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Three Year Old I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27)
이 3세는 악역입니다 127화.(127/390)
127화.
내 말에 시합장이 크게 술렁였다.
직계, 방계, 황궁인 할 것 없이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하긴, 이런 질문은 쉽게 하기 힘들지.’
이곳은 할아버지의 눈길 하나로 신분이 바뀌는 곳이었다.
만약 에레카가 정말로 ‘할아버지가 숨기려 한 소중한 손주’였다면, 진노를 살 수 있는 일이다.
직계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에레카 부녀가 소문대로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다면 후계 구도가 크게 요동칠 테니까.
할아버지는 미간을 좁힐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안달복달하던 발데릭 숙부가 벌떡 일어나서 물었다.
“아버님, 기왕 말이 나왔으니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해 주십시오!”
바스티나 고모까지 인상을 찌푸리고 길라르 자작을 노려봤다.
“정말로 길라르 자작이 아버님의 핏줄이 맞는 건가요?”
사촌들도 앞다퉈 물었다.
“예, 조부님……. 저희도 묻고 싶었습니다.”
“마, 맞다면 응당 혈족 교육에 투입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긴 했지만, 애들까지 끼어들어 물었다.
할아버지의 기세가 냉랭해졌다.
인상을 쓴 채로 자식과 손주들을 둘러본 할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관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예? 길라르 자작이 아버님의 사생아이고, 선대에게 사생아를 들키지 않으려 숨겨 키웠다는 소문이…….”
발데릭 숙부의 말에 할아버지가 왈칵 인상을 썼다.
“헛소리─!”
벼락같은 노성이 터져 나왔다.
* * *
아스트라 공작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에레카 길라르가 공작성에서 얼마나 활개를 쳤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직접 겪은 3세들뿐만이 아니라, 2세들의 귀에까지 소문이 흘러들 정도였다.
“기가 막혀서.”
“무슨 일이니, 헤르난.”
“누님은 못 들으셨습니까? 길라르 부녀의 오만이 도를 지나칩니다!”
“길라르 부녀?”
“아비는 의결권조차 없는 주제에 황궁인들을 의전하겠노라 나섰고, 그 딸은…… 딸이 정말이지 기가 막혀서……!”
“무슨 일인지 상세히 얘기해 봐라.”
“콘라드 마르시알에게 찾아가 제 곁에서 일할 기회를 주겠다고 선언했답디다.”
“뭐라고?!”
“그리 난리를 치고 다니는 걸 보면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지요.”
“허…….”
어이가 없기는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500제곱킬로미터 이상의 대관할령 소유자만이 대회의의 의결권을 가진다.
대회의에선 의결권이 곧 발언권이었기에, 소규모의 관할령을 지닌 자들은 입도 벙긋 못 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길라르 자작은 번번이 입을 열고 멍청한 말들을 쏟아 냈다.
마치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의장인 드뷔시 자작이 뒤를 봐주는 것도 소문이 사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두가 당황했으나, 가장 놀란 것은 방계들이었다.
“뭐, 뭐라고? 방금 공작님께서 뭐라고 하셨……!”
“에레카 양!”
“무슨, 이게 무슨…….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말씀 좀 해 보세요!”
우리가 누굴 믿고 지금껏 직계 3세 앞에서 오만방자하게 굴었는데.
방계 어른들까지 사색이 된 표정이었다.
‘이게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식들이 직계 3세들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리지 않았다.
모두 에레카 길라르 때문이었다.
저 애가 공작님의 친손주라는 말을 믿었다.
후계 싸움이 본격화되면 공작님이 길라르 자작에게 힘을 실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방계들이 힘을 모아 지지한다면 공작 위도 꿈이 아닐 거라고 여겨서!
방계 아이가 에레카를 붙잡았다.
“말을 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해 보라고요!”
“…….”
“에레카 길라르!”
에레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비틀었다.
그때였다.
“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드뷔시 자작의 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황당한 듯 이마를 쥔 드뷔시 자작에게 향했다.
“길라르 자작이 공작님의 혈육일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가신 하나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면 어째서 드뷔시 공께서 길라르 자작의 뒤를 봐주신 겁니까.”
“큰일 날 소리들을 하는군. 뒤를 봐주긴 무슨.”
“하지만 어디서 왔는지 모를 자에게 작위까지 주셨고…….”
“내가 그에게 관대했던 건, 공작님께서 그의 작고한 부친에게 목숨 빚이 있었기 때문이네.”
“예?”
“자작의 부친이 공작님을 대신해 활을 맞고 납독으로 사망했지. 죽어 가면서도 자식을 그리 걱정하여서 각별히 살펴 준 것일세.”
“납독으로 죽은 측근…… 설마 기사 베노실을 말씀하십니까?!”
“그래. 죽은 부친에게 전공이 있으니 그 자식에게 행상하는 건 당연한 이치지.”
가신들의 얼굴이 벌게졌다.
“베노실이라니…… 베노실은 평민 출신 호위였지 않습니까!”
그럼 평민의 핏줄에게 그간 고개를 납작 숙여 왔다고?
뿌리 깊은 혈통주의자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방계 아이들 또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에레카를 쳐다봤다.
“평민?”
“공작님의 핏줄이 아닌 것도 기가 막힌데, 평민이라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넌 알았지?! 그렇지!”
방계 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아이들의 부모들이 2세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직계님들 앞에서 이게 무슨 짓들이냐…….”
“하, 하지만, 다 에레카 길라르의 탓이란 말이에요! 이 애가 자기가 공작님의 손주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희는 이 애 말을 믿고─!”
저 무서운 직계들에게 까불었다.
심지어는 내기까지 걸었단 말이다!
“맞아요! 모두 에레카 길라르가 시켰다고요!”
“저희는 직계님들께 공손하게 굴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 애가……!”
방계 아이들이 성토하자, 직계 3세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신을 못 차리고 까불더라니. 다 네 짓이었구나, 에레카 길라르.”
로레이나가 입매를 비틀며 말하자, 길라르 자작이 펄쩍 뛰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그렇지, 에레카?”
“…….”
“에레카?”
길라르 자작이 불안한 얼굴로 딸을 쳐다봤다.
딸은 똑똑한 아이라 그런 실수를 했을 리 없다.
하지만 평소에 하던 말이 있기에 불안하긴 했다.
“네가 아이손 남작의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내 앞에서 거만을 떨다가 공작님이 나타나시니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데……!”
“정말요? 와, 공작님이 아빠를 그렇게나 좋아하세요?”
“그럼. 최측근인 드뷔시 자작도 내 뒤를 봐준단 말이야!”
“그럼 혹시 소문이 사실인 게 아닐까요?”
“소문?”
“아무것도 없는 아버지에게 작위를 내리고, 방계에게 교육을 맡긴 게 사실은 아빠가 공작님의 사생아이기 때문이라잖아요.”
“그, 그랬다면 공작님께서 언질을 주셨겠지. 하지만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지키고 싶은 거죠!”
“그런…… 가?”
“아빠가 공작님의 사생아고, 저는 그분의 손녀인 거예요……. 그래서 언젠가 아빠는 공작이 되고, 저는 공작 영애가 될지도 몰라요.”
“으하하하! 그것참 달콤하군.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몰라!”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떠든 적이 있다.
물론 내심 소문이 사실이길 바랐다.
소문을 이용해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기도 했다.
‘하, 하지만 그건 정말 농담이었고…….’
길라르 자작이 불안한 표정으로 딸을 쳐다봤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간 다 우리가 뒤집어쓰게 생겼다고!’
자작은 날카롭게 소리쳤다.
“에레카!!”
“……다고요.”
“뭐?”
“제 입으로 공작님의 손녀라고 한 적은 없다고요!”
에레카가 희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뭐냐고.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그냥 조금 자랑하고 싶었을 뿐이야.’
난 특별한 아이니까.
남들은 하나도 어려운 가호를 몇 개나 가진 아주 특별한 아이.
똑똑하고, 강하고, 아름다운데도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다.
12번째 탑에서 매번 1등을 해도 애들은 직계들만 동경했다.
“알아? 에릴로트 님이 12번째 탑에 있을 때 저 방을 썼대.”
“저는 그분과 함께 지냈어요.”
“저, 정말?! 어때? 소문처럼 강해?”
“그때는 아가씨께서 너무 어리셔서 함께 수업을 받진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남다르긴 하셨죠.”
지금은 탑에 있지도 않은 계집애를 떠받들고.
“요슈아 님의 가호가 2단계로 넘어갔대! 3세 중 최초 아냐?!”
“셀레네 님도 원화 후보에 드셨대요.”
“아아, 직계님들은 정말 멋져…….”
겨루면 다 저보다 못할 직계들만 부르짖었다.
그런데 자신이 공작님의 손주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나선 달랐다.
다들 제게 잘 보이기 위해서 기를 쓰고, 아양을 떨고…….
‘특별한 내가 동경을 받는 건 당연하잖아.’
그래서 소문을 좀 이용했다.
그럴 수도 있잖아.
저 직계들은 항상 제 할아버지를 이용해서 오만을 떨며 살아가잖아!
‘그런데 나는 왜 안 돼?’
3세 중에 있는 세작을 찾으라는 명이 떨어지고 나선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혈족 교육을 받아서 서열권에 든다면, 아니 1위를 한다면……!’
공작님도 자신이 덜떨어진 직계들과는 다르다는 걸 아실 것이다.
특별한 방계는 입양이 되기도 한다.
8대째에선 입양된 방계가 가주가 되기도 했는걸.
그래서 확실히 기회를 잡으려고 소문을 이용한 것이다. 기회를 잡기 전에 직계들이 방해하면 안 되니까. 잠깐 조용히 만들려고.
그런데…….
‘공작님은 소문에 대응하지 않으셨어.’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다소 지나치게 군 건 인정한다.
하지만…….
‘혹시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할 수는 있잖아. ……난 특별하니까.’
잠깐 꿈에 부푼 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
에릴로트 아스트라 같은 더러운 피도 공작님의 손주라고 떵떵거리잖아.
자신의 조부는 평민 출신이라지만 임명식을 치룬 기사였다. 조모는 귀족이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귀족이었다.
심지어 어머니는 확실한 아스트라의 방계였다.
‘그러니까 내가 에릴로트보다 더 나은 사람인 거야.’
아마도 에릴로트는 그런 자신을 질투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남들 앞에서 망신을 주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난 잠깐 꿈을 가졌을 뿐인데, 나한테 어떻게 이렇게까지 못되게 굴어?’
에레카는 무감한 표정의 에릴로트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봤다.
“다들 말해봐요. 제가 제 입으로 공작님의 손주라고 한 적이 있어요?”
에레카가 입을 가리고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방계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혀……. 됐어요! 저희는 돌아가 보겠어요! 더는 상대하고 싶지도 않네요!”
그때였다.
“그건 안 되지.”
등 뒤에서 오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혈통 얘기는 여기서 정리가 된 모양이고. ……정산만 남았나?”
밀란이 빙그레 웃자, 그의 뒤로 직계 3세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로레이나가 팔짱을 낀 채로 방계들을 쳐다봤다.
“내기는 잊지 않았겠지?”
리앙틴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에릴로트가 이기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했잖아?”
조프리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가호 <수구>로 하관을 변형시켰다.
하관이 표범의 형태로 변한 그가 크아아악! 울부짖자,
“헉!”
“……!!”
─방계 아이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 * *
사촌들이 방계들을 끌고 갔다.
‘멀쩡하게 돌아오진 못하겠네.’
조프리가 이를 가는 걸로 봐선 아마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훈련장을 나섰다.
인근에 있던 한지혁이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방계 녀석들, 그 난리를 치더니 결국 이렇게 됐네.”
“뭐, 공작을 ‘만들’ 기회니까 눈이 뒤집힐 수밖에.”
“뭐?”
“공작을 만들면 얼마나 엄청난 게 기다리고 있어? 드뷔시 자작이란 좋은 예가 있잖아.”
직계들조차 드뷔시 자작에겐 한 수 굽힌다.
직계들 뿐인가?
‘황도 대귀족들까지 드뷔시 자작을 다 알고 있는걸.’
아무것도 없던 할아버지를 지지해서 공작위까지 밀어준 대가로 받은 권력이다.
“할아버지 말버릇이 뭔지 알아?”
“뭔데?”
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그러니 젊었을 때 자식을 봐두라고 했던 것이다. 일가를 이뤄야 황도에 자리를 만들어주지!”
“누가 손주 아니라고. 똑 닮았네. 소름이 다 끼친다.”
한지혁이 어깨를 오르르 떨었다.
‘아무튼 할아버지는 드뷔시 자작을 대귀족까지 밀어주려고 할 정도였다고.’
방계들에겐 얼마나 꿈같은 말이겠는가?
눈앞에 1등 당첨이 확실한 로또가 있다면 달려가서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하며 걸으니, 할아버지의 집무실까진 금방이었다.
가신들이 샛노란 얼굴로 문 앞에 모여 있었다.
“아,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저, 그게…….”
그러던 찰나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문을 알고 계셨으면 언질을 좀 주시지……. 저희는 사실인 줄로 알았습니다.”
발데릭 숙부가 투덜거리는 소리였다.
그러자마자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트라를 엮은 소문이 수천이고, 나와 관련한 소문은 수백에 이른다! 그 소문을 전부 단속하겠느냐!”
“아, 아버님…….”
“믿는 놈이 멍청한 것이지!”
“…….”
“쓸만한 놈이 하나가 없구나. 그저 후계 자리에나 눈이 벌게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살벌하도록 낮아졌다.
‘으이구.’
할아버지가 소문을 모를 리가 없잖아.
가신들이 우물쭈물하며 내게 말했다.
“황궁 수행관들과의 회의가 목전인데, 공작님께서 몹시 노여워하시니 걱정입니다…….”
혹시 내가 좀 달래줄 순 없느냐는 표정이었다.
‘으음.’
고민하던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회의가 잘 돼서 빈센트가 빨리 돌아가는 게 내게도 좋으니까.’
나는 집사에게 눈짓했다.
얼굴이 확 밝아진 집사가 얼른 노크했다.
“에릴로트 아가씨와 가신들이십니다.”
그러자 노성이 멎고, 문이 열렸다.
나는 사뿐사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냐.”
“너무 오래 못 뵈었잖아요.”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래서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
“방해가 되었을까요?”
할아버지가 커흠! 헛기침했다.
“뭐, 큼, 여기 앉든지.”
“와!”
나는 홀랑 할아버지의 옆자리에 앉아서 헤헤 웃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
“할아버지를 화나게 한 사람이 있으면 제가 혼내줄 거예요!”
“손바닥만 한 게 무슨…….”
기가 막힌다는 목소리였는데, 입매는 흐물흐물해졌다.
숙부들과 바스티나 고모는 입을 떡 벌린 채로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른 가신들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까 이런 나와 할아버지를 보는 건 드뷔시 자작 외엔 처음인 것 같다.
‘좀 창피해서 남들 앞에선 자제했으니까.’
그래서 몰랐겠지만, 이제 난 할아버지의 기분을 풀어주는 데엔 거의 도사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팔을 잡고, 눈썹을 늘어뜨렸다.
“네? 왜 화가 나셨어요?”
“화는 무슨.”
“정말요? 화나지 않으셨어요?”
“네가 이리 난리인데, 어떻게 화를 내겠느냐.”
완벽하게 진정된 할아버지를 본 사람들은 이제 눈이 튀어 나갈 지경이었다.
“가장 사랑받는 손주라더니…….”
“소문에서 찾을 일이 아니었지. 눈앞에 있으니…….”
목소리를 바짝 낮추고 저렇게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였다.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리고, 집사가 말했다.
“길라르 자작 부녀를 데려왔습니다.”
웬일로 모여있나 했더니, 저 부녀 때문인 모양이었다.
에레카와 길라르 자작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에레카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나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할아버지의 팔을 잡은 내 손을.
그 애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륵 불타올랐다.
‘또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