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years old Hea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82
082화
“아는 곳이냐?”
“아, 알다마다. 뻔뻔하게 무림 초출의 뒷통수를 치다 걸려 놓고, 뒤에 와서 손해 배상금을 달라는 무도(無度)한 놈들이 있는 곳이지.”
“그게 대체 무슨…… 아?”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살암의 두 눈이 커진다.
“설마, 입관식 당일 너와 시비가 붙었다는 이들이……?”
“그래, 바로 저것들이지.”
원수는 어디서 만난다고 했더라?
어떻게든 한번 대가를 치르게 해 주리라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난 것을 보면 이번에는 하늘이 그의 손을 들어 준 모양이다.
“좋아, 이번에야말로 다 뒈졌다.”
희번덕이는 미소를 머금은 사무현이 대문을 열려는 그때, 그의 손이 닿기 전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려온다.
벌컥.
“오셨습니까? 소막주님.”
대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낯익은 여인. 적사의 모습에, 사무현이 두 눈썹을 추켜올린다.
“뭐야, 얘가 왜 여기서 나와?”
“따로 언질도 없이 와서야, 결정권이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겠나? 내 신분을 증명하는 과정도 피곤할 테고…… 오늘 아침 적사를 미리 보내 두었다.”
“……일 잘하네?”
싸움질은 못 하던데.
새삼 의외라는 사무현의 반응에 한쪽 미간이 꿈틀했지만, 살암은 용케 감정의 동요를 억누르며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지부장과 약속을 잡아 두었느냐?”
“예. 지부장님과 부지부장님 모두, 소막주님을 맞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계십니다.”
“하하, 뭘 준비씩이나…… 안내하거라.”
“존명.”
복명을 마친 적사가 앞장서자, 있는 대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암이 그녀의 뒤를 따른다.
‘보았느냐? 악양 일대의 가장 큰 상인마저도 발아래에 두고 있는 모습을.’
이것이 바로 암천막의 후계자가 가지는 이름값이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히 자신의 존재를 보여 주려는 살암의 의도와는 달리, 사무현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생각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상인 놈들이 저 새끼보다 아래다, 이 말이지?’
크으, 잘나가는 놈을 아래로 두니까 이런 게 좋네.
이제 내가 네 위의, 위다.
사무현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회심의 미소가 머금어지기 시작했다.
***
악양상회의 지부장 은서병(銀徐炳).
돗자리 장수로 시작해 십오 년 만에 동명상단(動明商團)이라는 중형 상단을 키워 낸 인물이다.
그의 가장 큰 무기는, 사람을 판단하는 정확한 눈과 그것을 기반으로 나타나는 행동력!
결국 이를 인정받아 그는 아룡상회의 악양지부장 이라는 꿈같은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돗자리 장수로 시작했던 그의 인생에 다시없을 전성기!
그런 황금 같은 시기를 만끽하고 있는 그가, 현재 예상치 못했던 큰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그…….”
방안을 가득 매운 무거운 침묵을 깨기 위해, 은서병이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희 부지부장이 큰 실수를…….”
“아, 실수요?”
은서병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사무현이 삐딱한 얼굴로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탁.
“무슨 실수요?”
“하하…… 이, 이토록 귀하신 분인 줄 알았더라면 부지부장이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는…….”
“아니, 저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거든요.”
지부장을 향해 있는 대로 미간을 구긴 사무현이, 괜스레 옆에 놓인 젓가락을 매만지며 말을 잇는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죠. 그런데, 제가 지금 사람이 실수 한 번 했다고 이렇게 따지고 드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
“실수는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잘못된 일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부지부장이 저한테 했던 행동은 그냥 ‘사기’ 아닌가요?”
“…….”
“아…… 진짜 애꿎은 사람 나쁜 사람 만드시네.”
조금의 타협의 여지도 없다는 듯, 그대로 멀리 시선을 돌리는 사무현의 모습에 은서병이 한쪽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던진다.
‘……저 빌어먹을 놈이!’
은서병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뒷짐을 지고 있는 부지부장 전추가 있었다.
불혹을 넘어 오십이 다 되는 나이에, 호의호식하며 기름진 뚱뚱한 몸으로도 그는 필사적으로 부동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아, 서운해……. 왜 이렇게 생각할수록 서운하지?”
“그…… 흠흠, 소협. 우선 제 말을 좀…….”
“사기 당한 건 난데!”
스팍!
댕그랑.
은서병의 말을 끊은 사무현이 젓가락을 내려치자, 그와 부딪친 은술잔이 깔끔하게 양분돼 술상 위를 나뒹군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서병과 총관의 얼굴이 함께 경악으로 물들었다.
‘세, 세상에……! 은으로 만들어진 술잔이……!’
‘무, 무기도 아니고 그냥 젓가락인데?’
차라리 젓가락 끝으로 관통했다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짜증이라도 내는 듯한 가벼운 휘두름으로, 예기라고는 전혀 없는 젓가락을 들고 은술잔을 베어 버렸다.
이는 저자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이건 간에, 여기 있는 이들 정도는 순식간에 쓸어 버릴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꿀꺽.
‘나, 나이에 비해 믿을 수 없는 무위로구나.’
고수의 손에 들리면 나뭇가지도 천하 명검으로 변한다고 했던가?
이제야 저 암천막의 후계자가 왜 그를 함부로 하지 못하는지 조금 이해가 간다.
그리고 왜 구태여 그를 이곳 아룡상회까지 데려왔는지도.
‘……더 이상 저자와의 관계를 틀어지게 해선 안 된다.’
장담컨대 저자는, 지금의 사천살과 같이 암천막을 이끄는 인물로 성장할 것이다.
언뜻 무례하다 말할 수도 있는 그의 언행을 암천막의 후계자가 묵인해 주고 있는 것은, 필시 그런 이유가 있어서 일 터.
여기까지 계산을 마치자, 은서병이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사무현의 앞에 고개를 조아린다.
“……다 저의 불찰입니다. 그의 잘못은 직속 상관인 제가 낱낱이 조사하고 징계할 것이니, 분기가 남으시거든 제게 말씀하시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에서 남으신 앙금을 지워 드리고 싶습니다.”
“지, 지부장님!”
은서병이 설마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굽힐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머리를 박은 채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부지부장 전추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인다.
“그, 그러지 마십시오! 이건 어디까지나 제 불찰…….”
“입 닥치게! 이 아둔한 사람 같으니!”
“……예?”
불같이 노한 은서병의 음성에, 당황한 전추가 땀이 눈에 들어가는 것도 잊은 채 두 눈을 치켜뜬다.
“신뢰는 상인의 생명이거늘! 아룡상회의 부지부장이라는 자가 작은 이윤을 위해 신뢰를 버렸으니, 이 일을 당신 따위가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짝 짝 짝.
“크으…… 옳은 말씀입니다. 여윽시, 지부장님쯤 되니까 말이 통하시네요.”
사무현이 흡족한 얼굴로 박수를 치자, 자신의 행동에 확신을 가진 은서병이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총관에게 소리친다.
“총관은 뭐 하는가!”
“예, 예!”
“아룡상회 악양지부장의 권한으로 명하니, 당장 부지부장의 직위를 박탈하고 그의 신병을 구금하라! 상회본부에 이 일을 전해 그의 처우에 대해 논할 것이니!”
“알겠습니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벌컥.
“부르셨습니까!”
“이 자는 더 이상 악양지부의 부지부장이 아니다! 당장 이자를 포박하여 구금하라!”
“존명! 가자!”
“자, 잠깐! 총관! 어찌 총관이 내게 이러는가!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아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전추가, 다급히 지부장의 앞으로 나아가 엎드린다.
“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지부장님!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정신 못 차리는가?! 지금 대체 누구에게 잘못을 비는 것인가!”
“예? ……아!”
그제야 은서병의 말뜻을 이해한 전추가, 다급히 사무현의 앞으로 다가가 이마를 바닥에 찍으며 소리친다.
쿵!
“하늘을 몰라뵙고 실로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한평생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대혀업!”
“대협? 나 사판데?”
“어, 어리석은 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한 행동과 언행 하나하나가 곧 정(正)인데, 어찌 협(俠)을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오나 혹여 듣기 거북하시다면 이제부터 대인(大人)이라 칭하겠나이다! 대이인!”
이야…… 상인이 괜히 상인이 아니네.
그 짧은 사이에, 놀라울 정도의 달변이 그야말로 물 흐르듯 흘러나온다.
이런 것도 생존본능인가?
하지만, 그래 봐야 입으로만 하는 사과 따위 애초에 받아 줄 마음도 없었다.
“크으…… 말 잘하시네요. 그 말을 금자 백 냥 가져갈 때 하면서 끝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 금자!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이미 난 금자 백 냥보다 더 좋은 물주가 있거든, 낄낄낄.
사무현이 금자에도 꿈쩍을 하지 않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전추가 두 눈을 질끈 감는다.
“하, 하오면!”
“음?”
“앞으로…… 대인(大人)께서 청하시는 것이라면! 이 전추의 이름을 걸고 무엇이든 전심전력으로 돕겠습니다!”
“……엥?”
아니, 이건 또 무슨 전개야?
지금껏 코웃음만 치던 사무현의 반응이 바뀌자,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한 전추가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애절한 음성으로 소리친다.
“제가 아룡상회에서 제명당하고 이름 없는 상인이 된다면, 은인께 지은 죗값은 앞으로 그 무엇으로도 갚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상인으로서 대인께 지은 큰 죄! 앞으로 떳떳한 상인으로 살아가며 평생토록 갚아 나가겠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대인!”
처절하기 그지없는 전추의 외침에. 아니, 솔직히 말하면 꽤나 달콤하기 그지없는 제안에 사무현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다.
‘평생에 걸쳐 갚는다고……?’
……이건 꽤 솔깃한데?
전추의 말대로, 복수를 해서 그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굳이 따지자면 복수에 성공했다는 기쁨 정도?
‘……그런데 이쪽은 이득이 되네?’
정확히는 복수도 하면서 이득도 된다.
이 일을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얻어 내면 되니까.
돈이 필요하면 돈이 나오고, 물건이 필요하면 물건이 나오는 만능 주머니가 아닌가?
그렇게 사무현이 생각에 잠긴 사이, 전추는 빠르게 눈알을 굴리며 사무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젠장…… 이 정도 내줬으면 제발 물어라!’
남들이 들었다면 미친 게 아니냐고 할 만한 제안이었지만 전추는 필사적이었다.
‘아룡상회에서 제명당하는 일만큼은 피해야 한다!’
만일 아룡상회에서 제명되게 되면 반드시 손해 배상이라는 명목하에 그의 재산을 건드리려 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가 지금껏 일궈 온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어쨌거나 아룡상회의 뒤를 봐주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암천막이니까.
‘암천막에 반기를 들고 살아남을 수 있는 상인은 없다!’
심지어 저 사무현이라는 녀석은 암천막의 후계자와 한눈에 보아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차피 기호지세라.
그의 손에 자신의 생사여탈권이 쥐어져 있다면, 차라리 그의 마음을 돌려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대인! 제발,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이마를 쿵쿵 찧으며 전추가 필사적으로 외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무현이 긴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일어나세요.”
“저,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일단 일어나시라고.”
다소 누그러진 사무현의 음성에, 그제야 내심 안도의 미소를 머금으며 전추가 몸을 일으킨다.
“감사합니다, 대인. 절대로 제가 대인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
턱.
한 손으로 전추의 어깨를 짚으며 묘한 미소를 머금어 보이는 사무현.
그 얼굴에 서린 사악함에 전추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내가 봐드려야지. 얼마나 도움이 될지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하, 하하 물론입니다. 이 전추, 능력 하나만큼은 악양에서…….”
“그러면!”
“…….”
“지금부터 내가 말해 주는 것들, 다 구해 올 수 있죠?”
“그…… 구해 오라 하시면 어떤……?”
“하급 영단 백 개.”
“…….”
“우선은 그거부터 구해 주세요. 우선은.”
“…….”
“그러면 살려는 드릴게.”
어깨를 쥔 손아귀에 힘을 실으며 미소 짓는 사무현의 모습에, 전추도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함께 미소를 머금는다.
‘……내가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왔구나.’
호랑이 등을 타려 했지, 아가리에 들어가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리고 얼마 후, 악양상회의 상인들은 전추가 지나갈 때마다 그의 뒤에 대고 남몰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기 호구가 지나간다.’라고.
천마가 보여
지은이 : 보용도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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