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years old Hea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207
207화
“처음 뵙습니다. 사천방주, 사무현입니다.”
그렇게 어느 한쪽의 기움 없이 동등한 위치에서 예를 주고받는 녹림왕 막우(幕宇)와 사무현.
어쩐지 기묘한 상징성을 띠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장내에 있는 모두가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그리고 잠시 후, 인사를 마치고 서로 마주한 이들 중 녹림왕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본인이 찾아온 것이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소. 본래 아들 녀석은 광호채주에게 초청장을 보냈으나, 직접 한번 와 보고 싶은 욕심에……”
“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녹림왕의 말에 사무현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한다.
“어차피 우리 애들 기죽지 말라고, 이름 있는 사람 좀 모셔 오라고 시킨 거였거든요.”
“……아하.”
대놓고 솔직한 사무현의 대답에 녹림왕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손익패가, 막휘에게 슬쩍 고개를 돌리며 속삭이듯 묻는다.
“녹림왕께서 좀 당황하신 것 같지 않습니까?”
“……아마도.”
당황했을 것이다.
지금껏 그를 만나 왔던 이들은 하나같이 억지로 태연한 척을 하려 하거나,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그를 떠받들어 주는 이들 뿐이었을 테니까.
이는 비단 정, 사를 떠나 사파 최대 규모 세력을 다스리는 수장에게 따라붙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저건 그냥 어른 공경이네.’
딱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이니 예의를 갖추고 있을 뿐, 그를 대하는 것에서 큰 어려움이나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기야,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지금껏 사무현과 치고받아 온 이들을 생각하면 녹림왕이라는 이름이 그리 특별할 것도 없으니까.
그들한테나 술밖에 모르는 땡중처럼 보이지, 아직까지도 강호에서는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파마불제 신불.
그리고 현 중원의 최강자라 불리는 천무신녀 단아란.
이들 모두, 사무현에게는 사고뭉치 동네 이웃 정도의 대우밖에 받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가만, 그런데 신불 스님이나 천무신녀를 처음 봤을 때도 저랬잖아?’
……역시 그냥 천성인 건가?
막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헛기침을 한 번 흘린 녹림왕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꺼낸다.
“아무튼…… 별다른 큰일은 벌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오. 본의 아니게 우리도 이 상황에 개입을 조금 했소만은…….”
“예, 덕분에 초청을 받고 오신 다른 분들 중에는 큰 부상자가 없어 보여요. 다행히도.”
“글쎄……. 꼭 다행인 것 같지도 않소만.”
“예?”
사무현이 눈썹을 추켜올리자, 녹림왕이 보란 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잇는다.
“보아하니 장강수로채의 가축들도 섞여 있는 것 같은데, 굳이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오.”
“……가축이요?”
“평생을 이용만 당하다 버려질 것도 모르고, 주인이 없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아는 것이 가축과 무엇이 다르겠소이까?”
명백한 비웃음이 서린 녹림왕의 음성.
이에 조금 전 위평문주의 목숨을 구걸하러 나왔던 상인을 포함해 몇몇 이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녹림왕을 앞에 두고 그의 말에 항변하지 못한다.
조금 전 사무현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보시오, 사천방주.”
“…….”
“자신들이 대놓고 모욕을 받고 있음에도 한마디 저항조차 못하지. 결국 더 큰 힘 앞에서는 곧바로 굴복하고 마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자들이라는 뜻이오.”
“…….”
“굳이 저런 것들과 아귀다툼이나 하며 남경에 자리를 잡아야 할 이유가 있소? 차라리 이들을 쓸어버리고 황룡채 인근에 자리를 잡으시오. 내가 뒤를 봐준다면, 터를 잡고 기틀을 다지기가 훨씬 쉬울 것이외다.”
“……!”
녹림왕 막우의 제안에, 사무현을 제외한 장내에 있던 모든 이들이 눈을 부릅뜬다.
사문회주는 물론, 바닥에 쓰러져 이 상황을 지켜보던 위평문주마저도.
‘서, 설마…… 진짜 저대로?’
사문회주의 눈이 빠르게 흔들린다.
사실 사천방으로서는 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무엇이건 처음 자리를 잡을 때는 기존 세력과 토착민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법.
그런 부분에서 보면, 사천방의 시작은 처음부터 험난함을 예고한 것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만약 저 제안을 따른다면…….
‘사천방에게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다.’
녹림왕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기반을 마련하는 것과 장강수로채의 뿌리가 내려진 곳에서 싸우며 자리를 잡아 가는 것.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비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사천방이 이곳을 떠난다면 우리는…….’
흑룡문과 사문회만으로는 남은 남경의 세력에 대항할 수 없다.
결국, 사천방을 따라 고향을 떠나거나 적어채주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일 터.
그렇게 복잡한 심경을 담은 사문회주를 포함한 모두가 사무현의 답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이윽고 침묵을 끊고 사무현이 입을 열었다.
“제안해 주신 마음은 감사하긴 한데…….”
“음……?”
“거절할게요.”
“……진심인가?”
사무현의 대답에 놀란 녹림왕이 두 눈을 추켜 뜬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흔히 오는 기회는 아닐 터인데…….”
“기회는요? 이미 싼값에 장원도 구입해서 자리까지 다잡아 놨는데, 이사하려면 귀찮기만 하죠.”
한 손을 흔들며 거절 의사를 표한 사무현이, 슬쩍 고개를 돌려 부상을 입고 서 있는 사문회주를 응시한다.
“그러기엔 이미, 여기서 함께하기로 한 식구들이 있어서요.”
“아……!”
사무현의 대답에 사문회주를 포함한 흑룡문 무사들의 얼굴에 안도와 감동의 빛이 어린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살피는 녹림왕의 두 눈에 한순간 흥미로운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재미있는 놈이군.’
누구라도 혹할 만한 제안을 이리도 단칼에 거절하다니.
녹림왕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의 거절이, 식구라고 표현한 이들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임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서로를 향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때.
“이이이……. 웃기지 마라!”
지금까지 바닥에 쓰러져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위평문주가, 돌연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친다.
“그토록 모두의 뜻을 보고도 아직도 남경에 남겠다고! 아직도 네 눈에는 남경이 만만해 보이더냐!”
“……음?”
“으드득……! 착각하지 마라, 이놈! 우리가 적어채를 등지고 네게 협력하는 순간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절대로!”
웅성웅성.
입에서 침까지 튀겨가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위평문주.
이에 넋 놓고 있었던 남경 상인과 무사들이, 어느새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에 동조하기 시작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무심히 위평문주를 응시하던 사무현의 입가에, 이윽고 보일 듯 말 듯 한 냉소가 머금어진다.
“……착각?”
“…….”
“거…… 재미있는 소리를 하네.”
쩌저저정!
다음 순간, 사무현의 몸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기세가 흘러나오더니 그가 서 있던 대지에 커다란 거미줄 같은 균열을 일으킨다.
동시에 폭풍처럼 뻗어 나간 거대한 기세가, 위평문주를 포함해 인근을 뒤덮어 가기 시작한다.
“크읍……!”
숨통을 조여 오는 사무현의 기세에 위평문주가 가늘게 몸을 떤다.
그리고 사무현의 기세를 이겨 내지 못한 몇몇 무사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털썩. 풀썩.
“……착각도 유분수지.”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지워낸 사무현이, 거대한 위압감을 풍기며 말을 꺼낸다.
“누가 너희한테 협력할 기회를 주겠다 했지?”
“……!”
사무현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살기에 위평문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이는 조금 전 위평문주의 목숨을 구해 달라 청했던 상인도 마찬가지였다.
‘마…… 말려야 하는데…….’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선뜻 입이 열리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젊은 나이에 힘과 능력을 갖춘 보기 드문 후기지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파답지 않게 다소 부드러운 인망까지 갖춘 인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이었다.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기세.
저런 기운을 풍기고 있는 인간이 그들이 짐작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일 리 만무하다.
“무기 들어.”
서늘한 한 마디와 함께, 등 뒤로 손을 뻗어 천마도의 손잡이를 움켜쥐는 사무현.
그 순간 그의 도신을 감싸고 있던 붕대가 부드럽게 잘려 나가며, 커다란 천마도의 묵색 도신이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부웅.
쓰윽.
“무…… 무슨……!”
일체의 낭비 없는 부드러운 움직임.
그 모습을 지켜보며 위평문주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버거워지는 상대와 싸울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한 걸음만 더 물러나면 벤다.”
“……!”
“……무기 들어.”
한 손으로 가볍게 쥔 천마도의 도 끝이 위평문주를 향하고 있다.
턱 끝을 치켜들고 오만하게 눈을 내리깐 그의 모습에, 위평문주가 마른침을 삼킨다.
***
‘……생각지도 못했군.’
장원을 지배하고 있는 사무현의 기세를 느끼며 살암이 두 눈을 가늘게 뜬다.
‘아니……. 어쩌면 지극히 녀석 다운 모습인가.’
그가 아는 사무현은 생각보다 힘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적의를 드러낸 것은, 과거에 막휘를 건드렸던 자신과의 싸움, 만패를 공격한 황보악과의 싸움 정도뿐이다.
물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관계나, 자잘한 것까지 합하면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정적인 것은…….
‘자신보다 주위 사람을 건드렸을 때 더 크게 분노한다는 거겠지.’
사무현의 이런 성정은 사실 한 집단의 지도자로서는 그리 적합하지 않는 자질이다.
지극히 감정적이고, 이해타산에 밝지 못한 지도자는 자칫 집단 전체를 위험으로 몰고 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힘이 있다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아무튼…… 재미있게 되었군.’
만약 저들이 처음부터 사무현을 노렸다면, 그는 이렇게까지 위압감을 드러내 가며 상대를 꺾으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하필이면 사무현의 역린을 건드렸고, 그 때문에 그는 모두의 앞에서 사무현의 진면목을 보이게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저들의 선택뿐이다.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암천막의 후계자인 자신조차 꺾이고 말았던 사무현이라는 존재 앞에서, 과연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지.
저들의 대치를 지켜보는 살암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머금어진다.
***
‘……저 자세는?’
위평문주를 향한 사무현의 자세를 바라보며 천마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닮아 있다.
도라는 것을 꼴사납게 힘껏 쥐지 않게 된 순간부터, 자신의 앞에 얼어붙은 이들을 내려다보는 것이 일상이 된 순간부터 베어 버린 자세.
세상의 모든 것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저 자세는, 바로 천마 자신의 자세였다.
부들부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사무현의 한 마디에, 가늘게 몸을 떨면서도 자신의 검을 움켜쥐는 위평문주.
하지만 한눈에 보아도 승산이 없음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그의 팔과 다리는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나…… 나를…… 나를 베면…… 저, 적어채주가…….”
“입 다물어.”
“…….”
“들어와라.”
위평문주에게 있어서는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이 들릴 한 마디.
그 한마디 말을 내뱉고는, 사무현이 변함없는 자세로 위평문주를 기다리고 있다.
이에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몇 번이나 입을 열어 보았지만, 위평문주는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벙긋거리다 입을 다물고 만다.
마치, 사무현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 두려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그리고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식은땀만 비 오듯 흘리는 그를 향해 사무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다.
“안 온다면…….”
“……!”
“내가 가지.”
저벅저벅.
그 말과 함께 천천히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무현.
상대를 베러 가는 그 발걸음은, 마치 산보라도 나가는 듯 가볍기만 하다.
자신을 향해 사신(死神)처럼 다가오는 그 모습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켜보는 위평문주.
자신의 검을 힘없이 움켜쥐고 서 있던 그가, 잠시 후 자신의 앞에 선 사무현을 올려다보며 속삭이듯 말을 꺼낸다.
“주……시오.”
“…….”
“살려…… 살려 주시오…….”
천마가 보여
지은이 : 보용도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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