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years old Hea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269
269화
“……그럭저럭 오해는 풀린 것 같군.”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사무현의 반응을 바라보던 수룡왕이 이윽고 살암과 적사에게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암천막의 후계자. 네게 묻겠다. 수로채가 재물이 아닌 땅을 원한 것이, 음지와의 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지나친 요구라 생각하나?”
“……음지와의 전쟁?”
수룡왕의 말에 전후 상황을 알지 못한 살암이 유일하게 멀쩡한 한쪽 눈을 크게 뜬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뿐.
죽은 듯이 생기를 잃어버린 그의 눈은 여전히 흐리멍덩하기만 했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
“야.”
까드드득.
섬뜩함이 느껴지는 저음으로 살암의 말을 끊어 낸 사무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짙은 분노를 담아 그를 응시한다.
“누구냐.”
“……무엇이 말이냐?”
“누가 널 그따위로 만들었냐고.”
“큭……. 왜, 그자를 찾아 복수라고 할 셈이냐?”
사무현의 물음에 자조 섞인 미소를 머금는 살암.
그러고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쓸쓸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럴 것 없다……. 먼저 싸움을 건 것은 나고, 이는 도리어 나를 비참하게만 만드는 짓…….”
“누구냐고!”
콰앙!
콰구구구구!
한쪽 발로 바닥을 내려 차며 살암의 말을 끊는 사무현.
그와 함께 퍼져 나간 기파가 살암의 몸을 휘청이게 만들자, 적사가 다급히 그의 몸을 부축하며 사무현에게 소리친다.
“조심하십시오, 막주님은 아직 부상 중이십니다!”
“이……!”
꽈아악.
아무리 자신과 살암의 격차가 크다고 한들 고작 이 정도 기파에 균형을 잃을 살암이 아니다.
그런 그가 이런 기파조차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겉도 속도 그야말로 만신창이에 가까운 상태라는 것.
한눈에 보아도 생사를 오가는 전투가 있었음을…… 그리고 필시, 회복하더라도 살암의 몸 상태가 과거의 전성기를 되찾기 어려움이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살암과 같이 환검을 쓰는 무인에게 있어 한쪽 눈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치명적인 제약이니까.
그렇게 서로 간에 잠시 침묵이 자리하자,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온 수룡왕이 느릿한 어조로 말을 꺼낸다.
“어찌할 테냐? 내 요구사항을 들어준다면, 너를 돕는 것에 저들을 구출한 것까지 포함하도록 하지.”
“……요구를 받지 않는다면?”
“하면 별수 없지.”
쓰윽.
어느새 자신의 등 뒤에 매어진 도의 손잡이로 손을 가져간 수룡왕이 서늘한 눈을 번뜩인다.
“저것들을 구한 일은 없는 셈치고…… 우리 사이에 남은 빚을 해결하는 수밖에.”
“…….”
수룡왕의 한 마디에 지그시 그의 얼굴을 노려보는 사무현.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살기를 서로를 향해 내뿜으면서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본다.
누구 하나가 먼저 몸을 움직이는 순간 싸움이 시작되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렇게 길고도 짧은 대치 끝에, 이윽고 사무현이 짧게 혀를 차며 살암에게로 몸을 돌린다.
쓰윽.
“중경만 받아들인다. 사천은 안 돼.”
“하, 고작 중경만?”
“수작 부리지 마. 더 양보받고 싶으면 수적질을 완전히 내려놓으시든지.”
사무현의 날카로운 한 마디에 수룡왕의 입이 다물어진다.
수로채가 수적질을 완전히 그만둘 수는 없다.
그저 이전보다 덜 파괴적이고, 조금 더 너그러운 정책으로 수채를 운영할 뿐.
‘……여기까지인가.’
물론 조금 더 몰아붙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잠깐 본 것만으로도 저놈이 얼마나 동료를 끔찍이 여기는지는 충분히 전달되었으니까.
하지만 저들을 미끼로 삼아 억지로 약속을 밀어붙인다면, 저 영악하고 지긋지긋한 놈이 추후 약조를 지킬지 확신할 수 없다.
‘사실 사천은 당장 흡수하기에 무리인 지역이기도 하니…….’
중경과 귀주에 비해서는 훨씬 발달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사천은 아미와 청성, 당문과 같은 거대 문파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이다.
음지와의 전쟁을 마친 수로채가 사천에 자리를 잡는다면, 저 욕심 많은 것들이 수로채를 내버려 둘 리 만무하다.
결국 이쯤에서 타협을 마무리 짓기로 한 수룡왕이 느긋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거래를 받도록 하지.”
“……이 길로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음지 녀석들의 눈에 띄어 좋을 것이 없으니.”
“아, 염려 마라. 그리하지.”
“살암을 내게 넘겨라, 적사.”
투두두둑.
수룡왕의 대답을 들은 채 만 채 살암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점혈하는 사무현.
잠시 후 혼혈까지 짚어진 살암이 그를 향해 쓰러지자, 능숙하게 그를 등에 업은 사무현이 적사에게 고갯짓을 한다.
“따라와라.”
저벅저벅.
사무현의 뒤를 따라 몇 걸음쯤 옮기던 적사가, 질근 입술을 깨물며 수룡왕에게 포권해 보인다.
“……막주의 목숨을 구해 주신 것에 수룡왕에 감사를 표합니다.”
“거래를 위한 패였을 뿐이다, 가라.”
“……그럼.”
수룡왕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인 적사가 사무현의 뒤를 따르자, 잠시 후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수룡왕이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린다.
“따라가서 작은 배 한 척을 내주거라.”
“예? 배를요?”
“…….”
“죄, 죄송합니다! 바로 내어 주겠습니다!”
수룡왕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지자, 직각으로 허리를 숙여 보인 수룡채의 수적이 헐레벌떡 그들의 뒤를 따른다.
그 뒷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수룡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린다.
“계집이긴 해도, 저런 수하 놈 하나만 있으면 꽤나 든든하겠군.”
단순히 무위만 놓고 본다면, 삼 년 전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신무의 무위가 저 아이보다는 월등하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의식을 잃고 목숨의 위기에 처한다면, 그들이 과연 목숨까지 걸어 가며 자신을 지키려 했을까?
부러움에 입맛을 다시며 저들이 사라간 방향을 지켜보는 것도 잠시.
어느새 방 한쪽으로 고개를 돌린 수룡왕이 처참하게 나가떨어진 철제 탁자를 바라보며 두 눈을 가늘게 뜬다.
‘그나저나…… 이건 생각보다 더한 성장세인데…….’
삼 년 전에 만났던 저 사무현이라는 애송이는 엄밀히 말해 그보다 강하다고 말하기에 부족한 상태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내력과 초식의 정교함, 실전 경험 등을 갖추고 있기는 했지만 그 모든 것은 수룡왕인 자신을 넘어서지는 못하는 수준.
아니, 오히려 실전 경험을 제외하면 내력과 신력 면에서 우위를 점했던 것은 자신이 이었다.
당시 녀석과의 싸움에서 패했던 이유는, 상대를 무시하고 스스로의 강함에 도취했던 오만.
그리고 녀석의 독기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스스로의 안일함 때문 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지난 삼 년.
이제 녀석과 열 번을 싸워도 아홉 번 이상의 승부에서는 모조리 쓰러뜨려 버릴 자신이 있던 차였다.
‘한데…… 이래서는 고작 오 할 남짓이겠군.’
조금 전 사무현이 보여 준 기의 수발은 제아무리 수룡왕으로서도 흉내 내기 버거운 정교함을 보여 주었다.
목재로 이루어진 배 안을 조금도 파괴하지 않으면서, 이 무거운 철제 책상을 그에게까지 날아들게 만들었으니.
까드드득.
“……큭큭,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놈이구나!”
생각이 바뀌었다.
우선은 음지의 버러지들과의 싸움에 집중해야겠지만,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고작 중경이라는 작은 땅덩어리에 만족할 일이 아니다.
‘더 크기 전에…… 이번에 기필코 싹을 잘라 놔야겠구나.’
만일 저대로 시간이 더 흘러 버린다면 그때는 필시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괴물로 성장하고 말테니까.
아무도 남지 않은 방 안에, 숨길 필요가 없어진 수룡왕의 살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
“으음…….”
사천방의 장원 내에 위치한 의약당.
근 십 년간 남경 제일의 명의로 꼽히는 허삼 의원은 현재 자신의 앞에 뉘어진 시신…… 아니, 시신을 방불케 하는 부상자를 내려다보며 침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군.’
이곳 남경에서 수십 년간 의원으로 지내며 수많은 이들을 진료한 허삼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거의 목숨의 경각에 놓였던 사문회주를 치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맹세컨대 그의 손을 거쳐 갔던 그 어떤 환자도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환자만큼 위중하지는 않았다.
몸 곳곳에 기혈의 안정을 위한 금침을 수백 개가량 꽂고 누워 있는 사내의 모습.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연신 앓는 소리를 내는 허삼을 향해, 그의 뒤쪽에 앉아 있던 사내. 사무현이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예? 아…….”
“…….”
“크흠……. 그게…….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직설적으로 말해 주십시오.”
“…….”
“제 식구입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사무현의 한 마디에,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허삼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어찌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인지 따져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
“한쪽 눈에는 깊은 검상을 입었습니다. 아마 평생 저 눈으로는 앞을 볼 수 없겠지요. 대체 어떤 전투를 치른 것인지 몸 곳곳의 살점은 근육과 함께 거칠게 뜯겨 나갔습니다. 뼈도 여기저기 부러져 있고, 출혈의 양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이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두 다리는 근육과 힘줄이 통째로 잘려 나가, 앞으로 평생 제대로 걸을 수 없을…….”
“허튼소리!”
허삼의 이어지는 말을 듣고 있던 막휘가, 사무현의 뒤에서 참지 못하고 앞으로 튀어나오며 목소리를 높인다.
“말 같지 않은 소리 마시오! 저놈이 어떤 놈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막휘!”
“……!”
“……조용히 해라.”
……꽈악.
쥐어진 손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힘을 준 사무현이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음성으로 막휘의 행동을 가로막는다.
결국 막휘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자, 허삼이 어색한 표정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말을 잇는다.
“앞으로 평생 제대로 걷는 것은 아마 어려우실 겁니다. 그리고 사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이분이 다시 깨어나실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분명 깨어 있었습니다만.”
“그리 말씀하시면 저도 더 드릴 말씀이…… 사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이, 육체가 기능을 다할 수 있다고 하여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고통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이겨 내지 못할 정도의 고통을 겪게 되면 육체보다 정신이 먼저 생을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움찔.
과거의 천마신교를 떠올리게 만드는 허삼의 한 마디에 사무현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한다.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온몸으로 받아 내야 했던 끔찍하기 그지없는 시술들.
이를 견뎌 내지 못하고, 사방에 가득했던 비명 소리는 시술을 거듭할수록 점점 줄어들어 갔다.
그래…… 아마 사무현 또한, 머지않아 그들과 같이 목숨을 잃을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과거를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떠는 사무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허삼이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잇는다.
“어쩌면…… 의식을 차렸던 그 모습이 회광반조(回光返照)였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제가 알기로 이만한 상처를 한 번에 몸에 입고도 견뎌 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
“만일 이분이 생에 대한 욕구가 제 상상을 넘어설 정도라면…… 기적적으로 고통을 이겨 내고 다시 눈을 뜨실지 모릅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허삼의 말을 모두 들은 사무현이, 천천히 고개를 한번 숙여 보이고는 몸을 일으킨다.
“괜찮으시다면…… 저 녀석이 일어날 때까지 사천방에 머물러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예, 그리할 생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벅저벅.
허삼에게 짧게 예를 갖춘 사무현이 그렇게 의약당을 걸어 나온다.
막휘를 포함한 몇몇 이들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낯설 정도로 차갑게 식은 그의 얼굴에 누구도 차마 사무현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의약당을 나선 사무현이, 천천히 호흡을 한번 고르고는 어둠 속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와라, 청사.”
쓰윽.
사무현의 말이 끝남과 함께, 장원의 담벼락 한쪽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던 청사가 그를 향해 걸어 나온다.
사무현 못지않게 싸늘하게 식은 그의 두 눈에는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살기와 분노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너는 알고 있지?”
“…….”
“살암을 저렇게 만든 새끼.”
살기 어린 사무현의 물음에 청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좋네, 안내해.”
청사의 대답과 함께 몸을 돌린 사무현이 장원의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살암이 깨어나기 전에, 그 새끼 모가지 잘라 놓는다.”
천마가 보여
지은이 : 보용도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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