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the law RAW novel - Chapter (4229)
정신적인 고문 (1)
“이런다고 무너질까?”
오광훈은 좀 떨어진 곳에서 시한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가 차가운 표정으로 몇 마디 하더니 떠나는 게 보였다.
“무너질걸.”
“어째서? 사회적으로 고립된다고 해서 반성할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내가 하는 건 사회적 고립 같은 게 아니야.”
“뭐?”
그 말에 오광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사회적인 고립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지만 다음 말에 금방 이해가 됐다.
“이건 고립이라기보다는 고문이지. 정신적 고문.”
“정신적 고문? 하지만 저놈은 국정원 요원이잖아. 그것도 블랙 요원. 그러면 고문에 대항하는 훈련을 받는 거 아니야?”
“물론 그렇지. 하지만 아직 정신적인 고문에 대항하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어. 특히 한국은 더더욱 그렇지. 한국은 정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무척 만만하게 보거든.”
아직도 구 일본군처럼 정신력만 있다면 세계 제일이라면서 정신력으로 버티란 소리만 하지, 그걸 버텨 내기 위한 훈련이나 방법은 알려 주지 않는 게 한국의 문화다.
그런 문화가 국정원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당장 정신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면 국정원 요원들이 타락해서 이 지랄이 나진 않았겠지.”
“그런데 이게 고문이라고?”
“그래. 존재의 부정이거든.”
국민이 원하든 원치 않든 시한원은 자신이 사람들을 지키고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그의 정신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을 거다.
‘내가 가족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전쟁터로 향하는 병사들의 마음이니까.
실제로 이러한 목적성은 병사들의 사기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역사 속에서 벌어진 수많은 침략 전쟁 중에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서 진 전쟁이 엄청나게 많다.
그 때문에 설사 침략 전쟁이라고 해도 위정자들은 자신들을 지키는 전쟁이라고 세뇌하는 것이다.
침략 전쟁이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 사기가 바닥을 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부정당하면 어떻게 되겠어?”
“아하!”
지켜야 할 대상이 자신을 부정하거나 또는 자신 때문에 몰락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은 고통받는다.
실제로 자기를 고문할 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놈들이 막상 주변 인물이 고통받으면 포기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애석하게도 국정원은 그런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하긴, 이해되는 일이기는 하다.
애초에 해외 라인은 거의 사라지고 국내 감시와 정치적인 견제의 기능만 남아 있는 국정원이다.
‘국정원입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모두가 설설 기는데 정신적인 방어를 훈련하거나 저항하는 법을 개발, 훈련할 이유가 없다.
지금의 국정원은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을 두들겨 팰 줄만 알 뿐, 자기가 맞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권투 선수와 같은 거다.
“맞는 것도 잘 맞을 줄 알아야 버티는 거야.”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니 아마 노형진이 날리는 한 방 한 방이 생각보다 아플 거다.
“오래는 못 버틸걸, 아마?”
노형진은 울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시한원을 안쓰럽다는 듯 보며 말했다.
* * *
시한원은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이건 전쟁이다.
그리고 뭔가를 지키기 위한 전쟁과 뭔가를 빼앗기 위한 전쟁은 그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나 그 빼앗는다는 것은 그 과실을 가족이 아닌 제3자―대개는 정치인―가 먹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세 배 이상의 인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병사가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한원이 조국에 충성한다고 해도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이 사실상 대한민국 국민과 조국이 아닌 국정원의 일부만을 위한 거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기까지 한 그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당연히 무너질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상황에서 노형진은 그의 인생을 아예 박살 내기 위해 다가갔다.
“노형진 변호사입니다.”
자신을 찾아온 노형진을, 시한원은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노형진이 있다는 것은 예상했으니까.
목욕탕에서 자신을 잡은 것도, 그리고 고발한 것도 다 노형진이다.
물론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만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법적으로 이번 사건을 담당하는 책임 변호사로서 협상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까.
“뭡니까?”
“뭐긴요. 합의하러 왔지.”
무해한 듯 미소를 짓고 있는 노형진이었지만 시한원은 피하고 싶었다.
“가세요.”
“아, 그래요? 그러면 합의는 거절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노형진은 만남을 강제할 생각은 없었다. 이쪽이 유리한 상황인데 굳이 만나 달라고 할 이유가 없다.
“이 사실이 언론에 나가면 참 좋아할 겁니다.”
그 말에 시한원은 움찔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 사고를 치고서 합의도 거부하면 처벌은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노형진은 범죄자의 인권 따위를 신경 쓰는 사람도 아니다.
‘젠장.’
국정원에서 제대로 일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하지만 국정원은 시한원을 사실상 버린 상태.
“다시 묻겠습니다. 합의하시겠습니까, 안 하시겠습니까? 기회는 이번뿐입니다. 거절하시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노형진, 아니 마이스터는 온 힘을 다해서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려 줄 거다.
“부모님이 전주에서 설렁탕집 하시죠? 앞으로도 계속 그걸로 먹고사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들이 동성애 성향의 성범죄자라는 사실을 그분들도 아십니까?”
그 한마디에 시한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잖아도 부모님의 귀에 이 이야기가 들어갈까 봐 전전긍긍하던 차다.
도대체 부모님에게 파혼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미 상견례까지 마친 상황인데.
그런데 심지어 그 이유가, 자신이 게이라는 비밀이 성범죄가 걸리면서 들통났기 때문이라니.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저한테 그런 짓을 하실 때는 각오를 하셨어야지요.”
웃고 있지만 결코 웃지 않는 노형진을 보면서 시한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집 문을 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나 해 봅시다. 들어오세요.”
결국 자신의 인생을 구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기에 그는 노형진을 집 안으로 들였다.
집 안에 들어온 노형진은 정신없는 방 안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국정원 요원이라는 사람이 이렇게나 정신력이 약해서야 뭘 하겠습니까?”
그러자 시한원이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했다.
“저는 국정원 요원이 아닙니다. 그냥 회사원일 뿐이에요.”
“그래요?”
노형진은 싱글벙글 웃었다.
‘뭐, 그렇겠지. 그럴 거야.’
인정할 수가 없을 거다.
그렇기에 노형진이 그를 함정에 빠트릴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래요? 확신하십니까?”
“뭔 확신요?”
“당신이 국정원 요원이 아니라고 확신하시냐 이 말입니다.”
그 말에 시한원은 뭔 개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노형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노형진은 대답하는 대신에 성큼성큼 걸어가 식탁에 딸린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손님으로 온 건데 뭐라도 한 잔 내주시죠. 물이라도 주세요.”
“끄응.”
짜증 난다는 듯 노려보던 시한원은 유리컵에 수돗물을 담아서 건넸다.
대놓고 이야기하기 싫다는 신호였지만, 노형진은 신경도 쓰지 않고 벌컥벌컥 마셨다.
“요즘 날씨가 엄청 춥더라고요. 여름에 미친 듯이 더웠던 것도 온난화 때문이라던데, 요즘 추운 것도 그 때문이라네요.”
그리고 노형진은 시시콜콜한 날씨 문제부터 코델09바이러스 문제까지 온갖 쓰잘머리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려 30분이나 떠들고 있었기에 시한원은 결국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합의요? 미안한데 내가 돈이 없어요.”
실제로 돈이 없다.
정확하게는, 피해자 쉰 명에게 합의해 줄 돈이 없다.
한 사람당 500만 원씩만 해도 무려 2억 5천만 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의 전 재산은 이 전셋집까지 합해서 고작 1억뿐이다. 그나마도 대출을 빼고 나면 5천만 원 정도만 남는다.
“아, 그건 나중에 하죠. 좋게 합의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국정원에서 줄 수도 있고요. 뭐, 사실 당신한테서 받아 내는 것보다는 국정원에서 받아 내는 게 두둑하기는 하겠죠.”
“뭐요?”
말장난에 어이가 없어진 시한원은 노형진을 노려보았다.
합의하기 위해 왔다면서 자꾸 국정원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노형진은 대답하는 대신에 힐끔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국정원 요원치고는 참 조심성이 없네요.”
“저는 국정원 요원이 아니라니까요.”
“뭐,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만일?”
“이런 거죠. 만일 당신이 진짜로 국정원 요원이라면 말이죠…….”
노형진은 시선을 돌려서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을 바라보았다.
“007가방이라고 하죠. 보통 서류 가방이라고 부르지만 말이죠.”
노형진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던 시한원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저게 말입니다, 현금으로 돈을 넣으면 1만 원권을 기준으로는 딱 1억이 들어가요. 그래서 옛날에는 현금으로 뇌물을 줄 때 많이 썼지요.”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노형진.
그 순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시한원의 눈에는 공포가 서렸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상황은 늦어 버렸다.
“그리고 요즘은 5만 원권이 들어가죠. 그럼 5억이라는 소리죠.”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요즘은 007가방을 뇌물용으로 쓰지 않는다. 채우다 말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 채워서 5억을 주기에는 너무 부담스럽다.
그거 말고도 현금을 주고받는 방법은 많기도 하고.
요즘은 소위 ‘드롭’이라고 하는, 정해진 장소에 돈을 가져다 두면 약속한 사람이 가지고 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제가 어제 말입니다, 마이스터 한국 계좌에서 5억을 현금으로 인출했답니다. 딱 5만 원권으로요. 국정원에서 그걸 모를 리가 없겠죠? 아, 물론 당신이 국정원 요원이 아니라면 문제 될 게 없지만요.”
국정원은 모를 수가 없다.
5억을 현금으로 인출하는 건 상부에 보고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국정원이 노형진과 마이스터를 조사하는 건 비밀도 아니다. 당연히 그 돈이 출금되었다는 걸 알 거다.
“중요한 건 가방이 아니죠.”
노형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중요한 건 가방이 아니다.
이 말은 핵심을 품고 있다.
가방을 가지고 들어갔다고 해서 그게 꼭 뇌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기에, 국정원은 그게 뇌물일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국정원 요원이라면 이게 얼마나 골 때리는 상황인지 아실 겁니다.”
가방? 가방이야 도로 가지고 가도 된다. 내용물, 즉 돈만 두고 가면 되니까.
“아, 돈 없으시다고 했죠?”
노형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불쌍하신 것 같으니까 제가 대신 합의해 드리죠. 저한테는 2억 5천이라는 돈이 딱히 큰돈이 아니거든요.”
그 정도는 노형진에게 초 단위로 벌 수 있는 돈이니 존재감 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국정원에는 존재감이 제법 세게 박힐 겁니다. 그렇지요?”
“당신, 날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
그런 짓을 하면 국정원은 의심할 거다. 그리고 그에게 캐물을 거다.
물론 시한원은 부정할 테지만, 과연 국정원이 믿을까?
그런 짓을 가장 잘하고 가장 잘 써먹는 곳이 바로 국정원이다. 음모와 속임수, 계략, 국정원 같은 곳이 아니면 누가 쓰겠는가?
문제는 국정원도 그걸 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