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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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조락(凋落)의 수춘
누각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았다. 붉은 횃불들이, ‘들’이라는 복수형 보조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수한 횃불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이쪽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나는 진득한 침을 삼켰다. 나는 난간을 등지고 기대어 내 뒤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에게도 모두 낙담의 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노숙을 바라봤다. 그는 잠시 나와 눈을 맞추다가 이내 바닥으로 깔았다. 왕수도, 그랬다.
“하아……”
연주에서는 원소가 내 훼방을 놓더니, 예주에서는 유비가 내 훼방을 놓더니, 이제 양주에서는 손책인가. 아무리 등을 보이면 물어뜯기는 난세라지만 이 어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침착함을 되찾은 것은 량이었다.
“회병 4만에 더해 손책의 5만을 맞아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형님, 군을 물리셔야 합니다.”
나의 뇌리를 흐르던 혈액이 일거에 바싹 말라버린 느낌이었다. 이럴 수는, 정녕 이럴 수는…… 왕수가 말을 보탰다.
“지체하면 맹용한 기세의 손책의 병마에 따라잡히고 말 것입니다. 손책이 5만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했다면 단순히 구원의 개념이 아닐 것입니다.”
왕수도 긴장의 침을 삼켰다.
“우리를 멸망하게 하려는 병력입니다.”
정신을 가눌 길이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으로 군령은 발해졌다. 퇴각의 군령이었다. 노숙이 전군에 명령했다.
“전군! 퇴각!”
휘하의 장교들이 군령을 받들었다.
“전군! 퇴각하라!”
밤중에 긴 고둥소리가 울렸다. 왕수와 노숙이 나를 부축해 안장 위에 앉혔다. 왕수는 내가 올라탄 말의 엉덩이를 세게 내리쳤다.
“서둘러라!”
나는 참담함을 버티면서 외쳤다.
“합비로 물러난다.”
수춘을 가득 메웠던 나의 병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꽁무니를 빼는 나의 뒤를 따라 서쪽으로 부리나케 달렸다. 나는 뒤를 돌아 이제 영영 남의 것이 돼버릴지도 모르는 수춘을 보지 못했다. 앞만, 합비만 보고 달렸다. 울음이 쏟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삽시간에 수춘은 손씨의 것이 되었다. 손책의 깃발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등을 기대고 있던 누각의 난간에서 나부꼈다. 나의 뒷모습을 향해 각지에서 파견된 전령들이 아픈 보고들을 쏟아냈다.
“단양군이 완전히 손책에게 넘어갔습니다!”
“수춘의 대장군부가 손책에게 넘어갔습니다!”
“손책이 숙장 황개(黃蓋)를 앞세워 추격에 나섰습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을 간신히 삭이면서 그 보고들을 들었다.
“합비후께 보고!”
전령의 보고는 바람결에 흐트러진 발음으로 전해졌다.
“말하라.”
“온후께서 직접 적의 추격을 막겠다고 하셨습니다!”
“괴로운 마음으로 부탁드린다고 전하라……”
야전을 지휘하던 만지가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일이 어지럽게 돌아가우.”
“내 과실이오……”
“강동의 똥강아지가 저리 맹렬히 꼬리를 흔들어댈지 누가 알았겠수. 자책하지 마시우.”
“이 일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오. 손책……”
“암! 잊으면 안 되지. 저 망할 똥강아지를 삶아드실 생각을 하셔야지.”
“적은 합비로 출진할 것이오.”
만지는 흐흐 웃었다.
“탕지철성(蕩池鐵城)이 뭔지 그놈은 아주 단단히 알게 될 것이우.”
우리의 병력은 빠르게 합비로 귀환했다. 여포가 성공적으로 적을 막아냈다는 전언이었다. 승리로 기울어가던 전세가 패배로 급변하자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병사들만 그럴까. 합비의 성부에 모인 제장의 표정도 밝을 수가 없었다. 제일 못난 나는 그중에서도 죽상 중의 죽상이었는데, 내가 이래서는 솟던 힘도 사그라질 판이었다. 나는 한숨을 짧게 쉬고 팔걸이를 박차며 일어났다.
“구강공의 안방에 똥강아지의 흙발을 들이고 말았소. 구강공의 머슴이었던 자로서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오.”
나는 허리춤의 칼을 만지작거렸다.
“나의 죄, 너무나도 크오. 반드시 스스로 물을 것이오. 그러나 그 이전에……”
나는 동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더 큰 죄를 저지른 자를 먼저 벌해야겠소. 그 이후, 내 죄를 물을 것이오.”
나는 내 머리 위에 올린 관을 내려놨다. 그리고 내 상투를 쪽 지른 비녀를 뽑았다. 이 땅에 떨어진 이후 한 번도 자르지 않았던 머리칼이 가슴께까지 내려왔다. 허리춤의 칼을 뽑아 하늘을 향해 들었다.
“천지신명께 고하나니, 나 제갈찬은 반드시 손책의 머리를 잘라 구강공의 영전에 바치고 대장군부를 사수하지 못한 죄를 스스로 물을 것이오! 이것이 내 결심의 증명이오.”
풀어헤친 머리를 한 주먹에 쥐었다. 그리고 내 목줄의 근처로 칼을 들이댔다. 그 예리한 칼날로, 주먹에 쥔 머리를 잘라버렸다. 나의 명검은 나의 머리칼을 단숨에 잘라버렸다. 투두둑, 소리를 내면서.
그것을 나의 제장들은 똑똑히 보았다. 영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보다가, 투구를 벗고 비녀를 뽑았다. 그 역시 헝클어진 긴 머리칼이 어깨 밑으로 내려왔다.
“나, 토역장군 손관은 반드시 손책의 목을 쳐 죄를 갚겠다!”
영자는 피 묻은 칼을 뽑아 머리칼을 잘라버렸다. 그것은 나의 제장들을 고무시켰다. 내 좌우에 선 숱한 장수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머리칼을 잘랐다. 머리털을 잘라내는 소리가 좌우에서 굉음이 되어 울렸다. 마지막으로 백발의 만지가 뻣뻣한 머리칼을 자르며 시시덕거렸다.
“산발의 맹이로세(散髮之盟)!”
육중한 선언 뒤에 가벼운 우스개는 긴장을 적당히 풀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염상이 흐흐 웃었다.
“산발지맹이라, 이 일은 반드시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맹이 맹이 되려면 술이 필요하기에, 아랫것을 시켜 급히 술을 데워 대령하도록 했다. 한 잔씩 따르고, 모두들 잔을 들었다. 나는 술잔을 두 손으로 겹쳐 받들고, 시영이 누워있는 침실을 향해 들었다.
“부인은 훌륭하게 소임을 해냈소. 이제는……”
뜨끈한 술을 내 입술에 적셨다. 나는 눈을 감으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제는 너의 차례다……’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합비로 돌아온 여포는 산발의 향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피 묻은 방천극을 아랫것에게 넘기며 나를 향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뭐냐?”
나는 미적지근하게 웃었다.
“산발지맹입니다, 온후.”
여포는 땅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툴툴거렸다.
“어려운 말 쓰지 마라!”
그제야 좌중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포가 손책의 추격을 뿌리치기는 했지만 망할 강동의 강아지는 내 발목을 물고 늘어졌다. 그는 수춘에 숙장 정보와 병력 오천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병력 모두를 합비성의 앞으로 끌고 와 주둔시켰다. 수춘에서부터 나를 압박하던 횃불들이 이제는 합비에서 나를 압박했다.
나는 산발인 채로 전투를 지휘했다. 군의 수뇌가 산발을 하고 돌아다니니 휘하의 병사들은 시시덕거리다가도 언뜻 느끼는 바가 있어 밤중에 스스로 머리칼을 자르는 치들도 있었다. 군의 사기를 다잡는 데 효과가 분명했다.
시영은 내내 눈을 뜨지 못하고 와상에 누워있었다. 나는 밤에는 와상 옆에 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날이 밝으면 전략을 짰다.
“수춘은 우리 영지의 근본이자 젖줄입니다. 수춘이 점령당하니 예주와의 연락선이 차단되었습니다.”
노숙이 비관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수춘은 우리 군의 중심이었다. 그곳을 중심으로 가도가 나있었고, 전령이 그 가도 위로 드나들었다. 현재 북방의 진규, 진등, 장료와 여포를 대신해 예주를 지키는 고순과 우리의 연락선이 차단된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북방의 경계를 합비로 삼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차악은 진국과 패국 등 예주의 북부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예주 남부가 우리의 것일 수 있었던 것은 원술의 회병이 수춘을 든든히 지키고 언제든 그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패국과 진국에 주둔한 진규와 진등 부자가 보유한 병력은 합해서 일만이 겨우 넘는 수효였다. 그것만으로는 두 개의 국(國)을 지킬 수 없었다. 여남의 장료는 일만오천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서쪽으로는 낭릉의 이통이 도사리고 있고 여남의 넓은 권역을 모두 지켜야했기에 넉넉한 수효는 아니었다. 여포의 직할 병력은 제법 많은 수효를 자랑했으나 예주를 둘러싼 사방의 적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며칠 후, 진규와 진등이 패국과 진국을 포기하고 여남의 장료와 합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비가 움직인 것입니다.”
나는 유비의 큰 귀를 떠올리며 참을 수 없는 적개심을 느꼈다.
“유비……”
손책이 수춘을 점거하고 합비를 압박하는 동안, 유비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패국과 진국을 석권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예주의 군국은 여남군, 그것도 이통과 갈라먹은 반쪽짜리 여남군 하나만 남게 되었다. 유비는 서주와 예주 두 개의 주를 거느린 명실 공히 강력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손책과 우리가 으르렁거리는 꼴을 배를 긁으며 보고 있겠군……”
호로새끼. 죽을힘을 다해 우리를 물고 늘어지는 손책보다, 그 강아지를 부려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그 작자가 더 혐오스러웠다. 손책의 목을 베고 나서는 왕귀호로새끼, 너의 차례다.
나는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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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개
손씨 3대를 섬긴 역전의 숙장. 일찍이 손견을 따라 종군하여 별부사마에 임명되었다. 손견이 죽고 손책이 뒤를 잇자 그를 따라 유요와의 전쟁, 황조와의 전쟁에 종군했다. 이후 손책이 요절하고 손권이 집권했다. 석성현의 장관으로 부임했을 때 관리들에게 자율적인 정치를 일임했는데, 처음에는 관리들이 황개를 두려워하여 일처리를 잘했다. 그러나 황개가 나태하게 돌보지 않는다고 여겨 비리를 일삼았는데, 이를 안 황개는 관리들을 모두 처형했고 이에 감복한 근방의 산월들이 복속했다.
적벽대전 당시에는 주유에게 화공을 진언하여, 조조에게 사항계를 써서 결정적인 타격을 안겼다. 화공의 고안부터 실행까지 그가 도맡았으므로 실질적인 일등공신은 황개였던 것이다. 화공 후 그는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살았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마침 동료장수 한당이 지나가자 안간힘을 다해 애타게 그를 불렀고, 한당이 이를 듣고 그를 구원했다. 이후 이민족인 무릉만이 창궐하는 무릉의 태수로 임명되어 그들을 일망타진했다. 이후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