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Three Year Old I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285)
이 3세는 악역입니다-284화(285/390)
284화.
그리미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지하도에 깔아둔 마도구만 해도 엄청난 것들이었다.
마도 자료 또한 큰 재산일 터.
무엇보다 몬스터들을 잃어선 안 될 것이다.
그리미에는 나를 쏘아보았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생긋 웃어줬다.
‘복장이 터지겠지?’
그리미에는 이를 악물었다.
“……관할성으로 가봐야겠습니다. 가자, 달리아.”
“네? 아, 네…….”
달리아는 나와 사촌들에게 인사하고, 허둥지둥 그리미에를 따라갔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바람도 도와주네.”
발자크와 요슈아가 곁으로 다가왔다.
발자크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화재 조사가 시작되면 우리 쪽 짓이라는 것이 밝혀질 수도 있어.”
“조사는 없어.”
“없다고?”
나는 약아빠진 얼굴로 히죽히죽 웃었다.
“조사를 시작하면 그리미에 관할성 지하가 밝혀질 수도 있는데 저쪽에서 그걸 반기겠어?”
“아아…….”
“어떻게든 막을 거야.”
그리미에가 구린 덕분에 우리는 겁날 게 없었다.
나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등을 돌렸다.
“오라버니들, 우리도 돌아가자.”
쾌활하게 말하며.
* * *
이튿날 오전.
나는 씻고 나와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화장대 앞에 앉아있으니, 하녀들이 착착 준비를 도와줬다.
귀여운 수다쟁이인 하이디와 베티가 묻지도 않은 그리미에 관할성의 일을 떠들었다.
“새벽에야 화재가 진정되었다더라고요.”
“별관은 전소되었다고 하던걸요.”
“화재는 그리미에 님이 가져오신 마도구 때문이었대요.”
화재 조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런 핑계를 댔구만.
“그래도 민가로 번지지 않아서 다행이네.”
“그러게 말이에요. 본성에서 마도사들을 급히 파견했기에 망정이지……!”
나는 낄낄 웃었다.
물론 본성에서 마도사들을 급히 파견한 것도 내 짓이었다.
‘화재를 내자마자 그리미에 관할성이 아니라, 본성에 신고하도록 했거든.’
본성에서 사람들이 잔뜩 왔으니 서둘러 불을 끄지 못했을 거다.
지하에서 몬스터라도 튀어나오면, 할아버지가 모든 일을 알게 될 테니.
그래서 그대로 타죽도록 둘 수밖에 없었을 터.
‘속도 같이 타들어 갔겠구만.’
낄낄거리고 있는 동안 머리 손질이 끝났다.
“한데 오늘도 본성에서 호출이 있군요…….”
하이디가 염려 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베티도 입술이 댓 발 나와 있었다.
“아가씨께서 관할성에 돌아오신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쉬게 두시지…….”
베티가 꿍얼대니 하이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잖니. 그리미에 님과 그 따님을 직계에게 소개하는 자리라고 하니…….”
그랬다.
오늘은 달리아가 직계들에게 처음 인사를 하는 자리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방계 정리 때문에라도 혈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니까. 그보다 부탁한 편지를 보내주렴.”
“예, 아가씨.”
하녀들에게 인사하고 공작성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오라버니들은 미리 마차에 타 있었다.
우리는 공작성으로 향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사의 행방은?”
물으니 요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오리무중이야. 계속 찾아볼게.”
“응.”
“황자는 어떻게 되었어?”
“모레쯤 돌아간다고 하더라고. 아사르를 거래하겠다는 확답을 주었으니, 더 머무를 필요가 없겠지.”
“바란인들도 곧 돌아갈 건가?”
“더 자리를 비우긴 힘들겠지. 그렇지 않아도 라온의 왕세자 자리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니까.”
한참 이야기하던 중에 마차가 본성에 다다랐다.
발자크가 말했다.
“우리는 임무 보고가 있어. 조부님께 들러야 하는데 어떻게 할래?”
“난 사촌들이 있는 신관으로 바로 갈게.”
“그래.”
인사한 후, 난 즉시 신관으로 향했다.
신관은 시끌벅적했다.
“디오네라, 넌 큰일이다. 어쩌면 아직도 졸업 문턱에도 못 간 거니?”
“나, 나는…….”
“언제까지 혈족 교육을 받으려고 해? 이제 혈족 교육을 받는 사람은 너 포함 딱 넷이라고.”
“알고 있어…….”
“그렇게나 멍청한 건 병이라고, 병.”
신관은 사촌들로 가득했다.
나는 홀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디오네라는 다른 면으론 천재니까 괜찮아.”
사촌들의 시선이 일시에 내게 집중되었다.
디오네라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에릴로트!”
“안녕, 언니.”
“으, 으응!”
디오네라에게 핀잔주고 있던 파비오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천재?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말이 안 돼? 오라버니는 일대일 전투에서 한 번도 디오네라 언니를 이긴 적이 없잖아.”
“그, 그건……!”
그러자 다른 사촌들이 킬킬거리며 파비오를 쳐다봤다.
얼굴이 새빨개진 파비오가 팩, 고개를 돌렸다.
디오네라는 헤헤 웃었다.
“고마워, 에릴로트.”
“신경 쓸 것 없어. 맞는 말이잖아?”
“으응……!”
“그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촌들이 많나 보네.”
다들 나처럼 방계 정리 건으로 혈족들과 얘기하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아, 아냐, 다들 왔어!”
“그래, 네가 꼴찌란다, 에릴로트.”
셀레네 언니의 동생인 흑염룡 사촌 언니가 부채를 나붓나붓 흔들었다.
“어디 있어요? 안 보이는 얼굴이 꽤 되는데요?”
“그게…….”
디오네라가 우물쭈물하자, 리앙틴이 탕! 테이블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치사하게 2세가 없는 집안끼리 붙어먹었어!”
아하, 예의 ‘반대파’구나.
카라 언니를 필두로 리지, 밀란, 로레이나 등이 포함되었다는 그룹.
모두 며느리나 사위가 관할령을 다스리는 집안이다.
“그래서 그 ‘반대파’의 사촌들은 다 어디에 있는데?”
“여기.”
문 안으로 ‘반대파’의 사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가장 앞엔 로레이나와 카라가 있었다.
“안녕, 에릴로트.”
“안녕하세요, 카라 언니. 로레이나 언니도 잘 계셨어요?”
로레이나가 팔짱을 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여전히 우리의 파벌이 필요한 집안은 없나 보지?”
데콘스 숙부의 자식인 리앙틴.
바실레 고모의 자식인 디오네라.
구스타프 숙부의 자식인 파비오, 리오나, 아르망.
바스티나 고모의 자식인 셀레네와 쥴리아나(흑염룡 사촌언니).
모두가 침묵했다. 물론 나까지도.
리앙틴이 끙, 신음하며 말했다.
“조부님은 방계의 자치권을 빼앗는 사람을 후계로 정한다고 하셨어. 그런데 너희와 손잡으면 후계 자리와 영영 이별이라고.”
흑염룡 언니가 “흐으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계가 되려고 방계를 정리하려는 건데, 누가 너희와 손을 잡겠니.”
“그래, 오랜만에 쥴리아나 언니가 옳은 소리를 하잖아.”
밀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언제 아스트라가 제대로 계승식을 한 적이 있었나?”
“뭐?”
리앙틴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묻자 밀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나 아들이 아버지를 폐하고 공작위를 차지해왔지.”
즉, 할아버지의 명을 잘 수행해서 후계가 될 필요는 없다는 거다.
‘방계와 반대파 세력을 모두 흡수해서 할아버지를 칠 수도 있다.’
—라는 거지.
“그, 그, 그게 무슨…… 조부님께서 아시면 오라버니는……!”
“오해가 있나 본데, 조부님을 치라는 소리는 아니다.”
“그럼 그게 무슨 뜻인데!”
카라 언니가 말했다.
“이 장원의 절대 권력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세력이란 거지.”
“…….”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 중엔 가신들도 있어.”
“……뭐, 뭣?!”
“그들도 자치권을 가지고 지역을 다스리고 있으니까.”
“그, 그런…….”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세력을 불릴 거야. 자치권 회수 논의가 끝나지 않은 한은 언제까지고.”
“…….”
반대파가 다른 사촌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다들 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할 거야.”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아주 똘똘 뭉쳤네.’
이렇게 되면 숙부, 고모들이 움직이기 힘들다.
자치권을 회수하려고 나오는 사람은 저 막강한 세력의 적이 될 테니까.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문밖에서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자치권을 빼앗아요?”
모두가 흠칫, 문밖을 쳐다봤다.
달리아가 움찔 어깨를 좁혔다.
“아, 죄송해요…… 얘기를 들었는데…….”
우물쭈물하던 그 애가 곁에 있던 남자를 힐끗 쳐다봤다.
그 남자는 그리미에의 부관인 듯했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리아에게 말했다.
“현재 장원에선 적오기 계승자를 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알려드렸지요.”
“네. 후계……를 정한다고?”
“맞습니다. 공작님께선 ‘방계들의 자치권을 빼앗아 오는 자’에게 적오기를 계승하겠노라 하셨습니다.”
“아아, 공작이 되고 싶으면 자치권을 빼앗아 오라는 거죠?”
“그렇지요.”
“그런데 왜요? 왜 그래야 해요?”
“예?”
“아뇨, 제 생각엔 자치권은 빼앗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달리아가 손끝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백성들의 입을 막는 건 독재잖아요……?”
“아가씨!”
부관이 흠칫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라도 할아버지의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까 염려되는 듯했다.
달리아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이 세계의 일은 잘 모르지만…… 앗!”
‘저 바보.’
아주 차원 이동해왔다고 광고를 하고 있다.
부관은 점점 더 새파래지고 있었다.
‘그래도 누가 차원 이동 같은 꿈같은 얘기를 믿겠어.’
마법과 가호가 존재하는 이 세계에도 그런 일은 전무했다.
달리아가 어색하게 헤헤 웃으며 말했다.
“정치는 ‘바르게 다스린다’는 뜻이잖아요. 가능성을 믿어주고, 더 나은 내일이 올 거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게—”
달리아가 말을 하면 할수록, 사촌들의 표정이 달라지고 있었다.
특히 방계가 될 예정인 반대파가.
‘저들에겐 간절한 이야기일 테니까.’
나는 칫, 혀를 찼다.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봐 말의 무게가 엄청나다.
그리고 난…….
“정치는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야.”
—분위기 깨뜨리기가 전문인 악역 출신이다.
“응?”
“정치는 바르게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라고.”
“‘바를 정(正)에 다스릴 치(治)’해서 정치인데?”
정치의 ‘정’은 정사 정(政)이다, 멍청아.
저렇게 아는 사람들이 있지.
의붓동생인 세은이도…….
“하여간에 저런 정치인들이 문제라니까! 그쵸, 아빠? 바르게 다스린다고 해서 정치인 거잖아요. 바를 정!”
“하하, 그런 것도 알아?”
하지만 한자를 아는 티를 낼 순 없었다.
나도 차원 이동해왔다고 광고하는 거니까.
한자를 모르는 다른 사촌들은 다들 갸웃대고 있었다.
“바를 정이 뭔데?”
“그러게.”
나는 달리아를 쳐다봤다.
“그래서? 넌 이번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응? 음, 나는…….”
다들 조용히 그 애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미에의 부관도 달리아에게 주목했다.
“난…….”
한참 고민하던 달리아가 생긋 웃었다.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해.”
“네?”
그리미에의 부관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달리아를 쳐다봤다.
달리아는 해맑게 웃었다.
“모처럼 친척들이 잔뜩 있는걸요. 피보다 진한 건 없다고 하는데, 친구보다 소중한 관계의 사람이 많다는 건 행운이잖아요!”
“그건…….”
“그러니까 사이좋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달리아가 문 안으로 들어와서 내 손을 잡았다.
“그렇지, 에릴로트?”
“…….”
“저기, 나 널 엄청나게 보고 싶었어. 소설을 볼 때도 두근두근해서 꼭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
그러자 부관이 흠칫했고, 사촌들이 “소설?” 하고 중얼거렸다.
달리아가 “앗…….” 하며 얼른 말을 바꿨다.
“그러니까…… 어, 그게…… 아! 유명하잖아! 아스트라의 장미! 그렇지?”
“…….”
“아빠가 사촌들과 먹으라고 맛있는 디저트를 준비시키셨대. 기대되지, 그렇지? 얼른 가자!”
그러더니 로레이나와 카라에게 콩콩콩 뛰어가서 등을 밀었다.
“언니들도요. 얼른 가요!”
“뭐, 뭐야. 왜 이래?!”
“너 이상한 애구나…….”
이런 스타일의 사촌은 한 명도 없었다.
카라와 로레이나도 당황해서 달리아에게 끌려갔다.
셀레네가 그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이상한 애네, 정말…….”
밀란도 픽 웃었다.
“그러게. 아스트라에서 자라지 않아서 그런가.”
표정은 부드러웠다.
‘이렇게까지 금세 동화된다고?’
아무리 달리아라지만, 이건 너무 빠르다.
그것도 사촌들 같은 사람들이…….
사촌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뭐, 일단 가서 먹자고. 난 단 게 들어가야 머리가 좀 돌아가더라.”
“네가 머리를 돌릴 줄도 알아?”
“시끄러워.”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사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아무래도 이상해. ……설마!’
나는 황급히 가호를 발동했다.
“이게 뭐야…….”
“뭐야, 네 사촌들이 다 어디 가는 거야?”
한지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 홀로 남아있는 홀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용이 나오지 않아.”
“뭐?”
“<열람>이 안 돼…….”
오류라도 생긴 것처럼 노이즈가 끼어 있었다.
한지혁이 흠칫, 굳어졌다.
“그거 설마……!”
그가 소리치기 무섭게 글자들이 재배치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 현상을 알고 있다.
‘세계의 스토리가 바뀔 때.’
겨우 아빠를 주인공으로 만들어둔 세계의 스토리가 변화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글자들이 완전히 바뀌었다.
제목을 읽은 난 눈을 꽉 감았다.
한지혁이 나를 채근했다.
“뭐야, 어떻게 되었는데!”
“제목이 바뀌었어.”
“어떻게, 대체 뭐라고 쓰여있어?!”
“…….”
입술을 깨물던 나는 헛웃음과 함께 말을 토했다.
“……<빙의했는데 흑막의 손녀였다>.”
돌아왔다.
내게 처절하도록 끔찍하던 <빙.흑.손>의 세계로.
하지만 <빙.흑.손>과 한 가지 달라진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소개문이었다.
이 3세는 악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