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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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약왕 환재금
합비는 번영했다. 어느새 대로가 생겼고, 그 좌우로 상점의 휘장들이 울긋불긋 바람에 나부꼈다. 물 깊은 포구에는 하역부들이 열심히 물건들을 날랐다. 약초의 풋내와 어물의 비린내, 말린 고기의 고소한 냄새가 범벅되어 풍겼다. 사람이 모여드니 황무지가 개간되었고, 든든한 병력이 주둔하니 돈푼은 있되 그것을 지킬 힘은 없는 명망가들이 모여들었다. 또 그러하니 자연히 학식은 있되 빈궁한 선비들이 명망가를 기웃거리며 밥줄을 잡을 계책을 세웠다. 나는 합비에서 가장 높은 누대에 올라 그 풍경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는 만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노인장의 솜씨가 뻑적지근하기도 하오.”
만지도 그것을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걸작이우.”
“옛날 전국시대의 사공자(신릉군, 춘신군, 맹상군, 평원군)는 수천의 빈객을 거느렸다는데, 나도 그렇게 해볼까요? 뜻있는 선비들이 모여드는 수도 있겠습니다.”
만지는 들떠서 지껄이는 나를 보더니 픽 웃었다.
“팔략이 되시더니 이제는 사공자를 바라보시우.”
그 한 마디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멋쩍게 웃었다. 그럼에도 만지는 빈객들을 모으는 것에는 찬성하여서, 숙식할 수 있는 큰 규모의 집들을 지어 선비들을 모으도록 했다. 당장 나가는 밥값은 뼈아프지만 반드시 그 이상의 소득이 있으리라 믿었다. 계명구도의 고사를 생각하면서.
“약왕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유엽은 마치 밥 먹고 나서 차 마셨다는 투로 내게 말했다. 정작 그 소식을 들은 나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는데. 나는 허둥거리며 말을 재촉했다.
“속히 말씀하십시오, 청금령.”
“배후에 산월(山越)이 도사리고 있더군요.”
나는 눈썹 사이를 좁혔다.
“산월?”
산월의 소식을 이따금 듣기는 했다. 산월은 간단히 말하면 남방의 이민족 집단이다. 남중국부터 베트남에 이르는 영역과 그곳에 거처하는 종족들을 이전에는 백월(百越)이라 불렀는데, 산월은 그 지파 중 하나였다. 이 백월은 대개 정벌되었는데, 이후 민월(閩越)이라는 이민족 왕조가 등장하여 잠깐 번성하다가 이마저도 토평되었다. 산월은 민월의 후예로서 아직까지 맥박이 뛰고 있었다.
“합비후께서 일전에 비잔이라는 이름을 들었다고 하셨지요.”
유엽의 물음에 나는 긍정했다. 환재금은 그 장정을 비잔이라고 불렀다.
“비잔은 산월수(山越帥) 반림(潘臨) 직속 열 명의 새왕(塞王) 중 하나입니다.”
“산월수? 새왕?”
아무것도 몰라 순진한 눈망울을 한 나에게 유엽은 차분한 말투로 강의해주었다.
“산월이 비록 오랑캐의 집단으로 뿔뿔이 흩어져있다고는 하나, 그들의 우두머리 격의 인물이 있다고 합니다. 저들끼리는 수(帥)라고 부르고, 회계산의 반림이라는 자가 수로 군림한다고 합니다.”
“회계라면 얼마 전에 손책이 그곳의 태수 왕랑을 쳐부수고 석권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손책이 반림과 접촉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겠군요.”
유엽은 고개를 저었다.
“그랬습니다만, 손책은 산월을 가혹하게 토벌하기만 하지 그를 포섭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산월이 손책에게 협조할 까닭이 없습니다.”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손책과 제휴했을 수도?”
“그럴 리가 없습니다. 손책은 강동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강동의 밖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산월 또한 외부의 강성한 무력집단을 두고 영영 함께할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을 터, 제휴의 공산은 없습니다.”
나는 그것에 수긍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다 치고, 산월수는 알겠는데 그 직속 열 명의 새왕이란 무엇입니까?”
“산월의 무리들 중 맹용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각지의 산월을 거느리며 왕의 행세를 하는데, 저들끼리 새왕이라고 부른답니다.”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변방의 왕이라, 저들도 스스로 변방인 줄은 아는군.”
“각지에서 반림을 대신하여 산월을 다스리는 새왕은 도합 열 명이라고 합니다. 비잔이 그 중 하나입니다.”
“환재금은 비잔을 마치 노복 부리듯 했습니다. 허면 그는 대체……”
“그 부분은 아직 오리무중입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환재금이 과연 우리에게 해악을 끼칠 인물이냐는 겁니다. 산월이라는 말을 들으니 결코 곱게는 안 보이는데요.”
“새왕을 밑에 둔 자이니 아마 산월수 반림과 관계가 깊을 것입니다. 허나 산월은 제 강역을 지키기에 급급하지 세를 뻗칠 만한 여유는 없습니다. 구태여 전국제후의 코털을 건드릴 까닭이 없죠. 더군다나 손책의 견제세력인 구강공은 더욱.”
“그럼 제가 들었던 금속성은 뭐였을까요? 감녕과 허저도 들었는데.”
“그것은 조금 더 추적을 해봐야겠습니다. 환재금의 상단에서 오고가는 물동량을 봤을 때 천하에 손꼽히는 거상이라 하겠습니다. 당장 정세로 봐서는 우리에게 적대할 이유는 없지만, 만일 그리한다면 큰 타격이 될 것이므로… 철저히 파악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유엽이 물러가고 나는 머리를 싸쥐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 모든 관문을 닫아버리고 항구를 봉쇄한 뒤에 화평사를 풀어 환재금의 저택을 탈탈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간신히 대도시로 발돋움한 합비를 ‘못 믿을 땅’으로 전락시키게 된다. 게다가 유엽이 말했듯 환재금이 우리를 적대할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 그를 옥죈다면 일대의 약재 공급이 중단되는 것은 물론 산월과의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함부로 칼을 들이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산월은 험준한 산지를 의지하여 점조직으로 남방에 흩뿌려진 세력이다. 탄압한다고 하여 장악할 수 없다. 손책을 견제할 훌륭한 패를 우리의 발목을 잡는 함정으로 변모시킬 까닭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약왕의 저택에서 들었던 분명한 금속성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감 공.”
나는 화평교위 감녕을 불렀다.
“합비를 드나드는 물산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십시오. 수상한 것이 적발되면 현령 만지를 거치지 말고 나에게 즉각 보고하도록 하시고.”
감녕은 절도 있게 읍하며 내 명을 받았다.
청금령 유엽과 화평교위 감녕은 하루에도 여러 번씩 성부를 드나들며 약왕의 동정을 보고했다. 그들의 보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한밤에 시영을 안고 있는데도 감녕은 허리춤에 칼을 차고 불쑥 들어왔다.
“합비후께 보고!”
포효에 가까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와 시영의 정신을 단번에 뒤흔들었다.
“앞으로 자정 이후에는 보고를 금지합니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러 감녕을 내쫓아버렸다. 감녕은 풀이 죽은 채로 물러났다.
“불쌍한 화평교위의 마나님이야!”
내가 툴툴거리니 시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언해주었다.
“오래 전에 사별하셨대요……”
나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나지막이 탄식했다.
“아, 아……”
하루는 수춘에서 사람이 왔다. 대장군부좨주 양홍이었다. 그는 항시 바늘에 실 따르듯 원술의 옆에 착 붙어있던 자였는데, 웬일인지 오늘은 합비까지 먼 걸음을 했다. 남양파의 중핵으로서 나와 사이가 영 껄끄러운 인물이었지만, 그를 섭섭하게 대우해서 밉보일 까닭이 없었다.
“모처럼 바깥바람을 쐬셨습니다.”
나는 합비의 북문까지 나아가 그를 깍듯이 맞이했다. 봉작의 위계로 따졌을 때 나보다 한참 서열이 낮은 그였으니 나름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양홍도 아주 양식 없는 치는 아닌지라 맞절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자사부에 계셨으면 자주 뵈었을 텐데, 뵐 일이 많이 없군요.”
“하하, 합비에 드러누워 녹봉을 도둑질하고 있지요.”
양홍에게 안으로 들 것을 권하자 양홍은 순순히 성부로 들었다. 차를 데워 그에게 대접하고 나는 그와 마주앉아 독대했다.
“헌데 좨주께서는 어인 일로 합비까지 오셨습니까. 대장군부를 지키셔야 하지 않습니까.”
“구강공의 특명을 받았거든요.”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특명이요?”
“구강공께서 명하시길, 약왕을 만나 보양의 특약을 구해오라 하셨습니다.”
아이고! 나는 이마를 짚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가 있는데…… 좨주께서는 그냥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 말에 양홍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구강공의 특명이라니까요.”
“특명이든 칙명이든 어쩔 수 없습니다. 약왕을 무턱대고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일개 약재상을 두려워하여 보약 한 첩을 못 짓게 하시다니, 그런 이유로 제가 구강공의 명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나는 한숨을 팍 쉬었다.
“아직 조사 중인 사안이라 말을 아끼려 했습니다만, 약왕이 산월과 깊이 연관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아직 피아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으니 그를 신뢰할 수가 없는 겁니다.”
양홍은 괴이하게 얼굴을 구겼다.
“산월이요? 지금 합비후께서는 심심유천에 원숭이들처럼 모여 사는 산월과 약왕이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다소간의 조롱이 섞여 있었다.
“원, 믿기 힘든 말씀을 하시고 믿으라 하시니……”
“약왕이 믿을 만한 사람이란 확증이 나오면 굳이 좨주가 아니라도 이 제갈찬이 먼저 나서서 구강공께 갖은 보약을 바칠 것입니다. 그러니 좨주께서는 구강공께 시간을 달라 말씀해주십시오.”
양홍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합비후께서도 아시듯 구강공의 성정이 다소 급하신지라… 과연 그 말씀을 들으시겠습니까? 이 양 모는 구강공의 호된 질책이 일까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친필로 편지를 써서 구강공께 드리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의 책임이고 좨주의 책임은 없는 것으로 하지요.”
“음……”
이 망할 놈아! 그냥 알았다고 해!
“그렇게 하지요……”
양홍은 질질 끄는 목소리로 내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영 미심쩍은 걸음걸이로 숙소로 돌아갔다. 나는 허저를 불렀다.
“아문장군 허저! 그대에게 특명을 내리겠소!”
“특멩이유? 무신?”
“지금부터 대장군부 좨주 양홍과 술자리를 갖으시오.”
허저는 눈을 껌뻑였다.
“술이유?”
“아주 떡을 만들어버리시오.”
“고것이 특명이유?”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저는 헤벌쭉 웃었다.
“합비후께서 만날 특명을 내려주시믄 좋겄네유!”
그는 덩지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걸음으로 양홍의 숙소를 찾아갔다. 믿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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