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years old Hea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26
026화
‘……침착하자. 아무리 기세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사람인 이상 갑자기 실력이 바뀔 수는 없는 일.’
간혹 전투 도중 깨달음의 실마리를 얻어 실력이 상승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귀적과 사무현의 사이에는 그 정도로 메울 수 없는 격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자, 귀적의 얼굴에는 어느새 처음의 냉정함이 돌아와 있었다.
“허세 하나만큼은 제법이구나.”
“오호, 허세라?”
“아무리 그럴싸하게 겉을 포장하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이지. 자, 들어오거라. 이번에는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 줄 것이니.”
비장함과 살기가 맴도는 스산한 귀적의 음성.
하지만, 정작 사무현에게서는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은 순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하하, 재미있구나. 그런 말을 하기에는 네 스스로도 지나칠 정도로 떨고 있다고 생각지 않느냐?”
“……!”
사무현의 물음에, 그제야 심상치 않게 흔들리는 자신의 검신을 발견한 귀적.
불신 어린 눈으로 자신의 검을 마주하는 귀적의 귓가로 흡족한 사무현의 음성이 들려온다.
“때로는 이성보다 본능을 믿어 보는 것도 좋지. 무인이라면 말이다.”
“이……!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사무현의 조롱에 분기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흔들리는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서였을까?
돌연 어금니를 악문 귀적이, 다섯 자에 이르는 검은 검강을 흩뿌리며 사무현에게 달려들었다.
이에 흥미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사무현도, 천천히 천마도를 치켜들어 도신의 끝을 하늘로 향했다.
‘현혹되어선 안 된다!’
상대가 지닌 것은 태도(太刀).
머리 위까지 저렇게 도를 치켜들었다는 것은, 오로지 거리에 들어온 상대를 내려쳐서 제압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검과는 달리, 도는 오직 베는 것에만 치중된 무기이니까.
‘정면 대결이라면 이쪽이 이긴다!’
상대가 한 합에 상당할 정도의 힘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딱 그것뿐.
제아무리 모든 것을 쏟아부은 완벽한 일격이라고 한들, 도기(刀氣)는 검강(劍罡)을 당해 낼 수 없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귀적이 사무현의 거리 안으로 몸을 들이밀자, 난데없는 무형(無形)의 기가 귀적의 전신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콰드드드.
‘읍……! 이건?’
진(陣)?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기의 압력을 이용해 움직임을 억누르는 진(陣)은 분명 존재하지만, 만약 그가 미리 진을 준비해 두었다면 지금까지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크…… 크으읍……!’
상대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기의 압력 또한 강해진다.
처음에는 그저 몸을 무겁게 억누르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마치 전신에 바윗덩이를 매달고 있는 듯하다.
‘마…… 말도 안 되는……!’
이것이 진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상대가 마치 극마급의 고수들의 그것처럼, 기를 내뿜어 자신의 움직임을 제압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이……! 타하앗!”
자신을 억누르는 기와 상대의 육신을 한꺼번에 베어 버리기 위해,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선의 일 검을 휘두르는 귀적.
그 순간 사무현의 입가에, 상대를 내리까는 명백한 조소가 머금어진다.
“……가련한 것.”
그 한마디 중얼거림을 끝으로, 사무현의 일 도가 한 줄기 섬광이 되어 귀적의 검과 육체를 갈랐다.
쩌저정!
한순간의 짧은 폭음.
자신의 검과 육체가 단번에 베어져나가는 그 순간이, 그야말로 찰나와 같이 귀적의 눈을 스쳐갔다.
자신의 생명이 다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릅떠진 귀적의 눈에, 잠시 후 천마도에 어려 있는 붉은 도강(刀罡)이 들어온다.
‘말도…… 안 되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죽어가는 와중에도 한 가지만큼은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가 좌수도를 든 시점에서부터 모든 것이 완전히 틀어졌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나, 그만하면 만족스러운 죽음일 것이다.”
“…….”
“네놈의 한평생 동안 결코 경험할 수 없을…… 최고의 일도(一刀)를 보았으니.”
어쩐지 희열에 찬 듯한 사무현의 그 음성을 끝으로, 귀적의 이마부터 시작된 붉은 실선이 하복부까지 그어진다.
그리고 너무나도 깔끔하게 절단된 나머지, 아직까지 버티고 있던 그의 몸이 이윽고 붉은 선을 중심으로 갈라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촤좌좍.
털썩.
“……뒤처리까지 할 시간은 없겠군.”
귀적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미 흥미를 잃었는지, 이내 자리를 뜨려 하는 사무현. 아니, 칠 대 천마.
그러다 돌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발걸음을 멈춘 그가 천마도를 치켜들었다.
부웅.
촤좍!
……털썩.
“……깜빡할 뻔했군.”
허공을 향한 천마의 일 도와 함께, 그로부터 약간 벗어난 숲속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사무현에게 한쪽 팔이 잘린 후 여태껏 전장에서 벗어나 몸을 숨기고 있던 마지막 무사.
그의 육신이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쓰러지자, 상황을 마무리 지은 천마가 경공술을 펼치며 자리를 벗어났다.
파밧!
***
“헉……! 헉! 끄으윽……!”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 고통.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에 겨운 신음만을 내뱉는 내 귓가로, 소위 관리자라 불리는 이들의 대화가 오고 갔다.
“이럴 수가……. 벌써 반 시진이 다 되어 가고 있어. 이번 실험도 어떻게든 버텨 내는 건가?”
“신기하군. 그토록 타고난 몸뚱이를 가진 놈들도 견뎌 내지 못하는 실험에, 어찌 저런 것이 계속 견뎌 내는 건지.”
“글쎄……. 살고자 하는 의지라고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군.”
……개같은 새끼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저것들을 찢어 죽이고 싶지만, 그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는 이 사슬은 보통의 물건이 아니다.
소위 만년한철이라고 불리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고 알려진 철.
이미 수도 없이 많은 저항을 해 보았지만, 결국 그에게 찾아든 것은 절망뿐이었다.
‘……포기하면 편해질까?’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 나가는, 그와 같은 실험을 받은 수많은 실험체들.
처음에는 그들의 죽음을 마주하며 겁에 질렸지만, 막상 이런 지독한 고통과 마주할 때면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하겠다는 생각을 지워 낼 수 없다.
그렇게 저항의 의지는 가슴속에 묻어 둔 채 고통만을 이겨 내던 그때, 사무현의 귓가로 예상치 못한 이의 음성이 들려온다.
“무얼 하길래 아직도 의식이 없나 했더니,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어?’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여기서 왜 갑자기 천마 놈의 음성이……?
놀란 사무현이 고개를 들자, 그를 고문하던 흑의인들 사이에 서 있는 천마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니…… 너……?”
“쯧쯧. 생각보다 심약한 놈이로구나. 고작해야 꿈속의 허상들에게 발목을 잡히다니.”
“……꿈? 허상?”
“너는 웬 놈이냐!”
사무현이 의아함을 가지는 그 순간, 그제야 천마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흑의인들이 그를 향해 달려든다.
이에 삐딱하게 꼬고 있던 팔을 푼 천마가, 짧게 혀를 차며 양팔을 좌우로 힘껏 펼친다.
팟!
쩌저저정!
가볍다면 가볍고 호쾌하다면 호쾌한 천마의 일 수에, 그를 향해 달려들던 흑의인들이 산산이 부수어지고 사무현을 붙잡아 두고 있던 쇠사슬도 함께 사라진다.
“아……!”
……이럴 수가.
저 가벼운 움직임 한 번에, 사무현으로서는 결코 끊어 내지 못할 것만 같았던 족쇄가 너무도 쉽게 사라져 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믿기지 않는 상황에 멍하니 굳어 있는 사무현의 귓가로, 천마의 심드렁한 음성이 이어진다.
“자, 이 정도까지 해 줬으면 이만 정신 차리고 일어나라.”
“…….”
“……뭐야, 설마 의식이 나간 거냐?”
한 손을 사무현의 눈앞에서 휘휘 저어 보이며 그의 의식을 확인하는 천마.
그제야 어느 정도 제정신을 되찾은 사무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천마를 향해 물었다.
“네가…… 여기는 어떻게……?”
“이런,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헛소리군. 생각보다 일으키는 것이 쉽지 않겠어.”
음……. 이놈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이놈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순간부터, 처음 만났을 때의 반가움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별수 없군. 좀 거칠더라도, 상황이 급하니 이해해라.”
스윽.
그러고는 돌연 허공에서 커다란 태도를 만들어 낸 천마가, 그것을 느긋하게 머리 위로 치켜 세운다.
어……. 뭔지는 몰라도 심하게 불안한데…….
“어……. 잠깐만. 뭐, 뭐 하려고?”
“한 방에 간다. 힘차게 깨어나거라!”
“미친놈아! 깨어나긴 뭘…… 야! 뭔지 몰라도 하지 마!”
사무현의 다급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기로 희번덕이는 두 눈을 치켜뜨며 바닥을 향해 힘차게 도신을 내려치는 천마.
그 순간, 사무현이 내디디고 있던 바닥이 산산이 깨어지며 그가 속해 있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야아! 이 미친 천마 새끼야아아!”
무너져 내려 가는 세상 속에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천마를 향해 마지막으로 원한 섞인 비명(?)을 내지르는 사무현.
하지만 그의 외침은 안타깝게도 그의 귓가를 빙빙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
“미친…… 미친 새끼…… 아?”
한쪽 뺨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흙의 감촉.
더불어 머리칼을 간지럽히는 시원한 한 줄기 바람.
그제야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었음을 깨달은 사무현이, 다급히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본다.
“뭐, 뭐야! 여기가 어디…… 윽!”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은 숲속.
대체 왜 자신이 이런 곳에 있는지 기억을 떠올리려는 그 순간, 욱신거리는 흉부의 통증에 사무현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
이게 웬 상처지?
대체 언제 이런…… 아!
‘그래, 난 분명 그놈의 검에 맞고서…….’
그제야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린 사무현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여기가 바로 저승?
‘……저승치고는 좀 이상한데.’
저승인데 칼에 베인 상처가 아픈 것도 이상하지만, 그의 옆에 놓여 있는 천마도도 그렇고 오감 역시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다.
그런데 그 순간, 사무현의 귓가로 반갑기 그지없는 천마의 음성이 들려온다.
“……천마!”
사뭇 진지한 천마의 경고에 사무현이 고개를 주억이며 천천히 숨을 고른다.
아무래도,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대체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 거냐?”
“진이라고? 여기가?”
……뭐지?
지금 저놈의 말은, 마치 진을 만든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설마…… 네가 만들었냐?”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도리어 퉁명스레 반문하는 천마.
아니…… 네가 그렇게 반응하면 안 되지.
몸뚱어리도 없는 놈이 대체 어떻게 진을 만들어?
“대체 어떻……?”
아하……. 몸을 빌렸구나…….
내 몸을…….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냐?”
“내 몸을 빌려 썼다고? 네가?”
“야, 이 미친놈아!”
“대체 어떻게? 내 몸을 네 마음대로 빌려 쓰는 게 가능한 거였어? 그런 걸 왜 이제 말해!”
당황한 나머지, 지친 몸까지 벌떡 일으키는 사무현.
하지만 이에 대답하는 천마의 음성은 실로 천하태평하기 그지없다.
……세상에.
사무현이 한순간에 할 말을 잃어버릴 만큼, 이 상황은 꽤나 충격적이다.
이 몸을 빌려 쓸 수 있다니?
그 말은, 언제 저놈에게 몸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말이 아닌가?
충격에 빠진 사무현의 귓가로, 다소 흥미로운 듯한 천마의 음성이 이어진다.
……이 새끼.
아닌 게 아니라, 차마 뭐라고 말을 이어 갈 수가 없다.
만약 이놈이 정말로 육체를 빼앗으려 한다면?
대체 어떻게 내 몸을 방어해야 한다는 말인가?
딱딱하게 경직된 사무현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곧 유쾌한 천마의 웃음소리가 사무현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천마가 보여
지은이 : 보용도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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