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years old Hea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332
332화
황룡채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언덕.
그곳에는 역대 녹림왕들을 기리기 위한 비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질서정연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비들 중 하나의 앞에 선 신불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그곳에 술을 뿌리고 있었다.
꼴꼴꼴.
“아미타불…… 시원하시오? 막태 시주.”
비석에 새겨진 삼십이대(三十二代) 녹림왕(綠林王) 막태(幕太)라는 글귀.
그 비석에 꼭 붙어 있는 또 다른 비석에 녹림왕후(綠林王后) 천화(天花)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자, 천 소저도 한잔하시구려.”
꼴꼴꼴.
“아미타불…… 그대들이 살아 있었다면, 저 새카맣게 어린 녀석들의 머리통을 내 앞에서 두들겨 주었을 텐데 말이오.”
그리운 옛 동료들.
이들이 있었던 시절의 녹림은 의리 하나로 죽고 사는 집단이었다.
아마 그들이 조금 전 녹림왕과 채주들의 회의를 보았다면, 죽산을 지키는 것보다 단 한 명의 형제라도 덜 희생시킬 수 있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형제가 없는 녹림은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
‘아까 그 말을 그놈들 앞에서 내뱉어 줬어야 하는 것인데…….’
나이가 든 탓인지, 항상 해야 할 말은 그 상황에는 떠오르지 않고 뒤돌은 후에서야 떠올라 가슴을 치게 만든다.
그리움과 아쉬움을 담은 한숨을 내뱉은 신불이 술병 하나를 온전히 비울 때 즈음, 그의 뒤쪽에서 낯선 인기척이 들려왔다.
저벅저벅.
“거기서 뭐 하십니까? 어르신.”
“아미타불…… 녹림왕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오?”
“회의가 끝나 어르신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이곳으로 향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씩 웃으며 신불의 옆으로 다가온 막우가 그가 서 있는 비석의 앞에 서서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선대를 향한 예를 표하는 그를 가만히 기다린 신불이, 막우가 고개를 들자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결론은 어찌 났소이까?”
“우선은…… 결정을 다음 회의까지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의외로구려.”
“의외라 하셨습니까?”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 당연히 거절의 답을 받을 줄 알았는데 말이오.”
신불의 담담한 대답에 막우의 얼굴에 쓴웃음이 머금어진다.
회의 때 그렇게 신불을 보내기는 했지만, 막상 이렇게 선조들의 비석 앞에 선 그를 바라보니 조금 전의 상황이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본승 때문에 마음을 돌린 것이오?”
“그렇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사실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하면…….”
“소녹림왕이라는 녀석이,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아비를 들이받아 버려서 말입니다.”
어쩐지 신불의 앞에 서자, 돌아가신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대하는 기분을 느끼며 막우가 입을 열었다.
“녀석이 그사이 머리가 제법 컸는지…… 차마 반박할 수도 없게 저를 몰아붙이더군요. 녹림왕이라면 전통이라는 말 따위에 현혹되지 말고, 진짜 왕답게 행동하라고 말입니다.”
“아미타불…… 막휘 시주가 그런 말을 했다는 말이오?”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감탄한 얼굴로 막우를 바라보는 신불.
이에 짧게 실소한 막우가 신불이 바라보던 비석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린다.
“이분들이 계셨을 당시의 녹림은 어땠습니까?”
“흐음…… 그때의 녹림이라…….”
막우의 말에 가물가물하다는 듯 허공을 바라보던 신불이, 아련한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엉망이었소.”
“……예?”
“당시에는 소녹림왕이라는 직책도 없었고, 지금처럼 칠십이채의 체계도 잘 잡혀 있지 않았소이다. 녹림왕이 전쟁을 위해 전서구를 띄워도, 절반이나 오면 다행인 정도였지. 확실히 녹림왕의 권위는 지금의 녹림이 더 나은 듯하오.”
“……그렇습니까?”
“하나.”
“…….”
“만일 과거와 지금의 녹림 중 어느 곳이 더 무서우냐 말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과거의 녹림을 택할 것이외다.”
신불의 단호한 대답에 막우의 눈이 커진다.
“어째서입니까?”
“결집력이오.”
“…….”
“비록 절반밖에 모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절반의 결집력은 감히 지금과 비교할 수 없었소. 녹림왕의 결정에 의심을 품는 이 없었고, 서로가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만큼 의리 하나에 목숨을 걸었지. 이는 그 수많은 산채들을 하나의 군(軍)으로 만들었소이다, 한데…….”
“…….”
“본승이 조금 전 본 녹림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산채들을 끌어모았을지언정, 하나의 세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집단을 모아놓은 일종의 연합체처럼 보였소이다.”
정곡을 찌른 신불의 한 마디에 녹림왕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보이셨습니까?”
“높은 자리에서 이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다 보면, 보고 싶지 않아도 많은 것이 보이는 법이니 말이외다.”
“…….”
“시주와 가까이에 있는 몇몇 산채의 채주들만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필시 녹림 내에서 서열이 높은 산채들일 것이고…… 그런 이들은 황룡채 인근의 안전한 곳에서 방어진을 꾸렸을 테니, 구태여 위험을 감수하고 무당에 가고 싶어 할 리가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이까?”
“……정확합니다.”
“아미타불…….”
녹림왕의 대답에 긴 한숨과 함께 염불을 읊은 신불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고는 말을 잇는다.
“내 이번에는…… 무림맹에서 온 사자가 아닌, 누구보다도 녹림을 아꼈던 벗을 위해 한마디만 하겠소이다.”
“…….”
“서열을 중시하고 권력을 배분하여 체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녹림이 옳은지…… 아니면 보다 넓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녹림을 만드는 것이 옳은지.”
“…….”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라오.”
“…….”
“아미타불.”
돌처럼 굳어져 아무런 답을 내리지 못하는 막우를 뒤로 한 채, 뒷짐을 지고 언덕을 내려가는 신불.
복잡한 심사가 담긴 얼굴로, 막우는 한동안 가만히 서서 저 먼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
끼이익 끼익.
“아우우우, 제엔자아앙. 진짜 더럽게도 오래 걸리네.”
흔들리는 뱃머리 위에서 늘어져라 기지개를 켜는 사무현.
벌써 배를 타고 움직인 지 사흘째다.
이제쯤 슬슬 마교 놈들이 죽산에 다다를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초조한 그의 마음과는 달리 장강의 물살을 가르는 배의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야! 더 빠르게 못 가냐? 이 속도로 어느 세월에 죽산까지 가!”
“죽산이 아니라 흥산(興山) 인근까지지.”
짜증 섞인 사무현의 외침에, 어느덧 그의 뒤쪽에서 감정을 억누른 수룡왕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봐라.”
“…….”
수룡왕이 그들의 배를 뒤따르는 다섯 채의 큰 배들을 가리킨다.
“장강수로채에서도 가장 크고 빠른 수채의 배들이다. 여기 있는 수룡채까지 합하면 여섯 채.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쯤 되는 문파라도 쓸어 버릴 수 있는 전력이 네놈 하나의 부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뭐? 내가 빠르게 가달라고 했지, 전력을 투입해 달라고 했냐?”
“남경에서 출발해 안휘를 거쳐 사흘 만에 호북의 의창(宜昌)을 지났다. 장담하지만 네놈들이 그 어떤 말을 타고 움직였어도 이 뱃길보다 빠르지는 못할 거다.”
“끄응…….”
수룡왕의 설명에 사무현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 장강수로채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정도 속도로 호북에 도착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전투병들까지 노꾼으로 교대해 가며 밤낮으로 최고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무림맹도, 관군도, 이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장강을 지날 수는 없다.”
“후우…… 알겠다, 알았다고.”
결국 자신이 무리한 요구를 했음을 인정한 사무현이 두 손을 들며 항복을 선언한다.
그런 그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수룡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애초에 제 발로 거기까지 간 녀석이 아닌가? 구태여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구하러 가는 이유를 모르겠군.”
“모르면 알려고 할 거 없다. 너 같은 새끼가 형제의 의리가 뭔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지.”
“이……!”
꽈악.
사무현의 도발에 눈썹을 꿈틀한 수룡왕이 도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쥔다.
하지만 그 모든 동작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무현의 눈빛에,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도를 쥔 손아귀에 힘을 풀고 만다.
‘귀신같은 놈.’
굳이 도를 뽑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음지와의 전쟁 이전에도 이미 사무현은 그를 뛰어넘고 있었지만, 이번에 다시 만난 녀석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 열 번을 싸운다 해도 열 번 다 패할 것이 분명하다.
사파에서 관계의 우위를 점하는 것은 오직 힘.
그것을 사무현이라는 녀석이 쥐어 버린 이상, 앞으로 그들의 관계에서 수룡왕 자신이 우위를 점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떻게든 속도를 높이라고 전해라.”
“예, 예? 여기서 더 말씀이십니까?”
“…….”
“아, 알겠습니다! 바로 전하겠습니다.”
수룡왕의 매서운 눈빛에, 그의 명을 받은 수하가 헐레벌떡 노꾼들이 위치한 갑판 아래로 뛰어 내려간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수룡왕이 휙 고개를 돌리려던 그때였다.
“왕이시여! 저기 육지가 보입니다!”
“음……!”
뱃머리 쪽에서 방향을 확인하던 수적 하나가 목소리를 높이자, 수룡왕과 사무현의 시선이 덩달아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간다.
새하얀 강변의 모래가 드리운 그곳에, 배가 정박할 나루터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뻗은 황야를 말을 타고 지나는 다섯 명의 무리.
선두에는 나머지 넷과 거리를 두고 있는 사내가 공허한 얼굴로 가만히 저 먼 앞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르는 네 명의 무리들 중, 백발의 노인이 나머지를 대표하듯 선두의 사내와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인, 태상장로를 향해 뒤쪽에서 전음을 보내오는 구마장로.
수십 년 이상을 교외에서 활동을 해 오던 이였기에, 그는 중원의 주요 지리를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었다.
구마장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 태상.
본래 그의 계획대로라면 어떻게든 천마를 설득해 저 죽산에서 녹림도들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소교주가 그들과 합류하지 못한 채 홀로 무림맹과의 일전을 치르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현재 태상장로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었으니까.
한데…….
‘우방 이놈……! 대체 무얼 하느라 늦장을 부리고 있는 게냐……!’
소교주에게 서신을 보내라 시킨 것이 벌써 닷새 전의 일이다.
우방이 도착한 후에 죽산을 치고자 최대한 시간을 지연시켜 행군을 이어 왔거늘, 멍청한 녀석이 시급을 다투는 일인 줄도 모르고 여유나 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일수록 가급적 변수를 만들지 않아야 하거늘……!’
그가 속이고 있는 이는 이백 년 전 중원을 지배했던 십삼 대 천마.
그리고 그를 속이기 위해 사용한 이름은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최강이라 평가받는 초대 천마다.
잘못 일이 꼬이면 단순히 목숨을 잃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그가 계획을 밀어붙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태상장로님, 우회하거나 정찰을 보내려면 슬슬 움직여야 합니다.”
뒤쪽에서 그를 재촉해 오는 구마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어느덧 저 멀리서 죽산의 모습이 조금씩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꽈악.
‘……어차피 기호지세(騎虎之勢)다.’
이미 그의 패는 던져졌다.
상대가 쥔 패를 알 수 없어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차피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태상장로가, 조심스레 말을 몰아 선두에 선 초대 천마와 거리를 좁힌다.
다그닥.
“저 멀리 보이는 곳이 죽산입니다, 천마이시어.”
“……죽산?”
태상장로의 보고에 천마가 저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바라본다.
완만하지만 긴 능선이 늘어져 있는 산세는, 언뜻 보아도 우회하여 지나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녹림칠십이채를 다스린다는 녹림왕이 지배하고 있는 산입니다. 우회하여 지나가려면 사흘 정도는 더 걸릴 것인데…… 전투를 각오하더라도 가로지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녹림왕이라…….”
태상장로의 설명에 조금은 흥미를 보이는 듯 두 눈을 가늘게 뜨는 천마.
잠시 후, 그의 입에서 지극히 태상장로가 원했던 질문이 흘러나온다.
“강한 놈인가?”
“중원의 최강자라 불리는 천무신녀조차 천마의 발끝에 미치지 못하였사온데, 어찌 녹림왕 따위로 강함을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아부 섞인 예를 갖추며 은근하게 천마의 질문을 빠져나가는 태상 장로.
그는 결코 녹림왕이 강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녹림왕이 약하다고도 입에 담지 않았다.
‘천무신녀보다 강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가정으로 도리어 천마의 흥미를 교묘하게 유도해냈다.
거기에 쐐기를 박기 위해, 태상장로가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히 선택하며 말을 이어간다.
“다만 녹림은 중원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 중 하나이니…… 적어도 변변한 저항 하나 없이 무너졌던 곤륜이나 청성과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흐음…….”
태상장로의 은근한 어조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죽산을 바라보는 천마.
그리고 잠시 후, 초대의 고개가 미미하게 아래로 끄덕여진다.
“태상.”
“예, 천마이시어.”
“녹림왕을 봐야겠다.”
천마의 입에서 원했던 답이 흘러나오자, 태상장로가 내심 쾌재를 지른다.
“……알겠습니다, 하면 다른 잡것들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직 녹림왕 하나다.”
“…….”
“녀석이 나를 만나겠다고 하면 살려줄 것이나, 그렇지 않겠다고 한다면…….”
뒤이은 천마의 말을 직감한 태상장로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머금어진다.
“치워라.”
“……!”
“단 하나도 빠짐없이.”
“존명!”
기다리던 천마의 명이 떨어지자 태상장로의 입에서 우렁찬 복명음이 흘러나온다.
천마가 보여
지은이 : 보용도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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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602-6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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