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years old Hea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78
078화
‘……전보다는 좀 덜 모았네?’
사명관 곳곳에 배치된, 오십 명은 훌쩍 넘어 보이는 이들을 은연중에 둘러보며 사무현이 생각했다.
‘기습을 하려고 모은 것 같지는 않고.’
이렇게 대놓고 위협적으로 배치해 두었다는 것은, 오히려 싸우지 않고 끝내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간만에 힘 좀 써 보려나 했더니.’
요 며칠간 참을 인만 가슴속에 새기며 살아왔더니, 당장 어딘가 분출하지 않으면 못 버틸 지경이다.
물론 그 분출구가 정파쪽이 아닌 선배들을 향하게 되는 것은 가급적 피해야 할 일이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무현의 앞으로, 덩그러니 의자에 걸터앉은 사내가 인사를 건넨다.
“부름에 응해 주어서 고맙다, 이름이 사무현이라고 했던가?”
예상외로 서글서글한 그의 인사에, 잠시 고민하던 사무현이 이내 정중히 포권을 해 보인다.
‘그래, 뭐가 됐건 같은 사도관 선배인데 날 세워서 좋을 게 뭐 있냐.’
그가 날을 세워야 할 이들은 저 재수 없는 정파 놈들이지 무고한 선배들이 아니다.
“오십일 기 대표 사무현이, 적월 선배를 뵙습니다.”
“하하하! 과례(過禮)는 되었다. 그저 묵례나 해 보이면 되는 것을.”
사무현의 예의가 마음에 들었는지 적월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보다 순순한 사무현의 태도에 다소 경계가 누그러졌는지, 굳어 있던 만패와 나혼수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맴돈다.
그래, 그래. 역시 가는 예의가 좋으면 오는 예의도 좋은 법이지.
“헤헤, 그래도 첫인사인걸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아아, 별일은 아니다. 명색에 같은 사도관의 선후배 기수로 만났는데, 인사도 없이 서먹하게 지내서야 되겠느냐? 대표끼리 가볍게 담소나 나눌 겸해서 불렀다.”
그렇게 사무현에게 빙긋 웃어 보인 적월이, 한쪽에 시립해 있는 적의 무복 여인에게 손짓을 해 보인다.
“여화(餘貨), 준비한 것을.”
“예.”
적월의 말에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여인이, 뒤쪽에 준비되어 있던 작은 술상을 가지고 온다.
그럴싸한 모양의 술병 하나와 하나의 술잔, 안주용으로 보이는 만두 한 접시.
일전에 살암에게 대접받았던 식사에 비하면 조촐하기 그지없는 주안상이다.
“명색에 대표라고는 하지만 학관생의 신분이라 준비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선후배의 인연을 위한 술 한 잔을 나누는 데 의의를 가져 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사무현에게 빈 술잔을 먼저 내민 적월이, 그의 술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한다.
달콤한 주향(酒香)이 사무현의 코를 타고 들어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앞에 가득 채워진 술잔이 놓여 있었다.
“먼저 들지. 앞으로 우리의 공고한 관계를 위해서.”
“예, 그럼.”
적월이 내민 술잔을 받아든 사무현이 흔쾌히 그것을 입으로 가져간다.
그의 목젖이 몇 차례 움직이는가 싶더니, 잠시 후 완전히 비어 버린 술잔을 술상 위에 내려놓는다.
탁.
“크으…… 시원하네요.”
“흐음…… 독주에 속하는 술이네만, 생각보다 술을 잘하는 모양이군?”
“으음, 글쎄요? 술이라고는 거의 구경도 못해 보고 살아서…….”
적월의 물음에 사무현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까지 그가 마셔 본 술이라고 한다면, 천마 녀석의 꾐에 넘어가 백사(白蛇)로 담궜던 독주(毒酒) 정도뿐이다.
‘독주는 그게 진짜 독주였지.’
먹다 호흡이 어려워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며 의식을 잃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것이 삶의 마지막 날이다 싶었다.
꼬박 이틀을 앓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천마 새끼가 뭐라 그랬더라?
‘원래 술은 마시면서 느는거다.’
술을 못하면 나가서 사회생활(?)도 못한다면서 계속해서 그 빌어먹을 독주를 권했지.
웃긴 것은 배 속까지 알싸해지며 세상이 빙그르르 돌던 그 기억을 잊지 못해, 이후로도 종종 뱀술을 담궈 먹곤 했다는 것이다.
사무현의 기절할 때마다 그 몸을 빌린 천마가 행공으로 독기를 몰아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술맛은 무슨…… 목숨 맛 이었지, 목숨 맛.’
그 알싸한 게 바로 술맛이라고 주장하던 천마놈 얼굴에 주먹 한 방 맞히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그래도 그거 맛은 있었는데.
그렇게 술 한 잔을 마신 사무현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흥미로운 미소를 머금은 적사의 음성이 사무현의 귓가에 들려온다.
“기분이 좀 어떤가? 독주를 마셨으니 꽤나 어지러울 것 같은데.”
“예? 아, 뭐. 그런 것도 같네요.”
“……흐음.”
“아, 저도 한 잔 드릴…… 술병 좀 주실래요?”
그제야 자신이 주도를 어겼다는 것을 깨달은 사무현이 술병을 찾자, 아직도 한 손에서 술병을 내려놓지 않고 있는 적월의 모습이 사무현의 눈에 들어온다.
“저도 한 잔 드려야…….”
“그러기 전에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네만.”
“아, 예. 말씀하세요.”
“자네는 사도관의 오십일 기 대표로서, 오십기 대표인 나와 내 동료들을 선배로 인정하는가?”
“아, 물론이지요. 당연히 인정합니다.”
“하면, 내가 그대에게 내리는 ‘명’에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가?”
“……명이요?”
다소 날카로워진 두 번째 질문에, 사무현이 한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묘한 미소를 머금는다.
“……명이라고 하시면?”
“본론을 꺼내기 전에 답하게. 명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말이야.”
“흐음…….”
……예상외로 기분 좋은 자리가 되는가 싶었는데.
느낌이 슬슬 쎄해지네, 이거.
“……명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요? 예를 들어 누구를 대신 죽여라. 이런 명이면 제가 어떻게 따르겠습니까? 후배이기 이전에 연무학관 소속의 관도인데요.”
“그 말은 맞군. 하면 불가능한 명을 제외한다면 최선을 다해 따르겠다는 뜻인가?”
“……납득할 만한 내용이라면 그렇게 하지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들어나 보자, 들어나.
이미 예의고 나발이고 자리를 엎어버릴까를 고민하고 있는 사무현 이었지만, 그런 사무현의 생각은 알지 못한 채 적월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 정도 의지면 충분하지. 하면 오십 기의 대표로서, 네게 한 가지 명을 내리겠다.”
아니, 어떤 명이길래 이렇게 뜸을 들여?
얼른 말이나…….
“오늘 이 시간 부로, 매달 은자 열 냥의 상납금을 구해 내게 가져오도록.”
……아, 돈 문제였어?
“왜 대답이 없느냐? 액수가 많다 생각하느냐?”
“…….”
“언뜻 많아 보일지 모르지만 막상 구하려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게다. 신입 관도가 대략 백 명이라 치면 열 명이서 은자 한 냥을 감당하는 꼴이니까. 또 신입 관도 중에 은자 열 냥 정도는 돈으로도 생각 안하는 녀석이 있을 테니, 여차하면 그 녀석에게 구해도…….”
“잠깐만요, 대답하기 전에. 뭐 하나만 확인 차 여쭤봐도 되나요?”
“뭐지?”
“일전에 듣기로 선후배 사이에 ‘명’을 내릴 수는 없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맞나요?”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올린 사무현의 모습에, 대화가 글렀음을 깨달은 적월이 술병을 내려놓으며 두 눈을 가늘게 뜬다.
“선후배 사이에 명을 내릴 수는 없지. ‘강자’가 ‘약자’에게는 내릴 수 있겠지만.”
“아, 그러면 답 나왔네.”
어느새 말투가 짧아진 사무현이, 고개를 좌우로 꺾어 보이며 말을 잇는다.
“자랑스런 사도관의 신입 관도로서, 나보다 약한 새끼들 명은 못 듣겠는데? 이 선배 새끼들아.”
“……큭. 그래, 결국에는 이리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
콰장창창.
어느새 짧은 실소를 흘린 적월이 들고 있던 술병을 뒤쪽으로 내던져 버리자, 그 신호에 맞춰 벽쪽에 시립해 있던 오십여 명의 인형들이 포위하듯 다가온다.
“말로 했을 때 알아들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얼씨구? 혼자 덤빌 배짱도 없는 게 입만 살았네.”
머릿수나 끌어모아 놓고 자신만만해하는 적월에게 비웃음을 흘린 사무현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굳히며 목소리를 낮게 깐다.
“지금 분명히 경고하겠는데, 이 이상 하면 더 이상 선배고 나발이고 없다.”
“쯧쯧, 우리 신입께서 너무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는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인 적월이 준비되어 있던 목검을 뽑아 든다.
스윽.
“자신이 먹은 게 진짜 독주인 줄도 모르고 말이야.”
아, 그거 진짜 독주였냐?
그래서 이렇게 자신만만한 거였어?
“뭣들 하느냐?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후배에게 선배가 어떤 존재인지 가르쳐 줘야지.”
“모두 쳐라!”
“이야아아아아!”
언제 준비한 것인지, 몽둥이와 목검 따위를 든 오십여 명의 인형들이 사무현에게 일제히 달려든다.
일전에 사명관에서 맞붙었던 것들보다 몸놀림이 다소 빠른 것을 보니, 나름대로 정예에 속하는 이들로 준비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들은 크게 간과한 게 몇 가지 있었다.
우지끈!
쾅!
“꾸애애액!”
휘리리릭.
퍽!
선두에서 가장 자신만만하게 사무현에게 달려들었던 인형 하나가, 목검까지 부수어 버리고 날아든 사무현의 주먹에 다섯 장 가까이 나가떨어져 버린다.
“후우…… 지금 독주라고 그랬냐?”
“머, 멀쩡하잖아? 이게 대체 어떻게…….”
“치, 침착해라! 독에 대한 내성이 있는 놈일 뿐, 분명 정상적인 상태는 아닐 것이다!”
침착하긴 개뿔이, 지가 제일 당황하고 있으면서.
맨바닥에 침을 한 번 탁 뱉은 사무현이 두 주먹의 관절뼈를 소리 나게 풀어 보이며 적월을 돌아본다.
뚜두둑 뚜둑.
저들이 간과했던 첫 번째, 사무현에게 독은 듣지 않는다.
“그딴 게 독주면 내가 마신 건 사약이다, 이 선배 새끼들아!”
말을 마친 사무현이 노도와 같이 적월을 향해 달려든다.
이에 포위 중이던 이들이 다급히 사무현을 막아섰지만, 더 이삼 참지 않기로 한 사무현의 앞에 저들은 말 그대로 추풍낙엽과 다를 바 없었다.
쾅! 쾅! 쾅!
“뒈져! 그냥 뒈져, 이 새끼들아!”
“크아악! 모, 목검이!”
“혀, 형님들! 이놈 몸이 무쇠 같은…… 꺄울!”
……저들이 간과한 두 번째, 진검도 아니고 목검으로는 사무현의 몸에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다.
자신들 딴에는 혹시 모를 사고를 막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검기조차 맨몸으로 퉁겨 내는 사무현에게 저들의 무딘 목검이 들기나 하겠는가?
결국 저들은, 갈대 줄기를 들고 멧돼지를 두들기는 멍청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에잇! 멍청한 놈들! 모두 비켜라아!”
답답하다는 듯한 외침과 함께, 지금까지의 공격들과 격을 달리하는 권기(拳氣)가 사무현을 향해 날아든다.
저들에게 흑혈권이라 불리는 만패의 등장이었다.
쿵!
반투명한 권기를 머금은 흑혈권의 주먹이 사무현의 복부에 틀어박힌다.
회심의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드는 흑혈권의 두 눈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사무현의 얼굴이…… 잠깐. 조소?
“……이것도 주먹이라고 날리냐?”
“어…… 어어?”
“이 정도는 돼야 주먹이지! 이정도는!”
쾅!
“……커헉!”
자신이 날린 것과 똑같은 주먹이 복부에 틀어박히자, 만패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사무현의 응징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덥석.
“내가 말했지.”
만패의 머리칼을 한 손으로 움켜쥔 사무현이, 그의 안면으로 큰 동작의 주먹을 꽂아 넣는다.
“이제부터 선배고 나발이고 없다고!”
쾅!
휘리리리릭.
쿵.
허공에서 네 번? 아니, 다섯 번인가?
흡사 바람개비처럼 몸을 회전하며 흑혈권 만패가 다섯 장 밖으로 나가떨어진다.
이 모습에는 적월도 놀랄 수밖에 없었는지, 떡 벌린 그의 입과 얼굴에 경악의 빛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마, 만패가 일격에?”
“……늬들은 그랬으면 안 됐어.”
어쩐지 안타까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던 사무현이, 가슴속에 울화를 폭발시키듯 목소리를 높인다.
“꼭 그렇게! 참고 있는 사람을 건드려야 속이 후련했냐!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쾅!
“꿰애액!”
“히히히, 무섭지? 내가 더 무섭게 해 줄게, 이 선배 새끼들아아!”
“으아아악! 도, 도망쳐!”
“아아악!”
귀신이라도 들린 듯 미쳐 날뛰는 사무현과, 그런 그에 맞서는(?) 오십 기의 사도관도들.
훗날, 이 장면을 본 누군가는 이날의 모습을 이렇게 평했다.
닭장에 뛰어든 늑대와 같았다, 라고…….
천마가 보여
지은이 : 보용도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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