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the law RAW novel - Chapter (54)
아쉬운 건 아쉬운 거지만 그걸로 땡이다. 아쉽다고 울고불고 억지를 부리면서 남겠다고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남아 달라고 울고불고 한다 해도 나갈 것이다.
“덕분에 쉽게 제대했어. 고맙네, 친구.”
“이…….”
남상진이 기대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자신을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면서 이를 바득바득 가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걸 하찮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그걸 기대하고 왔다. 그런데 생큐?
“나는 자유다! 으하하하!”
심지어 웃으면서 멀어지는 노형진을 보면서 그는 알 수 없는 분노에 부르르 떨었다.
“개자식.”
분명 이겼다. 아니, 이겼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진 적 없이 살아온 자신이고 이번 역시 지지 않았다. 그런데 온몸을 휘감고 도는 이 진한 패배감은 뭐란 말인가? 처음으로 느끼는 그 굴욕적인 감각에 그는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민간인이다! 잘 있어라, 군바리들아!”
신나게 멀어지는 노형진을 보면서 그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노형진 이 개자식……. 언젠가…… 이 굴욕감을 그대로 돌려주마.”
그의 눈에서 엄청난 살기가 피어올랐다.
동창회.
노형진에게 있어서 동창회란 하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동창회. 중학교 동창회와 고등학교 동창회는 검정고시를 치르느라 나와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마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못했다.
“아! 이게 몇 년 만이냐?”
그렇게 몇 년 만에 동창회에 참석하게 된 노형진은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시절의 친구들. 그 친구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법이다.
“중학교 이후 처음인가?”
중학교 검정 이후 바로 학원으로 들어갔고 그 후에는 바로 사법 연수원에 갔기에 노형진은 참석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의 모습이 왠지 기대되었다.
끼이익!
오래된 고깃집의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벌써 홀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리고 그 홀에 넘치는 고기 냄새.
“좋구나.”
부어라, 마셔라. 이제는 대부분 대학생이 되어 버린 동창생들은 신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
노형진이 손을 들어서 인사하자 그에게 쏠리는 시선.
“누구야?”
“누구지?”
하나같이 모른다는 얼굴이다. 하긴, 그동안 출석하지 못했고 진짜 무섭게 클 시기가 지났으니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야, 나. 노형진.”
“노형진?”
“형진이?”
“그래!”
자신을 알아보는 친구들의 말에 노형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친구란 이렇게 순수해야지.’
법률적인 과정에서 순수함이란 게 끼어들 일이 없기 때문에 노형진은 왠지 설레는 기분이었다.
“잘들 지냈냐!”
막 인사를 건네는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왜 그래?”
마치 신기하다는 얼굴. 또는 약간은 재미있다는 얼굴. 일부는 짜증 난다는 얼굴.
“엄친아다.”
“엄친아가 왔네.”
“그렇게 엄친아가 드디어 왔네.”
“사람이구나.”
“존재하는 사람이었어.”
마치 역사적인 거물을 보는 듯한 시선에 노형진은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엄친아?”
그게 무슨 의도인지 순간 이해가 가지 않는 노형진이었다. 물론 그 뜻 자체를 모르는 건 아니다. 엄마 친구의 아들.
‘근데 내가 왜 엄친이야?’
순간 이해하지 못한 노형진.
“야! 엄친아!”
“내가 왜 엄친아야?”
“네가 엄친아지, 그럼 누가 엄친아냐?”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시끄러워, 엄친아야. 와서 고기나 구워 봐.”
“헐?”
“엄친아가 구워 준 고기는 엄청 맛있을 거야. 그지?”
“그렇겠지. 아마 육즙이 뚝뚝 떨어지지 않을까?”
“헐?”
순간 이해하지 못하는 노형진의 얼굴이었다.
‘도대체 왜?’
그는 자신을 왜 다들 엄친아라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냐?”
“솔직히 그래.”
술이 한 순배 돌고 나자 노형진은 이 동창회에서 자신을 지칭하는 별명이 엄친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작 자신은 한참 오지도 않았는데 엄친아라고 하면 자신을 뜻하는 말이라나?
“너 말이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냐?”
“나야 공부한 것밖에 더 있어?”
“그러니까 문제인 거다, 이 엄친아야.”
“응? 학교를 나와 봤어야 알지.”
“아니, 학교가 문제가 아니라 비교 대상이 있어 봐야 알지. 네가 우리에게 얼마나 고난의 대명사였는지 아냐?”
보통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가질 정도로 친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 대한 정보가 빠르게 퍼지곤 하는데, 그런 어머니들 사이에서 노형진은 천재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비교 대상으로 언급하는 것이 바로 노형진이었다.
동창의 설명에 노형진은 기가 막혔다.
“공포의 단어지.”
“그래, 공포의 단어지, 암.”
‘엄마 친구의 아들은…….’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갈굶.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형진이’는 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기 시작하면서 친구들 사이에서의 그의 별명이 엄친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노형진이 그걸 알겠냐?”
“하긴, 이 괴물을 누구랑 비교하겠냐?”
“그러게.”
“호호호.”
웃어 젖히는 사람들. 노형진은 그 말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렇게 되나?’
사실 이번 생 전, 즉 회귀 전에는 그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엄마 친구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아니, 내 경우에는 엄마 친구의 딸인가?’
엄친딸. 전교 1등에, 회장 출신이고 절대음감과 풍부한 감수성을 가진 아이가 한 명 있었다. 틈만 나면 노형진의 엄마는 엄마 친구의 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 신세구나.’
묘한 감정이 피식 웃음이 나오는 노형진.
‘그러고 보니 여기에 있으려나?’
백 명이 넘게 모인 고깃집이니 여기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물론 상관없는 사람이라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 나중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른다. 가끔 소식이야 들었지만 자신과 관련이 있지는 않았으니까.
‘뭐, 여기에 있겠지.’
피식피식 웃으면서 고기를 먹으며 술을 한잔하는 노형진이었다. 중학교 시절의 추억은 그들의 술안주이자 힘이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이 고백을 하고.”
“야!”
“내가 못 할 말했냐?”
“그 이야기 좀 그만해라. 우리 딸이 태어날 때까지 할 거냐?”
“아니, 손주가 태어날 때까지.”
“아 놔, 진짜.”
한구석에서 아웅다웅하는 부부를 보면서 노형진은 피식 웃었다. 중학교 때 남자가 고백했다가 차인 게 소문이 나서 알나리깔나리 놀렸던 게 어제 같은데 이제는 부부로 같이 참석하다니.
“그나저나 언제야?”
“뭐가?”
“산달.”
“이제 다섯 달 남음.”
“거참, 받아 준 게 용하다.”
“그러니까 프러포즈를 어떻게 했느냐면…….”
“야!”
“익숙해져. 이건 증손자, 증손녀를 볼 때까지 우려먹을 것이야.”
“큭큭큭.”
친구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있었기에 노형진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익.
오래된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정장을 예쁘게 차려입기는 했지만 왠지 힘들어 보이는 듯한 얼굴.
‘누구지?’
바깥에 전세를 놨다고 써 있으니 일반 손님이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런데 동창회의 중반을 넘어 종반에 가까워지는 이 순간에 들어오다니?
“오, 이번에는 많이 안 늦었네?”
“내놔.”
“아, 쓰읍.”
갑자기 킬킬거리는 친구들. 노형진은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장에 블라우스에…… 누구더라?’
단정하게 빗어 내린 긴 생머리에, 검은색 세미 정장을 입고 있으니 캐주얼한 모습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누구야?”
“누구냐니?”
“몰라?”
노형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돌이켜 봐도 그녀에 대한 기억은 없었기 때문이다.
“손채림 아냐? 몰라? 네가 모르면 안 되지. 너의 최대 피해자인데.”
“최대 피해자?”
노형진은 깜짝 놀랐다. 손채림. 얼굴은 기억나진 않지만 한 가지는 기억난다. 회귀 전 엄마 친구의 딸이라 불렸던 장본인.
“이제 온 거야?”
“매년 이래.”
“매년 이런다고?”
“올해는 늦기는 했네. 뭐, 별수 없으려나, 수업 끝나고 오려니?”
“학교?”
노형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노형진의 나이는 스물한 살. 즉, 다른 사람들의 나이도 스물한 살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직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소리다.
‘근데 아무리 봐도 저건 대학생 복장이 아닌데?’
검은색의 세미 정장. 검은색의 스타킹. 그리고 단정하게 내린 검은색 생머리.
‘저 애가 저렇게 예뻤나?’
생각해 보면 회귀 전 손채림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는 그녀와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게…….’
줄리어드 음대에 유학 가서 성악을 전공하고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되어 전 세계에 공연하러 다닌다고 했던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마저도 본 적도 없고 동창들에게 들은 게 다였다.
‘난 그쪽으로는 관심이 없었으니.’
노형진이 좋아하는 건 영화였기에 그녀가 세계적인 소프라노라거나 한국에서 >오페라의 유령>의 주연을 맡게 되었다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하긴…… 예쁘긴 하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뛰어난 외모와 몸매가 그녀의 인기를 높이는 데에 한몫했다는 걸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소프라노는 대부분 덩치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래도 최고로 높은 톤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체격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조수민이 그래서 인기가 많다고 했지?’
성악가 조수민이 유명한 이유가 바로 다른 사람들보다 마른 체형으로 최고음을 뽑아내기 때문이다. 오페라에서는 소프라노가 주로 맡는 주연은 극 중에서 미녀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녀의 가녀린 몸매와 뛰어난 외모가 다른 성악가들보다 그 조건에 적합한 것이다.
‘그래서 ‘제2의 조수민이다.’ 같은 소리를 들었는데?’
확실히 그랬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녀는 성악을 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애초에 성악 쪽으로 갔다면 지금 한국에 있을 리가 없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낯설어서.”
“낯설다? 하긴, 그럴 만하지, 암.”
“맞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엄친딸만 있었던 거잖아. 엄친아는 중학교 이후에 등장했고.”
“그렇지.”
확실히 노형진이 각성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이니, 초등학교 때는 엄친딸만 있는 게 맞다.
“근데 너희 어머니들이 그러셨다곤 해도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손채림이 나의 최대 피해자라는 거야?”
“어? 너 모르냐?”
“나야 모르지.”
“끄응, 어떻게 된 거냐면…….”
“여어, 사내놈들이 뭐 하냐?”
막 이야기를 하려는 찰나에 다가오는 손채림. 그녀는 지친 얼굴로 씩 웃었다.
“고기 내놔.”
“저기 많잖아? 여기는 금녀의 구역이다.”
“의자가 없잖아. 그리고 고기 님 앞에서 금녀 따위는 가식일 뿐.”
의자를 좌악 꺼내서 거침없이 앉은 그녀는 고기를 척척 쌈 싸 먹기 시작했다.
‘헐?’
그녀의 이미지가 잘나가는 소프라노였던 노형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모습에 살짝 놀랐다.
“그런데 누구야?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네 천적.”
“내 천적? 오! 드디어 온 거냐, 엄친아!”
“응? 으응.”
고기를 먹으면서 피식 웃는 그녀의 모습에 노형진은 살짝 설레는 것을 느꼈다.
“근데 생각보다 늦었다?”
“찾다가 포기하고 택시 탔다.”
“그럴 줄 알았다.”
그 말에 노형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대화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지내?”
“나? 언제나처럼 과외 중이지.”
“그래도 용케 가르친다. 네 성격에 개인 과외를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말도 마라. 이번에 담당하는 애가 중학생인데 진짜 공부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돌에 새기는 기분이야. 오죽하면 ‘내가 진로를 잘못 골랐나?’ 하는 고민까지 한다니까.”
“그래서 이제 온 거야?”
“응.”
그 말에 노형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것치고는 많이 늦었는데?’
벌써 시간이 10시 30분. 멀리서 한 게 아니라면 벌써 왔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야 참석하다니.
“회비 내놔.”
“늦게 왔는데 할인 없냐?”
“네가 고기 먹는 속력을 생각하면…… 아이고, 의미 없다.”
“쳇.”
지갑에서 3만 원을 꺼내서 탁 내려놓은 손채림은 갑자기 소주잔을 들더니 노형진에게 내밀었다.
“야!”
“응?”
“소주 한 잔 따라 봐.”
“오오! 드디어?”
“드디어?”
자신이 모르는 게 있는 것 같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물어본다고 해서 이야기해 줄 것 같진 않았다.
“뭐 해, 소주 안 따라 주고?”
“그래, 뭐, 까짓거.”
‘닥치라면 닥쳐야지.’라는 생각으로 노형진은 소주잔을 소주로 가득 채웠다.
“마셔, 마셔. 설마 죽기야 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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