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Three Year Old I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280)
이 3세는 악역입니다-279화(280/390)
279화.
에릴로트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넌 바보야?”
그녀를 돌아본 그가 픽 웃었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 건데.”
“내가 숨기는 게 잔뜩 있는 음험한 사람인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잘해준 거야?”
“…….”
“왜 바보처럼 네 마음을 이용해왔다는 소리를 듣고도 원망조차 안 하는 거냔 말이야.”
알렉시스가 장난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럼 바보인 것으로 해.”
“천하의 멍청한 놈…….”
그는 그녀의 머리에 턱을 괴고서 고저 없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좀 더 좋아하게 해주라.”
“…….”
“불편하고, 부담스러워도 얼마간은 더 봐줘.”
눈을 꽉 감은 에릴로트가 고개를 수그렸다.
바람이 불었다.
어린 날, 손을 맞잡고 노을 보던 그때처럼.
* *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눈이 퉁퉁 부어 돌아온 날 본 콘라드는 기함했다.
알렉시스를 찾아 온 성을 뛰어다니던 나를 보았던 한지혁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사내의 순정을 쉽게 입에 올린 죄죠.”
“순정이요?”
한지혁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날 힐난했다.
“뭘 잘했다고 울어, 울긴.”
“나도 알거든…….”
조용한 나를 본 한지혁과 콘라드가 눈을 크게 떴다.
한지혁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농담이었는데 뭘 그렇게…… 잠깐만, 너 걷는 모양이 왜 그래?”
알렉시스를 찾아다니다가 계단에서 넘어졌다.
하인들이 기함할 정도로 굴렀더니 영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치마를 살짝 걷었다.
아니나 다를까 온통 엉망이었다.
피가 엉겨 붙은 것은 물론, 발목이 사람의 것인가 싶을 정도로 퉁퉁 부었다.
“부러진 것 아니야?!”
한지혁이 펄쩍 뛰며 방에 비치된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으윽, 살살해…….”
약 바르는 손길에도 아파하자, 한지혁이 나를 흘겨보았다.
“잘하는 짓이다. 나이가 몇 살인데 엎어지고 다녀.”
“오늘 약속이 몇 시였지?”
“곧 출발해야 하는데…… 이 다리로 갈 수 있겠어?”
“가야지. 대충 약 발랐으면 나와.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붕대까지 메준 한지혁이 비켜줬다.
나는 비척비척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한지혁과 콘라드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저렇게 꼬리 처진 강아지처럼…….”
“아뇨, 츄X 뺏긴 고양이죠. 저 성격에 강아지는 아니지.”
“X르가 뭡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출발하기 위해 내저를 나서자, 익숙한 마차가 보였다.
바란의 마차였다.
다가가니 슥, 창문이 열렸다. 헤반이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왜 왔어?”
“빚 하나 만들어두려고.”
대답할 기운도 없어서 난 “그러든지…….” 중얼거렸다.
헤반이 날 보고 눈을 홉떴다.
“왜 그래?”
“별일 아니야.”
“……뭐, 됐어. 나야 좋지.”
“뭐가.”
“이럴 때 다정하게 대해주면 쉽게 넘어오던데?”
그가 빙글빙글 웃으며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타라는 뜻이었다.
입씨름할 힘도 없어서 대충 마차에 오르려던 때였다.
몸이 붕 떠올랐다.
깜짝 놀라서 나를 안아든 사람을 쳐다보았다.
“알렉시스?!”
알렉시스가 뻔뻔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헤반이 칸시스 대륙어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뭐긴 뭐야. 혼약자를 에스코트하는 거지.”
[……칸시스의 언어를 아는가?] [재수 없는 놈에게 대꾸할 정도로는.] [오만에도 정도가 있다, 이시론의 공자.]“칼소이에에 왔으면 칼소이에의 언어로 말해. 꿋꿋이 모국어로 지껄이는 놈의 오만도 상당하니까.”
그렇게 말한 알렉시스가 나를 마차 의자에 앉히고,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너 왜…….”
“다친 약혼녀를 홀로 걷게 하는 놈으로 보이나?”
“……알고 있었어?”
“그래.”
헤반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당신에게 내 마차를 내어줄 생각은 없었어.”
축객령에 알렉시스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하면 지금 내어줄 생각을 하면 되겠군.”
“이봐!”
“출발하지. 아스트라와 원수지고, 이시론과도 틀어졌다고 하면 그쪽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지지 않겠어?”
“이…….”
“싸워서 쫓아낼 요량이라면 지금 장갑을 던지고.”
눈뜬 알렉시스가 무미건조하게 헤반을 쳐다봤다.
헤반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알렉시스를 한참 노려볼 뿐 장갑은 던지지 않았다.
바란의 왕세자에게도 검을 들이대던 미친 자가 자신이라고 못할까 싶은 것이다.
‘겨루면 진다는 걸 지난번 사건으로 느꼈을 테고.’
헤반이 마부석과 연결된 쪽창을 두드렸다.
“……출발해라.”
나는 눈을 끔뻑이며 옆자리의 알렉시스를 쳐다봤다.
다시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물었다.
“왜.”
“어? 아, 아냐…….”
그렇게 대답하고 있을 때, 헤반이 말했다.
“이쪽으로 와, 릴. 그 불청객은 덩치가 어마어마해서 불편할 거다.”
알렉시스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움찔, 어깨를 좁혔다.
헤반이 알렉시스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유치한 질투인가?”
“그래.”
“……뭐?”
“질투가 맞아.”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에도 아무렇지 않게 인정하자, 헤반은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잠깐 도르륵 눈을 굴리고, 얌전히 앉았다.
그리미에령에 도착할 때까지 알렉시스는 손을 놓지 않았다.
자꾸만 내 숨이 신경 쓰였다.
* * *
그리미에 관할성.
마중 나와 있던 리지가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이시론 공자님도 오셨군요.”
“초청장 없이 오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 아녜요. 혼약한 사이라면 응당 에스코트가 필요하지요.”
리지가 후후 웃었다.
그녀의 목적은 헤반이었다. 내가 혼약자인 알렉시스와 함께 앉는다면, 그 옆자리는 리지의 차지였다.
그 점이 달가운지 리지는 알렉시스를 환대했다.
“어서 드시죠.”
“칼리아 숙모님은?”
내 물음에 리지는 슬쩍 헤반의 곁으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어머니야 우리 관할령에 계시지. 언니도 관할령 감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고. 해서 그리미에 관할령의 일은 내가 돕고 있어.”
‘잘됐다.’
칼리아 숙모는 깐깐한 편이었다. 있었더라면 움직이기 불편했을 것이다.
“그리미에 관할령은 처음이지, 에릴로트?”
“응. 안주인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까 초청받을 일이 없잖아.”
그리미에는 혈족들을 초청하지 않는다.
혹여 장남이 조카 중 한 명을 후계로 삼을까 다들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까.
게다가 황도 업무를 총괄했던 자라, 이 성엔 가문의 온갖 비밀이 있을 터였다.
해서 그리미에령의 관리를 대신하는 칼리아 숙모네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쉽게 이 성을 찾을 수 없었다.
‘이번 기회에 그리미에의 약점을 잡아가겠어.’
식사는 정원에 차려져 있었다.
“왜 식당이 아니고?”
물으니, 리지가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나도 본성의 동쪽 통로는 이용할 수 없거든. 근데 하필 식당이 동쪽 통로를 사용해야 해서.”
“왜 동쪽 통로를 사용할 수 없는 거야?”
“아마 제3창고 때문일걸. 가문의 내비문서가 잔뜩 있다고 해서 우리 어머니도 출입할 수 없어. 앉아.”
나와 알렉시스는 서로를 쳐다봤다.
‘제3창고에 뭐가 있다.’
알렉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알렉시스, 헤반, 리지는 둘러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메뉴는 칸시스의 전통음식들이었다.
리지가 수줍은 표정으로 헤반에게 물었다.
“신경 써봤는데 맛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괜찮군요. 한데 손님은 우리뿐입니까?”
“다른 손님들은 일정이 있어서 티타임에나 오실 거예요.”
우리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식사했다.
메인 요리를 얼마쯤 먹은 뒤, 나는 입을 열었다.
“미안, 통신이 와서 잠깐 자리를 비워야겠어.”
“감사 때문인가 보구나?”
모든 관할령이 감사로 정신이 없어서, 나도 그런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핑계로 좋았기에 나는 넙죽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뭐.”
실은 꼼꼼하기로는 아스트라 제일인 요슈아가 행정관들을 쥐어짜서 잘 대비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
나는 슬쩍 일어나며, 알렉시스에게 눈치를 보냈다.
‘내가 없는 동안 잘 커버해줘.’
알렉시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건물 쪽으로 향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미에는 한 번도 3세들을 성에 초청한 적이 없었다.
……이번 생에는.
‘하지만 난 첫 번째 삶에서 여기 와봤지.’
달리아가 그리미에령에 들어오고서 3세들을 초청한 적이 있거든.
첫 번째 삶에서 나는 완전히 천덕꾸러기라 사촌들이 말 한 마디도 걸어주지 않았다.
‘말만 안 걸면 다행이게.’
조프리 같은 애들은 만취해서 나만 보면 시비였다.
그때의 난 가호가 없는 무능력자였다.
살상용 가호를 가진 사촌이 만취까지 했으니,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
난 그들을 피하느라 인적 드문 곳을 찾아다녔다.
‘덕분에 그리미에 관할성 지리는 꽤 외웠단다. 게다가…….’
나는 성 뒤편의 벽을 보고 히죽 웃었다.
“여기다.”
조프리 놈에게서 미친 듯이 도망치다 이런 곳도 찾았지.
나는 벽돌을 더듬었다. 그리고 유난히 손에 걸리는 부분을 꾹 누르자…….
즈즈즈즈즛.
기묘한 소리와 함께 벽이 일렁였다.
‘사실 벽이 아니니까.’
마법을 통해 벽 형상을 한 결계를 만들어둔 것이다.
첫 번째 삶에서 가호가 없어서 죽어라 마법만 팠던 노력이 여기서 빛을 발했다.
‘파훼법을 알거든.’
손쉽게 결계를 파훼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지하도로 가는 길이었는데, 동쪽 통로와 이어져 있었다.
나는 남들이 보기 전에 얼른 결계를 되돌려두고 지하도를 걸었다.
내부는 너무 어두워서 걷기 힘들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멀리서 빛이 모였다.
‘홰에 불이 놓여 있구나. 저기부턴 걷기가 어렵진 않겠…… 어?’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미에와 그의 측근들이 죄다 유배에 떠났는데 왜 불이 놓여있지?’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횃불 근처로 향했다.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리지 아스트라가 손님을 초대했단 말이냐?”
“예.”
“흥, 주인이 없다고 객식구가 활개를 치고 다니는군.”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해서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익숙한 목소리였으니까!
저건 고대 몬스터를 끌어들인 것이 밝혀져서 도망친 사촌, 아일라였다!
나는 벽 뒤로 몸을 숨기고 아일라를 살폈다.
얼굴의 반쪽이 심각한 화상을 입은 듯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 이상했다.
고도의 결계가 펼쳐진 장원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게다가 공작 직속군이 이 잡듯 장원을 뒤졌으나 찾을 수 없었다.
이제 보니까 알겠다.
‘장원에서 도망친 게 아니었어. 그리미에 관할성 지하에 숨어 살고 있던 거야!’
팔짱을 낀 아일라가 말했다.
“692번 실험체가 가호를 발현했다는 것을 백부님께 아뢰어라.”
“하면 ‘그 가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까?!”
“그래, 이제 백부님의 후계자를 찾아 이계의 문을 열 수 있겠구나.”
‘이계의 문을 연다고?’
심지어 후계자를 찾는다면…….
‘마리야.’
마리를 찾아서 이계의 문을 열겠다는 것이 분명했다.
아일라가 물었다.
“축복의 땅은 찾았느냐?”
“예, 사우스로의 영토입니다.”
사우스로 부족의 땅에도 축복의 땅이 있다는 뜻인 듯했다.
그리미에가 유배지에 있건만, 저들의 정보력은 여전히 엄청나다니.
아마도 <장막>의 공인 듯했다.
미켈란의 말로는 <장막>이 이제 제국을 넘어 세계 곳곳에서 정보상과 암살단으로 활약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대체 내가 마리를 이공간에 숨긴 것을 저들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그걸 아는 사람들은 내 최측근뿐인…… 설마.’
나는 딱딱하게 굳어져서, 치맛자락만 꽉 부여잡았다.
‘배신자가 있다.’
……그것도 내 최측근 중에.
* * *
아일라와 남자의 대화는 짧았다.
남자가 아일라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근처에 있던 계단을 올라갔고 아일라는 길의 끝으로 걸어갔다.
나는 아일라가 사라진 후, 조심스럽게 횃불로 밝혀진 길로 들어섰다.
길엔 몇 개나 되는 방이 있었다.
‘실험기구가 잔뜩이네.’
실험기구뿐 아니라, 몬스터나 동물들도 잔뜩 있었다.
……시체까지도.
‘여기가 실험장인가?’
나는 그들이 무슨 실험을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방마다 샅샅이 훑었다.
‘몬스터와 사람을 융합하고 있구나.’
실험 내용을 보니 목표는 고대 몬스터와의 융합인 듯싶었다.
‘그 엄청난 고대 몬스터가 이지까지 갖는다고?’
심지어 그리미에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등골이 오싹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주머니에서 마도구를 꺼냈다.
지구의 카메라와 비슷한 마도구였다.
실험내용을 적은 서류를 기록하고 있던 중이었다.
지이이이잉─.
오른편에서 기계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시,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네.’
마른침을 삼키고 기계 쪽으로 향했다.
수정구였는데, 제국어가 적혀 있었다.
[축복의 땅을 손에 넣었는가. 주인께서 내용을 확인하신다.]현재 그리미에가 있는 곳은 통신 불가 지역이다.
‘그런데 통신을 해? 죽었어.’
나는 그것 또한 꼼꼼히 기록했다.
그러던 중에 다시 지이이잉, 하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거래 중. 부족장이 요구한 물품을 구하기 쉽지 않다.]‘아니야, 이거 그냥 통신을 보내는 게 아니라…….’
지이이잉.
[요구품은?] [마도병.] [바란과 접촉하였나.] [바란왕의 총애비에게 접근하였다. 약을 먹여 몸을 망쳐놓았으니, 치료제가 필요할 것. 때를 노려 총애비의 마음을 사로잡겠다.]‘이거 모든 메시지를 중앙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치구나! 잠깐만, 혹시 여기서도 메시지를 가로채서 보낼 수 있나?’
조작해보니 가능했다.
나는 한쪽의 메시지를 가로채서 송신하지 못하게 한 뒤, 내 쪽에서 메시지를 보냈다.
[에릴로트 쪽에 붙여둔 배신자는?]이 3세는 악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