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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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합비전
손책은 끓는 혈기의 젊은 장수였지만 한 순간의 착오로 군을 전몰시킬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뭐 지금 상황도 전몰에 가깝긴 하지만. 산월의 대군이 그의 앞을 가로막자 손책은 여포를 떼어내고 전군에 명령했다.
“전군! 오군으로 퇴각한다! 지금부터 어떠한 군령도 무효다! 각자 살아남아 오군으로 가라!”
군이 한 덩어리가 되어 적진을 돌파해 퇴각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앞에는 우리가, 뒤에는 산월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큰 고기는 그물에 걸리게 돼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각자도생이 유일했다. 작은 고기들이 떼를 이루어 다니는 것은 천적을 위협하기 위함이지만, 더 이상 천적이 겁을 집어먹지 않으면 다 같이 먹힐 뿐이다. 뿔뿔이 흩어져 촘촘한 그물코를 벗어나는 것이 상책.
손책은 명령을 내리고 먼저 진을 이탈해 동쪽으로 내달렸다. 이기적인 결단이 아니라 전범을 보인 것이다. 그가 먼저 그리하지 않으면 누구 하나 먼저 진을 이탈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책은 채찍으로 말의 궁둥이를 거세게 내리치며 산월의 진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손책 휘하의 4천 기병은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추격하라!”
콩을 한 움큼 쥐고 냅다 바닥에 뿌려보자. 다 줍는 데 한 나절이다. 찾지 못해 영영 줍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손책은 제 병력을 사방팔방에 뿌려버린 것이었다. 나와 산월의 병력은 그들을 압박하며 숱한 목숨을 거뒀지만, 결국 손책을 비롯한 거물급 무장을 생포하거나 죽이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일천의 주검이 더 늘었을 뿐이었다.
앞뒤로 손책을 짓누르던 우리와 산월은 접점을 만들었다. 반림과 나의 거리가 지척이 되었다. 얼굴 근육 꿈틀거리는 것까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이것으로 전쟁은 종결이었다. 손책의 5만 병마는 대개 죽거나 항복하고,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수만이 오군으로 귀환했다. 개중 절반은 또 병신이 된지라, 무사귀환한 자는 없다고 봐야 옳았다.
“적절한 때에 나를 불러주었소, 합비후.”
반림은 마상에서 내게 호의적인 말을 건넸다. 나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꾸벅 읍했다.
“적절한 때에 오셔주었습니다, 산월수.”
반림도 나를 따라 말에서 내렸다. 어깨가 벌어진 새왕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새왕들에 전혀 뒤지지 않는 나의 용장들이 나를 따랐다.
“마침내 공동의 적 손책을 무너뜨렸소.”
“오군에 틀어박혀 한동안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손책이 무너졌으니 그대들은 우리를 토벌할 것인가?”
급작스런 물음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산월수와 대적하여 득볼 일이 없습니다.”
나의 부정에도 반림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러나 대대로 그대 화하의 족속은 우리 산월을 미워하고 핍박하였다. 그대는 필시 북방의 영토를 얻고자 할 터다. 그러자면 배후의 우리를 제거하여 후환을 잠재우고 싶어 할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월이 우리의 후환이 될 경우입니다.”
“그대는 우리를 쉽게 신용할 수 있소? 우리는 그대들의 오랜 적이었소.”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그래도 당장은 산월수와 술잔이나 나누고 싶지 싸우고 싶지는 않은데요.”
반림도 내 어설픈 웃음을 따라 웃었다.
“그런가.”
“우선은 막사를 치고 우리의 승전을 자축하시지요. 그래도 되지 않습니까?”
“수춘의 일이 급할 텐데.”
나는 씩 웃었다.
“동지와 술 한 잔 마실 짬은 됩니다.”
반림은 어색한 낱말을 여러 번 발음했다.
“동지라… 동지……”
간이막사를 치고 병사들은 잠시 쉬도록 했다. 수춘의 상황도 지금쯤이면 정리되었을 터이다. 정보가 날고 긴다고 해도 고작 오천의 병력으로 수만을 당해내진 못할 테니까. 노숙이 어련히 잘 처리할 것이었다. 나는 반림과 나란히 자리에 앉고, 여포도 상석에 앉혔다. 술이 몇 잔 돌았을 즈음 내가 반림에게 말했다.
“아까 같은 물음을 산월수께 여쭙겠습니다.”
반림은 순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이제 손책이 무너졌으니 수께서는 우리를 치시렵니까?”
내 물음에 반림보다도 먼저 새왕 진복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우리의 원수 손책을 몰아낸 합비후가 아닙니까! 우리는 합비후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여기에 감녕이 으르렁거렸다.
“감히 천한 신분으로 대한의 공후께 친구를 운운하느냐!”
나는 땀을 삐질 흘리며 감녕을 만류했다.
“좋은 날에 그러지 맙시다, 감 공.”
얼어붙으려는 분위기를 서둘러 녹였다.
“산월수의 음성으로 듣고 싶습니다. 우리를 치시렵니까.”
반림은 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뭐야, 그 느끼한 눈빛은. 그러더니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대와는 맞서고 싶지 않소.”
반림의 대답을 듣고 나는 선뜻 다음 말을 꺼냈다.
“허면 맹을 맺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반림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번졌다.
“맹?”
“그렇습니다. 저와 산월수 사이에 맹을 맺는 것입니다.”
“상세히 말해보시오.”
나는 지필묵을 대령하게 한 다음 짧은 글을 썼다.
화월지맹(華越之盟)
-한(漢, 송경의 유총을 인정하는 세력권으로 정의)과 월은 영원한 친교를 맺는다.
-한에 불충으로 항거하고 월을 해친 역도 손책을 손적(孫敵)이라고 부른다.
-손적이 사사로이 다스리던 수춘과 단양군은 한의 경계로 삼는다. 회계군은 월의 경계로 삼는다.
-경계를 지키지 않고 한의 영역과 인명과 물산을 해치는 월은 월로 인정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민(閩, 산월은 민월의 후예)이라고 하며 한과 월이 공히 그들을 토멸한다.
-한은 토민교위(討閩校尉)를 설치하여 민을 정벌하도록 하고, 호월교위(護越校尉)를 두어 월과 화호하도록 한다.
-천자의 윤허가 있을 때까지 한의 소임은 양주자사(제갈찬)만의 의무로 삼는다.
-위의 조항을 한과 월은 성심으로 지킨다.
“화월지맹?”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화와 산월수의 월 사이의 맹입니다.”
글자를 모르는 진복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반림이 말로 일러주니 이를 다 드러내고 웃었다.
“손책을 손적으로 부른다, 마음에 드는군.”
“단양은 그대들이 갖고 회계는 우리가 얻는다?”
“그렇습니다. 비록 단양과 회계에 손책의 깃발이 걸려있긴 하지만 손책은 이제 오군 하나를 지키기도 버겁게 되었습니다. 들이치면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대들에게 대적하는 월은 민이다? 그리고 그들을 토멸할 수 있다?”
“산월수께서 이 맹에 동의하신다면 한과 월은 서로를 해칠 수 없습니다. 허나 해치는 자가 나온다면 그는 수의 뜻을 거스르는 자이니 응당 토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사람들 중에서도 월을 핍박하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토멸해야 할 것이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말은 즉각 반영했다.
“물론입니다. 수께서는 수의 명령으로 그러한 자를 벌하십시오. 우리도 힘써 돕겠습니다.”
“좋소. 유감없소.”
“그렇다면, 이것으로 맹이 성립되었습니다.”
반림은 입가를 벌렸다.
“아직, 입술에 피를 묻혀야 그때부터 맹이오.”
백마를 잡아 입술에 피를 묻히는 것, 이른바 삽혈(歃血). 썩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가끔은 이런 인사치레도 필요한 법이니까. 솜씨 좋은 자가 단칼에 백마의 목을 베고 피를 받았다. 나와 반림은 서로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가 그것을 입술에 적셨다. 화와 월 사이에 맹이 이뤄졌다.
이 맹을 송경의 유총에게 보내어 아뢴 것은 이 시점으로부터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 천자는 이 맹을 영원히 보류하겠노라고 전해왔다. 내 멋대로 체결한 맹을 인정해줄 정도로 호구가 아니라는 뜻임과 동시에, 나와 산월 사이의 맹은 유효하다고 인정해준 것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태부 공융을 보내어 나를 토민교위 겸 호월교위에 임명한다고 했다. 이런 나쁜 남자 같으니라고! 뽀뽀해주고 싶게.
나는 수춘으로 당당히 개선했다. 손책의 수탈에 시달렸던 백성들은 수춘의 대로로 뛰쳐나와 어깨춤을 추면서 나를 반겨주었다. 그것이 기분이 좋기보다는 서글펐다. 그들의 웃음 뒤에 숨은 고통의 기억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한창 전후처리에 바쁜 내게 별가 염상이 다가와 귀띔했다.
“원윤과 원요로 보이는 자가 북쪽을 향해 내달린다고 합니다. 매우 지쳐보이는 까닭으로, 지금 쫓으면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들을 붙잡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하면 나의 정통성을 한껏 드높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두세요.”
“북쪽은 유비의 영토입니다. 나중에 구실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이기적인 결단을 내리려고요. 그냥 두도록 해주세요.”
염상도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물러났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쟁이 끝난 수춘은 예전의 영화로운 모습은 사라졌다. 나의 책임도 분명했다. 수만의 병력이 대규모의 시가전을 벌였으니 온전하길 바라는 것이 욕심이었다. 손책의 대대적인 수탈은 덤이고. 이구동성으로 본거지를 수춘에서 합비로 옮기자는 말이 쏟아졌다. 모두들 합비의 번영을 목도한 이들이니 수춘의 조락이 더욱 초라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이견이 없었다. 양주자사부를 합비로 옮기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