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Three Year Old I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28)
이 3세는 악역입니다 128화.(128/390)
128화.
할아버지의 시선이 향하자 에레카는 흠칫, 고개를 수그렸다.
길라르 부녀를 쳐다보는 숙부들과 고모의 표정이 험악했다.
‘하기야 저 성격에 오래 참았지.’
할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참았겠지만, 소문도 가짜라는 게 밝혀졌으니 이제 두려울 필요가 없겠다.
할아버지는 사색이 된 길라르 자작을 지그시 쳐다봤다.
“네 아비에게는 빚이 있지.”
“예?”
딸이 공작성에서 활개를 치고 다닌 일로 곤욕을 치를 줄 알았나 보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말이 생각과는 다르니 얼떨떨해 보였다.
흙빛이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아아, 예. 듣기로 수많은 전공을 세우셨다고……! 하하, 뿐이겠습니까. 공작님의 최측근에서 전장을 누비며 얼마나 많은 추억이 있겠습니까!”
할아버지와 제 부친의 인연이 빠져나갈 구멍 같은 모양이었다.
길라르 자작이 나불나불 말을 이었다.
“두 분이 젊었을 적에 얼마나 끈끈하셨겠습니까. 소년병 때부터 전담 호위가 될 때까지 수많은 추억을 쌓고……! 예, 그러셨겠지요!”
“…….”
“충정과 우정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겠습니다. 그러니 공작님을 대신해서 활을 맞고 납독에 돌아가신─”
“그런 자들은 한둘이 아니지.”
할아버지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길라르 부녀가 움찔했다.
길라르 자작이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예?”
“드뷔시 자작의 죽은 형제 또한 나를 대신해 칼을 맞았다.”
드뷔시 자작은 표정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할아버지와 드뷔시 자작의 표정을 살핀 길라르 자작이 어색하게 웃었다.
“예, 예. 제 아버지나 드뷔시 자작님의 형제나 훌륭한 일을 하셨지요.”
“너와 드뷔시 자작의 차이가 무엇이겠느냐.”
“……예?”
“두 놈 다 날 위해 적군의 날붙이에 뛰어든 혈육을 지녔으나, 차이가 있지. 무엇이냐.”
“그야…… 드뷔시 자작께선 대회의의 의장이시고…….”
길라르 자작의 말꼬리가 길어졌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할아버지는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알아 와라.”
“예?”
“아버님─!”
발데릭 숙부가 펄쩍 뛰었다.
바스티나 고모도 왈칵 인상을 쓰고 있었다.
길라르 부녀가 호된 벌을 받을 줄 알았는데, 고작 알아 오라는 말로 넘어가니 눈에 불이 붙었다.
“길라르 자작 부녀는 감히 아버지의 이름에 기대서 이 아스트라 장원을 주무르려 했습니다!”
“그래요. 벌하지 않으신다면 다음에도 간 큰 자가 나올 겁니다.”
“기가 막혀서. 이번엔 아버지의 사생아라는 소문이었으니, 다음엔 선대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내는 놈이 나올지도─”
쾅─!!
할아버지가 테이블을 내리치자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슬그머니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하여간 저 바보 같은 숙부.’
할아버지의 앞에서 ‘선대’라는 단어는 절대로 입에 담아선 안 된다.
숙부들과 고모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 아버님.”
“저…….”
“나가봐라.”
축객령에 숙부들과 고모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바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길라르 자작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고 말했다.
“저, 저도 말입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예, 옛! 어서 가자, 에레카!”
길라르 자작이 제 딸을 데리고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나도 조용히 일어났다.
“그럼 돌아가 볼게요, 할아버지.”
“그래.”
“너무 많이 일하지 마시고 쉴 땐 쉬셔요?”
“걱정은.”
할아버지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픽 웃었다.
난 할아버지와 드뷔시 자작에게 인사한 채로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걷자, 한지혁이 따라붙었다.
“길라르 자작은 어떻게 됐어? 소란스럽던데.”
“……뭔가 이상해.”
“뭐?”
길라르 자작이 너무 쉽게 넘어갔다.
‘눈앞에서 분란을 만드는 것을 쉽게 넘어가는 자비로운 분이 아니신데.’
아무리 그의 부친에게 목숨 빚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다.
3세 중 세작을 찾으라고 했던 것도 이제 생각해보니 묘했다.
굳이 황궁인들이 왔을 때, 그런 명을 내릴 필요가 없을 텐데.
“한지혁.”
“응?”
“길라르 자작을 다시 털어봐.”
“이미 할 수 있는 조사는 다 했잖아? 콘라드의 도움까지 받았어.”
“…….”
“콘라드는 공작이 아는 모든 정보에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콘라드가 모르면 더 털 게 없는 것 아냐?”
“네가 직접 알아봐.”
“어?”
“직접 길라르 자작의 저택에 가보고, 그가 일하는 마탑까지 가서 소문이란 소문은 모두 긁어와.”
“그야 할 수는 있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있어?”
“이상한 감이 와서 그래.”
여기서 설렁설렁 넘어가면 절대로 안 될 것 같은 감이.
* * *
에레카는 얼떨떨한 얼굴로 부친을 쳐다봤다.
“공작님이 저희를 용서해주신 거예요……?”
“그렇겠지.”
자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넘어가서 얼마나 다행이냐. 산속에 숨어 사는 것까지 생각했는데.”
“…….”
“넌 저 늙은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늙은이가 제대로 칼을 빼 들면 재앙이라고, 재앙.”
“……그렇게 무서운 분이 왜 저희를 용서해주시는 거예요?”
“그야 뭐.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에게 목숨 빚이 있기도 하고…….”
“아뇨.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요.”
“어?”
“우리가 아까운 인재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딸의 말에 길라르 자작이 멈칫했다.
그는 힐끗 에레카를 쳐다보고서 눈을 굴렸다.
“그런가?”
“저는 강력한 가호를 셋씩이나 가진 특별한 아이고, 아버지는 꽤 큰 당파를 가지고 있잖아요?”
“…….”
“그러니까 이렇게 넘어가 주시는 걸지도요!”
“하긴. 책임 정도는 물 줄 알았는데, 길길이 날뛰는 제 자식들 앞에서도…… 우리를 좀 감싸는 것 같았지?”
“네!”
에레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뭐야, 손주가 아니라도 날 아껴주시는구나.’
길라르 자작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하긴 <마물 조련>이 어디 평범한 가호냐. 에릴로트 아스트라가 개화하기 전엔 전무했던 특별한 가호인데.”
에릴로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에레카는 입술을 삐죽였다.
“가호 자체는 제가 더 대단할걸요?”
“뭐…….”
“생각해보세요. 그 애는 승부에서도 가호를 안 썼어요. 저와 비교가 될까 봐서 그런 거겠죠.”
“그럴 것이다. 칫, 하여간 직계라는 놈들은 죄 허영심만 있어서 남보다 못한 꼴은 절대 안 보이려고 한다니까.”
“아빠, 저는 계속 본성에 있을래요. 세작을 찾겠어요.”
“뭐야?! 직계들이고, 방계들이고 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것이다!”
에레카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이건 신이 내린 시련일 뿐이야.’
특별한 주인공에겐 언제나 시련이 있다.
시련을 이겨내야 진정한 힘을 갖는 것이고.
“이번 실수를 어떻게든 만회해야죠. 계속 남들 눈치를 보고 살 순 없잖아요?”
“……그렇기야 하다만.”
길라르 자작은 끙, 신음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소란을 벌여선 안 돼.”
“세작을 꼭 찾아내서 공작님의 마음에 들 거예요.”
에레카는 생긋 웃었다.
‘두고 봐.’
집무실에 들어갔을 적에 보았던 에릴로트의 얄미운 꼴을 떠올렸다.
제 앞에서 보란 듯이 공작님께 들러붙는 꼴하곤.
‘그래봤자 내가 질투라도 할까 봐?’
방금 보니, 공작님은 자식들에게도 크게 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드뷔시 자작을 혈육보다 아끼잖아.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어.’
에레카의 눈이 열의에 불탔다.
* * *
이튿날.
나는 한지혁이 가져다준 자료를 쳐다봤다.
테이블에 책과 자료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책과 자료를 한 무더기 더 내려놓은 한지혁이 손을 탁탁 털었다.
“마탑의 출입 명부, 길라르의 토지 개발 일지 등등이다. 일단 마탑에서 자료는 전부 받아왔고, 나는 네가 명한 대로 길라르 저택에 가볼 거야.”
“응.”
“정말로 혼자서 다 볼 수 있겠어?”
“으으음, 어쩔 수 없지.”
“힘에 부칠 것 같으면 도움 좀 받아. 미켈란을 불러오든가.”
“미켈란은 황도 일만으로도 바빠. 혼자서 할 수 있어. 가봐.”
한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쓰러지면 네 무서운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날 얼마나 쥐잡듯이 잡을지 알지?”
“그래, 그래.”
“간다.”
“다녀와.”
한지혁이 출발하고, 나는 일단 머리를 묶었다.
그리고 마탑의 출입 명부부터 들었다.
알렉시스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어제도 얼마 못 잤잖아.”
“응?”
“그제도 승부 준비를 한다고 마도구 보관실에 틀어박혀 있었고.”
“음…….”
“그 전날도, 그 전날의 전날도 계속 못 잤어.”
“잠은 원래 몰아서 자야 더 꿀맛인 거거든?”
“그보다 먼저 죽겠지.”
나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사람은 닷새 정도 못 자도 죽지 않는다.
‘틈틈이 눈 붙이면 되지 뭐.’
명부를 펼치고 길라르 자작의 이름을 찾았다.
‘이주르 길라르…… 이주르 길라르가…….’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알렉시스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맞은편 소파에 앉은 알렉시스가 내게서 책을 빼앗았다.
“정리된 것부터 봐. 이 기록은 내가 찾아서 정리해줄 테니까.”
“……엄청 많은데?”
“그 엄청 많은 걸 넌 혼자 하겠다며.”
나는 책을 읽기 시작하는 알렉시스를 빤히 쳐다보다가 조금 웃었다.
‘하여간에 속은 다정하다니까.’
그리고 다시 자료를 잡았다.
한나절을 꼬박 자료에 파묻혀 있었는데도, 이걸 다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슬슬 머리가 아파.’
하녀에게 부탁해서 민트잎을 짓이겨 관자놀이에 붙여야 할 정도였다.
목을 주무르며 다음 책을 잡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릴로트, 나야!”
디오네라의 목소리였다.
알렉시스가 문을 열어줬다.
디오네라 뿐만이 아니라 리앙틴도 함께였다.
우리는 문을 열어놓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중·상급 교육실에서 일이 있었다면서?”
하급 교육실에 있는 디오네라는 에레카의 일을 잘 모르고 있었다.
‘리앙틴에게 들었나 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앙틴이 큼, 헛기침을 했다.
“네 하인이 마탑에서 자료를 엄청나게 많이 가져갔다더라?”
“어떻게 알았어?”
“바실레 고모(디오네라의 모친)가 마탑 관리장 중 하나잖아. 뭐, 안심해. 이 일은 고모와 우리밖에 몰라.”
“고마워. 그런데 왜 왔어?”
“……그걸 너 혼자 다 어떻게 보려고? 나와.”
리앙틴은 날 지나쳐서 내 방에 들어갔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니, 디오네라가 헤헤 웃으며 속삭였다.
“내가 어머니께 얘기를 듣고 말해줬더니, 리앙틴이 함께 오자고 했어. 도와주려고.”
“…….”
“내 입단속도 했어! 어디 가서 말하지 말래. 에릴로트가 조용히 움직일 땐 이유가 있는 거라고.”
나는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리앙틴을 보고 픽 웃었다.디오네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 글은 잘 읽어! 도울 수 있어.”
“고마─”
“나도 좀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셀레네의 목소리였다.
방 안에 있던 리앙틴과 나, 디오네라는 깜짝 놀라서 셀레네를 쳐다봤다.
“셀레네 언니.”
어떻게 왔냐는 표정으로 보니, 셀레네가 빙그레 웃었다.
“조부님의 동향이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너라면 조사하고 있을 것 같아서 왔는데, 타이밍을 잘 맞춘 모양이야.”
“그렇긴 한데…….”
“이번 일은 직계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잖아. 함께할 수 있게 해주면 기쁠 거야.”
“……바스티나 고모는 모르셔야 하는데요.”
“난 원래 어머니와 대화를 잘 하지 않아.”
셀레네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서 난 킥킥 웃었다.
‘셀레네가 도와준다면 천군만마지.’
리앙틴은 필기 성적으로만 따지면 7서열권은 우습게 들 아이.
셀레네는 언제나 직계 3세 중 1, 2위를 다퉈온 재원이다.
디오네라는…….
착해.
“셀레네 언니, 들어오세요. 디오네라 언니도.”
“그래.”
“응!”
나와 알렉시스, 리앙틴, 디오네라, 셀레네는 한 데 둘러앉아서 자료를 읽었다.
리앙틴이 책으로 입가를 가린 채 알렉시스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있잖아.”
“응?”
“너무 잘생겨서 자꾸 시선이 뺏기는데 뒤로 좀 보내줄래?”
난 웃어버렸다.
늘 이런 일은 혼자서 해왔는데, 누군가와 협력하는 것도 꽤…… 나쁘지 않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응?”
디오네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리앙틴은 자료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배고프면 좀 참아. 점심 먹은 지 몇 시간 안 됐─”
“아, 아니,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이거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네가 제일 이상해.”
리앙틴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함께 자료를 읽은 지 6시간째.
살짝 둔한 디오네라는 별것 가지고 전부 이상하다고 했다.
“왜 저녁때마다 마탑을 나가지? 이, 이거 아무래도 이상한 거 맞지!”
“……퇴근한 거잖아.”
“점심때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해!”
“……점심 먹으러 간 거잖아.”
“어어! A56구역에서 30분이나 혼자 있었대.”
“A56구역은 화장실이야! 내부도 못 봐? 글 못 읽어!?”
리앙틴이 터질 때까지.
디오네라는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니, 나는 길라르 자작이 꼭 이 실험체가 실험하는 날마다 마탑에 들어가는 것 같아서……. 알겠어, 조용히 할게.”
“뭐?”
“어?”
“다시 말해봐.”
나와 리앙틴, 셀레네가 동시에 디오네라를 쳐다봤다.
디오네라가 당황해서 말했다.
“조용히 한다고…… 나 뭐 잘못했어……?”
“아니, 아니. 그것 말고!”
“이 실험체로 실험하는 날마다 마탑에 들어가서……?”
리앙틴이 얼른 디오네라의 책을 빼앗아서 확인했다.
“맞아. 반년 전부터 이 실험체가 실험하는 날마다 마탑에 갔어.”
“그 실험체가 뭔데?”
“인간형 몬스터라는데…… 어, 12983번.”
그러자 알렉시스가 자료를 내려놨다.
그리고 어느 부분을 짚었는데…….
[12982번 – 만드라고라 영약 / 실험체, 쥐.12984번 – 가호 <성장>의 실험 / 실험체, 고트 게일라(남성, 19세)]
‘12983번이 없어?’
실험을 했고, 자료엔 남아있으며, 실험에 사용한 약과 광물들까지 전부 기록되어 있는데…… 없어.
굳어진 리앙틴이 얼른 실험 기록을 뒤졌다.
“12983번이 마지막으로 실험된 날이…… 4월 3일.”
그때였다.
마침 돌아온 한지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4월 3일?”
“왜?”
“아무래도 이상해서. 아니, 이상해서요.”
“뭐가?”
“에레카 길라르가 <마물 조련>의 가호를 발현한 날도 4월 3일이라고 하거든요.”
“……!”
“……!”
“……!”
나와 리앙틴, 셀레네는 시선을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