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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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비 내리는 호남선(湖南船)
주먹밥을 먹던 병사들이 멀뚱히 앉아 백의(白衣)의 단기필마를 바라보았다. 나도 높은 곳에 앉아 그들과 같은 곳에 시선을 보냈다. 무려 이십만 개의 눈알이 한 사람을 주시했다. 사내를 태운 말은 아군의 군문에서 저지당했다. 말 위의 사내가 무어라 말하자 군문의 장교는 더 안쪽의 군문을 지키는 제 상관에게 보고했고, 그는 다시 더 안쪽의 상관에게, 그는 다시 더 안쪽의 상관에게, 아아, 비효율적인 관료주의의 비극이여. 나는 가장 높은 곳에 앉아 군문의 소식을 기다렸다. 군문의 소식은 군문 장교의 상관의 상관의 상관의 상관의 상관이 좨주 노숙을 거쳐 그 상관인 나에게 마침내 도달했다. 이상 오감도 제2호가 떠오르는 골계미적 아침이다.
“합비후께 보고 드립니다.”
노숙이 특유의 느린 말투로 운을 떼자 갑갑증이 확 올랐다. 아니, 저 인간 일부러 느리게 말하는 걸지도 몰라.
“빨리 말해주세요. 현기증 날 거 같아.”
“역적 유기가 친히 합비공의 앞으로 나서 항복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나는 귓구멍을 후비적거리고 다시 물었다.
“잘못 들었습니다?”
노숙은 목소리에 힘을 주고 다시 반복했다.
“유기가 항복하겠답니다!”
“오, 이런. 잘못 들은 게 아니었잖아.”
나는 정면을 바라보고 멍청한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노숙을 바라봤다.
“대체 왜?”
노숙은 낸들 알겠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노숙에게 명했다.
“제장을 모두 불러주세요. 항복하겠다는데 만나는 줘야지.”
“존명.”
적의 수괴가 투항을 한답시고 제법 장중하고 삼엄한 분위기가 진중에 깔렸다. 진의 한가운데 천막이 둘러지고, 대장군부의 깃발과 태위부의 깃발이 나란히 펄럭였다. 대장군 합비공의 자리를 가운데 상석으로 하여 좌우로 기라성 같은 대장군부와 태위부의 무장, 문사들이 배석했다. 태위 온후 여포, 대장군부 좨주 노숙, 중부교위 손관, 화평교위 감녕, 북부교위 왕수, 서부교위 좌자, 동부교위 허저, 남부교위 진도, 대장군부 장사 주환, 북부사마 서성, 늠가연사 제갈량, 항장 채모와 괴월, 그리고 인질 가후. 그 면면이 압도적인 틈바구니에 아기 새처럼 애처로운 유기가 날아들었다.
흰옷을 입은 유기는 흰 깃발을 천막 밖에 꽂고, 안으로 들어와 대장군부와 태위부의 깃발을 향해 절을 올렸다. 그러한 채로 한참이 지난 후에 내가 천막의 안으로 들어왔다. 제장이 일어나 예를 갖췄고, 내가 착석하자 그들도 다시 착석했다.
나는 말없이 유기를 내려다봤다. 마음이 괜히 편하지 못하여 똑바로 보지 못했다. 한동안 그를 비스듬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죄인은 고개를 들라.”
일평생 죄인이라 불려본 적 없을 죄인은 내 말대로 고개를 들었다. 초연한 표정이어서 더 안쓰러웠다. 나는 내 안쓰러움을 숨기고 목소리를 더욱 날카롭게 벼렸다.
“너는 황망하게도 천자의 총신을 호수의 깊은 바닥에 가라앉혀 참살하였다. 그 죄가 바로 보기 힘들 만큼 무겁다. 사독하고 무람없다. 헌데 오늘에 이르러 갑자기 이렇듯 예의를 차리는 까닭은 무엇이냐. 참으로 역겹도다.”
유기는 나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죄인이 합비공의 존안을 뵙습니다. 마디마다 옳은 말씀이라 죄인이 항변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오늘에 이르러 합비공께 예를 올리는 것은, 늦게나마 죄인이 큰 죄를 깨닫고 하루라도 빨리 그 값을 치르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군더더기가 없는 답변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유기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이었다.
칼을 들어 목을 칠 테면 치고, 목에 새끼줄을 걸어 교수(絞首)하려거든 그리하라는 표정이었다. 책(磔, 기둥에 묶어 창으로 찔러 죽임)은 가혹하나 내 그것도 감당할 것이요, 거열(車裂, 수레에 사지를 묶어 찢어 죽임)은 참으로 매정하고 독하나 그것마저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표정이었다. 육신이 죽은 다음에는 수급에 침을 뱉든 자른 몸뚱이를 국 끓여 먹든 관계없으니 뜻대로 하라는 표정이었다.
“으음……”
내가 낮게 신음하는 것을 량이가 포착했다.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강도 높게 발언했다.
“합비공! 죄인 유기의 죄는 너무나도 커서 참작의 여지가 없나이다! 지금 죄를 뉘우치는 척 하나 이는 합비공의 병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음을 알고 일말의 자비심을 취하고자 하는 삿된 꾀일 뿐입니다! 만일 죄인이 죄를 깨달았다면 진즉 송경으로 스스로 출두하여 소상히 죄를 밝히고 형벌을 청했어야 합니다. 지금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은 너무나도 가증스럽습니다! 엄격히 형률을 적용하십시오!”
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찌도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느냐. 네가 유훈을 호수의 깊은 곳으로 빠뜨렸잖아. 유기를 책략의 마수로 옭아맸잖아. 너의 책략을 허물잡고 싶지는 않지만 너의 매정함은 그야말로 매정하구나. 량이는 내게서 시선을 거둬들이고 목을 꼿꼿이 세웠다. 결단하십시오. 그것이 형님이 감당해야할 냉정의 형옥(刑獄)입니다.
북부교위 왕수가 말을 보탰다.
“결단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합비공.”
여포는 팔짱을 낀 채로 내게 말했다.
“대장군부의 령으로 처단하는 것이 꺼려지시거든 태위부로 이첩하십시오! 태위부에서 즉각 처리하겠습니다!”
좌자는 일절 조언을 하지 않은 채 내 쪽을 보고 비죽비죽 웃기만 했다. 얄미운 노인네 같으니.
나는 왕수와 여포를 차례대로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의 유기를 바라봤다. 유기의 눈은 초점이 흐렸다.
“죄인에게 묻겠다.”
“하문하십시오.”
“네가 이렇듯 스스로 죄를 청하여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너는 헛된 희망을 안고 온 것이냐?”
“그럴 리가 있습니까. 마땅히 죽을 것입니다.”
“허면 어째서 끝까지 항전하지 않았느냐.”
“죄인의 목숨을 며칠 유예시키자고 더 많은 목숨을 묻을 수 없었습니다.”
“……”
량이가 나를 다시 매섭게 채찍질했다.
“합비공! 천자께서 역적으로 선포한 죄인입니다. 벌하지 않으면 합비공께서 죄인이 되십니다!”
왕수가 말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인지상정(人之常政)을 흩뜨리지 마십시오.”
그동안 입을 닫고 있던 채모와 괴월이 입을 열었다.
“만일 유기를 벌하지 않으시면 도리어 소인들이 죄인이 되고 맙니다. 부디 질서를 해치지 마시고 역적 유기를 벌하시옵소서.”
유기는 채모와 괴월 쪽을 바라보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나는 유기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죄인 유기는 들어라.”
유기는 땅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알은체를 했다.
“너는 천인공노할 대죄인이다. 천자의 용선과 궁녀를 해치고, 더불어 전에 없는 총신 유훈을 살해하였다. 그 죄는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으리라. 또한 천자께서 직접 너를 역적으로 선포하시니 더욱 그 죗값을 갚을 길이 없다.”
나는 좌우의 제장을 바라보고 다시 유기 쪽에 시선을 박았다. 나도 모르게 짧은 숨이 토해졌다.
“그러나.”
내가 역접으로 운을 떼자 좌우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나는 옷자락을 꼭 쥐었다.
“그러나 죄인이 스스로 그 죄를 깨닫고 홀로 흰옷을 입고 엎드려 얌전히 대죄하니 그 또한 불민한 와중에 갸륵한 일이다.”
말석의 량이가 다 들리도록 탄식했다.
“오, 제발.”
왕수의 옆에 배석한 가후는 재미난 유희라도 관람하는 듯 눈깔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시시덕거렸다.
“죄인이 스스로 대죄하는 터, 형주의 숱한 병사들과 백성들의 목숨이 보존되었도다. 비록 죄인이나 쉽지 않은 결단이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제 죄를 변명치 아니하고 모든 형벌을 마다하지 않겠다 하였으니 그 또한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증좌가 분명하다.”
량이가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엎드렸다.
“늠가연사 제갈량! 목숨을 걸고 간언 드립니다! 일말의 자비를 베풀지 마시고 당장 역적 유기의 목을 치십시오!”
나는 그를 노려보며 물리쳤다.
“대장군이 논죄(論罪)하고 있다.”
“합비공!”
“물러나라.”
량이는 내 말을 더 거스르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채모와 괴월은 낭패감으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내 옆의 육의는 긴장한 표정으로 숨소리마저 제대로 내지 못했다. 여포는 덤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수는 간언을 포기한 듯 좋을 대로 해보라는 표정이었고, 허저는 애먼 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영자는 내 처분이 흡족스러운 눈치였고, 감녕을 비롯한 대개의 무장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따르겠다는 얼굴들이었다. 좌자는, 이런 젠장, 다리나 떨고 있어?
나는 량이를 물리치고 다시 말했다.
“죄인을 마땅히 극형으로 처단해야함이 옳으나, 이러한 사안을 참작하여 목숨만은 부지토록 하겠다. 죄인은 당장 양양에서 축출하고 벽지에 유폐하도록 하며, 그 누구의 면회도 금지한다. 죄인의 가신들은 어리석은 탓에 죄인에 부역했을 따름이므로 그 우치(愚癡)의 죄만을 묻되, 천자께 대한 반역의 죄는 적용하지 않겠다.”
나는 말의 끝을 무겁게 맺었다.
“이상이 대장군의 논죄다. 반론은 허락하지 않겠다.”
량이가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외쳤다.
“반론을 받으십시오, 합비공!”
내가 무어라 쏘아붙이기 전에 태위 여포가 일어나 내 쪽을 바라봤다. 그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큰 소리로 량이의 목소리를 덮어버렸다.
“태위 여포! 합비공의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여포의 선창에 좌우의 가신들이 모두 일어나 내게 허리를 꺾었다.
“합비공의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아으, 진짜……!”
량이는 뒤통수를 벅벅 긁다가 하는 수 없이 건성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숙여진 고개들을 등지고 천막의 밖으로 걸어 나왔다. 말은 단호하게 뱉었으나 마음은 한없는 수렁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차피 사람 목숨 한 개다. 사람 목숨 한 개를 가엾이 여기기에는 양양에 묻은 이름 없는 목숨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유기를 이 자리에서 처단한다면 천자의 역적토멸의 칙명을 완수하는 것이요, 형주 유씨의 명맥을 완전히 끊어내는 것이요, 여강의 인심을 완전하게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유기의 목숨을 거두지 못한 것은, 계략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휘말려 궁지까지 몰리다가, 끝내 갈 곳을 잃고 적진으로 스스로 표류해올 지경에 이른 유기 그 자체가 가련한 까닭이 첫째였고 그가 스스로의 목숨을 부수어서 형주의 성벽을 온존하고 그 안의 사람들을 온존하게 하려는 생각이 갸륵한 것이 둘째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것은 위정자이며 난세의 전국제후가 품기에는 지나치게 말랑말랑한 생각이니, 나를 납득시키기 위하여 몇 가지 구실을 찾아보았다. 첫째, 형주 유씨는 채씨와 괴씨 위에 있는 형주의 주가(主家)다. 유씨가 비록 역적으로 지목되었다지만 지목의 주체는 전국적인 권위를 획득하지 못한 천자, 형주의 백성들에겐 도리어 형주 유씨가 황가(皇家)였다. 그런 유기의 목을 내가 베어버린다면 형주의 인심을 잃을 염려가 있었다. 둘째, 유기의 밑에는 유반, 문빙, 황충 같은 용맹한 장수들과 출중한 선비들이 많다. 유기의 목이 베어지면 그들과의 인연도 영영 베어지고 마는 터. 그럴 수는 없었다.
“천자를 등지시려고요?”
내 등을 향해 가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누군가를 등지고자 하지 않소. 다만 화평을 향하고자 할 뿐이오.”
가후는 씩 웃었다.
“유기를 구명한 것이 과연 화평의 방책이 될까요.”
“나는 내 가신들에게도 이론을 허용하지 않았소. 하물며 인질 따위에야. 그냥 닥치고 계시는 게 좋겠소.”
내 겁박쯤에 가후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아뇨, 거창하게 이론씩이야…… 재밌어서요. 그냥 죽여버리면 편할 텐데, 합비공은 편한 길을 가지 않으니까 그냥 재밌어서 그랬습니다. 뭐, 닥치라 하시니, 닥치지요!”
가후는 건들거리면서 나를 지나쳐갔다. 감시역인 왕수가 급히 그를 따라갔다.
우리는 유기를 앞세워 양양의 전 병력을 무장해제 시키고, 천 명의 단위로 끊어 격리했다. 수만을 헤아리는 적이 재무장하고 단결하여 우리를 급습한다면 도리어 말리는 쪽은 우리니까. 유기의 결단에 양양의 무장들도 순응하기로 했는지, 나의 입성을 고분고분 맞이했다.
유반은 꼿꼿한 자세로 나를 맞이했다.
“장군 유반이오. 투항하겠소.”
“음.”
그와 더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신변보장을 약조했고, 유반은 양양성을 비롯한 형주 전역에서의 영유권을 포기하겠다고 약조했다. 나는 양양의 무장들과 문사들을 모아놓고 선언했다.
“그대들은 죄인이 아니오. 다만 형주 유씨가 물러나고 합비 제갈씨가 들어왔을 뿐이오. 그대들은 자유인이오. 임관하고 싶으면 임관하고, 물러나고 싶으면 물러나면 되오. 오래 밀고 당길 말들이 내게 남지 않았소이다.”
건조한 선언을 양양의 사람들은 그대로 따랐다. 벌이가 아쉽고 야망이 있는 자들은 그대로 관직에 남기를 바랐고, 형주 유씨에 대한 충성이 깊은 자들은 떠나기를 바랐다. 나는 그들이 어찌하든 그 뜻을 존중했지만, 단 두 사람에 대해서는 존중할 생각이 없었다. 내 맘대로 할 작정이었다.
장군 문빙과 중랑장 황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