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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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원룡, 정신이 드는가?”
빛이 차단된 시야에 흐린 빛이 스미더니, 이내 초점이 또렷하게 잡혔다. 진등은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좌우를 돌아봤다. 목이 심하게 마르는 터, 눈치가 빠른 장료가 얼른 숟가락으로 미온수를 떠 진등의 입에 넣어주었다.
진등의 병상은 말 그대로 참상이었다. 여기저기 튄 혈흔에서 진한 비린내가 올라왔고, 쌉싸래한 약냄새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져있었다. 의원과 그의 수발을 들던 시비들이 기진맥진하여 널브러져 있었다.
“제가 목숨을 구원받은 것입니까?”
진등이 힘겹게 묻자 장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명의 화원화(元和, 화타의 字)가 수고해주었네.”
장료가 화타가 있는 쪽을 가리키자 지친 표정의 화타가 진등을 향해 허리를 꺾었다.
“용케 완치가 되었습니다. 진 공께서는 운이 좋으시군요.”
“아아…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할지……”
“이 몸은 서주 패국의 사람으로서 진씨 일문의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받은 은혜의 만분지일이라도 갚게 되어 도리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진등은 노곤하여 눈을 감고 잠시 안정을 취하다가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화타가 절대안정을 취하라며 그를 진정시켰지만 진등은 가쁜 숨을 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화 공! 속히 합비로 떠나주시오!”
진등의 채근에 화타는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진등의 얼굴에 낙담의 빛이 번졌다.
“이미 늦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늦다니.”
화타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때를 놓쳤습니다. 탕약의 제조법을 담은 비방(祕方)을 급히 합비로 보냈습니다만, 그뿐인 것입니다. 아마 합비공께서는 일어나기 힘드실 것입니다.”
진등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오……”
“간의 기생충이 재발할 때는 급히 치료하지 않으면 통제하기가 힘듭니다. 이미 시일이 많이 경과하여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진등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장료와 고순 등도 화타의 말을 듣고 얼어버렸다. 진등은 화타의 손을 붙들고 울 듯이 절규했다.
“허면 나를 버리고 곧장 합비로 가셨어야 옳지 않소! 어찌하여 이 하찮은 목숨을 구제하고 귀인의 목숨을 저버리신단 말이오!”
“제게는 합비공보다 진 공이 더 귀합니다.”
“답답한 말씀이시구려! 나 같은 이야 천하에 흔하지만 합비공처럼 천하를 화평하게 할 귀인은 터무니없이 적단 말이오! 아니, 합비공이 아니면 아예 없을지도 모른단 말이오!”
화타는 얌전히 침구(針灸)를 정리하면서 대꾸했다.
“저는 합비공의 가신이 아닙니다. 저는 저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입은 은혜가 있어 갚기 위해 진 공의 병을 고쳤을 뿐. 제가 진 공을 고치지 않는다고 하여 그 시간에 합비공을 고치리라 재단하지 말아주십시오. 저와 합비공 사이에는 얽힌 일이 없습니다.”
“너무나도 무정한 말씀이시구려!”
“저는 유현덕에게 귀부한 장중경과 돈독한 사이입니다. 진 공이 합비공에 귀부했다고 하여 제가 합비공에게 호의를 품을 까닭도 없으며, 장중경이 유현덕에게 그랬다고 하여 제가 유현덕에게 호의를 품을 까닭 또한 없습니다. 그런 걸물은 하늘이 내린 운명을 타고났거든요.”
“뭐요?”
“진 공은 좋은 사람이지만 천하의 시류를 바꿀 걸물은 아닙니다. 저는 그런 진 공의 병을 고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합비공이나 유현덕 같은, 천하의 시류를 바꿀 걸물은 함부로 치료할 수 없습니다. 제 손끝에서 천하의 시류가 뒤틀려버리니까요. 저는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감당 못할 미래를 제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진 공은 아십니까?”
진등이 뭐라 답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장료가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 화타의 목을 겨눴다. 쇠의 서늘한 기운이 화타의 목에 드리워졌다. 장료의 묵직한 목소리가 그를 겁박했다.
“당장 합비로 떠나시오. 가서, 합비공의 병을 물리치시오.”
화타의 목소리는 한없이 태평했다.
“지금 가봤자 이미 늦었다고 하질 않습니까? 이미 늦은 병을 화타가 찾아가면 세인들은 화타가 합비공을 죽였다고 할 것입니다. 이 화타의 걸음만으로 천하의 시류가 또 다시 바뀌는 것입니다.”
화타는 물끄러미 장료를 올려다봤다.
“죽이려면 죽이십시오. 그러나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합비성의 서쪽으로 한 떼의 무리가 빠져나갔다. 흰색 휘장을 두른 가마가 그들 무리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 가마를 옹위하여 합비성의 서쪽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 결 같이 음울했다. 울음 많은 여인은 그 가마를 붙들고 대성통곡을 했다. 깃발도 아니 세우고 흰 휘장만 두른 가마를 세인들은 궁금해 했으나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말하지 못하고 섣부른 추측만 난무했다.
합비 서산(西山)의 등성이를 타고 올라간 가마는 허름하게 지어진 사당 앞에 멈춰 섰다. 가마꾼들이 가마의 안에서 장방형의 물체를 꺼냈다. 그것 역시 흰 휘장이 둘러져 있었다. 여인 두 명이 그 장방형에 매달려 눈물을 짜냈다. 함께 온 사내들이 얌전한 손길로 그들을 떼어냈다.
장방형의 물체는 사당의 안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앞에는 향로가 놓였다. 가마를 따라 산등성이를 오른 자들이 저마다 향을 꽂고 장방형을 향해 참배했다. 술을 따라 올리고, 그것을 저들끼리 나눠먹고 하던 이들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 빈 가마를 들고 내려왔다. 무장한 병사들이 장방형이 안치된 사당을 둘러싸 경비했다. 밤새 세 번 교대했다.
약삭빠른 몸놀림의 사내는 그것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봤다. 그리고 장방형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합비공 제갈찬의 정실부인인 원시영과 교교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합비성의 통행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에, 부리나케 마필을 구해 합비성의 북문을 빠져나갔다.
서주 동해국, 담성.
가을걷이가 끝났는데 유비는 농구(農具)를 쥐었다. 곡식을 다 거둔 맨땅을 휘적거리다가, 이내 밭일 같지도 않았던 밭일을 관두고 일대의 농군들을 불러다가 탁주를 나누었다. 유비는 부러 닦지 않은 흙손으로 사발에 탁주를 가득 담아 촌로에게 내밀었다.
“유사군이 내리는 술을 다 받잡자니, 황송하오이다.”
유비는 낄낄거리며 받아쳤다.
“이 유현덕이 뭐 대단한 작자라고 황송까지 왼단 말이오! 내 술이 맛이 좋거든 나에게도 한 잔 따라주시구려!”
“황송, 황송하오이다!”
촌로는 유비가 내민 사발에 공손히 탁주를 따랐다. 유비가 모처럼 돼지고기를 마을 일대에 푸지게 나눠주니, 백성들은 절로 어깨춤을 추면서 성군의 덕을 칭송했다. 유비도 가증스러운 겸양을 떨다가 이내 자연스레 그 칭송을 받아들였다. 한참 지위고하를 잊고 왁자하게 떠드는데, 유비의 호위 격으로 있는 조운이 그의 귓전에 입술을 갖다 대고 속닥거렸다.
“봉추 선생께서 사군을 찾습니다.”
“급한 일이라던가?”
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눈치였습니다.”
유비 역시 고개를 끄덕여 알은체를 했다. 그는 다시 마을사람들에게로 다가가면서 익살스러운 웃음과 함께 배를 부여잡았다.
“아이고! 이 유 아무개 좀 살려주시오들!”
일순 놀란 백성들이 달려들어 용태를 물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사군!”
“아이구우 그것이, 그것이 말이외다!”
유비는 배를 쓰다듬으면서 끙끙거렸다.
“오랜만에 탁주를 먹었더니 설사 똥이 나오려는 모양이오! 아주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이라오!”
“저런!”
과장된 몸짓과 신음소리에 백성들은 저들끼리 깔깔거리면서 영주의 아픔을 유희로 삼았다. 유비는 한 손으로 배를 잡고 한 손으로는 뒤를 잡으면서 뒤뚱뒤뚱 걸었다.
“더 버티고 있다가는 똥을 지릴 것만 같으니 먼저 자리를 떠야겠소! 다음을 기약하세나!”
뒤가 마려워 지릴 것 같다는데 백성들이 그를 더 붙잡아둘 명분이 없었다. 촌로 이하 백성들이 허리를 꺾으며 유비를 전송했다.
“살펴 들어가십시오, 사군!”
유비는 급히 마차에 올라 담성의 성부로 돌아갔다. 백성들은 저마다 소탈한 영주의 덕을 추켜세우며 익살스러운 몸짓을 떠올리고 큭큭 웃었다.
“봉추! 나를 급히 찾았소?”
유비가 담성으로 들어오자마자 방통을 불러 물었다. 방통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대한 변고가 발생했습니다.”
“변고, 변고라니?”
유비의 눈알이 놀라 동그랗게 떠졌다. 방통은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급히 말을 덧붙였다.
“우리 쪽에서가 아니라 합비에서 변고가 발생했습니다.”
유비는 방통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경사라고 해야지! 변고라고 하니까 놀랐잖아!”
“뭐, 사과드립니다.”
“그래 일단은 제갈찬 그 애송이한테 변고가 일었다니 기분은 흡족하군. 변고라, 대체 무슨 변고라던가?”
방통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제갈찬의 사망입니다.”
좀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부산하게 몸을 움직이던 유비는 방통의 말에 걸음을 멎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방통을 바라봤다.
“…사망?”
“그렇습니다. 합비의 세작이 제갈찬의 장례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유비는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 여우같은 놈이 쓸데없는 궤계를 쓰는 것이렷다! 그 탄탄하던 놈이 하루아침에 죽어 고꾸라질 까닭이 없지 않은가?”
방통은 그것을 부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떠들썩하게 장례를 치른 것이 아니옵고, 관을 은밀히 합비 서산의 허름한 사당에 안치하고 삼엄한 경비 속에서 장례를 치렀다 하옵니다. 제갈찬의 정실인 원씨와 교씨가 관을 끼고 울었고, 향을 피운 후에는 병력을 배치하였다 합니다. 계책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방통의 주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유비의 비호 하에 서주에 머무르고 있던 의원 장중경을 소환했다.
“어어, 장 의원 오랜만이올시다.”
장중경은 유비를 향해 예를 갖춘 후 발언했다.
“소인이 지난날 사군을 돕기 위해 제갈찬의 병을 치료한 적이 있었는데, 그 병은 세 해가 지나면 다시 재발하는 병이올시다. 아마 제갈찬의 사인(死因)이 그 병이 아닐까 합니다만.”
장중경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유비는 쉽사리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장중경에게 물었다.
“장 의원,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이가 그대 말고도 또 있질 않소?”
“화타가 있지요.”
“그래, 그 자가 제갈찬의 목숨을 구제했을 공산도 배제할 수 없느니.”
장중경은 허공을 향해 크게 웃었다.
“어찌하여 웃으시는가?”
“제갈찬이 민물고기를 날로 먹어 병에 걸릴 때, 진등도 함께 그리하였지요. 제가 제갈찬을 치료할 때에도 화타는 진등을 치료했습니다.”
장중경의 말을 방통이 받았다.
“여남의 세작이 연통을 해왔습니다. 여남의 진등이 중병에 걸려 화타가 그 병구완을 했다고 말입니다.”
다시 장중경이 말했다.
“소생과 화타가 아니면 제갈찬의 병은 고치지 못합니다.”
“…허면 정녕 제갈찬이 죽은 것인가?”
유비의 물음에 방통이 답했다.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현재 드러난 일들로 봤을 때 그렇게 판단해도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유비는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