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the law RAW novel - Chapter (397)
“흐아암.”
노형진은 기지개를 켜면서 입맛을 다셨다.
“피곤해 죽겠네. 가을 타나?”
이제는 완연히 가을로 들어가는 선선한 날씨. 그 날씨에 노형진은 왠지 더욱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음…… 어디 보자…… 일단 먹을 게…….”
노형진은 입맛을 다시면서 냉장고를 열고는 피식 웃었다.
“역시나 없군.”
부모님은 아예 시골로 내려가시고 누나는 남편을 따라 가 버리고 나니 전처럼 반찬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물론 누나야 원래 반찬을 만들어 줄 사람이 아니기는 하다마는.
“이거 이거 혼자 사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좀 심한가?”
우유와 콘플레이크, 생수 몇 병. 그리고 말린 과일 정도. 비참할 정도로 비어 있는 냉장고의 모습.
“일단은 오늘은 좀 시장을 볼까?”
노형진은 쉬는 날을 이용해 자주 가는 시장에서 먹을 것과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옷을 입고 나섰다. 아무리 잠만 자는 오피스텔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먹을 게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그가 도착한 곳은 그가 즐겨 찾는 반찬 가게였다. 워낙 솜씨가 좋아 이 근방에서도 유명한 곳이라 노형진이 시장을 볼 때면 언제나 거치는 곳이었다.
“얼레?”
그런데 노형진이 도착한 그곳은 평소와 다르게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이상하다? 이분이 아무런 말도 없이 쉴 분이 아닌데?”
이곳을 운영하는 아주머니는 무척이나 억척스러운 분이다. 어지간하면 쉬지 않는 데다가 쉴 일이 있으면 며칠 전에 공지를 한다. 물론 노형진처럼 오랜만에 가는 사람은 못 들을 수도 있으니 가게 입구에 언제까지 쉰다고 써 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런 공지도 없이 가게 문만 굳게 닫혀 있었다.
“총각도 반찬 사러 왔나 봐?”
“어떻게 아셨어요?”
“다 큰 총각이 시장 가방 들고 그 앞에 서 있으면 뻔한 거지.”
“하하하.”
넉살 좋은 주변 상인의 말에 노형진은 미소를 지었다.
‘공지해 주지 않아도 주변에서 이야기해 주니까.’
시장의 좋은 점이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 언제 열어요?”
“거기? 어쩌나 몰라.”
“네?”
“언제 열지 몰라.”
그 말에 노형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분이 아닌데?’
휴가를 가더라도 안절부절못할 것 같은 사람이 바로 이 가게의 주인아줌마다. 그런데 언제 열 줄 모른다니?
“무슨 사고라도 있었어요?”
“사고? 사고라면 사고지. 에효.”
“아니, 사고라면 사고라니요? 무슨 일인데요?”
“이집 딸내미 있잖아. 목매달았어.”
“네?”
그 말에 노형진은 깜짝 놀랐다. 딸이라고 하면 그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주 본 것은 아니지만 가끔 나와서 엄마를 돕는 싹싹하고 참한 아가씨였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을 매달다니?
“왜요?”
“남자한테 실연당했다네.”
“네? 고작 그걸로요?”
사람이 살다 보면 실연당할 수밖에 없다. 그 자신이 엄청난 미인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니, 그런 사람이라도 서로 맞지 않으면 끝인 게 인생이다. 그런데 실연당했다고 목을 매달다니?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근데 그동안 만난 사람이 글쎄, 유부남이었다지 뭐야.”
“끄응…….”
노형진은 왠지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유부남이 마치 혼자인 것처럼 여자에게 접근하는 사건은 흔한 사건이다.
“뭐, 뻔하지.”
“그렇게 말이야.”
“아휴, 세상 무서워서 어디 살겠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상인들.
중구난방의 이야기였지만 그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간단하게 말해 남자가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접근했는데 그걸 믿고 마치 노래처럼 몸 주고 마음 주고 사랑까지 줬지만 정작 그 남자는 유부남이었고 결혼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설마…… 아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목을 매다는 것까지는 좀 심하다 싶었던 노형진은 아니길 빌면서 물어봤다.
“뭘?”
“네? 아니에요.”
“뭐야, 총각. 그 애한테 관심이 있던 거야?”
“아니요. 그냥…….”
보아하니 상대방 아줌마들은 노형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노형진은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줌마들의 소문의 힘을 무시하면 안 되지.’
자살까지 한 걸 봐서는 애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물어본 것이지만 아줌마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물론 확실하게 물어봐도 되지만 아줌마들의 세계에서 이런 걸 물어보면 어느 사이엔가 아이와 함께 동반 자살했다는 식으로 소문이 날 수도 있어서 그냥 모른 척한 것이다.
“하여간 그래서 딸이 있는 병원에 가 있어.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지만.”
“그렇겠네요.”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정신은 생각보다 예민하다. 충격이 크다면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릴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까 당분간 그 집 반찬은 포기해야 할걸.”
“네.”
노형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돌려서 그곳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대?”
“네.”
노형진의 말에 남상주는 입맛을 다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남상주 역시 그 집의 단골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크, 큰일 났네. 우리 집 마나님 반찬은 영 아닌데.”
“혼납니다.”
“어쩌겠어. 그건 자기가 인정한 거야.”
남상주의 아내는 모든 면에서 현모양처 스타일이기는 하지만 딱 하나, 요리 솜씨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인 게 문제였다. 그래서 언제나 반찬은 반찬 가게에서 사먹는 편이었다.
“다른 집은 영 그 집 맛이 안 나는데.”
“어쩔 수 없죠.”
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어?”
노형진은 회사에 들어오는 한 사람을 바라보고는 깜짝 놀랐다.
“저거, 그 아줌마 아니에요?”
“어? 그런데? 왜 여기 온 거지?”
고개를 갸웃하는 남상주. 하지만 노형진은 딱 느낌이 왔다.
“하나뿐이죠, 뭐.”
“하나? 아…… 그런가?”
자신들이 아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여기에 올 이유는 하나뿐이다.
“어떡해? 자네가 할 거야?”
“글쎄요.”
솔직히 노형진은 이번 사건은 맡을 생각이 없었다. 잘 아는 사이도 아닌 데다 이런 사건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니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결해도 어렵지 않으니까.
“배당에 대해 너무 터치하는 것도 좋은 건 아니죠.”
“그렇기는 하지.”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회사의 사건 배당에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다. 사람들이 공평하게 사건이 돌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불만이 없기 때문이다.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네요.”
노형진은 그렇게 말하고 말았고 그 사건은 그렇게 잊혀 갔다.
“혼인 빙자 간음죄요?”
“네.”
자신을 찾아온 손예은을 보면서 노형진은 문득 얼마 전 찾아왔던 사건이 기억났다.
“혹시 그 사건 정아름 씨 사건 아닙니까?”
“맞습니다. 아시는 사건인가요?”
“조금요.”
노형진은 약간 당황했다. 정아름 씨 사건이 손예은에게 넘어간 건 이해하겠는데 정작 이해하지 못하겠는 것은 손예은이 1심에서 졌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쪽에서 손을 쓴 것 같습니다. 그쪽은 정아름 씨가 혼인 상태였다는 걸 알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요.”
“음…….”
혼인 빙자 간음죄는 말 그대로 혼인을 약속하고는 성적?재산적 착취를 하는 것을 처벌하는 규정이다. 그런데 그것에서 지다니.
“이건 뭐…… 너무 뻔하네. 누구네 집 아들입니까?”
“대룡토건 사장 아들입니다.”
“엥?”
노형진은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오자 당황했다.
“대룡요?”
“네.”
“허.”
대룡이라면 자신들과 아주 끈끈하게 연결된 기업이 아닌가? 그런 곳의 아들이라니?
‘하긴…… 유민택 회장님이 바르다고 해서 그 아래가 다 바르라는 법은 없지.’
그룹 차원이다 보니 별별 사람들이 다 있기 마련이고 그중에는 바르지 않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의외인 것은 손예은이 상대방이 대룡의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였다는 것.
“대룡 사람인 거 알았습니까?”
“네, 조사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건을 받아들이셨나요? 우리와 대룡의 관계를 알면서?”
“그거랑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룡과 우리는 공적인 관계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사적인 사건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 손예은을 보면서 노형진은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물론 대룡은 중요한 거래처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공적인 것일 뿐이다. 애초에 송정한과 노형진이 다른 쪽으로 계속 손을 뻗은 이유 역시 대룡에 많이 기대고 있는 사건 수임 기록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나저나 이거 빨리 끝내야겠군요.”
“어째서요?”
“혼인 빙자 간음죄 헌법 소원 중입니다. 아마 없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 실제로 없어진다. 헌법 재판소에서는 혼인 빙자 간음죄가 성적 자기 결정권 침해라면서 이걸 없애 버린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차라리 시간을 끄는 게 훨씬 나은 거 아닌가요? 어차피 없어질 법이라면요.”
법이 없어지면 당연히 재판도 없다. 그러면 편해진다. 하지만 노형진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고했다.
“아니요. 그건 우리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네, 미래에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그 법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운전할 때도 예측 출발은 하지 말라고 하지요. 우리가 예측해서 법을 운영하게 되면 실질적으로 변호사가 아니라 검사나 판사 같은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예측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법에 따라서 판단하면 됩니다. 피해자가 현재 법을 기준으로 처벌을 요구한다고 하면 그 법이 미래에 어떻게 되든 우리는 지금 규정에 맞게 고소를 넣으면 되는 겁니다.”
“그런가요.”
“네, 변호사는 어찌 보면 대리인입니다. 대리인은 자기 의견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일종의 부품이니까요.”
“부품…….”
아마도 다른 변호사들이 들었다면 변호사를 모욕했다면서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형진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미래에 어떻게 되든 설사 우리가 고발한 상태에서 법이 바뀌어서 사라질 게 뻔하다 해도 그 의뢰가 들어온 이상 우리는 그에 맞게 일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손예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리 예측하면서 사건을 받으면 나중에는 희생자를 가려 받게 될 수도 있다. 그건 결코 변호사로서 좋은 행동은 아니다.
“그럼 가능하면 빨리 이 사건을 처리해야겠군요.”
“그렇지요. 그나저나 상대방은 사전에 기혼인 걸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고요?”
“네.”
“뭐, 뻔한 논리이기는 한데.”
문제는 이런 사건의 경우, 증거가 마땅하게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걸 판단하는 판사의 감이 중요한데 그 판사는 아무래도 권력과 돈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일단은 이 사건은 제가 도와 드리죠.”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무슨. 안 그래도 먹을 게 떨어져서요.”
“네?”
“아, 그런 게 있어요. 하하하.”
노형진은 그냥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서 막아 달라?”
“네.”
노형진은 일단 재판부터 공정하게 하기로 했다. 이미 압력이나 뇌물이 들어갔겠지만 더 이상 압력이나 뇌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노형진은 그걸 할 만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이거 참…… 미안하군.”
“미안하신 얼굴이 아닌데요?”
“일단은 양쪽 다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유민택은 그냥 노형진의 말만 듣고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인터폰을 눌러서 비서를 호출했다.
“전문광 사장더러 들어오라고 해.”
“네, 회장님.”
그 말에 노형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있나 봐요?”
“마침 오늘 사장단 회의가 있어서 말이지.”
“그래요?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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