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years old Hea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스스슥.
피할 길이 보이지 않는 복잡한 도풍을 향해 허량의 검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다.
저 도풍의 무서움은 기세 같은 것이 아니다.
만변(萬變).
무당의 숙적인 화산의 검과도 같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많은 변화가 그를 향해 쇄도한다.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무당의 검으로 저런 변화를 막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
‘흘린다.’
바람은 베어 낼 수 없다.
하지만 거친 바람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물길을 베어 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허공에 그려진 태극 형태의 검기가 쏟아지는 도풍으로부터 허량의 몸을 보호한다.
쿠구구구구.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거친 바람과 태극의 검기가 맞부딪치며, 연무대 바닥에 수없이 많은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크으읍……!”
촤좌좌좍!
생각보다 더한 바람의 위력에, 검기를 유지하고 있는 허량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온다.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고, 검기가 흘려 내지 못한 도풍의 일부가 그의 무복 곳곳을 찢어 낸다.
‘……강하다!’
이만한 공격을 저리도 자연스레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상대가 한 번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저 나이대에 믿기 힘든 거대한 공력,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육체, 거기다 상식을 뛰어넘는 도법까지……!
분명 그가 당해낼 수 없는 상대이건만, 허량의 입에서는 도리어 미소가 머금어진다.
‘기쁘구나……!’
교관들도, 무당의 장로들도 아니다.
자신의 목표가 되어야 할 벽이 이리도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허량은 기꺼운 웃음을 흘렸다.
‘하나…… 이 정도로 쓰러지지 않는다.’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자신을 압박할 수는 있을지언정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렇게 짧고도 긴 인고의 시간이 흐르고, 압박하는 기운이 사라지자 태극의 검기를 지워 낸 허량이 상대를 찾아 고개를 든다.
파밧!
허량의 머리 위로 몸을 날리며 거대한 묵색 태도를 내려치는 사무현의 모습.
이에 맞서기 위해, 허량도 남은 모든 공력을 검신에 집중한다.
“어림없다!”
부드러움 끝에 어린 강맹함.
무당이 추구하는 검의 진의는 결국에는 극강(極强)에 있다.
상대의 도력에 실린 힘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전심전력을 다한 그의 검도 결코 가볍지 않다.
부웅.
잠시 후, 도강을 머금은 사무현의 일도와 허량의 일검이 충돌하며 인근에 거대한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콰과과광!
***
‘……대단하네.’
허량의 검과 도를 맞댄 사무현의 두 눈이 가늘어진다.
저 얇디얇은 검신으로, 그의 천마도가 전하는 무게를 버텨 내고 있다. 아니, 도리어 밀어내기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꾸욱.
천마도를 쥔 사무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이대로 천마도법의 묘리를 실어 베어 낸다면 승부는 갈린다.
하지만 그 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술을 깨물던 사무현의 얼굴이, 곧이어 돌연 차분해진다.
그리고 잠시 후…….
쿵!
“읍……!”
팽팽한 힘의 대결을 펼치고 있던 허량의 안색이 일그러지더니, 그의 팔과 다리가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드드득 드득.
천마도법의 팔 초식 만근도(萬斤刀).
천근추의 묘리가 도에 실려 상대에게 태산과도 같은 무게감을 전달한다.
그리고, 만근도가 전하는 것은 단순히 천근추의 무게만이 아니었다.
주르르륵.
허량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물처럼 흘러내린다.
만근도의 진정한 무서움은 다름 아닌 격산타우(隔山打牛)의 묘리.
도신과 맞닿는 순간 도신을 타고 전해진 경기가 상대의 몸 안쪽을 완전히 흔들어 놓는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도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상대가 스스로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것처럼 비추어진다.
즉 이 만근도는, 상대를 베지 않고 제압하는 천마도법의 유일한 초식이다.
“끄으으으……!”
만마참풍을 받아 내며 이미 한계에 다다른 허량이다.
천마도법의 상승 초식을 두 번이나 받아 내는 것은 평범한 후기지수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
가까스로 버텨내던 허량의 한쪽 다리가 휘청이려는 순간, 돌연 사무현이 천마도를 크게 휘두르며 허량의 신형을 멀리 뒤쪽으로 날려 버린다.
쾅!
휘리리릭.
촤지지지직.
“……크윽! 쿨럭! 쿨럭!”
침음성과 함께 바닥에 안착한 허량이, 거친 기침과 함께 검붉은 핏물을 토해 낸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몸을 일으킨 허량의 눈에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불신과 경악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왜?”
이미 끝난 승부였다.
검신을 타고 전해진 상대의 경기에 의해 몸 안쪽은 엉망이 되어있었고, 찍어 내리는 도의 무게감을 버티지 못해 팔과 다리의 근육은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그의 패배가 확실해진 것과 다름없던 그 상황에, 상대는 흡사 변덕이라도 부리듯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때…….
스윽.
허량을 향해 겨누어져 있던 사무현의 도가 아래로 내려가더니, 잠시 후 그가 심드렁히 한 마디를 내뱉는다.
“여기까지 할게요.”
“뭐, 뭐라고?”
“최선을 다하지도 않는 상대를 이겨 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게…… 무슨…….”
저벅저벅.
말을 마치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멀어져 가는 사무현의 모습.
넋이 나간 허량은 두말할 것 없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마저도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일 뿐이다.
그리고 그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허량이 두 눈을 부릅뜨며 목소리를 높인다.
“멈추어라! 지금 나를 모욕하는 것이냐!”
“모욕이요?”
허량의 외침에 발걸음을 멈춘 사무현이 고개를 돌린다.
“어이가 없네요. 누가 누구를 모욕했는데요?”
“뭐라?”
“처음 저한테 성공시켰던 그 검기.”
“……!”
“전력 아니었죠?”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사무현의 물음에 허량이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다.
“에휴……. 이거 봐요. 전력을 다하지도 않은 상대를 진심으로 몰아붙여 이겨 봐야 뭐 하겠어요? 어디 가서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일전에 제 손속이 너무 과했다는 건 인정하지요. 적당히 해야 했는데, 사도관 선배에 대한 애정이 과해 조금 격했던 감이 있네요.”
그렇게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사무현이, 연무대 한쪽에 붕대를 감고 서 있는 황보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전의 일은 제가 사과드리죠. 하지만…… 앞으로도 저와 관련된 사람을 건드린다면,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는 장담 못 드려요. 그러니 앞으로 서로 조심했으면 하네요.”
……꿀꺽.
이게 사과인가, 협박인가?
싸늘한 사무현의 위압감에 마른침을 삼킨 황보악이, 이윽고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명심하지.”
“그럼 됐네요.”
어느새 다시 심드렁한 얼굴로 돌아온 사무현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그대로 연무대를 벗어난다.
“가자.”
“아……. 예! 형님을 모셔라!”
“예!”
우르르르.
연무대를 벗어나는 사무현의 뒤를 따르는 백여 명의 오십일 기 사도관도들.
흡사 군단을 연상케 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도월검 허량은 가만히 자신의 검을 움켜쥐고 서 있었다.
***
사무현과 허량의 비무가 끝난 후, 연무학관에는 하나의 큰 변화가 생겼다.
이는 바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던 정도관과 사도관의 마찰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것 이었다.
정도관은 사무현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되었고, 사도관은 말로만 듣던 도월검의 무위와 정도관의 저력을 확인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나자, 관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스스로의 발전에 매달렸다.
자신들과 비슷한 연배인 두 천재의 비무가 안주하고 있던 이들에게 기폭제가 되어준 것이다.
이러한 변화 이외에도, 사무현과 허량의 입지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적월 일행을 제외하면 사무현을 꺼렸던 오십 기 사도관도들이,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사무현에 대해 관심과 친근감을 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넘어설 수 없었던 도월검 허량을 상대로 사도관의 체면을 세워 준 후배.
한때 자신들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팼던 이단아 같은 존재에서, 이제는 더없이 듬직한 아우 같은 존재로 사무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량 역시, 오십 기와 오십일 기를 통틀어 모든 정도관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후기지수로 부상했다.
이전에도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그였지만, 모두의 앞에서 무시무시한 신위를 보인 사도관의 대표를 상대로 호각의 전투를 펼쳐 보였으니까.
물론 결과적으로 열세에서 마무리가 되었지만, 이는 사무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라는 말로 무마된 듯 보였다.
아무튼 그렇게, 정도관과 사도관은 허량과 사무현이라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되고 있었다.
***
연무학관주인 권존의 집무실.
평소 특별한 용무 없이는 찾는 이가 드문 그곳에,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찾아 들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탓에 곳곳에 붕대를 감고 있는 황보악의 방문에, 권존 황보웅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어려 있었다.
“정도관의 관도인 네가, 무슨 용무로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권존께 청할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학관주가 아니라 ‘권존’이라는 별호로 그를 칭하는 황보악.
이에 미간을 찌푸린 권존이 다소 날카롭게 그를 쏘아본다.
“학관에 청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정도관주를 통하면 될 것인데, 어찌하여 나를 찾았느냐?”
“학관의 일로 찾은 것이 아닙니다.”
고개를 숙인 채 이야기를 이어 가던 황보악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권존과 눈을 마주한다.
“……제게 천왕삼권(天王三拳)을 전수해 주십시오.”
“뭐라? 천왕삼권을?”
“예, 학관의 다음 비무 대회까지, 지금 저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허물어 내고자 합니다.”
“흐음…….”
황보악의 청에 못마땅한 얼굴을 한 권존이, 이윽고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될 말이다. 천왕삼권은 벽력신권을 완성한 이들에게만 전해지는 권법이다. 네게는 아직 자격이…….”
“외람되오나.”
돌연 권존의 말을 끊어 낸 황보악이, 그의 앞으로 자신의 멀쩡한 왼 주먹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주먹에 푸른 권강이 머금어지더니 그 위로 은백색의 뇌전이 번뜩인다.
“벽력신권은 이미 완성했습니다.”
“……대체 언제 그런 성취를 얻었다는 말이냐?”
권존의 얼굴에는 놀라움의 기색이 가득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 비무 대회에서 보았던 황보악의 성취는 아직 벽력신권의 완성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무 대회가 끝난 후, 도월검을 넘어서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수련에 매달렸습니다.”
“으음…….”
“하나, 벽력신권을 완성하자 그보다 더 높은 벽이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더 높은 벽?”
황보악의 말이 흥미를 끌었는지 권존의 두 눈이 가늘어진다.
“설마 너를 그리 만들었다는 사도관의 대표를 일컫는 말이더냐?”
“……알고 계셨군요.”
“나는 학관주다. 학관에 파다한 소문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겠느냐?”
권존의 말에 황보악이 조용히 쓴웃음을 머금는다.
의약당주에게도 말하지 않고 버텨 보았지만, 역시 그날의 일은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 천왕삼권을 익히면 그 아이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음……?”
황보악이 고개를 가로젓자 권존의 두 눈이 가늘어진다.
그렇다면 대체 왜 굳이 천왕삼권을 입에 담았다는 말인가?
“천왕삼권을 익히는 것만으로 넘어설 수 있는 벽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벽력신권이라는 무공이 부족해서 제가 그 아이에게 패한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하면 대체…….”
“단련을 받고 싶습니다.”
“…….”
“다름 아닌 권존님께.”
그제야 자신이 바라던 진정한 속뜻을 털어놓는 황보악.
이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권존이, 잠시 후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네가 내뱉은 그 말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권존에게 단련을 받는다.
이는 곧, 그가 권존의 제자가 되어 황보세가의 소가주와 동등한 자리에 올라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황보세가의 다음 가주 자리를 놓고 소가주와 경쟁을 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뜻.
그리고 그 경쟁에서 패하는 자는, 세가 내에서 그 어떤 권력이나 식솔도 거느리지 못하고 없는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라도 가주가 되겠다는 욕망과 확신이 없다면, 누구라도 결코 그 자리를 탐하려 하지 않는다.
“네 모든 것을 걸고라도 그 벽을 넘어서고 싶다는 말이렷다?”
“……예!”
단호한 황보악의 대답.
이에 잠시 후, 권존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네 각오가 정 그렇다면 좋다.”
“감사합니다.”
“하나, 내게 단련을 받는 것만으로 녀석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그 녀석은 괴물이다.”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괴물과 싸울 각오를 했기에 소가주와도 싸울 각오를 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 어느 때보다도 형형하게 빛나는 황보악의 눈빛.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한 명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천마가 보여
지은이 : 보용도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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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602-6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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