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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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합비전
수 만 명의 절규가 전장을 꽉 메웠다. 동서남북의 성문마다 장수들이 배치되어 꽥꽥 소리를 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것에 감응한 병사들이 기꺼이 죽음을 향해 뛰어들었다. 북문에는 영자가, 서문에는 감녕이, 동문에는 여포가, 남문에는 노구가 배치되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목청이 연약한 백면서생들은 성부에 앉아 생에서 죽음으로 옮아가는 사람들의 비명을 안주삼아 술을 홀짝였다. 그것이 전장에서, 특히 농성전에서 선비의 유일한 역할이었다.
“노인장이 축성을 잘 해내긴 했습니다.”
나는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노숙이 말을 받았다.
“벌써 열흘째 공성이 이어지는데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그려.”
과연 그의 말대로 합비성은 탕지철성이었다. 손책은 악착같이 성문을 두드리고 성벽에 사다리를 걸었지만 무용으로 귀결되었다. 사다리에 올라 메뚜기처럼 튀어 오르는 적병을 아군이 찍어 죽였고, 임충(臨衝, 나무 등을 뾰족이 깎아 성문을 부수는 병기)으로 성문을 두드리는 적병의 머리 위로는 끓는 기름을 끼얹어 몸의 절반은 튀겨지고 절반은 생생히 살아있는 고통을 안겼다.
그런 참혹한 광경을 술이나 처마시는 성부의 선비들이 알 리 없었다. 아니, 모를 리 없지만 알 리 없는 체 한다고 해야 옳겠다.
노숙이 술잔을 입에 대자 이번에는 유엽이 말했다.
“어제는 땅굴을 팠지만 무소용이었죠.”
유엽의 말대로, 어제는 손책이 동문에 화력을 집중하면서, 북문으로 별동대를 보내 야음을 타 땅굴을 파게 했다. 북문을 지키는 영자는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생글생글한 웃음을 지으며 땅굴을 통해 네 발로 기어들어오는 적병들을 나오는 족족 찔러 죽였다.
왕수는 입가심으로 매실 절임을 집으며 말을 보탰다.
“그제는 수공을 도모했었죠.”
합비성의 안쪽으로 장강의 지류가 흘렀다. 평시에는 상선이 수시로 오가고 여러 척의 정박이 가능했지만, 전시에는 그다지 유리하지 않았다. 이에 만지는 합비성을 축조할 때 여러 곳의 수문(水門)을 두어 적습을 대비하도록 했다. 성문을 거듭 두드리다가 홧병이 도진 손책은 수문을 과녁으로 삼았다. 수전이라면 그도 제법 자신이 있는 분야였으니까. 그렇다면 손책의 야심찬 수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수공이 성공했으면 내가 여기서 팔자 좋게 술이나 홀짝이고 있을 리가 없잖은가. 왕수가 매실 절임을 어금니로 깨물자 신물이 팍 터졌다.
“으이구, 셔라!”
왕수는 눈을 찡그리며 쓴 술로 매실의 신맛을 지워냈다. 손책이 보낸 수군의 운명이 저 매실과 같았다. 어금니에 쪼개진 채 한 가득 머금은 술에 이리저리 부유하는 매실 조각 같았다. 합비의 수위를 조정해놓기 위해 세워놓은 갑문을 개방하자 소나기에 가랑잎이 뒤집어지듯 손책의 조각배는 침몰해버렸다.
시도하는 방법마다 족족 효험이 없으니 손책의 몸은 잔뜩 달아버렸다. 손책의 본거지인 말릉과 합비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긴 보급선은 원정군의 가장 큰 약점이다. 아무리 힘이 센 장사라 해도 밥을 먹지 못하면 허약한 법,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면 아무리 정예한 병력이라도 서풍에 민들레 홀씨 날리듯 무력하다. 그리고 보급선이 길어질수록 돌발변수의 공산이 비례하여 늘어난다. 난세에 지친 백성들은 도적이 되기 십상이다. 지키는 병력은 적고 양곡을 쌓은 달구지가 줄지어 천천히 움직이는 제후의 보급부대는, 기아에 눈이 뒤집힌 도적들이 노리기에 가장 적당한 먹잇감이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급작스런 호우로 비를 맞은 곡식들이 썩어 문드러진다든지, 길어진 보급선 중간 중간에 배치된 관료들이 얼마간 해먹는다든지 하는 수가 있었다. 이러한 변수가 없이 온전히 보급이 전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더러는 빠르게 도착하고 더러는 늦게 도착하는 때가 있다. 더러 빠른 것은 훌륭했지만 더러 늦는 것은 작전수행에 치명적이었다. 손책은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많은 쌀을 해치웠다. 보급이 더러 늦게 되는 경우, 막사의 아우성소리가 땅 깊이 박은 말뚝을 들썩였다.
이따금 북방의 영지를 지키는 영특한 장료가 별동대를 파견하여 손책의 보급부대에 불을 지르고 도망을 놓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이에 손책은 보급부대의 경호병력을 증강시켰는데, 이는 한 차례에 수송할 수 있는 보급량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원활한 작전구사에 걸림돌이 되었다.
여우같은 만지는 또 어떻고? 이 교활한 노인네는 밤마다 별동대를 보내 꽹과리를 치고 소리를 악악 지르게 하고 유유히 병력을 불러들였다. 그러하니 손책의 대병력은 연일 불면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견고한 합비성 안의 농성군은 적의 기습에 지레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었지만, 탁 트인 들에 막사를 친 손책은 기습의 두려움을 항상 곁에 둘 수밖에 없었다. 만성피로는 원정군의 숙명이었다.
한참 합비를 두드리던 손책군의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오늘도 합비의 수성에 성공했다.
“손책의 마음이 어지간히 급해지겠군.”
전장의 함성이 멎자 비로소 풀벌레 소리 들렸다.
“어, 좀이 쑤셔 견디질 못하겠구만!”
동문을 지키던 여포가 뻐근한 목을 좌우로 건들거리며 성부로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읍을 하며 얼른 상석을 양보했다. 어쩌다 보니 내가 군의 수장처럼 되었지만 위계나 명성으로 따지자면 여포가 한참 위였다.
“온후의 무용에 오늘도 손책이 이기지 못했습니다.”
여포는 갈증이 심했는지 탁상 위의 술병을 들고 탈탈 털어버렸다. 폭포수가 동굴로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여포의 울렁거리는 울대에서 들렸다. 여포는 단숨에 술 한 병을 마시고 크으, 적절한 감탄사를 뱉으며 입가를 훔쳤다.
“이봐, 그냥 성문을 열고 나가서 손책을 쑤셔버리는 게 어때?”
내가 난감한 웃음을 짓자 여포가 하소연조로 말했다.
“성벽 위에서 적을 기다리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그러나 성벽에 얼마나 엉덩이를 잘 붙이고 있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릴 것입니다. 온후께서는 다소 좀이 쑤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이거야 원!”
여포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든든한 성이 있다면 의지하여 적을 맞는 것이 누가 봐도 옳은 병법이었다. 특히 적에게 주유 같은 지략가가 포진해있다면 더욱 그렇다. 야전으로 나서게 된다면 주유에게 허점을 파고 들 기회를 주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싸움으로 고단하실 터이니 내일은 수비에 나서지 마시고 성부에서 푹 쉬시지요. 아문장군 허저를 대신 동문으로 보내겠습니다.”
“처방을 거꾸로 하는군! 나는 쉴수록 고단한 사람일세!”
영자와 노구, 감녕도 다소 지친 기색으로 복귀했다. 나는 그들이 들어오는 족족 술을 따라주었다. 술이나 퍼마셨기 때문에 피곤한 선비들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농성이 마냥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만은 아닌 것이었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체력도 점차 바닥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이것이 최선인데.
피곤한 장군들은 일찍 잠들었다. 배려를 아는 풀벌레들이 새벽에는 점잖게 울었다. 해 뜨니 다시 함성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해 지니 썰물처럼 나갔다. 나간 함성을 대신해 다시 풀벌레 소리. 함성과 풀벌레 소리가 그렇게 소리를 주고받았다. 계속.
결국 손책은 합비를 포기했다. 참모들과 성부에서 갑론을박하고 있는데, 허저가 들어와 보고했다.
“합비후께 아뢰겠슈.”
“말씀하시오.”
“손책이 군을 물렸슈.”
“군을 물리다니.”
“원윤, 원요와 그 찌꺼기들이 이끄는 회병 2만과 한당과 여범이 이끄는 강동군 1만을 합비에 남겨놓구 나머지 병력은 여강으로 향한다는 소식이우.”
나는 눈썹을 치떴다.
“여강태수 유훈 공을 치겠다?”
유훈은 수만의 병력을 보유한 나름 명망 있는 군벌이기는 했으나, 그 자체의 깜냥도 그렇거니와 휘하 장수들의 면면도 손책과 주유를 내세운 적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수차례 합비를 흔들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자, 손책은 회병 2만으로 합비를 묶어놓고 여강을 들이치겠다는 심산이었다.
왕수가 말했다.
“합비후와 상대하는 것보다 유여강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겠죠.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유엽이 덧붙였다.
“장강의 수로를 통해 보급하겠다는 뜻이기도 하죠. 육상에서 자질구레한 일들로 방해받느니 자신 있는 수상으로 보급로를 변경하는 겁니다.”
나는 의문을 표했다.
“물론 유여강의 군재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마냥 만만하지도 않습니다. 여강은 늪지가 발달해있어 공략하기가 매우 어렵지요. 제 아무리 손책이 양장이라 하나 단기간에 여강을 꺾을 수는 없을 텐데……”
여포는 선비들의 복잡한 전략회의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았다. 그는 허저에게 삿대질하며 성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허저! 손책이 확실히 남하한 것이 맞는가!”
“맞슈!”
“허면 지금 눈앞에 원윤, 원요의 회병과 한당, 여범의 강동병이 있는 것이 맞는가!”
“맞슈!”
여포는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합비후! 뭘 하는 거냐! 손책이 우리를 위해 진수성찬을 차려놨다지 않느냐! 배고파 죽겠다!”
여포가 몸을 들썩거리며 안절부절하지 못하자 나는 빙긋 웃었다.
“하긴 기분이 좀 나쁘긴 하네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원윤과 한당 정도로 합비를 틀어막겠다고 하네요, 손책이.”
나는 내 앞에 등등한 기운을 내뿜는 면면을 바라보았다.
정북장군 예주자사 온후 여포 봉선
좌장군 단양태수 장패 선고
토역장군 손관 중대
아문장군 허저 중강
화평교위 합비현위 감녕 흥패
합비현령 만지
너희가 견딜 수 있을까. 어려울 걸, 아마.
나는 맹수를 들판에 풀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