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years old Hea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45
045화
“……그럴 리가 있겠느냐? 어쨌거나 스쳐 갈 인연이거늘.”
“스쳐 갈 인연 아닌데요?”
“…….”
“자, 이거 받아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어쩐지 득의양양한 미소를 머금은 여인이 사내에게 웬 서찰 하나를 건넨다.
“웬 서찰이냐?”
“말해 주면 재미가 없지요. 읽어 봐요, 어서요.”
의아한 얼굴로 여인을 바라보던 사내가 이내 서찰을 펼쳐 들었다.
오랜만에 긴 서찰을 읽어 내린 사내의 입가에 아련한 쓴웃음이 머금어진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래도록 보지 못했구나.’
그가 십만대산에 자리를 잡은 지 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가 그곳에서 도통 나오질 않으니, 단아란은 그를 만나러 수년에 한 번씩 이곳을 찾아오곤 했었다.
마지막 만남 때 무림맹에서 일을 하게 될 것 같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때로부터 어느새 삼십 년의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마음만큼은 당장이라도 발걸음을 하고 싶지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다.
그들이 괜히 십만대산에서 백년이라는 시간 동안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것이 아니니까.
현재 연화가 앓고 있는 지병은, 십만대산에서만 자라는 한명초라는 약초를 필요로 한다.
그 약초가 없이 연화가 버틸 수 있는 기간은 현재 기준으로 고작해야 닷새.
때문에 그녀는 이곳 십만대산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고, 자신은 그런 그녀의 곁을 지켜 주어야 한다.
어쩌면 보다 일찍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그녀가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고통을 이겨 내며 백여 년을 버틴 것은, 모두 홀로 남게 될 사내를 생각한 결정이었을 테니까.
한순간 스치듯이 떠오른 아쉬움을 이내 지워 버리며, 어느새 덤덤해진 눈빛으로 사내가 여인, 연화를 바라본다.
“조만간 개방을 통해 답신을 보내 주어야겠구나.”
“그것만으로는 많이 서운해할 텐데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 아이가 찾아오면 만날 수는 있으니, 시간에 여유가 생기면 찾아오라고 전할 생각이다.”
“에이, 그래도 그러는 건 아니지요. 아란이가 무림맹의 고문으로서 지금껏 기다린 시간들이 있는데요.”
“하면, 내게 아란이를 찾아가 보기라도 하라는 말이냐?”
“어차피 가라고 등 떠밀어도 안 갈 거면서, 뭘 묻고 그래요?”
피식 실소를 흘리며 연화가 정곡을 찌르자, 사내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되었다.”
“꼭 직접 찾아갈 건 없지요. 서신에 쓰인 대로 아란이의 체면을 세워 주면 되는 문제잖아요?”
“무슨 좋은 수가 있느냐?”
“제자를 보내면 되잖아요. 서신에 쓰인 대로.”
“……그게 무슨?”
그제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사내가 두 눈을 추켜 뜨자, 연화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머금어 보이며 그를 올려다본다.
“이제는 제가 잘했다고 인정할 차례지요?”
“……못 당하겠구나. 설마 녀석을 무림맹으로 보낸 것이냐?”
“맞아요, 아마 부리나케 무림맹으로 가고 있을 거예요.”
“녀석이 순순히 무림맹으로 갈 줄 대체 어찌 안다는 말이냐?”
“삼 년이나 봐왔는데, 그 극단적인 사람의 행동하나 예측을 못 하겠어요? 약간의 뻥을 섞은 서신이랑 초청장을 함께 주었으니까, 아마도 반드시 무림맹으로 찾아갈 거예요. 살고 싶다면!”
“……살고 싶다면?”
대체 어떤 서신을 썼는지 심히 궁금해지는 바가 아닐 수 없었지만, 대략적인 상황만큼은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무림맹에 가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내용을, 사무현을 위한 것처럼 각색하여 그의 행동을 유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정대로라면…….
‘……그 녀석이라면 반드시 무림맹으로 향할 테지.’
다른 건 몰라도, 살고자 하는 의지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녀석이니까.
“……조만간 무림맹이 꽤나 시끄러워지겠구나.”
“아마 무림도 시끄러워질걸요?”
“그 정도 평가를 받을 만한 녀석은 아니다.”
“아직은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가 무신의 마지막 제자라는 소문이 퍼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더군다나 지금의 성장 속도를 계속 유지한다면요.”
“…….”
“두고 봐요. 아마 머지않아, 여기 십만대산까지 재미있는 얘기들이 들려올 거예요.”
그렇게 씩 웃어 보이는 연화의 모습에, 결국 함께 미소를 머금고 마는 사내.
그녀의 말대로, 머지않아 중원무림은 꽤나 시끌해질 것이다.
녀석의 존재는 평화롭던 연못에 던져진 돌과 같을 테니까.
‘작은 파동이 될지 큰 파동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만……’
그리고 그 돌은, 실로 오랜만에 얻은 자유에 기뻐하며 연못을 향해 줄행랑을 치고 있을 것이다.
그 연못이 그들의 손바닥 안임을 알 수 없을 테니까.
……안타깝게도 말이다.
***
“……크흡.”
선자님이 몰래 건네주신 서신의 내용을 모두 읽은 사무현이, 거목 아래에서 조용히 목 끝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집어 삼킨다.
세상에 이런 선하신 분께서 존재하고 계셨다니.
악귀와도 같은 괴물 놈에게서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이런 안배까지 해 주는 은혜를 내리시다니.
‘감사합니다, 선자님. 혹시나 그 괴물이 먼저 늙어 죽으면, 제가 반드시 선자님을 찾아뵙고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괴물 새끼가 살아 있을 때는 차마 못 갈 것 같으니, 반드시 죽으면 가겠습니다.
반드시……!
“후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십만대산을 벗어나 한참을 내달린 끝에, 기척을 지우는 진까지 만들어 놓고 서신을 읽은 사무현이다.
오늘 밤까지는 심부름을 근거 삼아 어떻게든 괴물을 붙잡아 주시겠다고 약속이 되어 있으니, 사무현은 적어도 내일 날이 밝기 전까지 최대한 이곳에서 멀어져야 한다.
‘무림맹이 악양(岳陽)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고 했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사무현이 막 몸을 일으키자, 그의 뒤에 서서 함께 서신을 바라보고 있던 천마가 어쩐지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잠깐. 지금 설마 무림맹으로 가려는 것이냐?”
“어, 그런데?”
“아니……. 좀 이상하지 않느냐?”
“이상하다니? 뭐가?”
“녀석의 눈을 피하려면 차라리 이름 없는 산속 같은 곳에 은거를 하거나 새로운 신분을 구해 활동을 하는 것이 맞지, 무림맹이라는 곳에서 활동하면 아무래도 주목을 받기 쉬워질 것이 아니냐?”
“……왜 그렇게 생각해?”
“왜 그렇게 생각하냐니?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느냐? 만약 놈이 무림맹에 연줄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넌 탈출이 아니라 놈의 손바닥 안에서 노는…… 어어? 말은 안 듣고 어디 가느냐?”
“응, 더 이상 듣고 싶지가 않아서.”
충분히 타당한 의견임에도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사무현의 모습에, 당황한 천마가 다급히 그에게 따라붙으며 말을 이어간다.
“아니, 어째서냐? 이건 분명 일리가 있는…….”
“네 말을 듣고 그 끝이 좋았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
“……뭐라?”
“그리고 그에 반해, 선자님의 말을 듣고 그 끝이 나빴던 적은?”
“…….”
사무현의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는지 입만 벙긋거리며 그를 바라보는 천마.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돌아본 사무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천마야, 그렇게 선한 사람을 함부로 매도하는 게 아니다. 만약 그분한테 나쁜 마음이 있었다면, 그냥 탈출 못 하게 데리고 있으면 될걸 왜 추천장까지 주시면서 무림맹으로 가라고 하시겠냐?”
“글쎄…… 그거야 뭐…….”
“…….”
“……차차 알아가야 할 문제겠지.”
결국, 마땅한 항변을 못하고 대답을 얼버무리는 천마.
사실 사무현의 말대로, 그를 풀어줄 마음이 없다면 구태여 무림맹에 보내는 것도 말이 되지는 않으니까.
“것 봐, 너도 할 말 없지? 그분은 정말로 내가 안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제시해 주신 거야. 그런 분을 믿어야지, 감에만 의존하는 네 말을 믿을 수 있겠냐?”
“그래도 네가 여태껏 살아 있는 것은 전적으로 본좌의 감 덕분이 아니냐?”
“……전적으로 네 ‘감’ 덕분이라고? 확실하냐?”
이 새끼가 삼 년간 양심이라는 걸 잊어버렸나?
두 눈을 희번덕이며 노려보는 사무현의 모습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천마가 표현을 정정한다.
“뭐…… 일부 도움이 된 부분도 있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내가 지금껏 살아 있는 건 당연히 네 도움이 맞지, 그런데 그 와중에도 죽을 고비에 처하게 됐던 건 대부분 네 그 빌어먹을 ‘감’ 때문이었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지.”
“…….”
“이런 걸 뭐라 그래? 병 주고 약 준다? 아니지, 이 경우는 약 주고 병 준다?”
“아니, 본좌가 대체 언제…….”
“기를 느끼게 해 준답시고, 진을 이용해서 날 빈사 상태로 만든 게 누구였지?”
“…….”
“활로랍시고 절벽으로 데려가 죽일 뻔하고, 준비해 준 변명을 읊었다가 괴물 새끼한테 죽을 뻔하고, 식용 버섯이라고 빡빡 우기길래 믿고 먹었다가 사흘 내내 설사하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였지? 아니, 씨팔 생각할수록 열 받네. 이 새끼야, 그때 그건 누가 봐도 독버섯……!”
“아무래도 무림맹으로 가는 것이 좋겠구나.”
묻어 두었던 과거를 아주 정확하게도 짚어 내는 사무현의 기억력에,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천마.
하지만 한번 치밀어 오른 사무현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라고 이 새끼야! 너 이 새끼, 나 맥이려고 일부러 그딴……!”
“피곤하구나. 잠시 쉬고 오도록 하겠다.”
스슥.
결국 그렇게 천마가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분기를 억누르고 다시금 경공술을 펼쳐 움직이는 사무현.
어두운 밤.
드디어 십만대산의 탈출에 성공한 사무현의 입가에, 어느새 희열의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천마가 보여
지은이 : 보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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