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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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10로 정벌군(2)
잠깐의 침묵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유비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보고 운을 떼라는 게다. 이는 선수를 양보하는 미덕이 아니다. 달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지 않은가. 내가 떼는 첫 마디로 이 회담의 틀을 짜겠다는 심산이었다. 나의 언변은 애초에 달변이지도 않다. 내가 풀어내는 말의 허점을 골라내어 나의 말로 나를 옭아매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수렁으로 밀어 넣겠다는 책략. 나는 신중의 신중을 기했다.
“사군께서는 구강공과 얽힌 원한이 없습니다. 이 싸움은 남북양원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남원의 승리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헌데 사군께서는 어째서 대병을 동원하여 우리의 앞을 막고 북원을 구원하십니까?”
유비는 치졸하게까지 보이는 겸양 섞인 웃음을 비치며 대꾸했다.
“예주가 원씨의 것입니까?”
“사군의 것 또한 아닙니다.”
“아이구, 그럼은요. 어찌 감히 예주를 제 것이라 하겠습니까? 예주는 원씨의 것도, 제 것도 아닙니다. 예주는 예주입니다.”
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허면 어찌하여 개입하십니까.”
그는 헤벌쭉 웃었다.
“예주는 예주이기 때문입니다.”
“뭐라고요.”
유비는 두 손을 번쩍 하늘을 향해 들었다.
“예주를 비롯하여 이 나라 대한(大漢)의 십삼주는 그대로 십삼주입니다. 누구의 것도 아니지요. 오로지 업도에 계신 천자의 것이요, 그 땅을 파먹고 사는 백성들의 것입니다!”
“사군께서 업도를 운운하시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북원은 낙양에 거하던 천자를 납치하여 그를 꼭두각시로 내세웠습니다. 북원의 뜻이 천자의 칙명으로 둔갑하여 전국 각지에 뿌려집니다. 이미 한실은 한실이 아닙니다. 사군께서 여태 업의 북원을 한실로 떠받드는 것은 유감입니다.”
내 말에 유비는 웃음기를 거두었다. 섬뜩했다.
“명공의 말씀이야말로 대단히 유감이군요. 한실이 쇠한 것은 사실이나 그러하다면 대한의 신하로서 한실을 다시 일으킬 생각을 하셔야지요. 송자를 사사로이 송경으로 고치고 역적을 외람되이 천자로 옹립하는 것은 명백한 역도(逆道)가 아닙니까? 새로운 천자라니, 세상에 너무나도 참람하지 않은지요!”
나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북원은 한실을 가리는 먹구름과 같습니다. 사군께서 진정 한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려거든 원소를 쳐야만 합니다. 원소에 부역하시는 사군께서 그런 논리로 저를 논박하시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유비는 낄낄 웃었다.
“하나뿐인 혀로 자신의 죄과를 변호하지 않고 도리어 남을 찌른다는 것은 자신의 죄과를 인정하는 것이랍니다. 옳습니다! 명공의 말씀대로라면 이 유현덕도 죄인이요, 명공께서도 죄인인 것입니다! 간악한 신하를 치지 않는 것은 힘이 모자란 탓. 격류를 버티지 못해 휩쓸린 것은 무능의 죄입니다. 허나 한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은 불의의 죄. 이 유현덕 또한 대죄인이지만 제 앞에 계신 합비후의 죄에는 감히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제 칼끝은 간악한 북원을 치기에 앞서 역도를 스스로 걷는 남원을 먼저 향해야 옳지 않습니까?”
나는 목 줄기의 선연한 느낌을 받았다. 유비는 다시 웃었다.
“이런 명분론은 우선 내려놓으시지요! 명분으로 따지자면 합비후께서 저를 꺾지 못합니다!”
유비의 말에 순순히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힘의 논리로 말합시다. 본래 예주의 주인노릇을 하던 북원의 하수인이 패퇴했습니다. 합비후께서는 남원의 병력으로 그들을 몰아냈습니다. 힘으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비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도 합비후의 행위와 같습니다. 남원의 병력을 서주의 병력으로 몰아내려고요. 힘으로 말입니다.”
“그것 말씀은 서주의 남원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남북양원은 본디부터 적대했습니다. 오늘로써 서주 또한 남원의 적으로 간주해도 되겠습니까?”
유비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답변하십시오. 만약 서주가 구강공과 대립하시려거든… 당장 제 목을 베고 남원의 병마를 치십시오. 그리하지 않으시면 저는 전력을 다해 서주병을 몰아내고 예주를 온전히 석권할 겁니다.”
“아이구! 이거, 무섭네요……”
유비는 어깨를 움츠리며 관자놀이를 긁었다.
“그런데… 합비후께서는 정녕 목이 베일 각오가 되셨나요?”
그는 나를 향해 상체를 굽히며 시시덕거렸다. 나는 그 큰 귀의 귓불까지 영역을 넓히는 입가를 보고 침을 삼켰다. 유비는 웃음을 거두고 입맛을 다셨다.
“제가 예주를 꿀꺽해도 북원은 저를 허물잡지 못합니다. 도리어 고마워할 걸요? 다 죽어가는 둘째 도련님을 살려줬으니. 원소는 조조는 두려워하지만 이 유현덕은 밸 없는 나부랭이로 본답니다. 조조나 원술이 아닌 유현덕이 예주를 꿰찬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길 겁니다. 남북양원 사이의 완충지대도 마련되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는 잠깐 쉬고 다시 말했다.
“저는 원소와 긴밀하게 움직일 겁니다. 합비후나 남원이 저를 치시겠다면, 북원을 신경 쓰지 않고 남원과의 전선에 힘을 다하려고요. 강동의 손책이 슬슬 강동석권을 마무리해간다고 하던데. 얼마 전에는 저한테 그럴 듯한 백마 한 마리까지 선물 하더군요?”
유비가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원술은 유비에 비해 곱절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다. 강한 건 우리다. 유비는 약하다. 게다가 이 전장의 불문율을 깨고 개입한 것 또한 유비다. 유비가 나를 저렇듯 내려다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위에서 아래로 눈빛을 쪼는 것은 저 귀 큰 잡놈이 아니라 나여야만 했다. 지금 유비는 강동의 손책까지 운운하면서, 원술의 복수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물론 도리어 우리를 압박할 수 있다고 겁박하고 있었다.
“강동병과 서주병을 합친다한들 남원을 꺾겠습니까? 죄송하지만 가소롭습니다.”
유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놈의 어깨!
“말씀드렸듯 우리는 남원과의 싸움에 전력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차하면 강동의 손책과 손잡을 수도 있죠. 서쪽의 유표와 남쪽의 산월, 나아가 원소와 패권을 다퉈야하는 남원이 우리에게 힘을 다하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이 남원의 전력(全力)이 아니라 파편이라면, 글쎄요… 별로 안 무서운데요.”
“우리는 지금 오만의 대병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물러나지 않으면 이 병력으로 사군의 목을 취할 것입니다.”
유비는 이제 일부러라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았다.
“정말입니까? 그 전에 명공의 목이 날아갈 텐데요? 명공은 그리도 쉽게 목을 내줄 정도로 남원에 대한 충심이 지극합니까?”
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내 옆에 왔다. 그는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옅은 술 냄새가 끼쳤다.
“이 유 아무개가 얕은 재주이지만 관상을 좀 보는데 말이죠.”
나도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봤다.
“합비후는 결코 누구한테 충성하는 상이 아닌걸요.”
유비는 상체를 다시 세웠다. 허리에 손을 갖다대며 아구구,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즉슨 명공은 지금 나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 유 아무개는 거짓말쟁이는 두려워하지 않는답니다! 오만 대병으로 이 유 아무개를 치시겠다고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간옹에게 외쳤다.
“헌화! 지도를 펼쳐 보시게!”
배가 툭 튀어나온 간옹은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지가 펴면 되지……”
“감히 자사에게 대들지 말지니! 확 술 못 마시게 할까봐!”
간옹은 툴툴거리며 그의 말대로 했다. 예주의 전도가 탁자 위에 펼쳐졌다. 유비는 칼을 뽑아 날랜 몸짓으로 탁자 위에 칼날을 꽂았다. 굉음이 나를 엄습했다. 유비의 칼은 정확히 酇縣(찬현)이란 글씨에 꽂혔다.
“찬현 위로부터, 그러니까 건평부터의 예주는 이 유비가 통할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유비는 스스로를 유 아무개라고 부르지 않았다. 명백히 유비라고 말했다.
“여남군과 진국, 찬현 이남의 패국은 남원의 영역으로 삼으시지요. 양국, 노국, 찬현 이북의 패국은 유비의 영역으로 하겠습니다.”
“이보십시오, 사군……”
유비는 내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타협은 없습니다. 이대로 하지 않으시려거든 말없이 목을 늘어뜨리십시오!”
와… 세게 나오는데.
“저는 군의 주장이 아닙니다. 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아이구, 참 그러시지요.”
유비는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걸쳤다.
“그러시면 돌아가 온후와 잘 얘기해보십시오. 이 유 아무개, 기다리는 것만큼은 잘한답니다. 기다리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비를 등졌다. 유비는 허허거리면서 탁자의 칼을 뽑았다.
“괜히 들떠가지구 이런 행패를 잘도… 이 유 아무개의 만행을 이해하십시오, 합비후!”
그는 막사 밖까지 나를 배웅해주었다.
“다음번엔 자질구레한 얘기나 지껄이면서 술이나 드십시다. 영토가 어쩌고 병력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참 어렵거든요.”
유비는 간옹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 간 아무개라는 녀석은 아주 야한 얘기를 푸지게 잘 하거든요? 이 몹쓸 녀석의 재담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십시다.”
“옳지, 옳지! 거 좋은 생각이올시다. 합비후가 다음에 오면 내 북해국의 탕녀 이야기를 해드리리다!”
유비는 제 배를 부여잡고 낄낄거렸다.
“아니, 헌화 자네, 합비후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나보군! 듣는 것만으로 백 살 먹은 노인의 양물도 벌떡벌떡 세운다는 북해국의 탕녀 이야기를 하시겠다!”
나는 헛웃음을 몇 번 토하고 그대로 그들을 등졌다. 얻은 것이 없어 가벼운 주머니로 털레털레 돌아왔다. 이 와중에 북해국의 탕녀 이야기가 궁금한 건, 내가 건강하다는 증거겠지……? 말을 타고 돌아오면서 뭔가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가 싫어졌다.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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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국 탕녀 이야기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