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Three Year Old I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61)
이 3세는 악역입니다 61화.(61/390)
61화.
그 거대한 무게추가 라곤은 아니었다.
“으그, 끅…….”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앞쪽을 보니 어른들이 달려온 게 보였다.
맨 앞에 있는 사람은 우리 할아버지.
원래도 부드럽지 않은 얼굴이 이제 표정만으로 사람 하나는 가뿐히 죽일 기세로 흉흉해져 있었다.
“그 더러운 손 치워.”
우지끈.
“아악! 끄, 끄윽!”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하인의 팔이 뒤틀렸다.
짓눌려 있는 탓에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쌤통이다.’
“에릴로트!”
“아비노!”
할아버지와 함께 있던 아빠와 벨레인 왕자가 우리에게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벨레인 왕자는 내 품 안에서 축 늘어진 아비노를 끌어안았다.
아빠는 아비노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저 나를 살피느라 바빴다.
커다란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내 몸을 확인했다.
아빠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된 게냐.”
“저 하인이 아비노 님께 최면제를 먹였어요. 저한테 들키자 아비노 님을 납치해 도망치려고 했고요!”
내 말을 들은 벨레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우와.’
선이 진한 얼굴이지만, 인상이 좋아 보인다고 했던 것은 취소다.
알고 보니 엄청나게 무서운 얼굴이었다.
* * *
나는 회의장의 테이블 앞에 섰다.
아스트라의 2세들, 가신들, 알리기오사의 사람들이 긴 테이블에 주르륵 앉아 있었다.
수많은 눈이 모두 날 주목했다.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제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건 낮에 정원에서 함께 놀 때부터였어요.”
아니, 그때부터?
놀라워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2세들은 아마 자기 자식들이 아비노가 자신을 상대도 안 해준다고 징징거리는 말만 들었을 테니 더 놀란 듯했다.
“어떤 점에서 이상함을 느끼셨습니까?”
“제 강철 까마귀 몬스터, 라곤을 보신 아비노 님이 그러셨어요. 본인도 독수리를 길렀는데 사라졌다고요. 멋있어서 무척 좋아했는데 사라져서 슬프셨대요.”
내 말에 벨레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확실했다.
독수리는 내전 때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자세히 물어보니 기억이 안 난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으셨죠. 두통이 무척 심해 보였어요.”
“아비노 님의 독수리라면 내전 때 사라졌던…….”
아니나 다를까, 알리기오사의 사람이 내전을 언급했다.
“역시 그렇군요. 저는 처음에 내전 당시의 트라우마가 두통을 유발하는 거로 생각했어요. 책에서 그랬거든요! 그런데.”
나는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독수리 얘기를 하고 있던 저와 왕손님을 보는 저 하인의 눈이 희번덕거렸어요. 아비노 님이 아파하는데 별로 걱정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방으로 데려가기 바빴고요.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어요.”
“흐음.”
“그래도 만찬 때는 아비노 님의 컨디션이 좋아졌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찬이 끝나곤 하인이 약을 먹자고 아비노 님을 재촉했어요. 근데 아비노 님의 반응이 이상했어요.”
“이상하다고요?”
“보통 약을 먹고 아픈 게 사라지면, 그 약을 꺼릴 필요가 없지 않나요?”
“그렇지요.”
“꺼린다면 약이 쓰다거나, 역하다거나 하는 이유일 테고요.”
“맞습니다.”
내 논리적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비노 님은 그걸 먹으면 머리가 몽롱해지고, 멍해져서 싫다고 하셨어요.”
“정말 이상하군.”
어른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의 내 토크쇼를 감상하는 관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낮에 일으킨 두통에 관해 고민해보게 되었는데, 일전에 읽은 책의 내용이 떠올랐어요. 최면제를 오래 먹으면 그런 증상이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오, 어린 나이에 그런 어려운 책도 읽는단 말인가.”
누군가의 감탄에 아빠의 입가가 씰룩이는 게 보였다.
‘아이고.’
아빠, 지금은 자제하세요.
그런 눈으로 쳐다보자, 아빠는 다시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방으로 갔다가…….”
나는 어린애답게 염려되는 척 말끝을 흐리며 할아버지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렇다는군. 따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게.”
어른들은 혀를 내둘렀다.
“정말 영민한 아가씨입니다.”
“아직 열 살이라지요? 사려 깊은 데다가 상황 판단까지 빠르군요. 대단합니다.”
어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칭찬뿐이었다.
하긴, 여기서 나쁜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아무런 근거 없이 ‘그냥 아비노 왕손님이 보고 싶어서 방에 찾아갔어요!’라고 말해도 다들 칭찬을 해줄 상황인데.
앞뒤까지 딱딱 맞는 근거를 주니 아주 칭찬을 하라고 판을 깔아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린애가 세심하기도 하네요.”
“거기까지 추측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게다가 바로 행동에 옮긴 것이 기특한 일입니다.”
다들 내 칭찬을 하면서 조심스레 벨레인 왕자의 낯빛을 살폈다.
벨레인 왕자가 아비노 왕손을 지극히 아끼는 게 유명한 만큼, 그가 받았을 충격은 컸을 터.
벨레인은 탄식하며 양손을 모아 입을 가렸다.
보기 좋은 구릿빛 피부가 창백하게 질렸다.
엄청나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아들의 곁에 둔 오랜 하인이라면 벨레인 왕자의 철저한 검증을 통과한 사람이었을 터.
소중한 아들을 믿고 맡겼던 자가 사실은 아들에게 최면제를 먹이고 있던 악한이라니.
심지어 이번에 밝혀지지 않았더라면 언제 밝혀졌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이다.
최면제를 최대로 장기 복용해도 되는 기간은 얼마일까?
하인이 아비노를 되찾은 후부터 약을 먹였다면 근 1년간 최면제를 먹인 셈이다.
‘어린아이의 몸에 얼마나 부담이 되었을지.’
벨레인 왕자의 눈이 촉촉하게 물드는 것을, 사람들은 적당히 모른 척해주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그렇게나 사랑하는 외아들인데, 더 늦기 전에 밝혀지게 되어서.’
나는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약하다.
아빠를 떠올리게 해서.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벨레인 왕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맞추고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정말 고맙구나.”
“아비노 님이 무사해서 천만다행이에요!”
“영애도 무서웠을 것인데. 어떻게 이토록 작은 몸으로 아비노를 도와줄 수 있었던 것이냐.”
벨레인 왕자는 정말 기특하고 감사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헤헤, 웃고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빠, 앗, 제 아버님은요. 제가 건강한 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일이래요.”
“…….”
“아비노 님이 건강하셔야 벨레인 님도 기쁘세요. 소중한 귀빈을 행복하게 하는 게 초청한 자의 역할이라고 배웠어요. 드뷔시 자작에게.”
“…….”
“저, 할아버지의 손녀니까 열심히 했어요!”
아빠를 넘어, 드뷔시 자작을 찍고, 마무리로 할아버지까지.
‘좋은 릴레이 아부였다.’
나는 속으로 킥킥 웃었다.
가신들의 표정에선 기시감이 들었다.
‘저 표정은 우리 관할령 관리들이 날 볼 때의 표정인데.’
울망울망한 눈망울 속에 가득한 감동과 애정.
난 힐끔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미소 짓던 할아버지가 내 시선에 흠칫! 하고 다시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기분은 괜찮아 보여.’
그리고 아빠는…….
아빠를 보다가 난 움찔했다.
‘그렇게까지 감격할 건 없는데.’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만 없다면 뭐라도 부숴버릴 것만 같은 아주 강렬한 감동이었다.
알리기오사 사람들의 시선도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정말 대단한 아가씨입니다…….”
내 말에 이미 감동했던 알리기오사 사람들도 한 번 더 감동한 게 보였다.
눈썹이 축 늘어져서 좀만 콕콕 찌르면 눈물을 뚝 흘릴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손수건에 눈물 찍는 사람이 있네?’
저 사람은 신파 영화 한 번 보여주면 눈물을 줄줄 뽑을 게 분명하다.
그들은 한참 나를 칭찬하더니 곧 칭찬의 대상을 아스트라로 넓혔다.
“저희가 아스트라의 소문에만 휘둘려 이토록 아름다운 본질을 몰라봤군요.”
“벨레인 님께서 아스트라와 거래를 하시겠다고 고집하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정말이지 이 은혜를 어찌 갚을는지…….”
나는 수줍은 척 뺨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은혜를 어찌 갚냐고?
갚을 방법이 다 있지.
‘백수정 좀 저렴하게 줘!’
기왕이면 우리 아빠랑 협상해주고.
오늘 공로는 절대 잊지 마.
쿵.
쿵, 쿵.
어딘가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바로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관할령에 새로운 병원들이 지어지는 소리였다.
* * *
에릴로트가 뒤늦게나마 잠을 청하러 회의장을 나가고.
벨레인은 제 품에 안긴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방으로 돌려보내서 재우면 되는데 도저히 손에서 뗄 수가 없어서 데리고 있었다.
자신의 재킷을 덮고 새근새근 잠이 든 아비노.
아직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어린 얼굴을 보자 눈물이 왈칵,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이미 한 번 지켜주지 못했던 아들이다.
‘이 무능한 아비 때문에 네가…….’
이번에도 잃을 뻔했다.
만약 에릴로트가 나서서 납치범을 잡지 않았더라면 아비노는 어디로 가게 되었을까?
만약 아비노가 최면제를 복용하는 것을 에릴로트가 알아채지 못했더라면, 아비노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을까?
맨바닥에 쓰러져서 에릴로트의 품에 안겨 있던 아비노를 다시 떠올리니 심장이 철렁,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멎는 것도 이것보단 아프지 않으리라.
“……아비노.”
벨레인이 축축한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모두가 숨죽인 채 아들을 잃을 뻔했던 아비의 슬픔에 공감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꼭 눈치 없는 놈 한 명은 있는 법이다.
그건 바로 발데릭.
조프리의 아빠였다.
다들 입을 다물고 쥐 죽은 듯 조용히 기다리는 와중에 발데릭이 입을 열었다.
“허허. 이렇게 좋게 마무리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백수정에 관해 논의를 해볼까요.”
째릿!
사람들은 경악하여 발데릭을 노려보았지만 벨레인이 슬픔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무리를 이끄는 왕자님이 그럴진대 알리기오사 사람들이 별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회의장은 협상을 위한 자리로 탈바꿈했다.
“네, 그럼…….”
발데릭은 이번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눈이 벌게진 상태였다.
에릴로트 때문에 관할령의 반, 그것도 알짜배기 영지를 잃고 재정에 큰 손실을 얻은 지 몇 년.
그 뒤로 데이몬드가 신나게 땅따먹기를 하여 관할령을 키운 바람에 발데릭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거래를 성사시켜 공을 세워야만 했다.
발데릭의 눈이 탐욕으로 반들반들하게 빛났다.
“뭐, 저희도 그리 욕심을 내는 건 아닙니다.”
거래에 능숙한 척, 유창한 화술을 지닌 척.
발데릭은 서론을 길게 늘이다가 본론을 말했다.
“매년 10캐럿 이상의 백수정 700개만 보장해주신다면, 단가는 시세보다 높게 드릴 수 있습니다!”
“네? 700개요?”
알리기오사 사람이 난색을 보였다.
“500개도 힘들다고 말씀드린 바 있는 줄 압니다만…….”
아까 알리기오사 사람들은 술자리에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백수정 500개도 공급이 힘들다고 말이다.
그런데 700개?
‘이게 될까.’
‘괜히 밀어붙였다가 거래 자체가 무산되는 건…….’
다른 2세들이 차마 같은 편인 발데릭을 욕하지는 못하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스트라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스트라 공작은 화를 참으며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곤란한 일이 있으면 자신부터 찾고 보는 꼴들이 한심했다.
침묵하고 있던 벨레인 왕자가 입을 열었다.
“……그 제안보다 더 좋은 제안을 드리겠소.”
“더 좋은 제안 말씀입니까? 혹시 백수정 800개?”
발데릭이 호들갑을 떨며 말을 받았다.
그러나 벨레인 왕자는 발데릭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벨레인이 바라보는 건 아스트라 공작.
그리고.
“아스트라가 이 대륙의 백수정 유통 거점이 되어주시오.”
벨레인의 말에 알리기오사 사람이며 아스트라 사람들 할 것 없이 모두 입을 쩍 벌렸다.
“……!”
“……!”
“……!”
뭐?!
소리 없는 외침이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알리기오사는 세계의 백수정 공급량 90퍼센트를 책임지며 전 세계 백수정 물량을 조절할 수 있는 막강한 국가다.
그런 알리기오사에서 아스트라에게 대륙의 유통 거점이 되어달라고 한다?
그 뜻은 이 대륙에 공급될 모든 백수정을 아스트라와 독점 거래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와, 왕자님! 그건……!”
“조금 더 상의하신 후에……!”
“아직 황도로 가지도 않았는데!”
제일 패닉인 것은 알리기오사 사람들이었다.
아스트라 사람들도 황홀한 제안에 놀라 자빠질 뻔하긴 했지만, 무조건 이득인 일이니 거절할 리가 없다.
쾅!
발데릭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발데릭의 얼굴엔 탐욕이 줄줄 흘렀고, 그의 눈엔 성공했다는 기쁨이 가득했다.
“물론─!”
발데릭은 그 짧은 순간 황홀한 꿈을 꾸었다.
이번 백수정 협상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람은 바로 발데릭 아스트라, 자신이다.
‘그러니 당연히 공도 이 발데릭에게……!’
그때 벨레인의 단호한 목소리가 발데릭의 상상을 잘라내었다.
“단.”
벨레인은 아스트라 공작을 보았다가 데이몬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스트라 공작은 이미 예감했다는 듯 피식, 미소 짓고 있었다.
“이 거래의 총책임자는 데이몬드 아스트라여야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