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66
0169 / 0284 ———————————————-
21. 비 내리는 호남선(湖南船)
유표가 죽었다. 권력자다운 말로라는 것이, 그는 끅끅거리며 죽음으로 향하는 길목에 놓인 고통을 감당하면서도 후계자를 명백히 지명했다. 그는 가신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분명히 말했다.
“후계는… 유기가……”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헐떡이다가 끝내 호흡을 멈췄다. 이미 예정된 죽음에 식솔과 가신들은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다만 침묵을 지키며 몸가짐을 정중히 했다. 채모는 내심 유표가 혼곤한 잠에 빠진 듯 죽어버렸으면 바랐지만 그의 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만일 유표가 후계지명을 명확히 하지 않고 죽는다면, 채모로서는 호재로 작용할 수 있는 까닭이었다. 물론 유표의 적장자인 유기가 뒤를 잇는 것은 당연해도 그의 정통성에 큰 흠집을 낼 수 있었다. 게다가 유표의 조카인 유반 또한 지닌 야심이 가볍지 않아서, 채모가 유반을 부채질한다면 정국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유표는 후계를 분명히 유기로 지목했다.
유기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부친의 영전에 절을 올렸다. 유기는 스스로 남군왕과 형주자사를 잇겠다고 선언하고, 천자에게 사신을 보내 윤허를 청했다.
“작고하신 부왕께서는 필마단기로 형주에 뛰어들어 조정에 반하는 무리들을 토평하고 형주를 대한의 십삼 주 중 으뜸으로 세우셨소이다. 또한 제갈찬과 더불어 송경의 천자를 옹립하고 군왕의 위에 오르셨으니 그 찬란한 위업을 어찌 말로 다 하겠소. 나는 비록 미욱하나 부왕께서 나를 후계로 지목하셨고, 능력은 미치지 못할지 모르나 어진 정치에 대한 마음은 누구보다도 지극하니 부디 여러분은 나를 도와 형주를 넘어 천하에 부왕의 향기가 널리 퍼지도록 해주시오.”
채모는 속으로 복종하지는 않았으나 몸을 바짝 깔면서 유기의 당부에 호응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유기는 유반을 필두로 한 오만의 병력을 그대로 시상에 주둔시키도록 했다. 그도 부왕 유표의 의중을 잘 짐작해냈다. 유기가 비록 유표의 측근세력을 의지하고 있다고 하지만, 유기가 말했듯 형주를 장악한 것은 오로지 유표의 개인기에 의한 것이었다. 유표가 형주의 패권을 장악하고 그 측근들에게 콩고물을 나누어주었지만 그것은 엄연한 한계가 있었다. 유표는 형주의 유력호족인 채씨, 괴씨와 결탁하고 형주의 권력을 양분해왔다. 그러던 차에 유표가 죽었다. 유기가 유표의 자리를 이었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리일 뿐, 유표의 위엄을 잇지는 못했다. 당장 유기가 채모를 이긴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향후 형주의 권력추가 어디로 기울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특히 명망가인데다가 전술적인 안목을 갖춘 채모의 채씨, 지모와 내정에서 빼어난 기량을 보이는 괴량과 괴월이 있는 호족세력에 비하여 유기는 기껏해야 유표의 일가붙이들이나 장군 문빙 정도가 고작이니, 유기의 속에서는 불안감이 좀체 가시지 않았다.
유표의 측근이자 중신인 형주별가 유합은 유기의 그러한 마음을 잘 알았다. 그는 남군왕 즉위를 선언한 후 유기의 뒤를 따랐다.
“단독으로 채씨와 괴씨에 맞서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연대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그렇지요.”
유기는 유합을 흘끗 바라봤다. 무슨 복안이라도 있느냐는 뜻이었다. 유합은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진언했다.
“평서장군 장제와 연대하시지요.”
“장제는 채모를 도와 장안을 점령했던 인물, 과연 그가 채모를 버리고 우리에게 협력하겠습니까.”
“채모에게 줄을 서봤자 좋을 게 없거든요. 채씨는 장안 일대를 제 영지처럼 부리고 있습니다. 장제의 근거와 지척이지요. 채씨는 장안을 쥐고 나아가 형주를 쥐려고 하는 것입니다. 장제가 채모를 도와 용케 형주의 패권을 얻는다 한들 그에게 떨어질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도와 채씨를 축출한다면? 그는 무주공산이 된 장안을 거머쥐려는 계산을 할 수 있습니다.”
유기는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장안을 장제 따위에게 줄 마음은 없소만.”
유합은 옅은 웃음기를 머금었다.
“저도 그런 순수한 호구가 되시라 진언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토사구팽이야 권력자의 유구한 전통이니까요. 급한 불부터 끄고 보셔야지요.”
유기도 유합을 따라 웃었다.
“옳거니.”
장제는 형주별가 유합을 맞이했다. 둘은 한참 환담했다. 유합은 가벼운 표정으로 양양으로 돌아갔다. 유합이 돌아가고 장제가 가후를 불렀다. 장제가 입을 떼기도 전에 가후는 이미 웃고 있었다. 김 샜다는 표정으로 장제가 툴툴거렸다.
“재미없구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야 자네가 그런 건방진 웃음을 거두고 호들갑을 떨까?”
가후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제가 호들갑을 떨게 되면 주공의 신변에 중대한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니 그다지 바라실 일은 아닙니다.”
“이젠 협박까지.”
“유기가 연대를 제안했지요?”
장제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남양군공으로 삼고 평서장군에서 진서장군으로 올려주겠대. 차후 장안태수 채모를 몰아내고 나더러 관서를 얻으라는군.”
“줄 마음도 없으면서 선심 쓰는 척 하기는.”
장제는 혓바닥으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정치가 다 그런 거지 뭐.”
“이것으로 월동을 위한 외투는 얻었습니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턱 주변을 쿡쿡 찔렀다.
“볕 좋아지면 벗어버리지요.”
시영과 함께 자택의 뒤뜰을 거닐고 있던 때였다. 모처럼 공기가 좋아서 산책하기 제격인 날씨였다. 시끄러운 잔소리꾼들이 모두 접경지대로 가고 없으니 살 만했다. 앞뜰의 예쁘게 생긴 잡초를 뜯어다가 내 멋대로 이름을 붙여 시영에게 허풍을 떨며 나의 지적허영심과 남편으로서의 권위를 세워보려고 애를 쓰던 차였다.
“어어, 이건 배불뚝이오줌풀이라는 건데……”
내가 배불뚝이오줌풀(실은 잡초)에 얽힌 말도 안 되는 유래를 한편의 대서사시를 읊조리듯 웅장한 목소리로 떠벌리려는데, 좨주 노숙이 앞뜰을 찾아와 급히 내 앞에 섰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때를 못 맞춘 노숙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남군왕 유표가 사망, 장남 유기가 후사를 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죽었군. 시상에서는 별 다른 동향이 없습니까?”
“철병하지 않고 내내 버티고 있답니다.”
“언제까지 버티려는지. 쌀 아까워 죽겠네.”
“다른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노숙은 나를 보고 히죽 웃었다.
“좋은 시간 보내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다 알고 있으면서 가증스럽게 예의 차리는 척 하기는! 나는 입술을 한 번 삐죽거리는 것으로 가볍게 항의했다. 그래도 후에 노숙의 내방이 아주 적절한 때였다는 것을 통감했다. 시영은 화초를 좋아해서 따로 화초도감을 만들어서 편찬하려는 원대한 계획까지 지닌 식물학도였다. 배불뚝이오줌풀이라니, 속으로 지랄한다고 비웃고 있었겠다.
노숙이 돌아가고 나는 헛기침을 하며 계속 산책하려는데, 노숙이 다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아, 왜 또!
“한 가지 빠트린 소식이 있습니다.”
나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천자께서 여강태수에게 용선 한 척과 노군 삼십, 궁녀 열을 하사하셨다는군요.”
“뭐, 뭐라고요?”
왜 하필 유훈에게? 예사 선박도 아니고 용선이면 천자로서도 상당한 비용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용은 천자의 상징, 일개 태수에게 그런 과분한 선물을 해줄 이유를 몰랐다. 아니, 차라리 나한테 줬으면 몰라!
“궁녀도 열 명이나 내렸다고요?”
내가 재차 확인하자 노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려 열 명.”
“와, 좋겠다……”
나는 무의식중에 자해성 발언을 입에 담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노숙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시영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아, 그래요. 여강태수는 참 좋겠네요.”
싸늘하다. 시영의 눈빛이 비수가 돼서 가슴에 날아와 박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나는 애교 섞인 눈빛을 하면서 시영의 허리를 감쌌는데, 시영은 매몰차게 그것을 뿌리쳤다.
“앞으로 사흘 간 각방이에요.”
그녀는 나를 놔두고 쌩하니 자택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낭패를 당해 정신이 쑥밭이 되어 있었고, 노숙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흘 후에 원 부인과 함께 여강으로 가시지요.”
심란해 죽겠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나는 얼굴을 구기고 물었다.
“여강을 왜 가요.”
“여강태수 유 공을 안 본 지 꽤 되지 않았습니까. 용선을 하사받고 노군에 궁녀까지 얻었으니 얼마나 기고만장하겠습니까. 주제를 모르고 날뛸 염려가 있으니 상관이 누군지 확실히 알려주셔야지요.”
“이 시점에서요? 너무 쩨쩨하게 보일 텐데.”
노숙은 고개를 저었다.
“아, 그것이 정치적 경륜이죠.”
“부인의 마음도 풀어줄 겸?”
노숙은 눈을 찡긋했다.
“그렇죠. 겸사겸사. 또한 유기를 압박할 겸해서.”
“지금은 별로 움직이고 싶지는 않은데……”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지금이 적기입니다. 바로 여강으로 움직이시죠.”
나는 노숙을 쏘아봤다.
“아, 싫다니까요!”
“가셔야 합니다, 합비공.”
“요즘은 대체 내가 당신들 주인이 맞는 건지 모르겠네요. 순 당신들 맘대로야.”
노숙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군주를 올바른 말로 간언하는 것이 신하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내가 여강으로 가서 부인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하면 그대 책임입니다. 바로 잘라버릴 줄 아세요.”
노숙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제 판단이 틀렸다기보다는 합비공의 여자 다루는 재간이 영 별로라는……”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흰소리 그만하고 여강으로 갈 채비나 해요!”
유훈은 풍악을 울리며 어깨춤을 추었다. 그의 춤사위처럼 거대한 용선은 호수 위에서 출렁거렸다. 팔자 한번 제대로 늘어졌다. 온 산을 울긋불긋 물들인 단풍은 사나이로 하여금 화조풍월을 누리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유훈은 왼쪽에는 부인 교씨를 끼고 오른쪽에는 열 명의 궁녀 중 가장 나은 치를 끼고 술을 마셨다. 힘 좋은 노군들은 열심히 노를 저어 유훈이 시원한 추풍을 한껏 느끼도록 했다.
“어, 좋다. 술 좋고 경치 좋고 여자 좋고 날씨 좋고 다 좋다!”
유훈은 얼굴이 단풍만큼 불콰하게 달아올랐다.
“어이, 너! 노래 한 가락 뽑아봐라.”
그의 명령에 궁녀는 아리따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남산에 잔디 있고
북산에 명아주 있네
즐거워라 군자여, 나라의 기본이다.
남산에 뽕나무 있고
북산에 버드나무 있네
즐거워라 군자여, 나라의 빛이시다.
즐거워라 군자여, 만수무강 하소서!
============================ 작품 후기 ============================
리코멘은 사정 상 추후에 작성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