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se Who Live Without the Law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진짜가짜 (2)
황제가 한참 전부터 대타를 두고 도망쳤을 확률은 낮다.
‘여기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겠지.’
하지만, 카이루스가 격벽을 때리기 시작할 때 모든 것이 글러먹었음을 알고 도망을 시도한 거다.
만약 카이루스가 의심하지 않고 곧바로 대타의 목을 친 다음, 복수를 마쳤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면 도피하기 위한 시간은 충분했을 것이다.
애초에 카이루스가 추격할 일이 없었을 테니까.
“어디….”
카이루스는 그러지 않았다. 언젠가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맹세했던 원수 앞에서, 한순간이나마 냉정함과 침착함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옥새를 꺼내보라고 했더니 역시 황제의 대타는 옥새를 꺼내지 못했다.
“대타 친구 잘 들어. 황제가 도망을 시도한 지 몇 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을 거야, 그렇지?”
카이루스의 말에 대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제가 떠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게 당연하다.
“어차피 대타와 진짜의 차이는 옥새 하나 말고는 없잖아.”
황제의 대타는 카이루스의 말에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제국의 황제 자리. 기껏해야 황제를 연기하는 가짜에 불과하던 자신이, 진짜 황제가 되어 만인 위에 올라설 수 있다니.
“단지 너만 황제가 되는 게 아니야, 친구.”
카이루스의 목소리는 은근하면서도 달콤했다.
“황제가 되어, 아름다운 황후와 매력적인 첩들을 잔뜩 거느리겠지. 그리고 네가 낳은 아이 중 하나가 다음 황제가 된다.”
이 가짜의 혈통이 발로른 제국의 황가를 대체하게 되는 거다.
“너의 혈육은 발로른 제국의 황가가 되어 대대로 이어지는 거야. 딱 하나만 약속한다면 말이지.”
“그게… 뭡니까.”
카이루스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너는 황제를 대신해 만들어진 대타일 뿐이며, 진짜 황제는 이미 죽었다. 라는 서류를 하나 작성할 거야.”
“…그러면?”
대타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카이루스의 서늘한 손길에 몸을 살짝 움츠렸다.
“거기에 옥새와 지장을 찍어. 나는 그 서류를 보관할 거야.”
눈앞의 대타는 진짜 황제가 될 것이다. 물론, 카이루스가 원한다면 다시금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려지게 될 것이다.
딱 그것뿐인 계약이다.
“만약, 제가 당신의 기분을 거스른다면.”
“서류가 공개되겠지. 황제의 옥새와, 너를 증명하는 지장이 찍힌 서류가.”
그걸로 대타의 황제놀이가 끝나게 된다. 눈앞의 남자는 계속해서 진짜 황제 노릇을 할 수 있을 거다.
카이루스가 용인하는 한. 이즈음 되자, 대타도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여기에서 대타로 죽느니. 황제 노릇 한 번 해볼랍니다.”
거절할 이유도 없고, 거절할 수도 없는 제안이었다. 여기에서 대타가 카이루스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카이루스는 그를 죽일 생각일 테니까.
“아주 훌륭해.”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루스가 일레나를 향해 말했다.
“일레나, 이 친구를 좀 지키고 있어줘.”
“좋아. 황제는 찾아내면 어쩔 생각이야? 굳이 죽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오히려, 살려두는 게 황제에게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을 거다. 얼굴을 망가뜨리고 옥새를 빼앗으면, 황제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게 된다.
대대로 이어져 오던 제국의 황가는 대타의 핏줄로 교체되고, 원래 자신의 자리였던 황제의 자리에서 대타가 진짜 행세를 하는 꼴을 보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거다.
“일레나, 나를 봐.”
하지만, 카이루스의 생각은 달랐다.
“가문이 멸망하고, 노동교화소에서 몇 년을 썩고, 풀려나서는 베넷 시로 굴러들어와 식당 종업원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
하지만 지금, 카이루스는 황제에게 복수하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도달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다.
“살아있으면, 아직 가능성이 있는 거야.”
무수한 우연과 필연이 오랜 시간 속에 겹치고 얽히면 결국, 가능성이 꽃피게 될 수도 있다.
몇 년 뒤, 카이루스의 심장에 필립 4세가 칼을 박아넣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죽일 거다.”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카이루스가 원하는 건 황제의 죽음이다.
괴로움? 절망? 여태 동안 내가 이토록 고생했으니 너도 한번 당해봐라?
그런 철없는 생각 때문에 위험의 불씨를 남겨놓을 생각은 없다.
“…그것도, 그렇네.”
오래전 가문이 멸망한 카이루스와는 달리 캘로그 가문의 멸문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필립 4세가 고통받았으면 하는 게 일레나의 바람이었다.
그녀의 원한은 카이루스의 원한처럼 깊게 숙성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싱싱하니까.
그래도, 일레나 또한 카이루스의 말에 동의했다. 살아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의 산증인이 바로 카이루스였으니까.
“고맙다.”
카이루스는 최대한 설득할 생각이었다. 카이루스는 황제에게 원한이 있지만, 그건 일레나 또한 마찬가지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으니 상호 동의하에 일을 진행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고맙긴 뭘. 생각해보면 난 진짜 반역자잖아.”
“나도 거기에 가담했으니 마찬가지야.”
대화를 마친 다음, 카이루스는 바람을 움직여 대피소 내부를 훑었다. 여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비밀통로가 있을 거다.
그리고, 바람은 그 통로의 틈을 놓치지 않을 거다.
“여기군.”
공기가 희미하게 흘러나가는 것을 확인한 카이루스는 어렵지 않게 비밀통로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벽을 찾아냈다.
“여는 방법은….”
“필요 없잖아.”
카이루스는 벽을 향해 검을 미친듯이 휘둘렀다. 이내, 칼질에 난자당한 금속 벽이 무너져 내리고, 그 뒤편에 숨어있던 통로가 드러났다.
“다녀온다. 대타 잘 지키고 있어.”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가 휙휙 손을 흔들며 가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곧바로 카이루스는 통로를 질주했다.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카이루스가 대타에 속지 않고, 바로 추격을 시작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거다. 그야, 필립 4세가 카이루스였다면 황제의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불구로 만들거나, 죽였을 테니까.
황제가 믿는 건 바로 그 점이었다. 그리고 여지껏 계속해서 이어졌던 무수한 실패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필립 4세는 실패했다. 카이루스는 추격을 시작했고, 필립 4세는 도피 중이다.
원래 추격은 도피보다 더 어려운 법이다.
“열심히 숨어봐라. 하늘에서 안 보이나.”
문제가 있다면, 카이루스는 지상에서 추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숨겨진 대피로를 빠르게 주파한 다음 지상으로 올라온 카이루스는 즉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높은 곳에서, 뛰어난 감각으로 주변을 훑는다.
‘황제 혼자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지.’
호위는 있을 거다. 원래라면 호국경 덴버 허드슨이 그를 지켜야 하지만….
리리아나의 확보에 실패한 이상, 덴버 허드슨은 더 이상 황제를 지킬 이유가 없다. 다른 녀석들을 통해 호위를 받고 있겠지.
덴버 허드슨은 대타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마찬가지로, 다른 녀석들은 덴버 허드슨의 아내에 대한 사실을 모르겠지.’
원래 윗사람은 아랫사람들에게 정보를 숨기는 법이니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카이루스는 몇 시간에 걸친 수색 끝에, 불이 피워져 있는 장소를 발견하고 하늘을 유영하며 그 주변을 관찰했다.
‘찾았다.’
민간에서 발견하기 힘든 실력자들이 많이 모여있다. 적어도 다섯 정도. 그리고 근처에 숨어있는 기척들도 느껴진다.
결정을 내린 카이루스는 곧바로 해당 모닥불 근처로 내리꽂혔다.
“….”
착지하자마자,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무기를 꺼내들었다. 카이루스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누구냐고 물어보지는 않는군. 개죽음당하지 말고 항복해라. 나는 너희가 호위하는 놈에게 볼일이 있어.”
“놈? 이 미친 개새끼가…!”
녀석들 중 하나가 분노를 끌어올리며 외쳤지만 카이루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외쳤다.
“야, 필립 4세! 튀어나와!”
제국 역사에서, 황제를 이딴 식으로 불러제낀 녀석은 카이루스 말고 없을 것이다.
“이거 참, 직접 끌어내야 하나. 손이 많이 가는 자식이라니까.”
카이루스는 그렇게 말하며 천막 쪽으로 다가갔다.
“그 이상 다가가는 것은…!”
곧바로 무기를 든 녀석들이 달려들어 카이루스를 막으려 했지만, 그 순간 검광이 번뜩였다.
덤벼든 녀석의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내가 지금 기분이 좋아. 쓸데없는 피를 흘리고 싶지 않거든? 얌전히 짜져있으면 여기에서 죽을 일은 없을 거다.”
카이루스는 그렇게 경고하며, 천막 문을 활짝 열었다.
“….”
“혼자서 너무 큰 천막을 쓰는 거 아니야? 필립 4세. 이거 원래는 24명이서 함께 사용하는 물건이라고.”
황제는 가만히, 카이루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누는 건 처음 같은데.”
뒤늦게 천막으로 들어오려 하던 자들이 카이루스가 휘두르는 검에 삽시간에 토막난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 대타에게 옥새가 없더라.”
카이루스는 필립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나를 앞에 두고도, 그런 걸 확인할 여유가 있었더냐.”
“신중하고 확실하게 해야지. 중요한 일이니까.”
아직 황제가 살아있는 이유는 하나다. 원래라면 카이루스 혼자의 복수였기에,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고 바로 목을 쳤을 거다.
하지만, 일레나 또한 황제에게 볼일이 있다.
‘그냥 내가 목을 쳐서 죽였어! 라고 말을 전달하는 걸로는 부족하겠지.’
죽음을 직접 보고 싶을 거다. 황제를 고통받게 하지 않고 죽이겠다는 카이루스의 말에 일레나는 동의해주었다. 그렇다면, 카이루스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배려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
“날 어쩔 생각이냐.”
“글쎄? 생각 중이야.”
카이루스는 휘파람을 불며 텐트 안을 살폈다. 필립 4세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녀석이 중요한 물건을 남에게 맡길 리는 없다.
이 텐트 안에 있을 거다. 주변을 살피던 카이루스는 황제에게 다가가더니, 그대로 옷을 벗겼다.
“….”
“춥냐? 참아 새끼야.”
중년이 넘어가는 나이에, 남의 앞에서 알몸으로 서 있게 된 황제의 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린다.
‘옥새는 크지.’
황제 권위의 상징이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자그마한 도장 같은 것과는 그 크기부터 남다르다. 사실, 옷 안에 숨겨두고 있을 리가 없다.
그냥 놀려먹으려고 벗긴 것뿐이다. 텐트 안을 수색하던 카이루스는 마침내 수상한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
곧바로, 황제의 표정이 굳었다. 카이루스가 제대로 찾았다는 증거다.
“잠겨있네.”
그리고 상자에는 피를 받을 수 있는 자그마한 홈이 보인다. 페더윙의 상자와 비슷한 물건이겠지. 카이루스는 곧바로 황제의 손에 상처를 낸 다음, 그 홈에 피를 받았다.
딸각,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고… 그 안에는 통짜 옥을 깎아 만든 커다란 옥새가 들어있었다.
“그걸로, 뭘 할 생각이냐.”
상자에서 옥새만 꺼낸 카이루스는 황제를 옆구리에 낀 채 천막 밖으로 나오며 대답했다.
“황궁 지하 대피소로 돌아가서 말해줄게.”
그리고, 거기에서 일레나와 함께 황제를 처리할 것이다.
자신이 죽은 다음 이 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알게 되면 황제는 절망에 빠질 테고.
아마 그 정도라면 일레나에게도 충분한 복수가 될 것이다. 카이루스는 나름대로 필립 4세를 배려하며 비행했고, 황궁 지하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