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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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평자와 태산의 도둑들
소건은 장시간 침묵했다. 나는 그의 머릿속을 충분히 짐작했다. 오만 가지 계산을 하고 있을 터다. 도겸이냐 장패냐, 어느 쪽에 붙어야 내 목숨을 보전하고 오래도록 호사를 누리겠는가. 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잘 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라는 단체가 있다. 나는 고령으로 인해 먼 여정을 떠나지 못하는 사장님을 대신해서 대구에서 열리는 회의에 종종 참석하곤 했다. 씨가 말라가는 소형 서점들의 점주들은 정부에 시급한 대책마련을 촉구하기 위한 기자회견을 열려고 했다. 나도 붉은 머리띠를 질끈 매고 들러리를 서려고 했다. 우리들은 우리 나름의 대표자를 선출했는데, 지방 소도시에서 중견서점을 경영하는 배불뚝이였다. 그의 말버릇이 내가 58년 개띠인데…로 시작하는 탓에 나는 그의 나이를 지금껏 잊지 못한다.
그의 눈빛이 지금 소건의 것과 판박이다. 불안하게 떨리면서, 항상 살길을 염려하는 듯 사방팔방을 살피는. 그 개띠 배불뚝이는 대책마련 촉구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금의 불경기에 어찌 서점만 힘들겠습니까. 정부도 지금의 불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뇌리에서 개띠 배불뚝이의 영상이 재생되는 것과 동시에 소건의 입이 열렸다.
“지금은 난세. 비록 관군이 황건의 난을 토평했지만 여전히 불안하오. 다만 천자의 관인을 받은 외관들이 열심히 발로 뛰고 있지.”
배불뚝이와 소건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공명했다.
“우리 연합회는,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켜 정부의 큰 그림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정부정책에 적극 협조하여 지금의 난국이 서둘러 타개되도록 하겠습니다.”
“그… 여전히 황건 잔당이 날뛰는 가운데 어찌 관군끼리 창칼을 마주하겠소? 도서주께서 움직이시는 것도 황건 잔당을 뿌리 뽑기 위함일 터. 그대가 운운하는 의와 불의는 이해하기 힘들다. 도리어 황건 잔당을 치려는 도서주를 막으려는 그대들의 불의가 아니야?”
이런 부류의 특징은 이렇다. 자신이 머리를 굴려 도출한 결론이 무조건 정답인 것으로 믿는다. 결론의 불확실성은 그들 자신을 불안하게 하니 이것은 완벽한 정답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것. 정부의 회유와 협박에 입장을 선회한 배불뚝이나, 장패보다 도겸이 정답이라고 생각한 소건이나 자신의 선택이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도출한 결론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은, 자신의 역량 안에서 얼렁뚱땅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배불뚝이는 불황을, 소건은 황건 잔당을 핑계거리로 삼았다. 그런 허울만 좋은 명분은 외부에는 먹혀든다. 실제로 한국서점조합연합회의 기자회견은 여론의 큰 반향을 얻지 못한 채, 어용단체로 전락했다는 비판만 듣고 그렇게 묻혀버렸다. 황건 잔당의 토벌 명분도 그러할 터다. 외부의 사람들은 그렇구나, 짧게 소회를 밟히고 관심을 끄겠지.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일의 당사자들, 그들은 결코 조악한 명분 놀음에 놀아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일에 처절한 삶이 얽히고설킨 그들은 도리어 분노한다. 이쯤에서 배불뚝이의 최후의 대하여 얘기를 해보자면, 그는 자다가 경동맥에 칼을 맞고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범인은 배불뚝이와 동향의 소형서점주. 그는 피 묻은 칼을 든 채 근처 경찰서에 자수하여 얌전히 쇠고랑을 찼다. 배불뚝이는 그렇게 죽었다.
소건도 배불뚝이의 뒤를 따를까. 영자는 탁자에 박은 장도의 자루를 잡았다.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싸늘하게 물었다.
“쉽게 말씀해주시지요. 장광설은 필요 없습니다. 도겸입니까, 노구입니까.”
소건은 의자 등받이에 바짝 몸을 붙인 채로 말했다.
“어찌 관군끼리 편을 가르나. 애초에 틀린 질문일세!”
“도겸은 도적 궐선과 결탁하여 백성의 적이 되기를 택했습니다. 백성의 적은 곧 천자의 적, 역적입니다. 그는 더 이상 관군이 아닙니다.”
“…중차대한 일이니 차후에 결정하세.”
졸렬한 보신주의자는 앉은 자리에서 결단을 내리는 법이 없다. 말을 빙빙 돌리면서 대담의 결과를 보류로 몰고 가려고 노력한다. 소건은 전형적인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영자는 두 개의 선택지만 들고 있었다. 동지 혹은 적. 영자에게는 물러설 이유가 없으니 앞으로 나아가며 소건을 압박하기만 했다. 그것은 상대의 기를 죽이는 데 탁월하지만 그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데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나는 소건과 영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낭야상, 이미 태산태수 응소님께서는 도겸에게 협조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뭐, 뭐라?”
살의 가득하던 영자의 눈빛이 다시 순진하게 바뀌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나는 말을 이었다.
“저희는 낭야에 오기 전에 태산에 들러 태수 응소님을 뵈었습니다. 장고를 거치긴 했지만 분명히 우리 측에 동조하시기로 했습니다.”
배불뚝이와 소건 같은 류의 인간들은 소위 대세를 따르기 마련이며, 자신이 주류에 편승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들은 스스로 결정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으며 항상 주변의 징후에 따라 움직인다. 더우면 옷을 벗고, 추우면 외투를 입는다. 주변이 갑하면 갑하고 을하면 을한다.
태산과 낭야는 이빨과 입술처럼 붙어 있다. 태산이 도겸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에 소건의 낯이 흙빛이 되었다. 도겸이 장패를 압도적으로 누르던 구도가 일거에 무너졌다.
소건의 생각에서 도겸은 절대 우위에서 근소 우위가 되었다. 이러면 따질 것이 또 많아진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양치기 개처럼 소건을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었다.
“태산의 성문이 닫혀 있으면 도겸은 길을 우회하여 낭야로 올 것입니다. 낭야상께서는 정녕 도겸과 궐선이 순수하게 황건 잔당을 토멸하기 위해 출병한 것 같습니까? 저들은 약탈을 위해 출병했습니다. 정세의 일단을 꿰고 계시는 낭야상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저희는 태산태수 응소님과 협력하여 태산을 그들의 마수로부터 지킬 것입니다. 낭야상께서는 손 놓고 저들에게 임지를 약탈당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낭야상의 지위도 위태롭게 할뿐더러 중앙조정의 문책이 따를 것입니다. 그때 낭야상께서는 뭐라 답하시겠습니까? 또한 아시겠지만 하비의 궐선은 문란하고 잔학한 자입니다. 그가 낭야를 장악하면 낭야는 환란에 빠질 터. 그 와중에 낭야상의 목숨이 온전하시겠습니까?”
이런 부류를 설득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신변의 안전을 들먹이는 것이다. 이들에게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어떻고, 무릇 군자란 어쩌고 하며 시작하는 말들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오로지 말을 듣지 않으면 신상에 위협이 발생할 것을 강조하면 된다. 벼슬을 뺏기고, 재물을 잃고, 종내 몸을 다치고 목숨을 앗기고. 그것만을 들먹이면 된다.
소건이라고 눈과 귀가 없는 자는 아니다. 도리어 보신주의자는 사방에 활짝 눈과 귀를 열고 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근방의 궐선이란 패거리가 어떤 성분인지 모르지 않을 것이고 장패를 북해로 내몰려하는 등 그 혐의가 아주 또렷하다. 말이 많던 소건은 입을 닫았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낭야상께서 우리의 제안을 거부하시면 도겸과 궐선은 낭야를 쑥밭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전에, 손관의 성마른 칼날이 소낭야를 해치고 말 것입니다.”
“……”
“그러니 노구의 편에 서서 백성을 지켜 명분과 일신의 안위를 모두 챙기십시오. 응태산과 소낭야, 노구가 연대한다면 도겸과 궐선도 쉽게 꺾지 못할 것이며 회남의 원술과 연주의 조조가 도겸의 목덜미를 노릴 것인즉, 도겸도 몽매한 자는 아니기에 물자를 강탈하기 위해 제 본거지를 오래 비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낭야와 태산은 온전히 보존될 것이고 도겸과 궐선이 앞으로 우리를 함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이곳 낭야에는 연주자사 조조의 부친인 조숭님이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부로 소문난 그의 물자를 도겸과 궐선이 가만히 두겠습니까? 만일 도겸이 조숭님을 약탈하면 조연주(조조)의 분노가 소낭야께도 미칠 것입니다. 소낭야께서 조연주를 당하겠습니까? 모로 보아도 소낭야가 우리와 결탁하지 않을 까닭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스스로의 언변에 감탄하며 쉬지 않고 쏘았다.
“우리는 소낭야를 보위하기 위해 일천의 병력을 이끌고 왔습니다. 소낭야께서 우리와 맺는다면 일천의 병력을 거현에 주둔시키겠습니다. 우리와 낭야국의 병력을 합쳐 두터운 성벽에 의지한다면 도겸이 무슨 수로 낭야를 꺾겠습니까.”
어안이 벙벙하던 영자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한 마디를 얹었다.
“이 손관, 비록 변변하지 못한 솜씨이나 수성에는 자신 있으니 우리를 신뢰하고 도겸을 저지합시다, 소낭야.”
이제 칼자루는 우리가 쥐었다. 소건은 말이 없었다. 주먹만 쥐었다 폈다 하며 메마른 혀로 입술을 쓸었다. 시선 둘 곳이 없어 동공은 불안하게 떨렸다. 장시간 소건이 침묵을 견지하자 나는 이죽거렸다.
“낭야상, 주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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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열전 5. 응소(?~?)
여남 사람으로, 박학다식하여 여러 편의 저술을 남겼다. 태산태수에 임명되어 191년 황건적의 30만 대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으며, 194년 도겸의 수하가 태산에서 조조의 부친인 조숭을 죽이는 바람에 후환이 두려워 원소에게로 도망갔다. 조조가 원소를 정벌하기 전에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