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Three Year Old I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390)
이 3세는 악역입니다-389화(390/390)
389화.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가볼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원화들과 함께 황군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엔 익숙한 면면이 보였다.
“원화!”
백기사의 망토를 찬 리암이 밝은 얼굴로 소리쳤다.
“네?”
“넹?”
“넵!”
새로운 동군, 남군, 북군 원화가 대답하자, 리암이 “아…….” 중얼거렸다.
다른 백기사들, 그러니까 서군 출신의 기사들이 쿡쿡 웃었다.
“다른 원화들께서 계시니 호칭을 정확히 해야지.”
서군 상장군 출신 쿠가 히죽 웃자, 리암이 목을 긁적였다.
“서군 원화를 부른 것입니다.”
“넷!”
문 뒤에서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밝은 대답이 들려왔다.
잔뜩 흥분해서 달려 나갔던 현 서군 원화가 뒤따라온 것이다.
리암은 다시 당황했고, 회의실엔 푸핫!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도 픽 웃으며 말했다.
“이제 서군 원화는 지니 리셔우 양이시니, 난 달리 불러줘…… 가 아니고 전 달리 불러주세요.”
“말씀 높이시니 어색합니다.”
“이제 원화는 확실히 졸업하려고요.”
“…….”
조용해진 조윅이 뒤를 돌아보았다.
자리에 앉아있던 서군 출신 기사들도 묘한 표정이었다.
서군 출신들은 시선을 교환하다가 이내 웃었다.
서군 상장군 출신 쿠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무릎을 굽히더니 그 옛날 보였던 소년과 같은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쿠가 무릎을 꿇은 건 상장군 임명 때 뿐이었잖아요.”
“언제, 어느 때라도, 설령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되더라도 저희의 원화십니다.”
“감사한 일이군요.”
“마지막으로 호칭을 허락해주십시오.”
나는 새로운 서군 원화를 쳐다봤다.
그녀가 “무, 물론 괜찮죠!” 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기에 나 또한 대답했다.
“그래.”
서군 출신의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시에 무릎을 꿇었다.
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스테마 리도르. (불꽃의 근원.)”
리암, 조윅, 카진이 동시에 소리쳤다.
“칼 로 네스! (최강의 원화여!)”
해서 나는 화답해주었다.
“이브아 탈 라스 스테마. (영원히 타오를 제국의 불꽃.)”
서군 출신 기사들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리암은 눈물을 참으려는 듯 애써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그렇게까지?’
아무래도 <기사단의 꼬마 대장님> 스토리 시절의 주인공 버프가 끝나지 않은 게 아닐까.
“칼 로 네스! 칼—로—네스!”
리암이 크흑! 소리치며 나를 끌어안으려 들어서 난 뒷걸음질 쳤다.
‘그건 좀 그래.’
“아무튼 앞으로 아스트라 양이라고 불러주세요.”
쿠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폐하라 칭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뭐……. 다음번엔 호위를 부탁해볼까.”
픽 실소를 흘리자, 회의장에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원화들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그런 우리를 구경했다.
난 한때 나의 기사들이었던 자들과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즐겼다.
* * *
“아가씨.”
한참 대화하던 중에 한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황제궁으로 갈 시간인 모양이었다.
“그럼.”
고개를 숙이자, 서군 출신 기사들이 궁 앞까지 나와서 나를 배웅했다.
“다시 뵐 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아스트라 영애.”
“몸 건강히, 언제나 즐겁게 지내세요.”
“예.”
다른 기사들이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렇게 나는 한지혁과 황제궁으로 향하기 위해 철문을 지났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원…… 아니, 아스트라 양!”
“아스트라 영애!”
조윅과 카진이었다.
돌아보자, 두 사람이 재빨리 달려왔다.
조윅은 밭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감히 주인이신 알렉시스 섭정을 배신하는 일이라고 하셔도……!”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뭐야, 이 자식.’
이틀 전에 위엘 랑그로도 꼭 이런 표정으로 고백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고 있는데 조윅이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언니를 소개해주십시오!”
“……뭐? 아니, 뭐라고요?”
“저, 망상 병자라고 하셔도 할 말이 없긴 합니다만, 그…… 하하! 제 가호를 아시지요?”
알지. <과거를 보는 눈>이잖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윅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영애께서 어릴 적에 영애의 과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기억 속에서 영애와 꼭 닮은, 뭐랄까, 금세라도 부서질 것 같아서 안타까운 분을 보았지요.”
“…….”
“…….”
나와 한지혁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거 설마……회귀 전 성인이었던 나인가?’
한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윅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감히 섭정의 연인에게 이런 소개를 부탁하는 게 얼마나 부덕한 일인지 압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를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
“상처받은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열망으로 수련했습니다! 부디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
“사촌 언니인 것이지요? 그, 이런 짓은 옳지 않지만, 주변에 듣자 하니 그 비슷한 나이대인 여성은 카라 아스트라 님이실 거라던데……!”
“아, 카라 언니.”
“예! 카라 님을 소개해주십시오!”
“……한, 아스트라에 서한을 보내.”
“예, 아가씨.”
조윅은 뛸 듯이 기뻐했다.
“가, 감사합니다!”
“할 말은 그게 다지요?”
“예!”
“그럼 가세요…….”
“옛!”
조윅이 신이 나서 돌아갔다.
한지혁이 내게 속삭였다.
“카라가 아니잖아.”
“카라 언니를 소개해 달라잖아. 뭐, 조윅이 언니 취향이긴 해.”
딱 저런 운동부의 호탕한 스타일을 놀리는 걸 좋아하거든.
언니가 부서질 듯 가는 선을 가진 미인이기도 하고.
‘잘됐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카진을 쳐다봤다.
“라비오 경도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지난날, 영애께선 제가 대장군이 될 거라 확신하셨지요.”
“예.”
“왜입니까?”
“그걸 왜 궁금해하세요?”
“저는 이방인입니다. 서군일 적의 공로로 백기사가 되었지만, 한직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어찌 대장군이 되겠습니까.”
“흐음.”
“저를 왜 북돋아 주신 겁니까?”
“북돋웠나요?”
“……예?”
“내 말에 감정이 고조되고, 희망을 품게 되었는지 물었어요.”
“…….”
“그건 애초에 대장군이 되겠다는 것이 라비오 경의 꿈이었기 때문일 거예요.”
“…….”
“그렇다면 내 확신은 필요 없잖아요? 남의 확신이 있어야 하는 꿈이 어디 있어요?”
“…….”
카진이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예. 그렇겠지요……. 남의 확신이 필요한 꿈은 초라할 뿐인데요.”
카진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쓸데없는 말로 영애의 시간을 빼앗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돌아가려는 그에게 난 소리쳤다.
“이렇게 진지한 사람이라서요!”
“예?”
“꿈에 진지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런 사람이 원하는 바를 거머쥐는 사회가 되길 바라서 ‘대장군이 될 것’이라고 했어요!”
“…….”
“나는 확신을 줄 수 없어요. 확신은 스스로만이 줄 수 있으니까. 다만…….”
나는 외투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카진에게 건넸다.
“경의 꿈에 나의 바람 또한 함께 걸겠어요.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경이 결국 원하는 바를 거머쥐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이건…….”
“라곤의 비늘이에요.”
오리하르콘보다 강력하고, 신목보다 신성한 힘의 결정체인 이것.
가지고 있으면 전투 중에 필시 도움이 될 것이다.
“내겐 소중한 것이니 꿈을 이루면, 다른 자에게 물려주세요.”
“……돌려드리는 것이 아니라요?”
“예. 해서 내 소중한 라곤의 비늘이 ‘희망의 증표’로 남게 해줘요.”
“……이루기 힘든 꿈을 꾸는 자들에게 물려주겠습니다. ‘희망의 증표’로.”
나는 미소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절하게 발버둥 치고, 악착같이 노력했던 시절은 내게도 있었다.
결국 나는 꿈을 이루었다.
내게 평화로운 이 세계를 손에 넣은 것이다.
아마 카진도 처절하게 발버둥 치고, 악착같이 노력해야겠지.
그러나 그 또한 결국 꿈을 이루길 바란다.
내 손에 있던 비늘이 카진을 넘어 다른 이들에게도 전승되기를.
희망의 증표가 되어서.
카진이 떠나고 나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한지혁에게 말했다.
“가자!”
.
.
훗날, 카진 라비오는 세계에서 가장 어린 용의 비늘을 품고 흉포한 용을 토벌한다.
용기사가 된 그가 제국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무장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소녀가 전해주었던, 희망의 증표는 또 다른 어떤 소녀에게로 전해진다.
희망의 증표로써.
* * *
황제 궁 지하에 도착했을 땐 의식의 준비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
황태후와 황후가 나를 반겼다.
“어서 오렴.”
“오는 길이 고되진 않았니.”
나는 치마를 넓게 펼치고 두 분께 인사드렸다.
“황태후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염려해주신 덕에 즐겁게 왔어요.”
“다행이구나.”
후후 웃은 황후가 한 손으로 중앙을 가리켰다.
“저기다.”
진의 중앙. 상아 탁자에 황제가 누워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섭정께서는 의식에 참여하지 않으시나요?”
“그래. 남은 일이 있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진의 중앙으로 향했다.
치유사들이 진 밖으로 둥글게 서 있었다.
나는 황제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아…….’
황제의 육체 위로 묘한 빛을 띄는 혼이 있었다.
[최후의 순간에 보는 얼굴이 너라니, 기가 막히는구나.]황제였다.
“혼으로 존재하고 계셨습니까.”
“뭐?”
“뭐라고?”
“무슨…….”
황후, 황태후, 심지어는 치유사들까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황제의 혼을 바라보았다.
“언제 이리되신 겁니까.”
[글쎄. 이 지경이 되어선 시간의 흐름을 느낄 겨를이 없어 셈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너희들의 시간으로도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최후의 순간이란 말씀은…….”
[나를 보내다오.]“…….”
[육체에서 벗어날 수 없어. 아무래도 크루마투스와 그리미에에게 받았던 기묘한 사술의 영향인 듯싶다. 피차 내 몸으로 돌아가긴 글렀다는 것을 알아.]“안식을 이르시나요?”
[아니……. 저 애의 곁으로.]황제가 바라보는 건 구릿빛 피부와 호수 같은 푸른 눈을 가진 시녀였다.
‘에스더.’
황제의 시녀로, 황명을 받아 지하에서 은밀히 크루마투스를 키우던 이방인이었다.
“사랑하십니까?”
[사랑이 무엇이지?]황제가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히 제게 사랑을 운운하는 것이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지켜주고 싶은 마음, 곁에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 나도 모르게 다정해지는 것, 바라보면 가슴이 저미고, 대신해 아프고 싶을 만큼 간절한 것. ……그런 것이요.”
[……그런 게 사랑이라면 난 에스더를 사랑하는 모양이군.]“…….”
[날 저 애 곁으로 보내다오.]“완벽하게 수호성화 되신 게 아닙니다. 육체를 떠날 수 없다는 건 세상과 이어주는 끝이 육체라는 뜻이겠지요.”
[육체에서 벗어나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어.]“그런데도 가실 겁니까?”
[……너는 나를 아둔한 황제라 생각하겠지. 비루하고, 초라하다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황제로 완벽하였다.]“…….”
[황제란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자이니까. 난 단 한 순간도 율리우스 칼소이에로 존재한 적이 없어.]“…….”
[해서 마지막만은 나로 존재하련다. 부탁하마. 아니, 애원하겠다. 저 애 곁에서 생이 저물게 도와다오.]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예.”
나는 고요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식을 시작해요.”
황제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 의식을.
* * *
의식은 아주 오래 진행되었다.
하루가 꼬박 지나 이틀째에 치유사들이 지쳐 혼절하고, 지하엔 에릴로트와 에스더만이 남았다.
에릴로트와 황제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하하, 알렉시스가 수로에 숨어있었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수로도 아니었어요. 빗물받이라고요.”
[오셀리아와 살바토레는 어찌 되었느냐.]“사형을 면치 못하겠지요. 하지만 나라가 혼란한 와중이니 섭정께서 즉위하신 후, 역적의 사형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오셀리아에게 딸을 잃은 이시론이 기뻐하겠구나.]“이시론 공작님께서 열심이시긴 해요.”
황제가 아닌 율리우스는 수더분한 남자였다.
이런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회귀 전에 제 할아버지를 폐하께서 죽이셨어요. 해서 폐하는 제 원수였습니다.”
[나라를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스트라는 필요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기에 그리했겠지.]“……사익을 위해 아스트라를 쳤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무엇보다 현재는 저와 제 가족에게 해를 가하지 않으셨고요. 해서 용서하겠습니다.”
[……미련하긴.]“알렉시스의 부친이기에. 그게 나를 위해 삶을 송두리째 바친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요.”
[사람은 어찌 끝에 가서야 후회하는 생물인지. ……고맙다.]진에 빛이 떠올랐다.
에스더가 흠칫 진에 다가왔다.
“어찌 되었습니까? 회복하실 수 있으십니까?”
“…….”
“마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신지요. 대가가 필요하다면 제 목숨을 써주세요.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조리 쓰셔도……!”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예?”
“해서 당신 곁에서 당신과 함께 저물고 싶다고 하셨어요.”
“…….”
에스더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쩌면 그녀가 나일 수도, 황제가 알렉시스였을 수도 있었다.
우리가 패배하였더라면, 그렇다면.
해서 나는 자비로워지기로 하였다.
“말씀하시면 그녀에게 전하겠습니다.”
[다른 이에게 할 말을 부탁하지.]“어째서요?”
[나를 잊고 행복하길 바라니까. 내 말 한마디가 족쇄가 되길 원하지 않아.]“…….”
[황후에게 미안하다 전해다오. 모후께도 존경했다 전해. 그리고 알렉시스에게…….]“…….”
[나와 달리 살라 전해다오. 응원하겠다 전하고, 아비보다 수백 배 나은 남자가 되라 전해줘.]“예…….”
빛이 지하를 온통 감쌌다.
황제의 육체 위로 기묘한 색으로 빛나는 사슬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내 균열음과 함께 부서졌고, 황제의 영혼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아, 나는 이제 어디든 갈 수 있겠구나. 이 무거운 금관은 나를 붙잡지 못할 것이다.]“폐하, 아아, 폐하……!”
에스더는 황제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오열했다.
그런 그녀를 황제가 감싸 안았다.
혼이나마, 남자로서.
황제가 아닌 남자로.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저것은 그에게도 해피엔딩일 것이다.
훗날, 기록은 말했다.
깊은 죄를 지은 황제이나, 제국을 사랑했노라고.
수천 년이 이어진 구민청을 지은 황제.
역사 속에 남은 명군과 명황후의 아비이자 시아비였다고.
* * *
황태후와 황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치유 의식으로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가 혼을 에스더에게 보냈구나. 노력해줬음에 감사하구나.”
“송구합니다.”
황태후와 황후가 빙그레 웃었다.
“무슨. 고마울 뿐이지. 한데 국상은 언제 치러야 하나…….”
“혼이 부서지면 육체도 함께 눈을 감을 것입니다.”
“언제로 생각하느냐?”
“생각보다 길겠던걸요. 1, 2년쯤으로 보고 있어요.”
“……율리우스가 그간 즐거운 여행을 즐기겠어.”
그때였다.
“알렉시스 섭정 드십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의식 얘기 중이었어. ……가 아니라, 얘기 중이었어요.”
“네가 언제 내게 공대했다고.”
“섭정이시니까.”
“오늘부터 아니야.”
“……뭐?”
알렉시스가 황태후의 앞에 산더미 같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황족 원로들의 허가까지 얻었습니다. 저는 섭정 위에서 내려와 후계 수업에 들어갑니다.”
“그래. 하면 섭정은 황후가 맡는 것으로—”
“아뇨.”
알렉시스의 단호한 말에 나는 움찔했다.
‘설마……!’
알렉시스가 빙그레 웃었다.
“엘리자베트 섭정을 뵙습니다.”
“……!”
황태후가 흠칫 놀랐다.
황후와 알렉시스는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황후가 말했다.
“이 아이가 즉위할 수 있을 때까지 나라를 맡아주셔요, 모후.”
“하지만 섭정의 역할은……!”
“모후께서 가장 걸맞으십니다.”
황태후는 곤란한 표정이었다.
제국을 다스리는 것은 황태후의 오랜 꿈이었지만, 황후를 밀어내고 섭정이 되는 것을 바라진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하면 이렇게 해요!”
“어떻게?”
“황태후 폐하께서 섭정을 맡으시고, 황후 폐하께서 지켜보시는 거예요. 잘하고 계시나, 좋은 길로 가고 계시나 지켜보는 거요.”
“…….”
황태후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황후는 후후 웃었다.
“그거참 좋은 생각이구나.”
“그렇지요?”
나와 황후가 까르르 웃고 있을 때, 알렉시스가 말했다.
“저와 황후 폐하께선 오래 자리를 비웠었습니다. 저희보다 훨씬 오랜 시간 황궁을 지켜오신 황태후 폐하께서 맡아주십시오.”
“……네가 즉위할 때까지 맡아두겠다.”
“다행입니다. 얼른 할머님께 맡기고 전 휴가에 가고 싶었거든요.”
“휴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알렉시스를 쳐다보자, 황태후와 황후가 후후 웃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는 내용인가 보다.
황후가 일어나 내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늦겠구나, 나가보렴.”
“네?”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대체 무슨 소리야!
당황하고 있는데 알렉시스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빠르게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가 향한 곳은 마차대기소였는데…….
“어?”
내가 타고 온 마차가 아니잖아!
아스트라 공작만이 탈 수 있는 흑단목 마차가 보였다.
그때였다.
“기다리느라 혼났다. 빨리 타!”
“이쪽으로 와.”
“아니, 여기 앉아.”
마차 창이 열리더니 발자크, 요슈아, 리시먼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으로 아빠와 엄마도 보였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당황해서 소리치니 알렉시스가 씩 웃었다.
“뭐긴 뭐야. 여행이지.”
“그러니까 왜……!”
“이제껏 바쁘게만 지냈잖아. 나흘 정도는 놀다 오자고.”
오라버니들이 킬킬 웃었다.
“웬일로 좋은 생각을 냈기에 동참했다!”
발자크가 마차 문을 열며 말했다.
요슈아는 빙그레 웃으며 뒤를 가리켰다.
“저쪽에도 사람이 잔뜩 있다고.”
“……누구?”
“리앙틴의 마차엔 밀란, 디오네라, 셀레네 등의 사촌들이 타고 있고, 콘라드의 마차엔 잔느, 그리고 네 하녀들과 미켈란, 한지혁, 이그리츠의 마차엔 기사들이 있고. 할아버지는 드뷔시 자작과 함께 가고 계시고.”
“뭐야, 진짜.”
“싫어?”
“……재밌겠다.”
내가 웃으며 알렉시스의 손을 잡자, 아빠와 오라버니들이 눈을 희번득 떴다.
“떨어져!”
“떨어져.”
“떨어지지 좀?”
“떨어져라.”
그때, 엄마가 아빠의 얼굴을 밀며 말했다.
“조용히 가자.”
“넌 괜찮으냐? 우리 딸을……!”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하니까.”
“사위는 무슨!”
엄마는 아빠의 얼굴을 한 번 더 밀어서 정리하곤, 내게 말했다.
“넌 황자와 함께 와라.”
“네!”
마차가 출발했다.
처음으로 맞는 휴가에 나는 잔뜩 들떴다.
마차에 타자, 알렉시스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뭐야, 왜?”
“여기가 좋아서.”
가라고 할 새도 없이 마차가 출발했다.
황궁 마차는 아주 빨라서 금세 거리를 지나 숲으로 접어들었다.
“와!”
호수가 보였다.
“마리한테도 보여주고 싶은데.”
“아퀼라와 이미 와있을걸.”
“정말?”
“그래. 여행 준비를 마리가 했으니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전부 모으자고 한 것도 그녀야.”
“역시 마리라니까.”
“역시 알렉시스라니까—는 아니고?”
그가 눈을 가늘게 떠서 나는 킥킥 웃으며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았다.
“역시 내 남자친구야.”
“……듣기 좋네.”
알렉시스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촉.
가볍게 입술을 맞붙였다.
나는 큼,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건 또 언제 배웠대.”
“너한테 배웠지.”
그렇게 말한 그가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반지 케이스였다.
“……그게 뭐야?”
“곧 네 성인식이잖아.”
아, 성인식 반지.
이 세계는 만 나이를 사용해서 열여덟부터가 성인이다.
알렉시스가 내 손에 반지를 끼워줬다.
“지난번과 디자인이 다른데?”
“용비늘과 특별한 원석이 들었어.”
“뭔데?”
“달리아의 부서진 육체에서 찾은 네 영혼의 조각.”
“……뭐?”
“네 어머니의 저주가 영혼의 조각이 부서지지 않게 지켜준 모양이다.”
“…….”
“만체 박사에게 물으니 이거라면 수호성을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거라더군.”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빠들을 다시 못 만날 줄 알았어…….”
“다시 만날 거야.”
“……고마워. 최고의 선물이야.”
나는 알렉시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 남자와 모든 유년을 함께했다.
슬플 때도, 즐거울 때도, 벅차게 행복할 때도.
나는 알렉시스에게 말했다.
“성인이 되면 결혼해줄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렉시스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소지었다.
“오래 전부터 너를 좋아했어.”
“오래 전부터 너를 사랑했어.”
아, 나는 정말로 틈 없이 행복했다.
앞으로도 이 남자와,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겠지.
이렇게 나의 어린 시절이 끝났다.
난 성인이 되어 또 다른 삶을 걸어갈 것이다.
또 다시 넘어지고, 다치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더없이 행복하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