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years old Hea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289
289화
“안주는 없다. 아무래도 오늘 같은 날은 조금 취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어느새 챙겨 왔는지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풀어, 미리 들고 있던 술병 하나를 흔들어 보이는 살암.
그러고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 사무현의 옆으로 가 철퍼덕 주저앉는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며 사무현이 물었다.
“뭐냐?”
“음?”
“왜 어울리지도 않는 짓이냐고.”
사무현이 아는 살암은 좋게 말하면 기품, 나쁘게 말하면 허세가 몸에 깃든 녀석이다.
암천막이 멸문한 이후 쓸데없이 몸치장을 해 가며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건 줄었지만 그럼에도 행동거지에는 언제나 격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술잔도 없이, 사무현의 옆에 건들건들 걸어와 병째 나발을 부는 행동은 평소의 모습과 확연히 거리가 있었다.
“대가리 좀 컸다고 슬슬 막 나가는 거냐?”
“……그럴 리가.”
정신 줄을 놓은 거면 두들겨 패서라도 다시 잡게끔 만들어 줘야 하나? 라는 의지가 느껴지는 사무현의 눈빛에, 쓴웃음을 머금으며 살암이 슬며시 그의 시선을 회피한다.
“그냥, 오늘은 좀 내려놓고 싶었을 뿐이다.”
“흐음…….”
살암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사무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술병을 기울인다.
평소와 다른 녀석의 모습에 괜스레 반응해 보았지만, 역시 지금은 이 이상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이내 살암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사무현이 한 번 더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며, 이들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꼴꼴꼴.
탁.
“……축하한다.”
술 한 병을 모조리 비워 버린 사무현이 빈 병을 한쪽에 내려놓으며 대뜸 입을 열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술병을 비우고 있던 살암이 천천히 긴 숨을 내쉬며 묻는다.
“후우……. 축하라고?”
“…….”
“……무엇을?”
“너까지 스스로를 몰아세울 것 없어.”
살암의 반문에 고개를 가로저은 사무현이 다시금 저 멀리 어두운 숲 쪽을 응시하며 말을 잇는다.
“사천방의 희생이 적었던 것에는 너희들의 공이 컸으니까.”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나?”
사무현의 말에, 어느새 일그러진 미소를 머금은 살암이 스스로의 한쪽 눈으로 손을 가져간다.
쓰윽.
“이 눈과 흑호를 바꾸고.”
“…….”
“이 다리와 명천을 바꿨다.”
명천은 적월이 있었던 서문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사천방도였다.
적월과 만패, 나혼수를 중심으로 적들을 괴멸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그들 모두 살아남는 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사천방도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문파의 문주급으로 강하다곤 하지만, 저들도 전투에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음지의 무사들이다.
집단전이 서서히 난전의 양상을 띄어 감에 따라 저들의 암수 하나하나를 신경 쓰기는 점점 더 버거워지고, 한순간의 빈틈을 보이는 순간 생사의 기로에 놓인다.
애초에 자신들보다 몇 배나 많은 음지의 적들을 상대로 이 정도 피해만 본 것도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 증거로, 천신련의 훈련 기수들은 태반 가까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졌으니까.
“……이 모든 일은 내가 없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그답지 않은 자책과,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살암의 한마디에 사무현이 덤덤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나 때문이다.”
“…….”
“만약 나라는 존재가 아니었다면…… 사천방이 음지와 싸워야 할 일은 없었을 거다.”
천신련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사천방은, 현재 녹림과 수로채에 이어 사파의 최대 무력 집단 중 하나로 손꼽힌다.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취급하며 갖은 악행을 저지르는 곳이 음지라고는 하지만, 반대로 그런 음지이기 때문에 더더욱 강한 적에게 싸움을 거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자신만 아니었어도 사천방이 음지와 싸우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힘겹게 내뱉은 살암의 자책에 돌아온 것은 생각 외로 덤덤한 사무현의 대답이었다.
“말했듯이, 그건 정말 모르는 일이야. 네가 없었어도 언젠가는 음지 놈들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몇 배는 악랄한 놈들과 맞붙게 되었을지 모르니까.”
“……뭐라고?”
사무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살암이 반문하자,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던 사무현이 처음 보는 괴로운 얼굴을 하며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누구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었는가는 중요치 않아.”
“…….”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그때…… 내가 함께하지 못했다는 게 중요하지.”
지금껏 본 적 없는 사무현의 얼굴과 분위기에 살암이 잠시 침묵을 지킨다.
“뭐…… 아무튼 너는 네 역할을 충분히 잘 해 줬다는 거야. 네가 경지를 개척하기를 바라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 쉬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 또한 결국 네 덕분이지.”
사실이다.
지난 삼 년간 이상하리만큼 그를 성장시키려던 사무현의 노력과, 마지막 순간 베풀어 준 영단의 기연이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화경의 벽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무현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나는 사천방을 위해, 그리고 천신련을 위해 너에게 길을 제시한 것뿐이다. 하지만 그 힘든 길을 결국에 걸어 낸 건 순전히 네 노력의 결실이다.”
“…….”
“그래서……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죽지 않고 사천방을 지켜 준 네게 감사하고 있다.”
진심이 느껴지는 사무현의 음성에 살암이 그의 얼굴을 돌아본다.
그가 사천방을 누구보다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무림인이라면 결코 함부로 가르쳐주지 않을 무공들을 대가 없이 가르치고, 자신의 시간까지 쪼개어 가며 모두가 ‘함께’ 강해지려 노력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살암의 수준에서만 봐도 까마득해 보였던 사천방도들을 여기까지 끌고 오는데 얼마나 많은 고민과 인내를 거쳤겠는가?
그러니 이제 와 새삼스레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사천방을 특별히 생각하는지.
“너한테…… 사천방은 무슨 의미지?”
결국 상황에 맞지 않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살암이 질문을 던진다.
이에 도리어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추켜 올린 사무현이 살암을 향해 반문한다.
“뭘 당연한 걸 묻고 있냐?”
“…….”
“식구들이지. 뭐 다른 의미가 있겠냐?”
“정말로 그런 단순한 의미라고? 한데 왜 그렇게까지…….”
더더욱 의아함을 지우지 못하는 살암을 향해 사무현이 담담한 답을 내어 놓는다.
“그 단순한 게 나한텐 없었으니까.”
“…….”
그 답과 함께, 그들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찾아든다.
‘……식구라.’
암천막에서 지낼 때는 듣지 못했던 단어다.
수하, 스승, 동료, 심복……. 수많은 수식어들이 있어도 한 집단에서 생활하는 이들 간에 식구라는 단어를 붙여 본 적은 없었다.
그런 단어는 저 저잣거리의 파락호들이나 녹림의 산적들 사이에서나 쓰는 표현법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살암은 사무현이 말한 식구라는 단어가 그 어느 때보다도 깊게 와닿고 있었다.
과거의 그라면, 아끼던 수하 몇이 목숨을 잃었다고 이렇게까지 자책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항상 자신은 암천막이라 주장했지만,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천방의 ‘식구’가 되었음을 실감한 살암이 이윽고 화제를 돌렸다.
“하면…… 이제 어찌할 거냐?”
“응?”
“우리의 식구를 건드린 놈 말이다.”
살암의 물음에 사무현의 눈이 서서히 서늘하게 번뜩인다.
“……가만 둘 수 없지.”
사천방을 침략했던 적들은 대부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들은 사천방의 복수의 대상이라 말하기에 부족했다.
그들은 그저 동천왕이라는 자가 휘두른 날붙이에 불과한 존재들이었으니까.
“동천왕을 칠 셈이냐?”
“그래.”
“그로 인해 더 많은 식구를 잃을 수도 있는데도?”
살암의 예리한 물음에 사무현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본다.
“……넌 왜 답지 않게 한 치 앞밖에 못 보는 소리를 하냐?”
“음?”
“정신 차려. 여긴 강호고, 우리 사파야.”
사무현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한 살암이 두 눈을 가늘게 뜬다.
“다시는 누구도 같은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공포를 심어 주겠다는 말이냐?”
“내 몸은 하나고, 언제까지고 사천방의 모두를 홀로 지켜 줄 수는 없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사무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저 멀리 동이 터 오는 방향을 바라본다.
‘그래, 어차피 해야만 한다.’
사실 살암과 대화를 이어 가기 전까지만 해도 사무현은 끝없이 이 문제를 고심하고 있었다.
살암에게는 핀잔을 주듯 이야기 했지만, 사실 이번 전쟁이 가져올 결과가 두려운 것은 사무현도 마찬가지니까.
‘동천왕이 아닌…… 음지와의 전쟁이 될 테지.’
살암이, 암천막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머지 음지삼왕이 동천왕을 돕지 않을 리 만무하다.
저들이라면 천신련을 등에 업은 암천막의 공식적인 부활만큼은 어떻게든 막으려 들고 말테니까.
‘……할 수 있다.’
꽈악.
지난 삼 년의 시간동안 천마와 사무현이 천신련을 성장시키는 데만 집중한 것은 아니었다.
수룡왕과의 싸움 이후, 언제 또 있을지 모를 강적들과의 싸움을 위해 천마로부터 매일 밤 지옥을 경험해 왔으니까.
음지삼왕이 얼마나 강한 녀석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사무현에게 저들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새 날이 밝았구나.”
어느새 몸을 일으켜 사무현과 함께 동이 터 오는 저 먼 하늘을 바라보는 살암.
그렇게, 사천방의 길고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
날이 밝자, 사천방과 천신련의 모두가 힘을 합쳐 전사한 이들의 시신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묻어 주었다.
천신련 무사들의 경우 고향으로 시신을 돌려보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먼 거리를 지나 도착하기까지 시신이 부패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그들의 가족들에게 소식과 위로금을 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는 천신련 무사들의 신원을 미리 파악해 둔 사문회주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사천방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어 간 모두는 사천방의 장원이 한눈에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모두가 경건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그 앞에 도열했고, 사무현이 그들의 무덤 하나하나에 술을 뿌려 주었다.
꼴꼴꼴.
“내가 주는 잔은 오랜만이겠구나.”
우연찮게 가장 마지막에 남게 된 흑호의 무덤 앞에서 사무현이 입을 열었다.
“……마음껏 마셔라. 네가 죽고 못 살던 죽엽청이다.”
“읍……!”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손익패.
두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자신을 대신해 목숨을 잃은 흑호.
그가 죽어 가는 동안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리고 이윽고, 남은 모든 술을 흑호의 무덤 앞에 쏟아낸 사무현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서 백여 개에 이르는 무덤을 향해 고개를 숙여 포권한다.
“천신련주 사무현이, 사천방을 지켜 주신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쓰윽.
사무현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천신련과 사천방의 무인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 후 고개를 들어 모두를 향해 돌아 선 사무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렁차게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의 동료가 죽었다!”
“…….”
“바로 어제까지 우리와 함께 수련하고 밥을 먹던 식구들이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 이곳을 지키기 위해 저들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살아남았다!”
“……!”
“그리고 그 어떤 값진 말로 포장한들…… 우리는 이 빚을 갚을 수 없다.”
사무현의 말이 이어질수록 천신련 훈련기수들과 사천방도들의 얼굴에 슬픔과 분노의 빛이 짙어진다.
사무현의 말대로, 저들은 어제 이 시각까지만 해도 함께 땀을 흘리며 수련하던 동료들이니까.
함께 웃고 떠들고 불평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그들은 이곳에 서 있고 저들은 묻혀 있다.
가늘게 몸을 떨며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하는 저들을 향해 사무현이 소리친다.
“살아남은 우리는 책임이 있다!”
“…….”
“저들이 지키려 했던 천신련을 지켜야 하는 책임!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강한 천신련을 만들 책임! 저들의 죽음을 결코 가치 없는 죽음으로 만들어선 안 될 책임!”
사무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의 심금을 울린다.
슬픔과 분노에 잠겨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모두가 하나둘씩 고개를 들어 어느새 사무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빙 돌아보며 사무현이 결의 어린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그리고 나아가…… 이 일의 원흉이 된 이들을, 우리의 원수들을 벌해야 하는 책임.”
“……혀, 형님, 설마.”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은 이들과 살아남은 이들이 모두 보고 있는 자리에서 약속한다!”
부웅.
퍼억!
어느새 등 뒤에 메고 있던 천마도를 풀어 땅에 박아 넣은 사무현이 두 눈을 번뜩이며 선언한다.
“사천방주이자 천신련주로서, 우리를 공격한 원흉의 목을 이 자리로 가져오겠다!”
“……!”
“그리고 그 과정을 방해하는 그 어떤 세력도, 천신련의 적으로 간주한다.”
사무현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에 서서히 그와 같은 결의가 어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사무현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한 이는 단 하나도 없다.
이것은 음지를 향한 선전포고.
그리고 잠시 후, 인근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내지른 함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와아아아아!”
천신련주 사무현이 음지를 향해 선전포고를 전했다.
이 소문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중원 전역에 확산되었다.
천마가 보여
지은이 : 보용도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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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602-6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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