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Three Year Old Is a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72)
이 3세는 악역입니다 72화.(72/390)
72화.
‘이거…… 그건가, 설마?’
첫사랑 같은 거.
그래서 아빠를 슬쩍 올려다봤는데.
아빠는 있는 힘껏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건 아닌가 보네.’
그러고 보니까 떠오르는 게 있다.
‘아……. 아빠한테 황녀님이 매달린 적이 있다고 했지.’
아빠 때문에 2층에서 뛰어내렸던 황녀님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 황녀님이 이 선황녀님인가?
추측이 맞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하하 호호 웃고 있는데, 이쪽은 어떻게든 모른 척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 선황녀님이로군.’
그래도 이렇게까지 지긋지긋하단 표정은 좀 그렇다.
나는 슬쩍 아빠의 소매를 쥐고 살살 흔들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아빠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런 모습을 본 선황녀가 깜짝 놀라 날 쳐다봤다.
“아아.”
그러곤 울망울망한 눈빛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움츠린다.
‘아빠를 보고 울먹이는 건 알겠지만, 날 보곤 왜?’
저러다 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황비가 나섰다.
황비는 미간을 좁히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불편하면 오찬엔 참석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고 칠 거면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뇨. 가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선황녀의 시선은 아빠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오찬이 시작되었다.
접시가 하나둘 테이블 위로 올라왔고, 이윽고 화려한 음식들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발자크는 스푼을 들기 전부터 돌아가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오찬에, 만찬에……. 식사 좀 그만 같이할 수 없어? 사이 안 좋은 혈족이 맞는 거냐고.”
발자크가 목소리를 낮추고 투덜거리자, 요슈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잘 좀 해. 선황녀가 이쪽을 보고 있잖아.”
“우리한테는 시선도 안 주고 아버지만 보고 있는데?”
“……아무튼.”
정말로 그랬다.
나는 샐러드를 포크로 쿡, 찌르면서 흘낏 선황녀를 쳐다봤다.
숙모들이 양쪽에서 종알종알 말하고 있는데, 개코도 관심 없어 보인다.
그저 아빠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 한번 애절하다.’
가슴 절절한 눈빛 공격에도 묵묵한 아빠가 대단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리시먼드가 아빠에게 물었다.
“관할령으로 언제 가실 겁니까?”
“바로.”
“시전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가호 시전 준비까지 해두겠다고 하는 걸 보면, 리시먼드의 눈에도 선황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을 나가자마자 <이동>해라.”
마차도 버리고 가버릴 셈인가 보다.
리시먼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결계 때문에 걸릴 텐데요.”
“내가 분해를 하든, 부수든 하지.”
삼형제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저렇게까지 짜증 난 아빠가 재밌는 모양이었다.
발자크가 실실거리며 말했다.
“그만하라고 말씀하시죠?”
“벌써 수십 번은 얘기했지.”
리시먼드도 목소리를 죽였다.
“황궁에 항의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항의서만 네 번을 오갔어.”
요슈아는 아빠에게 말하지 않는 척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더는 달라붙지 못하게 확실히 체면을 뭉개줘야 하지 않을까요.”
“침실에서 뛰어내─”
─까지 말한 아빠는 내 양쪽 귀를 막고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입 모양으로 다 보인다.
“2층이긴 하지만 침실에서 뛰어내린 사람이다.”
“음, 체면이 있을 리가 없군요.”
오라버니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쌍둥이도 인기가 많고, 리시먼드는 꽤 수준 높은 진상 고백을 듣는 편이었는데도, 선황녀 정도의 난리 통은 끔찍한 모양이었다.
발자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이렇게 된 거 팔자려니 생각하시고 만나주는 것도…… 는 농담이었습니다, 아버지.”
낄낄거리며 말하다가 아빠의 살벌한 눈빛을 보고 얼른 말을 돌린다.
‘빨리 돌아가야겠네.’
아빠가 너무 지긋지긋해하니까.
‘이러다 사고 날라.’
하지만 아빠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오찬이 끝나고 막 나서려던 때에,
“네가 에릴로트니?”
─하고 선황녀가 아련한 눈으로 내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복도로 나가려던 우리 가족이 가로막힌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예, 선황녀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릴로트 아스트라입니다.”
“그렇구나. 네가…….”
선황녀는 체면도 잊은 건지, 무릎을 굽히고 날 올려다봤다.
누가 보면 잃어버린 딸이라도 찾은 줄 알겠다.
황비는 그런 선황녀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긴. 나도 어이가 없는데, 같은 황족들은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살바토레 황자까지 어이없어하네.’
짙은 한숨을 내쉰 황비가 선황녀에게 말했다.
“선황녀.”
“네, 언니.”
“여정이 고되지 않았나요?”
제발 방에 가서 쉬라는 뜻으로 들린다.
다들 의미를 눈치채고 있는데, 선황녀만이 여전히 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강적이네.’
눈치가 없는 걸까, 없는 척을 하는 걸까.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황비도 저 순백의 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입술을 질끈 문 황비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풍요제 준비도 해야 하고요.”
“괜찮아요.”
“잘 도착했다는 것을 모후께 말씀드려야지요.”
“밤에 해도 충분해요.”
나는 눈만 굴리며 그녀들의 설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아빠가 나섰다.
“이만 관할령으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벌써 말인가요……?”
“예.”
“일이 많으신가 봐요…….”
“예.”
“잠시도 시간을 못 내실 정도인가요……?”
“예.”
아빠의 단호한 철벽에 선황녀의 눈썹이 늘어졌다.
무척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가 주변에 있던 숙모들에게 물었다.
“그럼, 에릴로트 양의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숙모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발데릭 숙부의 아내인 숙모가 대답했다.
“다른 얘기를 들은 건 없습니다. 지금은 휴식기이기도 하고……. 그렇지, 에릴로트?”
거기에 할 말이 없어서 잠깐 대답을 지체했다. 그러자 선황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럼 내 말 상대가 되어주지 않겠니?”
눈치 없는 발자크조차 ‘우와…….’ 하는 얼굴로 선황녀를 쳐다봤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냐는 표정이었다.
굳이 아빠한테 묻지 않고, 숙모들에게 내 일정을 물은 이유야 뻔하다.
아빠라면 단호히 바쁘다고 할 테니까.
저러는 거 보면 눈치가 아예 없는 것 같진 않은데.
‘숙모들이 일정이 없다고 말한 바람에 거절할 수 없게 됐네.’
아빠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러다 폭발하겠다.
폭발하게 놔두기엔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다.
가신들, 2세들, 심지어는 황족의 궁인들까지.
선황녀는 황제의 동복누이였다.
황제가 아끼는 동생에게 망신을 줄 순 없다.
게다가 지금은 아빠에게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나는 얼른 대답했다.
“말동무로 삼아주신다면 영광이에요!”
“어머나, 기뻐라.”
기뻐하는 선황녀와 달리 아빠는 인상을 찌푸렸다.
“에릴─”
여기서 아빠가 거절하게 되면, 저 딱따구리 같은 숙부와 숙모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 거다.
황족에게 무례했다느니 뭐니 하면서.
그렇게 되도록 두고 볼 순 없어서 난 얼른 말했다.
“겨울에 황태후 폐하의 티 살롱에 가잖아요. 그 전에 황궁 얘기를 많이 듣고 싶어요!”
“…….”
아빠는 내가 티 살롱을 매우 기대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는 반대하지 못했다.
선황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가 아빠에게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늦지 않게 돌려보내겠습니다.”
아빠가 눈을 반짝이는 날 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흘렸다.
“……부탁합니다.”
선황녀는 깜짝 놀라서 아빠를 쳐다봤다.
이런 말은 한 번도 들은 적 없던 모양이다.
하긴, 내가 3살 때만 해도 아빤 벼린 칼날 같은 사람이었다.
선황녀와 만난 건 그보다 훨씬 전일 텐데, 얼마나 더 날카로웠겠는가.
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딸 앞에선 아무 말도 못 하니, 신기할 만도 하다.
선황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이 “……네.” 하고 대답했다.
* * *
물론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선황녀의 말 상대가 정말로 나뿐인 건 아니었다.
고모들, 숙모들, 심지어는 3세 여자애들까지도 주변에 빼곡했다.
“승마를 아주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게 굉장한 서러브레드가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차는 어떤 것을 즐기시는지요.”
“저희 남편이 황궁에…….”
다들 환심을 사려고 안달이었다.
‘그럴 수밖에.’
지금은 아주아주 중요한 시기니까.
중앙탑 입성자로 내정되어 있던 탈로스 백작이 사라졌다.
‘그럼 이제 중앙탑에 자리 하나가 비었다는 말이지.’
다들 그 자리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중앙탑 입성을 결정하는 건 황제지. 그런데 선황녀는 현황제가 아끼는 누이고.’
그러니 황제와의 통로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황제는 황비가 정치에 발 들이는 걸 싫어하니까, 황비에게 부탁할 순 없을 것이다.
‘지금이 기회야!’ 하며 몰려든 게 분명하다.
으휴, 한탕 크게 해 먹어 보려는 기회주의자들.
그리미에 백부가 외무 대사로 임명되었을 때 그렇게 축하한 이유도 알겠다.
‘그리미에 백부를 외무 대사 같은 자리에 처박아두고, 자기는 중앙탑에 들어가려는 거겠지.’
직계들의 모든 행동의 끝엔 아스트라 공작위를 얻는 것이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발데릭 숙부의 큰딸인 로레이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선황녀님, 제 아버지께서 이번에 물놀이용 배를 사주셨답니다. 배 위에서 보는 강 풍경이 아주 멋져요.”
“그렇구나.”
“괜찮으시면 뱃놀이는 어떠신지요?”
로레이나가 한껏 친절하게 말해도 선황녀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무슨 좋은 생각이 머리에 스쳤는지 바로 날 쳐다본다.
“그래! 에릴로트는 어떻지?”
“네?”
“뱃놀이를 좋아하니?”
“아……. 네.”
나는 하하, 간신히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선황녀가 밝은 얼굴로 로레이나를 빙글, 돌아보며 말했다.
“배를 빌려주겠어? 에릴로트와 함께 가면 무척 즐겁겠지.”
빌려달라는 건, 로레이나는 데려가지 않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순간, 로레이나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왜 그렇게 봐. 난 아무런 말도 안 했어!’
배를 타고 놀자고 한 건 저쪽인데, 말한 사람은 쏙 빼고 다른 아이와 놀 테니 배만 달라고 하다니.
당연히 무례한 일이었다.
그러나 로레이나는 이내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감췄다.
테이블 아래로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원하신다면 당연히요.”
“잘 됐구나. 에릴로트, 그렇지?”
‘난 싫은데!’
이 세계의 사교계는 마술 상자 같은 곳이다.
천을 넣었으면 비둘기가 나온다.
[단둘이 나들이를 갔다. → 선황녀와 데이몬드의 딸이 그렇게 친한 사이? → 설마 선황녀가 데이몬드와 결혼이라도 하는 건가!]─로 맥락 없이 소문이 부풀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안 되지.’
고모, 숙모들, 3세들까지 전부 선황녀를 권력으로 가는 발판으로 삼은 모양인데,
‘완전히 틀린 생각이에요.’
암만 황족의 눈에 들어서 중앙탑에 입성해봐라.
할아버지가 후계로 삼아주나.
‘황족의 비위를 맞춰서 얻어낸 자리를 할아버지가 기꺼워할 리가.’
그것도 황제조차 아닌 선황녀의 비위를 맞춘 건데.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아무튼 뱃놀이는 안 돼.’
그렇게 생각한 난 눈썹을 착! 늘어뜨렸다.
선황녀도 한 늘어뜨리기 하는 모양인데, 이건 사실 내 쪽의 특기였다.
난 너무나 아쉬운 표정으로 선황녀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선황녀님.”
“……뭐?”
“몸이 안 좋아서.”
콜록콜록.
마른기침까지 하며 열연을 펼치자, 선황녀가 “어머나.” 하며 내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몹시 마음이 아프다는 듯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이 계절에 감기라니. 역시 챙겨주는 어머니가 없어서 그런 게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이렇게 하자. 내가 아스트라 령에 자주 들려 너를 챙겨주마.”
“네?”
“너는 나를 어미처럼 여겨도 돼.”
그러며 우후훗 웃는데, 나는 하마터면 굳어질 뻔했다.
‘이 선황녀님이 뭐라는 거야?’
스케치북처럼 순백으로 텅텅 빈 머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왔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비어있을 줄은 몰랐다.
‘남들 다 듣는 데에서 대체 무슨 소리를…….’
누가 들으면 선황녀가 아빠의 연인이라도 되는 줄 알 것이다.
당연히 분위기는 묘해졌다.
숙모들이 저마다 수군거리고, 3세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그런데도 선황녀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내게 이런저런 디저트를 챙겨주며, 아주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아주 귀여워, 에릴로트. 물론 그분의 딸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걸 이렇게 대놓고 말한다고?’
나는 황당해서 대꾸하지 못했고, 선황녀는 이제 날 아빠 보듯이 아련하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보자마자 느꼈거든.”
“…….”
“그분이 만약 나와 아이를 낳았다면 딱 너 같은 아이가 태어났겠지…… 하고.”
“…….”
“외모는 그분을 꼭 닮고, 성품은 나를 닮았구나, 에릴로트.”
난 깨달았다.
‘환생에 회귀까지 하면서 웬만한 일론 정신 대미지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참 멀었다.
난 아직 부족한 어린이였던 것이다.
세상은 넓고, 미친 자는 많았으며, 환장할 일은 수두룩했다.
너무 어이없는 상황이라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어머니라고 불러도 좋아.”
그러고 선황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우후후훗, 웃었다.
나는 결국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와…….’
오셀리아 황비를 걱정할 게 아니었다.
끝판왕이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