 거라고.”
유죄 쪽으로 넘어가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이제부터는 논리 싸움이지. 그건 다행히 충분히 훈련이 되어 있고.’
논리적으로 하나씩 격파해서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야 한다.
손채림은 그들을 보다가 명쾌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하나씩 논리적으로 해석해 보죠.”
“논리, 논리. 잘났다, 증말.”
“싫어요? 그러면 감정적으로 개싸움 하든가. 아, 참고로 저 건물주입니다. 개싸움 하면 변호사 한 열 명쯤 동원할 수 있는데, 해보실래요?”
그러자 어떻게 해서든 태클을 걸려고 하던 박정남은 입을 다물었다. 켕기는 게 있으니까.
“일단 이야기는 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판사는 판사고 검사는 검사죠. 각자 자기 이야기만 떠들었으니 그걸 우리가 정리하기는 해야 해요. 인터넷에서 한쪽 말만 들었다가 개판 되는 건 우리 세대에게는 익숙한 일이거든요. 전 여기서 그런 실수를 하고 싶지는 않네요, 사람 목숨이 달렸는데.”
자신을 대학원생이라고 소개한 아가씨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중립이라……. 현명하네.’
여기서 중요한 건 중립을 취하는 사람이다.
배심원이 아홉 명이라는 것은 최악의 경우 다수결을 하라는 뜻이다. 홀수는 절대로 균형이 맞을 수 없으니까.
따라서 그녀가 중립을 취하면 양쪽 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할 테니, 그녀는 이 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좋습니다. 하나씩 정리해 보죠.”
그리고 논리로 하나씩 격파하는 건 노형진의 특기이고, 손채림은 지난 몇 년간 그걸 계속 보고 배웠다.
“첫 번째. 학교 폭력으로 인한 보복인가?”
“아니, 이건 살인이라니까!”
“그러니까 하나씩 분석하자니까요! 만일 반론이 있으면 제 이야기가 끝난 후에 말씀해 주세요.”
손채림의 말에 박정남은 불편한 얼굴을 하기는 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다시 시작하죠. 첫 번째, 학교 폭력이 있었는가.”
“핵심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아니요, 핵심입니다.”
손채림은 차분하게 말했다.
“검사님은 이렇게 말했지요. 학교 폭력으로 인해 원한이 생겼다고 말이지요.”
“그래서요?”
“그리고 그게 직접적 살인의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피고인 측도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걸 인정했고요. 그렇지요?”
“맞지.”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모두가 봤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겨요. 증인들. 그들은 자신들이 학교 폭력의 가해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린 시절의, 그저 애들 장난이었다.’라고 말했지요.”
그건 그들이 증인석에서 한 말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양쪽의 말이 충돌하는 거죠.”
학교 폭력의 피해자라는 주장. 그리고 아니라는 주장.
“만일 증인들의 말이 맞는다면 살인을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살인의 직접적 원인이 학교 폭력으로 인한 보복이니까요.”
“으음…….”
다들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면 그건 사고라는 거죠. 살인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물론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이유는 이번 재판에 언급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검사도 학교 폭력을 이야기했잖아요?”
“그렇지요.”
검사 입장에서는 그래야만 원인을 명확하게 할 수 있으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원인 없이 ‘그냥 죽였습니다.’라는 건 일부 묻지 마 살인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이런 경우 그런 주장은 사고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아져 버린다.
“그러면 다른 말이 성립되지요. 증인들이 학교 폭력에 대해 위증을 했다는 거지요.”
손채림은 그 말을 한 뒤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한 번 위증했는데 두 번 위증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안 그래요?”
“그건 그러네요.”
“위증이든가, 아니면 살인의 원인이 없든가.”
애매한 상황이다.
전자라면 증인이 위증한 거고, 후자라면 살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게 논리적으로 첫 번째 문제점입니다. 이 두 개의 명제가 정면으로 충돌하지요.”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빠지는 사람들.
“두 번째 문제는 바로 블랙박스에 찍혀 있는 피해자의 모습이에요.”
“으윽.”
사고 장면이 생각난 듯 몇몇 사람들이 눈을 찌푸렸다.
전속력으로 달려온 8톤 트럭에 치인 사람이 멀쩡하기는 힘드니까.
“그게 왜요?”
“예를 들어 보죠. 잠깐 도와주시겠습니까?”
손채림은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에 잠깐 서 주세요.”
“네, 왜요?”
왜 그러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남자.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손채림이 그를 확 밀었기 때문이다.
“우아악!”
그리고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순간 잽싸게 그의 손을 잡아 완전히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남자는 발끈하며 화를 냈다. 사람을 갑자기 밀었으니까.
“미안합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이 이해하려면 명확하게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뭘요?”
“밀었다면 넘어졌으리라는 것을요.”
“어?”
그랬다. 만일 밀었다면 일반적인 사람은 뒤로 넘어졌어야 했다.
“거기에다 거기는 차도와 인도 사이에 당연히 경계석이 있더라고요. 즉, 사고가 난 도로와 인도의 높이가 다르다는 거죠.”
당연히 그 높이 때문에라도 넘어질 가능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블랙박스에 찍혀 있는 피해자의 모습은 넘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지요. 저기, 잠깐 다시 한번 도와주시겠어요?”
아까 그 남자는 주춤거리면서 일어났다.
“또 밀려고요?”
“네. 하지만 이번에는 미리 경고드립니다. 제가 미는 자세를 취할 테니 그걸 피해서 뒤로 뛰어 보세요. 셋에 밀겠습니다. 하나, 둘, 셋!”
손채림은 남자의 가슴팍을 손으로 확 밀었다.
그러자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남자는 타이밍에 맞춰 뒤로 펄쩍 뛰어서 피했다.
“좋습니다. 잠깐만 그 자세로 계세요. 보다시피 이런 경우 균형을 잡기 위해 한 발은 앞으로, 한 발은 뒤로 갑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마지막에 취하고 있던 자세가 딱 이랬지요.”
“그러네요.”
“맞네.”
그는 마치 뭔가를 피하는 것 같은 자세를 잡고 있었다.
“그건 일반적인 사람 기준으로 한 거고요.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은 밀쳐져도 버틸 수 있습니다.”
박정남의 말엔 손채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확실하게 합시다. 우리는 피해자의 운동신경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습니다. 그가 운동을 했는지도 모르고 평소에 운동신경이 어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운동신경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박정남은 눈을 찌푸렸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끝이 없어요.”
“사람 목숨 하나 결정하는 일을 얼마나 쉽게 하려고요?”
손채림의 말에 그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오늘 재판은 쉽지 않을 겁니다. 평결을 최대한 만장일치로 해야지요.”
손채림은 그렇게 말하면서 박정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럴 거면 왜 불렀니?
사건에 대한 토론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상황이 영 쉽지 않았다.
“논리적이라고 해도 그다지 논리적인 건 아니네.”
“아니, 아까도 말했잖습니까? 일반적인 경우는 그렇다고요.”
“아니, 세상에 예외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대입하면 기준이 어디 있겠습니까?”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게 법이라며? 그럴 거면 예외도 인정해야지.”
손채림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놈 이거 아주 작심했네. 도대체 얼마나 받기로 한 거야?’
회의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아홉 명의 배심원 중에서 세 명은 유죄를, 다섯 명은 무죄를 주장하고 있었다.
‘다수결로는 이쪽이 유리하기는 한데.’
하지만 기본적으로 배심원 제도는 만장일치를 추천한다.
다수결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경우는 판사가 끼어들어서 설명을 해 줘야 한다.
‘문제는 판사도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그러면 도리어 지금과 반대로 무죄를 주장하는 쪽이 소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판사가 와서 그쪽으로 설명해 줄 테니까.
‘사건 자체는 너무 단순해. 변호사도 당연히 의뢰인을 배신했다고 봐야 할 테고 말이야.’
손채림은 아까 인터뷰할 때를 생각했다.
출석한 배심원 후보 중에서 검사와 변호사는 대상을 골라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변호사는 고른다기보다는 찾는 듯한 느낌이었다.
‘배심원을 고를 권한은 변호사에게도 있지.’
배심원을 고를 때는 그 숫자를 맞춰야 한다.
가령 지금같이 아홉 명이 들어간다고 하면 그중에서 변호사는 네 명을 골라내서 배제할 수 있다.
검사도 마찬가지다.
사실 변호사는 손채림을 걸렀어야 했다. 슬쩍 피해자에게 유리하게 말했으니까.
하지만 그걸 들었음에도 변호사는 그녀를 걸러 내지 않았다.
‘포섭보다는 협박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 변호사까지 포섭할 정도면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뿐이다.
‘그 말 자체가 결국은 무죄를 입증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지.’
무죄가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협박을 할 이유는 없다.
애석하게도 자신 있게 권력자, 그것도 정당과 싸울 수 있는 변호사는 거의 없을 테니까.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아니에요.”
손채림은 대학원생의 말에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집중하자, 집중.’
정황상 그리고 증거상 이 사건의 피고인은 무죄일 가능성이 높다.
그를 돕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이겨야 한다.
“현장에 다른 증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불확실할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그게 법률의 규칙입니다. 당장 이번 사건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증인이라고 있는 사람들은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상황이고요. 더군다나 구호의 문제도 있습니다.”
“구호?”
“이 기록을 보세요. 사건 당시에 증인들은 당황해서 도주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사건이 벌어지자 증인들은 당황해서 도망갔다고 한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자기 친구가 차에 치였는데?”
“그건 증언을 하지 않았습니까? 주영우가 자신들도 죽일까 봐 두려워서라고요.”
“그게 더 말이 안 되죠. 그냥 교통사고잖아요?”
무기를 들고 찌르거나 때린 것도 아니다.
설사 진짜로 살인을 했다고 해도, 그저 도로 쪽으로 밀어낸 것이 끝이었다.
“그런데 뭐가 두렵습니까? 더군다나 그들은 학교 폭력의 가해자 출신들인데요. 상대방은 피해자고. 두려워할 리가 없지요.”
학교 폭력의 가해자들이 피해자가 두려워 차에 치인 친구를 두고 도망간다?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막나가자고 생각해서 피고인이 위협했을 수도 있지요.”
“물론 그랬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경찰 조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당시 주영우는 비무장이었습니다. 가진 물건은 고작 삼각김밥 세 개랑 계란 한 판이었어요. 설마 그게 무서워서 성인 남자 세 명이 도망갔다고 생각하세요?”
말도 안 된다. 성인 남자 세 명이면 충분히 비무장인 주영우를 제압할 수 있다.
“더군다나 여기 구급대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사고 직후 세 사람은 도주했고 남아서 구호 활동을 한 건 주영우뿐입니다.”
주영우는 그 상황에서 자신의 옷을 찢어서 출혈을 막고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지르며 피해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게 블랙박스에 찍혀 있는 장면이었다.
“원한을 가지고 고의로 살인을 한 사람이 피해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순간 후회했을 수도 있지요. 사람을 죽인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절박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애초에 원한을 가지고 살인을 했는데 계기는 우연히 만난 것뿐입니다.”
사고 현장은 주영우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피해자인 조호국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곳이다.
“심지어 그곳에는 유흥가도 없지요.”
“그래서요? 그게 무슨 관계가 있죠?”
“조호국이 거기를 일부러 찾아갔을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거죠.”
“일부러 찾아간다?”
“네.”
분명 조호국과 그 친구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영우를 만나서 괴롭혔다.
“그런데 거기에 조호국이 갈 이유가 없어요.”
조호국이 죽었기 때문에 그거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피고인이 피해자를 원한 때문에 죽이려고 한 거라면 피해자를 직접 찾아갔어야 정상이에요. 하지만 단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지요.”
도리어 대부분의 학교 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을 극도로 피한다.
“하지만 많은 학교 폭력 가해자들이 제정신을 못 차리지요.”
학교 폭력을 할 때는 미성년자일 수밖에 없다. 당연하게도 그때는 청소년 보호법의 보호를 받는다.
그래서 영악한 놈들은 성인이 되는 순간 딱 손을 씻어 버리지만, 대부분의 학교 폭력 가해자들은 그런 걸 모른다.
자신이 법 위에 있고 어차피 상대방은 신고나 보복을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게 학습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고를 해도 경찰은 풀어 주고 선생님도 모른 척하는 게 현실이니까.
만일 신고했다고 하면 끌고 가서 개 패듯이 패며 보복해도 학교에서는 별말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줄 안다.
“하지만 대부분 그 개 같은 버릇을 못 고치죠.”
사실 만 18세가 넘으면 법적으로 성인이지만 그걸 확실하게 이야기해 주는 곳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교 폭력 가해자들은 성인이 되어도 그다지 바뀌지 않는다.
그들이 바뀌는 시점은 대부분 군대다. 군대에서는 학교처럼 물렁하게 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현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가능성은 이거예요. 피해자와 증인들은 다른 곳에서 술을 먹다가, 과거의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피고인을 찾아가 괴롭힐 생각으로 그곳에 갔고, 사건이 벌어졌다는 거죠.”
그렇다면 정황상 살인이라는 것이 벌어질 가능성은 낮아진다.
“원한 때문에 즉흥적으로 벌어진 살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살인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니까요.”
끝도 없이 달리는 평행선. 다들 지친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현재 시간이 벌써 저녁 9시 40분이니까.
‘아오, 죽겠네.’
손채림도 죽을 맛이었다.
경험해 보고 싶기는 했지만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으니까.
재판이 시작된 것은 오전 11시였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이 좁은 방에서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으니 문제였다.
“그냥 다수결로 가죠.”
결국 누군가 질렸다는 듯 말했다.
평행선을 달리는 의견은 맞출 방법이 없으니까.
손채림은 손채림대로 무죄를 주장하고 박정남은 박정남대로 유죄를 주장한다.
“그건 안 됩니다.”
“거봐요. 저거 켕기니까 저러는 거야. 판사님이 오면 논리에서 깨질 게 뻔하니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애초에 판사가 부당할 게 뻔한 상황에서 그에게 조언을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 목숨이 달려 있는데 허투루 할 수는 없다는 소리예요.”
“그냥 판사 부릅시다. 의견 듣고 여기서 다수결로 끝내죠. 그래야 집에 가죠.”
“끄응…….”
손채림은 걱정이 앞섰다.
‘이러면 곤란한데.’
지금 배심원들은 죄다 지쳤다.
한국 배심원 제도는 외국 배심원 제도와 다르다.
미국 같은 경우는 이런 사건은 일단 숙박을 시켜 주면서라도 토론을 할 수 있게 해 주지만 한국은 일단 여기에 들어오면 끝나기 전에는 못 나간다.
‘더군다나 회사나 가게를 며칠씩 비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은 결국 이기적인 동물이다.
지금이야 아까 손채림이 사람 목숨 운운해서 집중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봤을 때 자신에게 피해가 온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판사는 거기에 쐐기를 박을 테고.’
결국 재판은 확실하게 질 것이다.
“네, 그만해요. 우리도 내일 회사에 가야지요.”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논리적으로.”
“뭔 놈의 논리를 따져요.”
그때 심지 약한 여자가 박정남을 거들고 나섰다.
“맞아요. 그냥 빨리 끝내고 갑시다. 점심때도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점심?”
손채림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리가?’
애초에 재판을 시작한 게 11시다.
그리고 12시 살짝 넘어서 휴정을 하고 점심을 먹고 1시가 좀 넘어서 재판을 다시 시작했다.
그사이에 누군가와 이야기해 본 기억이 없었다.
손채림이 모르는 눈치이자, 여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점심때 그랬잖아요. 어차피 유죄인데, 살인범 새끼 때문에 시간 끌지 말고 가자고. 안 그랬어요?”
“누가요?”
“그건…….”
방금 입을 연 여자의 시선이 박정남에게 향했다.
“지금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러자 박정남이 당황한 듯 눈을 슬쩍 돌렸다.
“아니, 그게 뭐 어때서? 시간 끌어 봤자 서로 피곤하니까 빨리 끝내고 가자고 한 거지.”
“아, 그랬다?”
손채림이 피식 웃었다. 갑자기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멍청한 새끼. 이래서 형진이가 몇 번이나 경고를 해 준 거였나?’
돈을 얼마나 받았는지 모르지만 박정남은 너무 열성적으로 덤볐다. 그게 그의 실수였다.
“저는 그런 말 못 들었는데요.”
“뭐,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점심시간이라고 해 봐야 긴 것도 아니었고.”
“그래요?”
대충 이해가 갔다.
딱 봐서 만만한 이미지의 사람들을 포섭하려고 했을 것이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어.’
들어오자마자 극단적으로 유죄를 주장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더 말이 안 되는 건 다른 배심원들 중 일부가 동조했다는 거다. 상식적으로 그런 말에 그렇게 동조하는 것은 정상적이지는 않다.
말하자마자 동조? 허수아비도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사전에 언질이 없었다면 말이다.
손채림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혹시 점심에 이야기를 나누신 분?”
“그건 왜요?”
“그게 중요해요? 그냥 빨리 끝내고 가요.”
짜증스럽게 말하는 사람들.
“중요합니다.”
“얼마나 중요한 거죠?”
여학생은 손채림이 돌변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누군가는 감옥에 가야 할 만큼요.”
사람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자고 모였지 감옥에 가기 위해 모인 게 아니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감옥이라니?”
“이거 심각한 규정 위반이거든요.”
배심원이 피해야 하는 것은 예단이다.
그래서 배심원으로 확정되기 전까지는 사건에 대해서도 말해 주지 않는다.
“또한 평결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사건에 대해서도 말하는 게 금지되어 있지요. 아까 후보로 선발되었을 때 경고를 들었을 텐데요?”
“그거야…….”
분명히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냥 의례적인 경고로 생각한다.
어차피 평결에 들어가면 계속 그 이야기만 할 건데 조금 먼저 이야기하는 게 뭐가 잘못이냐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평결도 하기 전에 누군가 부정적 이미지를 박아 버리면 그들은 평결에서도 부정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다.
“거기 두 분. 두 분 다 점심시간에 이야기를 들은 분들 맞지요?”
“어…… 그건 그런데…….”
“그렇기는 하지요.”
박정남의 편을 들어 주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제부터 유죄라는 생각을 했나요?”
“그러니까 대충 점심 먹고?”
생각을 하던 그들은 움찔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점심 먹기 전에는 아무 생각 없었다.
하지만 점심 먹고 나서 유죄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박정남 씨, 점심시간에 이야기했다고요?”
“아니, 뭘 그걸 가지고 그래. 어차피 할 거…….”
“어차피 할 게 아니죠. 어떤 아동 강간범이 그랬다죠? 어차피 나중에 남자랑 할 거 뭐 어떠냐고?”
“뭔 말을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가 누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었지요.”
손채림은 차분하게 일어났다.
그들이 그렇게 나가고 싶어 한다면 소원대로 보내 주면 된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방식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녀는 바깥에서 기다리는 법원 직원을 불렀다.
“여기요.”
“네?”
“평결을 이대로 진행하지 못할 심각한 사유가 있습니다.”
“심각한 사유요?”
“네, 한 명이 사전에 확신을 가지고 점심시간에 다른 배심원들을 설득했다네요.”
직원은 황당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네, 다른 배심원들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잠시만요.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어어?”
“이게 무슨 일이야?”
다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손채림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나야 땡잡았지. 날밤 새우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안 그래도 박정남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박정남이 자폭을 했다.
너무 열정적으로 일해서 말이다.
‘이야, 열혈남이 마냥 좋은 건 아니라니까.’
손채림이 기다리는 사이 몇몇 사람들이 왔다.
“지금 보고받았습니다.”
재판장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짙게 서려 있었다.
그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사전에 설득 작업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분이 여기 두 분과 점심시간에 만나서 사전 설득을 했다고 하네요.”
“으음…….”
판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박정남을 바라보았다.
“아니, 판사님, 이건 그러니까…… 제가…….”
박정남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런 상황이 될 줄은 몰랐으니까.
‘경고가 왜 경고인지 모르는 모양이네.’
그래서 손채림은 평결에 들어올 때까지 사람들 이름도 제대로 몰랐다. 대화 자체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걸 대놓고 무시하다니.
이런 경우 재판부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하나뿐이다.
더군다나 법에 대해 잘 아는 손채림이 있다면 더더욱 말이다.
“박정남 씨, 죄송하지만 박정남 씨를 배심원에서 해임하겠습니다.”
“네?”
배심원에서 해임한다는 말에 박정남은 당황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이건 배심원으로서 중요 결격사유입니다. 배심원은 철저하게 중립적이야 합니다.”
그래서 배심원이 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사람들을 뽑는다.
심지어 공무원은 배심원으로 활동하지 못한다.
영향을 줄 만한 위치에 있으면 애초에 걸러지는 것이다.
“아니,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노력했는데…….”
“노력할 게 뭐가 있습니까? 노력이라는 건 어떤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겁니다. 우리가 할 건 노력이 아니라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겁니다.”
손채림의 말에 박정남은 입을 다물었다.
판사는 그런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십시오.”
“끄응…….”
박정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짐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예비 배심원분을 모시고 오세요.”
판사는 차갑게 말했다.
모든 배심원들은 선정되면 끝이 아니다.
만일에 대비해서 예비 배심원이 한 명씩 대기하게 된다.
그들은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지거나 배심원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는 경우와 같은 비상시에, 대리해서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손채림은 그가 들어오고 판사와 직원들이 나가자 씩 웃었다.
“자, 그러면 이제 다시 시작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