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09
0110 / 0284 ———————————————-
15. 약왕 환재금
“…그만 수춘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합비후.”
양홍은 딱한 몰골로 내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전언에 의하면 그는 밤새 스무 번 변소를 들락날락거리며 먹은 술과 안주를 고스란히 토해냈다고 한다. 허저가 제대로 한 건 해주었다. 원래 말을 타고 왔던 양홍은 속이 거듭 울렁거린다며 가마를 타고 돌아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허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아주 잘해주었소, 허 공!”
허저는 헤헤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포상으로 술을 내려주었더니 펄쩍펄쩍 뛰며 조퇴하고 진도와 술을 퍼마셨다고 했다. 못 말린다, 진짜.
신년 월단평이 합비에 도착했다. 외방으로 돌지 않고 내내 합비에 박혀 있었더니 다달이 들어오는 월단평은 답답한 숨통을 트여주었다. 유종의 죽음으로 유표의 후계구도가 유기로 확정되어가는 분위기이며 채모는 장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형주에 남아 전전긍긍한다는 전언이었다. 채모는 유표의 조카이자 핵심 측근인 장윤(張允)을 장안으로 보내 자신을 대리하게 하고, 자신은 유표의 본거인 양양에 남아 사세를 지켜볼 작정이었다. 이로써 유표의 세는 장안에 머무르게 되었고 내부의 균열을 봉합하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우리로서는 호재였다.
이른바 팔략의 명단에서 말석이기는 하지만 아직 내 이름이 머물러 있었다. 허문휴는 내가 합비를 재건하고 있다며 장사하기에 썩 좋은 땅이 되었다고 써놓았다. 공짜 홍보를 해주니 고마울 뿐이지. 나중에 합비로 놀러오면 술 한 잔 사야겠다.
자질구레한 단신들을 읽다가 한 줄이 눈에 띄었다.
‘송경 태부 공융 문거, 합비 예방 예정.’
“오잉? 공융이 여기 온다고?”
이 아저씨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유엽이 헐레벌떡 성부로 들어왔다.
“합비후께 보고 드립니다.”
“말씀하세요.”
유엽은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공 태부께서 곧 합비를 예방하신다고 합니다.”
그 말에 나는 꽁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월단평 보고 확인했어요.”
“…아.”
“청금의 신뢰도에 균열이 가는군요.”
“…죄송합니다.”
유엽은 머쓱하게 웃었다.
“허면 태부를 영접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나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합니다. 저도 의관을 정제하고 마중 나가야겠군요.”
태부는 실권이 없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천자의 스승이다. 의전에서만큼은 그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이가 몇 없는 것이다. 나는 합비의 남문을 활짝 열어놓고 마중을 나갔다. 나의 속관들도 의관을 정제하고 나의 좌우로 도열했다. 합비에 모여든 장돌뱅이들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흔치 않은 구경에 열중했다. 공융은 말 네 마리가 끄는 수레에 올라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상당한 수의 호위들도 거느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태부 어른.”
내가 인사를 건네자 공융은 부리나케 수레에서 내리며 내 손을 맞잡았다.
“합비후, 오랜만일세.”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걸게 상차림을 봐놨을 겁니다.”
공융은 껄껄 웃으며 내 손등을 쓸었다.
“그럴 듯한 술 한 병이면 족하네. 원래 사람은 갑자기 봐야 반가운 법일세.”
“갑자기라 하기에는 이미 월단평을 읽고 천하만민이 태부의 내방을 알고 있습니다.”
“저런, 허문휴가 요즘 아주 못된 짓을 서슴지 않고 있어! 그 망나니 때문에 내가 주사 부린 일을 서량의 얼룩망아지까지 알고 있단 말일세. 도통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어.”
나는 받아칠 말이 궁해서 애먼 웃음을 걸쳤다.
“아무튼 우선 안에 들도록 하지. 오랜만에 회포를 푸세! 진미는 되었고 술이나 잔뜩 내오시게!”
“아니, 이제 서량의 얼룩망아지도 모자라서 남만의 왕지렁이한테까지 술주정뱅이로 불리고 싶으신 겁니까?”
“어허! 그대는 부쩍 수다스러워졌군! 잔말 말고 술상이나 보시게!”
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를 성부 안으로 초청해서, 그의 원대로 술상을 봐주었다. 공융의 호위들도 섭섭하지 않게 대우했다. 명색이 천자의 스승이니 합비의 이러저러한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모여드는 것이 당연했다. 너도나도 공융에게 술 한 잔 올리고자 했다. 공융은 그것을 넙죽넙죽 한 잔씩 받아먹더니, 대뜸 좌중을 향해 말했다.
“나는 천자의 칙명을 합비후에게 전달하고자 하니, 그대들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오.”
“칙명이요?”
유총이 나한테 칙명 내릴 게 무에 있단 말인가.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이 칙명이란 말의 무게에 눌린 치들이 모두 자리를 빠져나갔다. 결국 공융과 나, 둘만 남게 되었다.
“태부 어른, 원래 칙명은 벼슬아치들을 세워놓고 절을 하며 받는 것이 아니었던가요?”
“칙명 그런 거 없네. 그냥 조용히 마시고 싶어서.”
“조용히 마시고 싶어서 칙명을 빙자하다니요!”
“폭음의 형벌로 죄과를 갚도록 하겠네.”
누구 맘대로! 기가 막혀서 나는 실소를 몇 번 흘리고 관뒀다. 술이 서너 번 오고가자 공융은 은근히 목소리를 낮췄다.
“비단 술이나 얻어먹자고 그대를 찾은 것은 아닐세.”
나는 잔을 입에 가져가다가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것을 느끼고 탁자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대, 약왕을 캐고 있지?”
공융의 잔잔한 목소리가 내 귀에서 우레가 되어 나를 흔들었다. 나는 잔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떨리는 손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그걸 어떻게……”
공융은 한숨을 쉬었다.
“약왕은 생각보다 녹록한 자가 아닐세.”
“그걸 어찌 아신 겁니까.”
“송경의 상서령 낙준을 그대는 일전에 보았지?”
진왕 유총을 옹립하기 위해 진국을 찾았을 때 유총을 보필하던 이다. 왜 모르겠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서령 낙준은 약왕과 긴밀한 사이일세. 상서령뿐만이 아니야. 송경과 업도 가리지 않고 그와 돈독한 사람들이 많네. 약왕의 됨됨이가 좋아서가 아니야. 장돌뱅이 주제에 돈줄을 쥐고 흔들기 때문이지.”
“그 고고한 선비도 약왕과 연이 닿아 있다는 겁니까.”
“약왕이 낙준에게 서한을 보내 합비후의 수사를 중단하도록 요청했다는군. 낙준이 그 서한을 받고 그대와 연이 깊은 나를 합비로 보낸 것일세.”
환재금은 청금의 활동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묘한 열패감과 서늘한 긴장감을 동시에 느꼈다. 유엽과 진도가 구슬땀을 빼며 그의 뒤를 캐고 있는 것을 환재금은 낄낄거리며 보고 있었다는 소리…… 청금의 수사에 긴장을 했다면 바로 달려와 내 앞에 엎드려 우는 소리를 했을 테다. 그런데 그는 저 멀리 송경의 낙준에게 서한을 보내고 태부 공융이 합비로 오는 수고를 감수하게 했다. 그렇게 에둘러 일을 처리할 만큼 여유가 있었다는 소리다. 공융은 내 집무실 한쪽 구석에 있는 죽간을 흘끗 보았다.
“월단평이로구먼. 저것은 허문휴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것이지만 실은 약왕의 목소리일세.”
“뭐라고요?”
“허문휴라고 해봤자 여남의 골방에 틀어박혀 인물평이나 늘어놓는 이일세. 약왕이 그의 이름값을 산 것이야. 약왕이 뿌려놓은 천하 각지의 정보망을 통해 각지의 소식이 모이고, 그것을 보고 허문휴가 문장을 지어 월단평을 쓰는 것이지.”
“……”
송경 태부 공융 문거, 합비 예방 예정. 월단평의 단신 한 줄이 떠올랐다. 이것은 기실 나에게 전하는 말이었던 것인가. 월단평을 읽고 나서야 나에게 공융의 예방을 알린 유엽의 모습이 떠올랐다. 약왕은 이토록 기민하다. 공융은 말을 이었다.
“약왕이 산월과 긴한 관계가 있음은 그대도 알 터.”
“네… 그렇습니다.”
“산월이 비록 문화의 은택을 입지 못하였으나 한번 그들과 반목하게 되면 끈질긴 괴롭힘에 시달려야 하지. 약왕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그놈들 때문에 약왕과 틀어지기 어려운 것일세.”
“하지만 일개의 장사치일 뿐입니다. 저는 약왕의 말을 듣고 태부를 이곳까지 보낸 상서령도 이해가 되지 않고, 그 말을 순순히 듣고 예까지 오신 태부 어른도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저는 그가 위협적인 인물이라고 판단이 서면 곧장 칼을 쓸 작정이었습니다.”
공융의 눈매가 반달을 그렸다.
“판단이 서면 곧장 칼을 쓴다라…… 그대의 유순하던 모습이 그립군. 약간은 멍청해 보이기도 했던.”
“지금도 멍청합니다……”
나는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그러나 마냥 유순하기는 힘든 세태입니다.”
“아쉬운 시절이지. 이런 자리에는 시시한 농담이 안주로 제일인데 말이야. 칼의 얘기는 술맛을 뚝 떨어뜨리거든.”
“맛 떨어진 김에 끊으시지요.”
“옛날의 그대는 유순하고 약간은 멍청해 보이는 것에 더해 참 예의가 바른 소년이었네만, 이제 보니 약간은 싹수가 노래졌군! 공자께서는 억지 부리지 않는 것이(毋意) 예라고 하였거늘!”
나는 성의 없는 웃음으로 무마했다. 공융은 나를 한번 쏘아보고 내가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약왕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세. 첫째, 말하였듯 산월의 존재가 껄끄럽네. 산월은 중원의 문화와 물산을 그리워하지만 얻을 길이 없지. 헌데 약왕 환재금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네. 때문에 산월은 그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지. 만일 함부로 그를 해친다면 지긋지긋한 산월의 저항에 시달릴 것이네. 때로는 정규군보다도 신출귀몰한 도적떼가 고달픈 법이지. 둘째, 중원도 산월의 험준한 산지에서 자라는 약초와 산채를 원한다네. 남방에는 진귀한 식물들이 많지. 물량이 적으니 중원에서는 더욱 귀하게 통하지. 귀인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단 말일세.”
“산월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헌데 진귀한 식물은 무슨 말씀이신지.”
“말린 것이나 말려서 가루를 낸 것은 부피가 상당히 작지 않은가. 값이 비싸면서.”
나는 대충 말의 의중을 알고 씁쓸하게 웃었다.
“뇌물로 주기에 딱이군요.”
“그렇다네. 또한 효렴으로 천거되기 위해서는 허문휴 같은 명사의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이제 그대도 알게 되었지. 허문휴와 약왕 사이의 돈독한 관계를. 그러하니 사족들도 약왕을 굳이 건들고자 하지 않지.”
“전국제후들은 그러한 제도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렇듯 방종하는 약왕을 제후들이 치지는 않습니까? 듣자하니 약왕이 양양에 머물 적에 창궐하는 역병에도 배짱을 부렸다고 하던데요. 유표는 꼼짝 못하고 말이죠.”
공융은 술로 목을 축이고 답했다.
“유표가 어쩌지 못했던 것은 약왕이 없으면 정말로 약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네. 약왕의 집단은 은밀하기 때문에 만일 그의 목을 벤다면 약을 구할 길이 없어지고야 말지. 그렇기 때문에 유표는 그 녀석에게 다섯 배의 값을 치르고 약을 사들였네. 약을 얻자마자 장군 문빙(文聘)을 시켜 들이치게 했으나 이미 합비로 내뺀 다음이었지. 다른 제후들이야 그와 엮일 일이 없으니 구태여 해칠 생각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약왕은 유표를 실컷 골탕 먹이고 자네에게 온 거야.”
가슴이 답답했다. 환재금을 용납할 수 없다. 나를 손바닥 위에서 굴리면서 시시덕거리는 그놈과 같은 합비 땅 위에서 어떻게 사냔 말이야!
“골치 아프게 됐군요. 괜히 건드렸다가는 손책과 적대하고 있는 산월이 우리를 주적으로 삼을 텐데. 게다가 부친의 봉지인 예장은 산월의 입김이 지배적인 곳이라……”
“그대와 막역한 장패 공의 임지인 단양도 산월의 힘이 큰 곳이지. 유훈 공의 여강도 마찬가지.”
나는 술맛이 뚝 떨어져서 잔을 저만치 밀어버렸다. 생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