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Three Year Old I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64)
이 3세는 악역입니다 64화.(64/390)
64화.
아까 하녀가 몰래 뽀뽀하려고 할 때에.
뒷말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하지만 블리젠은 내 뜻을 알아듣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야. 하녀가 뽀뽀하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자는 척 눈 감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아하, 저 애를 좋아하는구나. 방해해서 미안.”
썸 타는 남녀 사이에 괜히 끼어들었다.
눈치 없이 굴었네.
하녀가 민망했겠다.
빠른 사과와 함께 지나가려는데,
“아니.”
블리젠의 부정이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천천히 블리젠을 돌아보았다.
“응?”
“좋아하지 않아.”
저 하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왜 몰래 뽀뽀하는 걸 내버려 둔 거야?”
“글쎄.”
블리젠이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야성적인 아빠, 발자크와는 다른 나른하고 치명적인 매력이 블리젠에게 있었다.
블리젠이 눈을 휘자 루비 같은 눈이 반쯤 가려졌다.
“장미가 브라운 벨벳에서 테레시카로 바뀌었다는 걸 알려준 게 저 애니까?”
“…….”
가느다랗게 휘는 눈매처럼 모양 좋은 입술도 그림 같은 호선을 그렸다.
과연 아까 그 하녀가 넋을 놓고 탄식한 이유를 알겠다.
이렇게 청량하고 맑은 숲속에서 햇살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블리젠에게서는 나른하고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러나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었다.
말의 내용이었다.
나는 팍 인상을 찌푸렸다.
‘이 청소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대가를 받고 신체를 내주는 건 좋지 않아. 아주.”
“…….”
“그게 고작 뽀뽀라고 해도 말이야!”
내 말이 의외였던 듯 휘어있던 블리젠의 눈매가 살짝 커졌다.
그렇다고 딱히 반격하려 들지는 않아서, 나는 조금 더 설명했다.
“작은 거에 익숙해지면, 언젠가는 선을 넘고 말아.”
“…….”
“너무 멀리 갔을 때 알게 되면 돌이키기 너무 힘들어져.”
나는 엄숙한 목소리로 블리젠을 따끔하게 혼냈다.
“나중에 후회해 봐야 지나간 시간은 붙잡을 수 없단 말이야.”
블리젠은 그런 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쿡쿡 웃었다.
“뭐야.”
“너는 사촌들 중에서도 어린 편인데, 제일 어른스러운 말을 할 때가 있어.”
아차.
나는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열 살다운 앳된 목소리로 귀엽게 덧붙였다.
“─라고 아빠가 그랬어.”
“백부님이?”
아, 택도 없었나?
“응! 우리 아빠가!”
살짝 눈을 크게 뜬 블리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이내 끄덕였다.
“그렇지. 맞는 말이야.”
진짜로 납득…… 한 건가?
‘다행이다.’
슬쩍 눈치를 봤지만 블리젠의 얼굴에서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요슈아도 표정이 풍부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블리젠보다는 더 알기 쉬운데 말이다.
“그런데 말이야.”
“응?”
블리젠은 내가 너무 큰 오해를 하기 전에 조금 더 상황을 설명해줬다.
“저 애는 그렇게 용기 있는 애가 아니야. 바짝 들여다보는 정도로 설레하다 도망가는 정도지.”
그래서 가만히 놔두었다는 건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나쁜 건 나쁜 거고.”
블리젠이 내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받았다.
나는 거기다 덧붙였다.
“맞아! 왜냐면, 뽀뽀하려고 했단 말이야!”
나도 안다.
뽀뽀한다고 뺨 안 닳는 거.
입술끼리 안 닳는 거!
‘그치만 입술 뽀뽀는 베이비 키스잖아.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야지.’
적어도 블리젠의 나이엔 그렇게 생각해야 맞다.
바짝 들여다보기만 하려 했다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블리젠은 열을 내는 내가 재밌는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둔 재킷을 들고서 풀을 털어낸 뒤 손을 바지에 슥슥 닦았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발자크가 세게 쓰담쓰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마치 손끝으로 간질이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내가 반응을 못 하는 사이, 블리젠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고맙다.”
“…….”
블리젠은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나는 홀로 남아 내 머리를 매만졌다.
아직까지 그가 쓰다듬은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진짜 알 수 없다니까.’
사촌들 가운데 제일 어려운 사람이 바로 블리젠이다.
불편하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어려웠다.
아빠를 닮은 얼굴 자체는 좋아하는데.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머리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푸르르 털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라곤만 보고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지.
* * *
라곤과 실컷 놀아준 뒤, 나는 데이몬드 관할성으로 돌아왔다.
아빠 집무실에 가자 아빠는 유심히 지도를 들여다보고 계셨다.
지도 옆에 잔뜩 놓인 서류에는 나라별 귤 산출량이 적혀져 있었다.
‘설마…….’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맞는 거 같다.
지난번에 내가 좋아한다고 포도를 잔뜩 가져왔던 것처럼, 이번엔 귤을 잔뜩 가져올 계획을 짜고 계신 거다.
‘……귤의 최대 산지국을 정벌하는 방법으로.’
그러지 말라고요!
하지만 이럴 때 대놓고 말하면 아빠가 시무룩해 할 게 뻔하다.
나는 집무실 책상에서 잘 보이는 소파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그리고 무심하게 지나가듯 말했다.
“아빠, 이제 과일은 그만 가져와도 될 것 같아요.”
아빠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무공상을 받지 못했는데?”
무공상을 받으면 작위를 수여 받는다.
어떤 작위를 받는지는 경우에 따라 달랐다.
하지만 아빠는 아스트라 공작가의 아들이니 적어도 자작, 운 좋으면 백작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럼 작년에 백작위를 받은 그리미에 백부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지.’
더 이상 허울 좋은 장군 소리는 안녕이다!
하지만—
‘그걸 노리느라 자꾸 다쳐서 오는 건 싫어.’
속상했다.
내 빛나는 플래티넘 메달도 아빠에게 작위를 주진 못한다.
3세들 중 제일이라는 서열 1위도 그저 3세들 사이의 일이다.
지금 아빠는 그나마 내 가호 덕에 버프를 받고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 된 상황이니까.
그렇지만 그게 과연 언제까지 갈까?
‘주인공 버프가 언제까지 이어지진 않아. 소설의 진행이 위기 단계로 넘어갈지 모른다고.’
주인공에겐 버프만 있는 게 아니다.
위기도 있고 고난도 있다.
장애물도 있고, 크게 마음에 상처 입을 일도 생긴다.
읽는 사람조차도 가슴이 벌벌 떨릴 정도로 엄청난 고난이 한 번쯤은 꼭 찾아온다.
‘만약 그런 위기가 아빠에게 닥친다면—’
정이 많지 않은 아빠에게 닥칠 위기는 몇 가지 없다.
나나 쌍둥이들, 아니면 본인의 큰 부상…….
‘그만 생각하자!’
상상만으로 끔찍해서 나는 얼른 생각을 끊어냈다.
“귤은 됐어요. 이제 백수정이 있잖아요. 드뷔시 자작이 그러는데요. 요새 황도에서 아빠 이름이 화제래요.”
그러니 지금 이 시기에는 다른 나라로 원정을 떠나는 것보다 황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게 더 좋을 수 있다.
대단하다는 명성에 쐐기를 박는 것이다.
아빠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챘다.
“황도라…….”
아빠가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댔다.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하신 거다.
‘우리 아빠는 한참 어린 딸의 말이라도 귀담아 들어주고 성실하게 생각해주신다니까.’
참 좋은 아빠다.
객관적으로도 그렇지만, 주관적인 내 입장에선 정말 최고의 아빠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빠를 지켜보니 괜히 가슴이 간지러웠다.
아빠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좋은 시기를 놓치는 게 아깝긴 하지.”
됐다!
나는 은근슬쩍 귤 산출량이 적힌 서류를 저 멀리멀리로 밀어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황도에 가서 아빠 친구들을 만나보면 어떨까요?”
“……?”
아빠가 물음표를 띄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리낄 것 없이 아주 당당한 시선이었으나—
‘본인에게 친구가 어디 있냐는 얼굴인데.’
“…….”
난 잠시 침묵했다.
‘괜찮아, 뭐. 나도 없잖아.’
아스트라 장원에만 사는데 친구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아빠는 나와 다르지!
“아카데미를 함께 나온 삼촌들이요!”
아빠는 할아버지랑 사이가 무지무지 안 좋아서 일찍부터 혈족 교육을 받지 않고 뛰쳐나갔다.
7년 전만 해도 저 능력에, 저 무공을 가진 아빠가 가장 한미한 관할령을 다스리던 것도 그 이유가 컸다.
혈족 교육을 받는 대신 아카데미로 간 아빠는 아카데미에서 삼촌들을 만났다.
그리고 삼촌들은 전부 다 중앙 귀족들이었다.
아빠는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난 알고 있다.
‘그쪽에선 아빠를 친구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삼촌들 중엔 첫 번째 삶에서 날 도와준 사람도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끈 떨어진 연 신세인 날 도와줘서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아빠의 물음에 난 움찔했다.
“코, 콘라드가 그랬거든요.”
“콘라드 마르시알인가…….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내 말에 아빠는 생각에 잠겼다.
삼촌들은 다들 권세가들이니 확실한 인맥으로 굳혀 두면 좋을 거다.
“생각해 보마.”
그 말은 곧 내 말대로 하겠다는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아빠는 나한테 너무 약하니까.
“네!”
나는 힘차게 대답하곤 일어났다.
보는 척만 했던 책을 얌전히 책장에 넣어 두었다.
한 장도 읽지 않아서 정말 민망하네.
여하튼, 이제 잘 시간이라서 올라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빠가 날 불렀다.
“에릴로트.”
“네.”
나는 양팔을 벌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는 아빠에게 도도도 달려갔다.
포옥.
아빠가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나는 익숙하게 아빠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빠 냄새.’
굿나잇 포옹을 하고 우리 부녀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좋은 꿈 꿔라.”
“아빠도요.”
정이 넘치는 인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왔다.
통신석이 빛을 내며 울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울리고 있었던 거지?’
나는 놀라서 재빨리 받았다.
“에릴로트입니다.”
[미켈란입니다.]와!
‘기다렸던 연락이었어.’
일전에 내가 미켈란에게 명했던 것이 있다.
탈로스 백작에 관해 조사해달라고 한 것이다.
어떻게 그가 아스트라의 장남인 그리미에 백부를 제치고 중앙탑에 입성하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막막한 명령이지만 미켈란은 아쉬운 소리 없이 명을 따라주었다.
나는 기대감을 품고 물었다.
“어떻게 되었어?”
[정보를 까다롭게 관리해서 자세한 일을 알아내는 데엔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그런데…….]미켈란이 잠시 침묵했다.
뭔가 말하기 꺼려지는 정보를 접했나?
“왜?”
[탈로스 백작이 지난달에 노아리젠 님을 만났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노아리젠?
노아리젠 아스트라?
‘노아리젠이라면…… 블리젠의 아버지잖아.’
노아리젠은 아스트라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남자였다.
그는 고모가 돌아가시고도 아스트라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고모가 맡았던 아스트라의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들었다.
“탈로스 백작과 노아리젠이라. 이런 상황에 두 사람이 접선했다니……. 구린데?”
[노아리젠 님 쪽도 파볼까요?]“응.”
[알겠습니다.]나는 통신을 종료하고 팔짱을 꼈다.
‘흠, 생각지도 못하게 여기서 고모부가 튀어나오네.’
하필 오늘 블리젠과 숲에서 기묘하게 마주쳤던지라 기분이 이상했다.
똑똑.
한창 고민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이 활짝 열렸다.
“야식 먹자!”
쌍둥이들이 기운차게 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들고 있는 트레이에는 탱글탱글한 청포도가 잔뜩 담겨 있었다.
“좋아.”
우리는 침실에 있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포도를 집어먹었다.
발자크가 내 입에 포도알을 쏙쏙 넣어 주었다.
잘 익은 청포도 껍질이 잇새로 터지며 새콤달콤한 과육이 입안에 가득해졌다.
‘달다!’
시원하고 달고. 정말 맛있다.
맛을 음미하며 먹고 있는데 이번엔 요슈아가 한 알을 내 입에 쏙 넣어 주었다.
받아먹는데 이번엔 발자크가 넣어 주었다.
이번엔 또 요슈아.
다음엔 발자크.
넣어 주고, 또 넣어 주고.
또또.
또또또 넣어 준다.
‘으윽!’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더 이사 모 히어. (더 이상 못 씹어.)”
발자크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난 네가 다람쥐 같아지면 벽을 부수고 싶어져. 왜지?”
“……나호 모라. (……나도 몰라.)”
모르지만, 벽은 그만 부쉈으면 좋겠다.
나는 피곤한 눈으로 발자크를 바라보았다.
터질 것 같은 입을 어떻게든 오므려서 열심히 씹고 있는데 요슈아가 중얼거렸다.
“노아리젠 고모부라…….”
포도를 먹으며 탈로스 백작과 노아리젠 고모부에 관해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발자크는 별로 도움 안 될 것 같고, 요슈아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얘기했다.
아니지, 발자크도 의외로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저번에 벨레인 왕자 일행이 탄 배가 국기를 달지 않고 항구에 들어왔다고 했을 때처럼 말이다.
물론 본인은 모르지만.
일단 나는 요슈아에게 집중했다.
“어떻게 생각해?”
“노아리젠 고모부의 평은 좋아. 성격 좋고 털털하고. 데릴사위라 후계 쟁탈전과도 상관이 없어서 다른 친척들과 잘 지내지.”
“마법사라 이용하기도 좋고.”
발자크가 덧붙였다.
두 사람의 말대로였다.
노아리젠은 꽤 실력 있는 마법사였다.
할아버지가 연구소에 자리를 줄 만큼.
‘하지만 지난 생에서도 딱히 문제 있던 사람이 아닌데.’
이번 생에서 노아리젠 고모부와는 마주친 게 다섯 번도 되지 않는다.
블리젠에 관해 모르는 것보다 더.
나는 노아리젠 고모부에 대해서 잘 모른다.
아스트라 사람들이 꽤 좋아한다는 것만 알지.
‘그런데 탈로스 백작과 결탁했다고?’
대체 왜?
탈로스 백작이 그렇게 좋은 끈은 아닐 텐데.
‘심지어 할아버지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잡을 끈은 절대 아니지.’
할아버지는커녕 그냥 아스트라의 2세들과 비교해도 현저히 떨어지는 끈이다.
‘뭔가 구려.’
구린 냄새가 날 때는 더 파봐야 한다.
거기에 묻혀있는 게 뭔지 파악해야 하니까.
아니면 땅이 전부 썩어서 온 밭을 갈아엎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정보가 더 필요했다.
‘블리젠 쪽을 한 번 캐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