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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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조락(凋落)의 수춘
나는 휑뎅그렁한 침실에서 혼자 잠을 청했다. 잠을 청하기만 했을 뿐 들지는 못했다. 시영은 새벽을 관통하여 아침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내내 개운하지 못한 기분으로 정치에 임했다. 기분이 몹시, 몹시 개운하지 못했다.
“대장군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장군부의 동정을 감시하고 있던 염상이 보고했다. 원요가 송경으로 향하겠다고 한 기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그가 변을 일으키려거든 그 안에 해야만 했다. 스스로 통보한 기한을 넘기면 천자의 칙명을 거스르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남양파가 행동하기 이전에 우리가 그들을 제압할 명분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원요가 병력을 일으킬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여포는 내내 수춘의 남문을 지키고 있었고, 만지의 화평사는 문만 열리면 성내로 진입할 채비를 갖춘 상태였다. 긴장은 원요가 못 박은 시간이 임박할수록 부풀어 올랐다.
시영이 돌아온 것은 원요가 통보한 날짜 하루 전, 늦은 오후였다. 그녀의 낯빛은 완전히 표백되어 있었다.
“부인!”
나는 버선발로 뛰쳐나가 그녀를 부축했다. 시영의 입술은 핏기가 가셔 있었다.
“합비후……”
그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실신했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이 일순 무거워졌다. 나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침실로 향했다. 와상에 누이고 의원을 불러 진맥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나섰던 시녀를 불렀다.
“부인이 대장군을 만났느냐?”
시녀의 얼굴은 어두웠다.
“예. 대장군이 오랫동안 만나주지 않다가 날이 밝고 나서야 허락했습니다.”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아느냐?”
“마님과 대장군 사이에 언쟁이 있었습니다. 심한 언쟁이었습니다. 목소리가 커서 발음이 또박또박 들렸습니다.”
둘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두 분의 생각이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터다.”
영리한 시녀는 내가 묻기를 주저하는 말까지 대답해주었다.
“대장군이 병마를 일으킬지 얌전히 송경으로 갈지는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네 생각이 깊구나. 고맙다.”
시녀는 꾸벅 허리를 꺾었다.
“마님의 상심이 큽니다. 부디 잘 봐주십시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네 마음이 기특하다. 고맙다.”
스산한 속마음을 삭이고 있는데, 노숙이 급히 나를 찾았다. 이 시국에 급한 일이라면 하나 밖에 없지. 그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나는 칼을 쥐었다. 나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면서 노숙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가시죠, 치중.”
노숙은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병력이 어지러운 시가전을 벌이는 것은 나로서는 낯선 경험이었다. 굳이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 한정 짓지 않아도 되었다. 누구에게나 낯선 경험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쉽게 전술을 말하지 못했다. 이런 전장에서는 기습책도, 허허실실의 계책도, 화공도, 수공도 이뤄질 수 없었다. 고전적인 냉병기의 충돌만이 가능했다.
“원윤이 휘하의 병력을 집결시킨다는 전언입니다. 기령, 이풍, 악취, 진기 등도 수춘성 밖에 주둔한 휘하의 부곡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를 치려는 심산이 분명합니다.”
나는 등을 쭉 펴며 한숨을 쉬었다.
“올 것이 왔습니다 그려.”
전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을 모두 합비로 보냈다. 진도에게 임무를 맡겼다. 시영도 수레 위에 누운 채로 그 행렬에 동참했다. 여포가 장악한 남문을 통해 행렬은 빠져나갔다.
상황이 벌어지기 전까지 수춘은 평정 그 자체였으나, 한번 꿈틀거리기 시작하니 정신없이 돌아갔다. 속속 남양파의 병력이 집결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합비류의 병력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제 가식과 허위는 두 세력 사이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승리를 위한 치졸한 작전만이 옳았다. 나는 무표정으로 나의 병력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주요한 전장은 수춘의 정청이 될 것 같았다. 수춘이 양주의 거성이라고는 하나 수만의 대군을 주둔할 정도의 규모는 되지 않았다. 때문에 성내의 병력은 우리가 약 일만 정도, 남양파가 약 일만오천 정도 되었다. 대장군부의 관할 하에 있는 사만 병력 중 일만오천을 제한 이만오천은 수춘의 교외에 주둔해있었다. 때문에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수춘의 성내는 물론 교외에서도 일대 결전이 벌어질 터였다.
“영자, 야전은 너에게 맡길게.”
여포는 수춘의 남문을 지키고 감녕은 나를 도와 성내의 전투를 지휘할 것이다. 성 밖에는 만지가 있기는 했지만, 그 노인네는 남을 지휘하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돈키호테처럼 노마에 올라타 선두에서 칼질하는 걸 즐기지. 허저 역시 인간백정 노릇이나 하면 족하지 대군을 운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나의 절친하고 절친한 벗이자 독자적인 장군부를 운용하고 있는 영자가 야전사령관으로 적당했다. 영자는 히죽 웃었다.
“어깨가 무거워졌네. 최선을 다할게, 찬!”
나는 손을 뻗어 주먹을 내밀었다. 영자는 영문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라고?”
현대적인 제스처에 둔한 사람 같으니!
“너도 주먹을 쥐어서 가볍게 쳐.”
영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톡, 내 주먹을 제 주먹으로 건드렸다.
“오, 이거 괜찮은데.”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그는 낄낄 웃었다.
“맡겨 두십시오, 합비후! 설마하니 내가 이풍이나 악취 같은 떨거지들한테 질까보냐.”
나도 그를 따라 웃었다.
“그럴 리가! 손토역이라면 그런 잡것들은 한 주먹에 때려잡지.”
영자는 더 쾌활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나도 그 주먹에 내 주먹을 맞춰주었다.
남양파의 움직임은 점점 노골화되었다. 이제 그들을 적이라고 규정해도 될 정도로. 나도 내내 숨겨왔던 마각을 드러낼 때가 왔다. 이미 떠난 시영을 대신해 량이가 내 갑주를 챙겨주었다.
“별로 입고 싶지 않은데.”
“형님이 여기서 눈 먼 화살 맞고 돌아가시면 몇 만 명이 죽어요. 생떼는 관두시라구요.”
“너, 나중에 나랑 술 한 번 먹자.”
나는 툴툴거리면서 갑주를 입었다. 쇠의 무게가 나를 눌렀다.
“너는 안 입냐?”
내가 량이에게 퉁바리를 놓으니 그는 얄미운 휘파람을 불었다.
“제가 죽으면 저 혼자 죽는 거지 수 만 명이 죽는 건 아니거든요.”
“술 두 번 먹자.”
시시한 농담 따먹기의 와중에 노숙이 들이닥쳤다.
“합비후! 적습이 시작됐습니다!”
나는 허리춤에 칼을 찼다.
“모두들 침착하게 응전하라 하세요. 알아서들 그리 하겠지만.”
수많은 사내들의 기합소리가 성벽을 무너뜨릴 듯 진동했다. 나는 수춘의 성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누각에 올랐다. 량이와 왕수가 내 뒤에 섰다.
“기어코 내전이구나.”
어둠이 내려앉으려는 때였다. 하늘이 어스름을 널리 까는데, 인위적인 횃불이 그것을 방해했다. 하늘의 푸름과 땅의 붉음이 어우러져 천하는 자줏빛이었다. 수춘의 남문에서 불화살이 올랐다. 성문이 개방되고, 만지가 이끄는 일만의 화평사가 성내로 마구 쳐들어왔다. 각 편의 선두에 선 병사들이 서로를 향한 살육의 손짓을 건넸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어서 고통스러운 단말마가 울렸다. 화평사 전원을 통과시킨 여포도 휘하의 병력을 출병시켰다. 성내로 침투하는 것을 출병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삽시에 수춘은 살육의 현장으로 변모했다.
“사람들이 많이 죽겠군.”
나는 누각의 난간에 몸을 의지한 채 전황을 살폈다. 어지러운 시가전은 장군들의 능력을 무화(無化)시켰다. 그러니까 여포가 이끄는 병력이든 기령이 이끄는 병력이든 군의 우두머리에 의해 승패가 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즉 우리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기더라도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왕수가 꾀를 짜내어 별동대를 원윤과 원요가 있는 수춘의 정청으로 침투, 그들의 목을 취해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려고 했지만 방비가 두터워 그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초조해지네요.”
나는 턱을 괸 채로 어지러운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하늘은 어스름을 지나 완전한 어둠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피아의 식별조차 온전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전선에서는 아군이 아군을, 적군이 적군을 죽이는 참경도 이따금 벌어졌으리라.
“내가 이기려면 대장군부를 가로막은 저들을 모조리 죽이고 원요와 원윤에게로 나아가야 하는 걸까.”
나는 누가 들어도, 듣고도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또 저들이 이기려면 내 앞에 선 저들을 모조리 죽이고 이 누각으로 와야하는 걸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온당하지 않은 일이다. 만지라도 시켜서 원윤과 원요의 목을 몰래 따오게 하고 싶었다. 영자에게서 전령이 당도했다. 수춘성의 밖에서도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누가 공이고 누가 방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긴장을 불러일으켰던 살육은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지루해졌다. 나는 난간에 기대 깜빡 졸았다. 나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초 단위로 늘어나는데 피로를 느끼는 내가 혐오스러웠다. 나는 냉수를 채운 대야에 얼굴을 박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의무를 이행했다. 나 때문에 죽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보아야 할 의무.
“여강태수 유훈 공의 병력 1만이 당도했습니다!”
“단양태수 장패 공의 병력 5천이 당도했습니다!”
“여남태수 장료 공의 병력 3천이 당도했습니다!”
“예장태수 제갈현 공의 병력 2천이 당도했습니다!”
도합 2만의 병력이 나에게 더해졌다. 유훈, 노구, 장료, 아버지의 병력은 힘겨운 싸움을 하던 영자에게 더해졌다. 승부의 균형이 다소 우리에게 유리하게 기울었다. 이들의 병력 전부를 달달 긁어모아 단번에 적을 섬멸하면 좋겠지만 우리를 도사리는 적은 비단 눈앞의 남양파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적을 제압하기에는 충분했다. 마침내 한 떼의 병력이 골목을 죽 내달려 대장군부의 정청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대장군부의 병력은 그대로 내몰려 동문 쪽으로 후퇴했다. 원윤과 원요도 필시 그 무리에 섞여있을 터였다.
“저들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사로잡아야 해.”
나는 성밖의 아군에게 신호를 보내 동문으로 화력을 집중하도록 했다. 원윤과 원요를 생포해야만 했다. 그래야 그들을 나의 대의명분으로 징벌하고 이곳에 정당성의 씨앗을 심을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화평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색하며 그를 맞았다.
“대장!”
중무장한 노구가 누각 위로 올라왔다. 나는 반가움을 표하며 그의 손을 맞잡았지만 그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마냥 재회를 기뻐할 수만은 없군.”
“무슨 일이야? 이미 원요는 섬멸 직전이라고.”
노구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양의 주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책의 본군도 뒤따라온다는 소식이야. 최소한의 수비병력을 단양에 두었지만… 그들이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군.”
나는 뺨을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얼얼했다.
“어?”
“병력은 5만. 그들은 총력전을 각오했다.”
노구의 말은 날카롭게 벼려져 내 폐부를 깊게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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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자전”이 곧 네이버웹소설, 카카오페이지에서도 연재될 예정입니다. 자세한 일정은 추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플랫폼은 스카이북에서 대행하여 글을 올려주실 것입니다.
조아라에서는 현행대로 쭉 연재될 것이니 연재중단이나 삭제 등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