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years old Hea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스스슥. 스슥.
조용한 방 안.
풍만한 체형의 중후한 사내가, 책상을 가득 채운 새하얀 서지에 난을 그려 넣고 있었다.
아룡표국의 하남 부지부장, 전추가 바로 그 사내였다.
“흐음…….”
이윽고 작품이 완성되었는지, 붓을 내려놓은 전추가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구나.”
진짜 그림쟁이들의 작품에는 한참이나 못 미치겠지만, 근 십 년 만에 그의 손에서 탄생한 최고의 작품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그림이라 하였으니, 아마도 그가 근 십 년 만에 평정심을 되찾았다는 의미이리라.
‘사 대인께 선물로 드려 볼까?’
물론 그의 성품상 이런 것을 받는다고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정성이 들어간 선물을 무시할 만큼 무정한 이는 아니다.
연무학관에 입관하기 무섭게 그 검존의 제자를 쓰러뜨리고, 천하제일 후기지수였다는 허량과 호각을 겨루었다는 기재.
그리고 그때부터 일 년이 지난 지금, 암천막에서 마교와의 전투를 벌이고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그는 가장 유력한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손꼽히고 있었다.
근 이백 년간 사파에서 나오지 못했던 귀재!
그의 명성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그럴수록 상단 내에서 전추의 입지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사무현과 전추가 과거의 불화를 모두 씻고, 지속적인 거래로 신뢰를 쌓고 있다는 것은 아룡상회 내에서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이대로라면 차기 하남 지부장 자리는 이 전추의 것이다.’
물론 흑풍도(黑風刀) 사무현이 강호에 나온 이후에도 그만한 발자취를 보여 주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오 년 후가 기대되는구나.’
사무현이 연무학관을 졸업하고 강호에 나오는 그 날.
아마 이 그림 속의 난처럼 그의 인생도 활짝 피어나지 않을까?
그렇게 연신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때, 전추의 방으로 생각지도 못한 방문자가 찾아들었다.
타다다닷.
벌컥.
“부, 부지부장님! 큰일 났습니다!”
“……어허, 어찌 그리 경망스러운가?”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얼마 전 부총관 자리에 오른 아량의 등장에 전추가 짐짓 미간을 찌푸린다.
“자네도 부총관 자리에 올랐으면, 그에 걸맞은 처신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급보(給保)입니다! 급보!”
“……급보?”
아량이 이유 없이 이런 반응을 보이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슬며시 난화(蘭畵)를 한쪽으로 치워두며 전추가 물었다.
“크흠……! 급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사, 사 대인! 사 대인이 악양을 떠나고 있습니다!”
“사 대인이 악양을?”
아량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전추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문한다.
“타지에 무슨 볼일이 있으신 건가?”
“그게 아닙니다! 연무학관이 휴관을 한다고 합니다!”
“뭐? 연무학관이 휴관을?”
생각지도 못한 아량의 말에 전추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연무학관이 휴관을 하다니. 차근차근, 이해할 수 있게 좀 말해 보게.”
“일전에 암천막이 붕괴된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그랬지. 한데 그 일은, 무림맹에서 경고문을 보내는 정도로 마무리 지었다 하지 않았나?”
“그런 줄 알았었지요. 그런데 뒤늦게 추가 대책이 나온 모양입니다. 바로 어제 일자로, 연무학관에서 긴급 휴관 공지를 내렸다고 합니다.”
“긴급 휴관? 아니, 어찌 각 문파와 중원에 통보 하나 없이 이리 급하게…….”
“그러게 말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극비리에 진행된 사안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량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답답하다는 듯 이야기 하자,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전추가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정리한다.
“으음……. 그래. 조금 과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이백 년 만에 마교의 활동이 감지되었으니 능히 그럴 수 있는 일이지. 마침 암천막의 전 후계자도 연무학관에 있는 상황이었……. 가만. 그러면 그는 어디로 간다더냐? 연무학관이 휴관하면 음지삼왕(陰地三王)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을 텐데?”
음지삼왕.
암천막이 붕괴되고, 암왕과 살왕이 죽으며 전투에서 살아남은 북천과 서천, 남천이 각자의 지역을 찢어 가졌다.
현재 중원의 음지는 그들 셋이 다스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전 암천막의 후계자인 살암이 강호에 나온다면 저들이 어찌 행동할지는 너무도 빤하다.
그리고 그런 전추의 생각에, 아량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는다.
“바로 그겁니다!”
“무엇이 말인가?”
“바로 그 때문에, 아직 음지삼왕의 힘이 닿지 않은 동쪽으로 향하려는 것 같습니다. 전 암천막의 후계자와 사 대인이 함께 말입니다!”
“이런……!”
상황 파악을 마치자, 앉은 자리에서 다급히 몸을 일으킨 전추가 목소리를 높인다.
“그 긴박한 일을 어찌 이리 느긋하게 보고했다는 말인가!”
“아니……. 부지부장님께서 찬찬히 설명하시라고…….”
“그만!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사 대인은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조금 전에 막 악양의 북문 근처로 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북문이면…… 이런 젠장! 뱃길을 이용하시려는가!”
악양에서 동부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자, 현재의 살암에게 가장 안전한 길.
동정호를 통한 장강의 물길을 타는 것만이 중원의 동부에 도착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이다.
“당장 가마……. 아니! 아니다! 발 빠른 말부터 한 마리 데리고 나오거라! 지부에 있는 것 중 가장 빠른 말로!”
“예, 예!”
전추의 명에 아량이 헐레벌떡 방문을 빠져나가자, 그 뒤를 따라 곧바로 뛰쳐나가려던 전추가 돌연 방향을 돌려 그의 집무실 한쪽 구석으로 향한다.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깨문 전추가, 한쪽에 고이 모셔둔 금고를 열어 안에 든 두꺼운 전표 뭉치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품 안에 밀어 넣더니, 그대로 쏜살같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타다닷.
***
“자리 잡으시는 대로 무혈문(無血門)으로 연락해 주십시오! 바로 형님께 합류하러 달려가겠습니다!”
“파중(巴中)에 있는 흑사회(黑蛇會)입니다! 형님의 서신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절대로! 절대로 저 잊으시면 안 됩니다!”
“형님!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저는 양성(陽城)에 있는……!”
“아…… 그놈들 진짜……!”
악양성의 북문 앞에서 사무현을 붙잡고 늘어지는(?) 이들.
연무학관의 휴관으로 인해, 각자가 속한 문파로 우선 복귀해야 하는 사십여 명의 관도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각 문파에 형식적으로 얼굴만 비춘 뒤 다시 합류하기를 원했기에, 혹여나 자리를 잡은 사무현이 그들을 잊지 못하도록 강하게 자신들을 어필하고 있었다.
“그래서 명단들도 다 받아 뒀잖아! 이제 그만들 좀 가라, 얼른.”
팔랑팔랑.
자리를 잡는 대로 서신을 보내 달라 요청한 관도들의 명단을 흔들어 보이며, 하소연하듯 말하는 사무현.
사실 그 역시 저들과의 헤어짐이 아쉬운 것은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단순한 아쉬움만 생각하면 그들 중 누구도 사무현이 느끼는 허탈감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 모두는, 사무현에게 처음으로 생긴 식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잔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는 법.
벌써 반 시진을 넘게 서서 저들의 인사를 받다 보니, 아무리 아쉬웠던 사람이라도 슬슬 진이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인사고 뭐고 그냥 한번 엎어 버릴까?’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니 가급적 마지막을 그렇게 장식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런 식이면 오늘 안에도 끝나지 않을 기세다.
그렇게 참다못한 사무현이 막 입을 열려는 그때.
“자자, 다들 염려 마라!”
사무현의 뒤에 서 있던 살암이 그의 옆으로 걸어 나오며 모두의 시선을 주목시킨다.
“삼 대 암천막주(暗天幕主)의 이름을 걸고, 명단에 적은 모두에게 대표를 대신해서 서신을 보내도록 하겠다. 안심하고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도록. 그리고…….”
거기까지 말을 이어 가던 살암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머금어진다.
“너희는 흩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역할을 다하러 가는 것이지. 먼 훗날 대표를 위시한 우리가 사파일통(邪派一通)의 첫발을 내딛는 그때, 각 문파에서 너희가 가지는 위치가 큰 힘이 될 거다.”
“아……!”
“과연……!”
“사파일통……!”
사파일통이라는 살암의 발언에, 반쯤 울상이 돼 있던 녀석들의 눈에 사명감 비슷한 것이 반짝인다.
“자…… 가라! 지금부터 대표에게는 너희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 형님!”
“형님! 그럼 다시 또 뵙겠습니다!”
“형님의 크신 뜻에 함께하겠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형님!”
“어…… 그래.”
언제 망설였냐는 듯, 자신을 향해 힘차게 포권을 해 보이고 흩어지는 이들.
그런 그들을 얼떨떨하게 바라보던 사무현이, 잠시 후 그들이 멀어지고 나자 살암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사도일통?”
“……일단은 보내야 할 것 아니냐?”
“…….”
“그리고…… 사실 그리 허황된 이야기도 아니다. 솔직하게 말해, 사파에서 당장 이만한 세력과 맞붙을 수 있는 집단은 많지 않지.”
“그래 봐야 후기지수 육십 명.”
사무현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살암이 두 눈을 빛내며 대답한다.
“하지만 네가 있지.”
“…….”
“네 전력을 무시하지 마라. 넌 현재 사파에 없는 비공식적 화경급 고수. 어지간한 규모의 사파 집단은 너 혼자서도 괴멸시킬 수 있다.”
무언가 기대감이 느껴지는 살암의 말에,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사무현이 반박한다.
“헛소리는. 내가 왜 다른 사파랑 싸워? 난 평화롭게 내 사업만 할 건데.”
“평화로운 사업이라…….”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살암의 얼굴에 흥미로운 미소가 머금어진다.
“어떤 사업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네 생각만큼 그리 쉬운 일은 아닐거다. 적어도 이곳 사파의 세계에서만큼은 말이지.”
“그게 무슨…….”
“대이이이인!”
“……음?”
다그닥 다그닥.
살암의 말에 사무현이 막 질문을 던지려는 그때, 저 악양성의 북문을 뚫고 달려오는 인마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응? 저 아저씨……?”
말을 타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그 모습을 확인하자 사무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룡상회의 부지부장 전추.
좋지 않았던 첫 만남과는 달리 지난 일 년간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다.
애들 먹일 영단도 구해 주고, 훈련 도구도 만들어 주고, 간간이 사무현한테 용돈도 챙겨 주…….
타닷!
“허억! 허억! 대, 대인! 대인!”
말에서 내려 거친 숨을 헐떡이는 전추를 바라보며 사무현이 쓴웃음을 머금는다.
“거…… 어디 안 도망 갈 테니 숨 좀 고르고 말하세요.”
“허억! 허억! 대, 대체 무슨 일 이십니까? 연무학관이 휴관했다는 이야기는…….”
“아, 그거 이제 들으셨어요? 소식이 좀 늦으시네.”
사실 연무학관에서 휴관을 공지한 것도 고작 이틀 전의 이야기다.
각 문파에 전서응을 띄운 것도 어제라 했으니, 결국 상인에 불과한 전추가 휴관 소식을 모르고 있던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갈 것인지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전추는 이내 이를 무시하고 다급히 말을 꺼냈다.
“후우…… 대인. 죄송하지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하세요.”
“실례지만 자리를 옮겼으면 좋겠습니다. 대인께 개인적으로 여쭙고 싶은 이야기라…….”
전추가 슬쩍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내자,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겠다는 듯 살암이 피식 실소를 흘린다.
“다녀와라. 아무래도 꽤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온 듯하니.”
“끄응……. 귀찮은데…….”
뒷머리를 긁적이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것도 잠시.
문득 떠오른 생각에, 사무현이 가볍게 손짓을 한 번 해 보이고는 전추를 돌아본다.
“자, 이제 말해 보세요.”
“예, 예? 여기서 말입니까?”
“염려 마세요. 쟤들은 우리 말 못 들으니까.”
“……예?”
“기막을 쳤거든요. 굳이 멀리까지 가기는 귀찮잖아요.”
사무현의 말에 두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는 전추.
기막을 쳤다고?
지금 이 주위에?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선하게 불고 있던 바람이 느껴지지 않고, 서로를 향해 무어라 떠드는 것 같은 사도관도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저들끼리 복화술을 하듯이.
이 생소하고도 신기한 상황에 놀라워하는 것도 잠시.
어느새 자신의 원래 목적을 떠올린 전추가 사무현을 향해 말을 꺼낸다.
“앞으로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대인.”
“예?”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이 불쾌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상인이고, 사 대인과의 관계에 투자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해서, 실례를 무릅쓰더라도 여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침착하게 서론을 꺼낸 전추가 사무현의 두 눈을 응시한다.
“혹여 살암 공자를 도우실 생각이십니까?”
천마가 보여
지은이 : 보용도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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