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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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비 내리는 호남선(湖南船)
“패장은 말이 없는 법인데, 지체 높은 어른께서 찾으실 까닭이 무엇입니까.”
황충의 목소리는 가라앉아있었다. 그는 당면한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터였다. 나에게 투항하는 것은 유기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을 테니까. 황충 또한 승리보다는 패배를 염두에 두고 싸움에 임했을 테지만, 이런 류의 무장들은 투항하여 구차히 목숨을 건지는 것보다 비장한 전사(戰死)를 명예롭게 여긴다. 그는 견디지 못할 치욕을 가까스로 감내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점령군의 수뇌가 자신을 소환하는 것은 퍽 불쾌한 일이었다.
“그대와 독대를 하는 중이니 내 쓸모없는 가식일랑 벗으리다.”
내 말에 황충도 찬동했다.
“그러는 편이 말씀하시는 데 쉬울 것입니다.”
나는 황충의 앞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유기는 기실 반역자가 아니오. 명분도 창조된 것에 지나지 않거니와, 기실 명분을 창조해낸 천자라는 사람도, 합비공이라는 사람도 그 만한 주제가 못 되는 사람들이오.”
황충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솔직하시군요.”
“그러나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것은, 결국 유기는 패배했고 나는 승리했다는 것이오.”
황충의 눈에서 결기가 뿜어졌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승자의 아량으로써 유기를 죽이지 않을 것이오.”
황충은 입술을 비틀었다.
“아량이라 말하지 마십시오. 주군을 죽이지 않으신 것은 승자의 아량이 아니라 승자의 계산일 뿐입니다.”
“굳이 그렇게 이름 붙이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소.”
황충은 픽 웃고 말았다. 나는 메마른 아랫입술을 혀로 적시며 말을 이었다.
“내가 유기를 죽이지 않은 것은, 첫째로는 내 마음이 내키지 않은 까닭이었소.”
“난세를 누리기에 퍽 유약한 마음이시군요.”
“둘째로는, 바로 그대를 얻기 위함이오.”
흔들림 없던 황충의 얼굴에 잠깐의 경련이 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의 주군을 해치게 된다면 나는 그대를 비롯한 형주의 양장과 재사를 얻지 못할 것이오. 궁지에 몰린 데까지 유기에 대한 충정을 버리지 않은 자들이야말로 양장, 재사니까.”
황충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기를 베지 않은 것만으로 그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물론입니다.”
“그래서 묻겠소. 그대가 지닌 무(武)의 종착이 무엇이오.”
황충은 허공을 향해 세 번 웃고 답했다.
“그것을 대답하면, 합비공이 이 황충의 비원을 이룩해줄 수 있습니까?”
“가능하리라 생각하오.”
황충은 삐딱한 자세로 앉았다.
“그렇다면 말씀해드리지요. 이 황충의 비원은 바로 형주 유씨의 조정을 세우는 것입니다!”
좋소! 내가 이뤄드리리다! 준비했던 내 대답은 한 점의 눈이 화로에 내려앉듯 사라져버렸다. 내가 입술을 떼지 못하자 황충이 다시 말했다.
“그것은 죽어도 안 되시겠지요. 그럼 다시 말씀드리리다. 내 두 번째 비원은 내 주군을 몰락시킨 천자의 수급을 따는 것이외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침묵을 견지하자 황충이 다시 말했다.
“이것도 안 되시겠지요. 그럼 또 말씀드릴까요? 내 세 번째 비원은 천자에 부역하여 내 주군을 몰락시킨 바로 당신, 합비공의 수급을 따는 것이오!”
황충은 그렇게 말하고 나에게 냅다 달려들어 내 목을 움켜쥐었다. 무지막지한 악력이 내 숨통을 짓눌렀다. 나는 그 힘에 그대로 고꾸라져 맹수에 덮쳐진 초식동물의 꼴이 되고 말았다. 좌우의 근위들이 달려들어 황충을 치려는 것을 내가 손을 휘적거리며 막았다.
“안 된다! 그대로 두어라!”
황충은 맹수의 안광을 뿌리며 나를 노려봤다. 이를 갈며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발음했다.
“어떻소, 당신의 목을 내놓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무덤 앞에 세 번 절하고 당신의 뜻대로 하리다!”
나는 입술을 악물고 황충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내 가녀린 손목을 들어 내 목을 짓누르는 황충의 손아귀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것 좀 놓으시오. 놔야 대답을 하든 말든 하지!”
“좋습니다!”
황충은 꽉 쥐었던 내 숨통을 풀어주었다. 창백했던 혈색이 다시 돌아오고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괴팍한 성정이시군.”
“누구처럼 흉계를 쓰지 못하는 자가 이기려면 괴팍해지는 수밖에 없거든요.”
“미안하지만 세 번째 비원도 들어줄 수는 없겠소. 네 번째는 없소?”
황충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번째, 있지요. 이 황충이 형주 유씨를 위해 더 쓰지 못하는 헌 칼이 되었을 때 스스로 버려지기를 바랍니다. 내 칼로 내 목을 찔러 자결하길 바랍니다. 그것이 이 황충의 네 번째 비원이올시다.”
나는 그의 앞에 정좌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대의 무가 필요하오. 나를 도와주시오.”
“그럴 수 없습니다.”
“허면 나를 지켜봐주시오.”
황충의 눈썹이 올라갔다.
“무엇을 지켜보란 말씀입니까.”
“내 옆에서 칼을 차고 다니시오. 내가 참으로 불민한 자이거든, 지체 없이 칼을 빼들어 나를 찌르고 그 연후에 스스로 그대를 찔러 세 번째 비원과 네 번째 비원을 한꺼번에 이루시오. 허나 내가 참으로 도울 만한 자이거든, 나를 도와주시구려.”
“객장이 되라는 말씀입니까?”
“객장이든, 아니면 손관의 무예사범이든 명목은 관계없소.”
떠들썩한 소동에 부랴부랴 달려온 영자를 흘끗 보고 한 말이었다. 그 말에 영자는 주먹을 저으며 강력히 항의했다.
“저 영감한테서 배울 거 없어!”
“배울 것이 없기는 왜 없느냐!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줘야겠다.”
황충은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공후의 옆에서 칼을 차고 언제든 공후의 목숨을 앗을 수 있는 무장이라. 다섯 째 비원으로 나쁘지 않군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추후에도 절대 제 주군을 해치지 마십시오. 또한 벽지에 유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모자라지 않은 세간은 유지하게 해주십시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조하겠소. 유기는 양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폐하되, 넓은 저택을 새로 짓고 시비들도 들이겠소.”
“패전지장은 말이 없다고 하였는데 하도 떠들어서 입이 아픕니다. 이제 쉬게 해주십시오.”
나는 그의 원대로 해주었다. 유기를 양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둔 것은 내 정치적 포석도 깔린 것이었다. 채모와 괴월에게 분명한 공이 있는 이상, 형주 일대에는 어느 정도 채씨와 괴씨의 영향력이 유지될 터다. 내가 갓 형주에 발을 들인 상태에서 자칫하면 그들에게 휘둘릴 염려가 있는 터, 유기를 멀지 않은 곳에 두어 형주 유씨의 세력을 형태라도 갖추게 두는 것이 좋았다. 그 둘의 긴장관계 속에서 천천히 형주를 제갈씨로 물들일 것이었다.
황충은 문빙과 유반을 설득하여 나를 돕도록 하게 했다. 내가 유기를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퍽 충격이었다. 또한 유기를 겉으로는 힐난해도 안으로는 섭섭하지 않게 대우하니, 그들은 배신자인 채모와 괴월을 더 미워하였다. 그들이 형주에서 활개 치는 것을 방조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에게 협조하려 했다.
“채 공과 괴 공 덕분에 형주 병탄이 수월하게 이뤄졌소. 감사드리오.”
내가 감사를 표하자 채모가 고개를 숙여 겸양을 떨었다.
“아닙니다. 마땅히 도울 일을 도왔을 뿐입니다.”
“유기의 일은 양해를 구하겠소. 가신들도 왕왕 따지고 드는 일이지만 내 결단이니.”
이에 괴월이 난색을 표했다.
“저희의 입장이 퍽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승자의 자비심을 베풀어주시구려.”
“유기의 입김이 양양 쪽에 불지는 않게 해주십시오.”
“내 그것은 약조하리다.”
“그러면 우선은 믿고 따르겠습니다.”
“고맙소.”
나와 채씨, 괴씨 사이의 얘기가 마무리될 즈음, 좨주 노숙이 나를 찾았다. 나는 그것을 핑계 삼아 자리를 떴다.
“환성에서 원 부인으로부터 연통이 왔습니다.”
“어인 일로?”
“긴히 전할 말씀이 있으니 양양에서의 일이 맺어지는 대로 환성에서 뵙기를 바란다는 전언입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한다고 결론이 날 문제는 아니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음, 알겠습니다.”
양양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언제 왕귀호로새끼가 내 뒤통수를 갈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께 형남 사군을 맡겼지만 형북까지 맡길 수는 없어서, 나는 적당한 대리인을 양양에 주둔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채씨와 괴씨를 조율하면서 유반, 문빙, 황충을 다스릴 수 있을 정도의 무게감을 갖춘 자여야만 했다. 가신들을 불러 모아 의논을 했고, 의논 끝에 후보군이 좁혀졌다.
태위 여포
대장군부 좨주 노숙
북부교위 왕수가 그들이었다.
실력과 권위로 따지자면 여포가 옳았다. 그러나 군략뿐만 아니라 주변을 잘 조율할 수 있는 정치적인 능력은 다소 부족했다. 막무가내로 위압하다가는 여러 세력이 모여 있는 형주가 곪아터질 수도 있는 노릇. 그럼에도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위엄은 지닌 자라, 여포 쪽으로 중지가 모아진다면 그것을 거스를 생각은 아니었다.
“설마 태위더러 지방관 노릇을 하라는 건 아니시겠지요?”
여포의 그 한 마디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기실 나를 배려한 처사였다. 사실 여포가 지방군벌로 군림하는 것은 나로서도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동오에는 형님 제갈근을, 형남에는 아버지 제갈현을 한사코 책임자로 두었다. 나와 동급의 위상을 지닌 여포가 병력이 많고 땅이 기름진 형북을 얻는 것은 유사시에 세력이 둘로 쪼개질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을 내내 안고 가야 하는 일이었다. 여포 또한 이를 잘 알기에 단칼에 이를 거절했다.
이제 남은 것은 노숙과 왕수였는데, 가신들의 중지는 노숙 쪽으로 모였다. 노숙은 부드러운 인망을 갖췄으면서도 훌륭한 지략 또한 갖춘 걸물이었으며, 내가 원술의 세력에 몸 담았을 때부터 뜻을 맞춰온 합비군의 고참이었다. 왕수 또한 임관한 지는 꽤 되었지만 본디 성정이 남의 딴죽 거는 걸 좋아해도 일을 떠맡는 것은 체질적으로 꺼려했다.
“그러면, 좨주께 무거운 소임을 맡기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합비공의 뜻을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노숙의 손을 꼭 잡았다.
유기는 양양에서는 달구지에 실려 압송되었지만, 나의 특명으로 세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나서는 말을 타고 유배지에 갔다. 병사 오백을 두어 그를 지키게 하고 의식주는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그러나 외인의 출입은 엄히 금했다. 유기는 내 처분을 얌전히 따랐다.
양양에서 접수한 옛 유기의 병력을 그대로 두고 나는 귀로에 올랐다. 이것으로 강하와 남양 일대를 제외한 형주 전역이 내 손에 들어왔다. 남양의 장제와는 동맹을 맺어 이 일대에서의 안정을 더욱 기했다.
“비록 치사하게 제 목숨을 담보로 했지만 말이죠.”
“나 혼자 하는 생각을 멋대로 읽고 끼어들지 말라고.”
가후는 입을 삐죽거리며 딴 곳을 바라봤다.
유기의 유장(遺將)들과 채씨, 괴씨 사이를 조율하는 것은 퍽 지난한 일일 테지만 노숙에게 믿고 맡겼다. 조만간 채모와 괴월은 송경으로 소환하여 내직으로 둘 작정이었다. 형남 사군은 여러 번 말했듯 아버지 제갈현에게 맡겼고.
언제든 내 목숨을 노릴 수 있는 황충을 가깝게 두었고, 언제든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가후를 가깝게 두었다. 남은 것은 단단히 삐져 있을 천자의 문제였다. 천자는 강하를 얻기는 했지만 예상했던 바를 확실히 얻지 못했으니까.
“도중에 송경에서 천자를 알현해야겠다.”
형주에 부임한 노숙 대신에 이제는 량이를 내 비서 격으로 두고자 했다. 실컷 굴려먹어야지.
“그게 좋겠네요. 주고받는 글 위에는 쓸데없는 오해가 쌓이니까요.”
송경으로 가는 길에 내 이마로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비가 쏟았다. 가을비 치고는 제법 많이 내렸다. 가을에 어울리지 않는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송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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