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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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여남에 어둠이 깔리고, 관우는 군령을 발했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달이 구름에 가리자 수염을 쓰다듬으며 음, 짧게 소리를 낼 뿐이었다. 절충장군 장비는 연주도독 관우를 향해 읍하고, 천지를 뒤흔드는 고성으로 병사들의 신체마다 기합을 불어 넣었다.
“전군! 공성에 돌입하라!”
공성을 명했지만 진중에 공성장비는 없었다. 진등이 성문을 열면 여남을 손아귀에 넣는 것이요, 진등이 성문을 열지 아니하면 그것은 진등의 계책이 실패하였거나 어설픈 책략의 마각이 드러난 것이니 칠 까닭이 없었다.
관우가 공성을 개시하자 그것에 맞춰 여남성에서 어둠을 가르는 소음이 들려왔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동요하고, 장료의 장과 고순의 고를 써넣은 깃발들이 거푸 무너졌다. 마구 휘날리는 흙먼지가 화톳불에 비쳤다. 관우는 진의 한가운데에서 혼돈에 빠진 성을 보고 흡족하게 웃었다. 음!
진중에서 관우를 보좌하던 장군 미방이 여남의 성문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면서 환희에 찬 목소리로 관우에게 아뢨다.
“장군! 여남의 성문이 열렸습니다!”
참모 진군이 관우에게 아뢨다.
“장군, 진군 명령을.”
“참모 진군이 진군 명령을 내리라 하는군.”
익살인지 재치인지 되도 않는 개소리인지 뭔지, 관우가 지껄인 말에 진군은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관우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애먼 곳을 바라보며 느릿한 투로 말했다.
“실패인가……”
관우는 진중하게 일어나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전군, 입성하라.”
주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미방은 춤이라도 추는 듯이 사방팔방으로 경망스럽게 뛰어다니며 전군에 명령을 하달했다.
“전군! 입성하라! 전군! 입성하라!”
관우는 미방을 바라보며 가볍게 혀를 차며 질책했다.
“쯧, 경망스럽게!”
진군은 푸근하게 웃으면서 관우의 마음을 달랬다
.
“좋은 날이지 않습니까!”
메뚜기 떼처럼 여남으로 대거 쏟아져 들어가는 대병력을 바라보며 관우도 저절로 웃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유비군을 향해 열린 북문과 동시에, 남문 역시 개방되었다. 패잔병을 가장한 기병 몇 기와 장료와 고순이 부리나케 남녘으로 달아났다. 관우가 입성할 때쯤에는 마구 일던 먼지는 잠잠해지고 진등 이하 그의 종복들이 얌전히 도열한 채로 점령군을 맞이했다.
진등의 환영에도 관우는 오만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말에서도 내리지 않았다. 진등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허리를 굽실거렸다.
“천하에 무명을 떨치시는 신장(神將) 관 공의 존안을 뵙사오니 기뻐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잔뜩 허영이 들어간 아부에 관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꼿꼿한 관우를 대신하여 참모 진군이 진등의 맞장구를 쳐주었다.
“귀공이 이렇듯 중대한 결단을 내려 여남의 백성들이 제갈찬의 마수에서 해방되었소이다! 귀공의 귀순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유사군께서도 필시 귀공을 크게 치하하실 것이오.”
진등은 거의 상하체가 만날 정도로 허리를 접었다.
“그것 참, 안심이 되는 말씀이시로군요.”
여기에 장비가 괄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빌어먹을 장료와 고순은 어디로 간 것인가!”
진등이 서둘러 대답했다.
“소인이 부곡을 움직여 여남의 정청을 습격, 장료와 고순을 일거에 들이치니 그 둘은 놀라 급히 달아났습니다. 수뇌가 사라지고 그 휘하의 부장 몇몇을 제거하니 그 밑의 병력들은 고스란히 소인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곧장 장군께 양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비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오랜만에 힘을 좀 쓰나 했더니 싱겁게 되었잖은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남에서 여독이 풀리시는 대로 곧장 합비로 남하하셔서 제갈찬이 사사로이 새운 대장군부를 무너뜨리고 인의의 깃발을 꽂으시면 됩니다.”
장비는 그 말에 바로 현혹되어 금세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거 말 한 번 잘한다.”
관우는 진등과 더 상대하지 않고 그대로 말을 몰아 성의 중앙으로 진입했다. 몇 남지 않았던 장료와 고순, 그리고 대장군부의 깃발이 무력하게 꺾이고 유비의 유, 관우의 관 자가 적힌 깃발들이 나부꼈다. 진등은 진득한 침을 삼켰다. 관우는 천천히 성내를 돌아보며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았다. 관우는 눈빛을 벼리며 진등에게 물었다.
“주검의 수가 적지 아니한가?”
아무리 계책이라고 한들 멀쩡한 목숨을 숱하게 죽여 없앨 수는 없었다. 성내에 이리저리 창에 찔려 죽은 목숨들은 여남의 뇌옥(牢獄)에 갇혔던 흉악범들로서, 기실 죽기로 돼있던 자들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관우로서는 그들의 성분을 알지 못했다. 진등은 관우의 의문을 즉각 해소해주었다.
“말씀드렸듯이 소인이 즉각 장료와 고순의 성부를 장악하여 큰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부곡을 그대로 보존하여 얻어냈으니, 잘 된 일입니다.”
“음.”
관우는 잠시 생각에 빠져 수염을 쓰다듬더니 진등에게 말했다.
“성문의 경비는 우리 군이 맡는다. 이의 없겠지.”
“…물론입니다.”
진등은 침을 꼴깍 삼키고 이내 해사하게 웃으며 점령군의 장수들에게 권유했다.
“자, 이렇듯 여남을 점령하시는 군공을 세웠으니 주연을 베푸시는 건 어떠하신지요? 여독도 푸실 겸, 여남 함락을 기념하실 겸.”
그의 말에 장비가 손뼉을 치며 호응했다.
“맘에 든다, 맘에 들어! 형님! 여남에서 합비까지는 지척이외다. 오늘은 즐겁게 술을 들고, 여기서 하룻밤 더 숙영한 후에 다시 군을 몰아 합비로 진군하시지요!”
장비의 권유를 관우는 단칼에 거절했다. 힐난조의 목소리였다.
“바보 같은! 이제야 전쟁다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거늘 벌써부터 술판을 벌인다는 말이냐!”
관우의 질책에 장비는 헛기침을 하며 물러났지만, 이번에는 참모 진군이 장비와 진등의 역성을 들고 나섰다.
“그렇지 않습니다, 도독. 여남의 소식이 합비에 퍼지고 그 효과를 볼 때까지는 여남에 머무르셔야 합니다.”
관우는 압도하는 눈빛을 진군에게 쐈다.
“무슨 말이지.”
진군은 눈빛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펴면서 말했다.
“제갈찬이 죽은 마당입니다. 합비의 공기는 뒤숭숭할 것입니다. 특히 여포 같은 작자는 속으로 불경스러운 생각을 품었을 터. 다만 상황이 뒤죽박죽하고 어지러워야 거사를 도모해봄직한데 사방이 고요하니 여포가 단독으로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당하여 도독께서 여남을 얻으셨으니, 이 소식이 합비에 전해진다면 합비의 이러저러한 놈들이 크게 혼란스러울 터입니다.”
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맞다.”
“그렇기에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벽력처럼 곧장 합비로 밀고 들어간다면 그들은 우리를 막기 위해 결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남에 머무르면서 합비를 압박한다면, 반드시 개중 튀는 놈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럴 듯한 이치를 들어 관우를 설득하는 진군을 바라보며 진등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관우는 잠시 고심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취하게 하지는 말도록.”
진군은 연신 허리를 굽히면서 관우의 비위를 맞췄다.
“물론, 물론입니다.”
가벼운 주연이 벌어졌다. 주연이라는 거창한 말은 고상한 헛기침이나 번갈아 콜록거리는 윗분들에게나 가당했고, 무수한 아랫것들에게는 약간의 술과 오랜만의 기름칠을 할 주먹 만한 고깃덩이가 전부였다. 진등은 지나친 아첨은 삼가면서 관우와 장비, 진군 이하 미방 등 점령군의 수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었다. 장비는 금세 진등에게 호감을 가졌고, 진군은 그를 원룡이라는 자로 불렀다. 관우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였다.
“합비후께 아룁니다!”
여남에서 스스로 쫓겨난 장료는 곧장 합비로 전갈을 띄웠다. 발 빠른 전령은 금세 백각에 닿았다. 합비공을 대신해 대장군부의 상석에 앉은 제갈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라.”
“예주자사 장료, 여남태수 고순, 여남에서 거짓 패주! 연주도독 관우 이하 적병 오만, 여남 점령!”
가후는 입맛을 다셨다.
“우선 월척이 미끼는 물었겠다!”
제갈량은 턱을 긁으며 그 말을 받았다.
“미끼만 먹고 낚싯줄을 끊어버리면 낭패지요.”
유복은 픽 웃으며 그 말에 토를 달았다.
“대낭패.”
여포는 먹물들의 대화가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지, 팔짱을 낀 채로 툴툴거렸다.
“거 참 복잡하게들 사는군. 창 한 자루 쥐고 쓸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소인배들을 두려워하여 이리 속이고 저리 속이고. 뭐하는 짓들인가 대체?”
고단수의 책략이 난무하는 와중에 입 한번 뻥끗하지 못한 허저가 여포의 말에 흥분한 듯 찬동했다.
“백 번 지당허신 말씀이셔유, 태위 어르신! 당장 여남으로 뛰쳐들어가가지구 궁둥짝을 걷어차블믄 고만 아니겠어유?”
“암! 그렇고 말고!”
좌자는 몸을 옹송그린 채 낄낄거렸다.
“먹물은 먹물대로, 돌멩이들은 돌멩이대로 싸우는 법이우.”
그 말에 여포가 버럭 화를 냈다.
“지금 그 말은 이 여봉선이 돌대가리란 소리냐!”
좌자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응수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수?”
호기로운 대응에 여포는 팔짱을 풀고 고개를 젖히며 폭소를 터트렸다.
“크핫핫! 그렇지! 옳기는 옳은 말이다!”
나는 병실에 혼자 처박혀 똥냄새 나는 고민이나 하고 있는데 정청은 시끌벅적하기에 다소 의기소침해졌다. 슬며시 병실의 미닫이를 덜거덕거리며 열고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밌……”
말을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감히 대장군의 상석을 멋대로 꿰차고 상전 노릇을 하는 량이가 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허! 사자무언(死者無言)!”
나는 울먹거리며 미닫이문을 다시 닫고 병실 안에 쭈그렸다. 그러면서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두고 보자……
내 마음의 소리를 들었는지, 량이의 목소리가 미닫이의 문풍지를 타고 또렷하게 들렸다.
“두고 보자는 사람 치고 제대로 앙갚음 하는 사람 못 봤습니다! 안 무서워요!”
내 처참한 꼴을 비웃는 가신들의 웃음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렸다. 분하다……
제갈량은 깨소금맛이라는 듯 낄낄거리면서 전령을 다시 바라봤다.
“관우의 동향은 어떠한가. 바로 합비로 쳐들어올 참인가?”
전령은 제갈량의 물음을 부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등 공이 장예주(장료)께 밀서를 보내 알려오기를, 당분간 여남에 머물면서 합비의 분란이 일어나도록 압박하려는 눈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여포가 불쾌한 듯 눈썹을 씰룩거렸다.
“필시 이 여봉선의 반란을 기대하는 터렷다!”
량이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정수리에 피도 안 마른 소인이 합비공의 궐위를 대신하니, 태위께서 이에 반감을 품고 거병하시리라 예상하는 것이겠죠. 불경하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제게 합비공의 전권을 쥐여 주신 것은 다름 아닌 태위 어른이신데 말입니다.”
여포는 콧방귀를 뀌었다.
“제 멋대로들 생각하라지! 대단한 오판이로다, 대단한 오판이야!”
여포의 우락부락한 얼굴을 바라보던 가후와 량이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제게 쓸 만한 생각이 있습니다!”
“내게 계책이 있소.”
동시에 말한 가후와 량이는 서로를 보고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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