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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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손책과 주유의 선단은 회계항에 정박하고 곧장 상륙을 개시했다. 수없이 예비했던 작전이기에 상륙은 전광석화로 진행되었다. 이만에 달하는 병력이 차례대로 오랜만에 뭍을 밟았다.
“단숨에 회계성을 함락하고 일대를 장악한다! 무조건 속전속결로 끝낸다!”
손책의 명령에 그의 상장들이 일제히 뛰쳐나가 회계성을 향해 내달렸다. 동기가 충분히 부여된 데다가 오래 싸움을 쉬어 충분히 전투의지가 동한 병력들은 씩씩하게 회계성으로 나아갔다. 주유는 필승을 확신했다.
“뭐라? 회계항에 적병이 상륙했다고?”
반림은 반쯤 누워 빈둥거리던 몸을 황급히 일으키면서 보고를 재확인했다. 보고를 올린 새왕 추림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여 반림의 물음을 긍정했다.
“손책과 주유가 이끄는 정병 이만이라고 합니다!”
“무진으로 갈 놈들이 왜 회계에 상륙한다는 말이냐!”
그때 새왕 화당이 우당탕 넘어질 듯 반림의 앞에 엎드려 대령했다. 화당은 다급한 목소리로 반림에게 보고했다.
“수께 보고 드립니다! 별부사마 육의가 전갈을 보내와 알리기를, 무진항은 다만 눈을 가리기 위한 미끼일 따름이고 회계가 손책과 주유는 처음부터 회계를 노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반림은 피식 웃었다.
“회계를 졸로 본다, 이거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칼 걸이에 걸린 보검을 쥐었다. 반림은 보검의 검실(劍室)을 천천히 벗겨 칼날을 드러냈다. 매끈한 칼날에 반림의 치아가 반사되었다.
“상대 잘못 골랐다.”
“뭐야, 반림이 왜 회계에 남았지?”
주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낭패, 낭패로다! 이렇게 되면 어느 정도 장기전 또한 염두에 두게 생겼다.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손책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주유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다! 반림 따위야 있든 말든.”
황개와 한당을 앞세워 손책은 삽시간에 회계성을 에워쌌다. 질풍 같은 급습에 회계의 산월은 요격에 실패했다. 반림이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회계성의 사방을 손씨의 깃발이 휘감고 있었다. 반림은 대대적인 농성을 선언했다. 회계의 산월병은 일만 남짓, 손책의 병력이 이만을 헤아리나 성벽에 의지하여 저항하니 손책의 승리를 낙관하기 어려웠다.
고전적인 전술을 채택한다면 손책이 회계성을 에워싸고 적들의 병량이 고갈되고 전의가 상실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지루한 포위는 도리어 손책에게 치명적이었다. 먼 항해 끝에 당도한 회계이므로 지참한 병량이 적고 돌아갈 퇴로가 없었다. 항우의 파부침주(破斧沈舟)와 다를 바가 없으니 속전속결로 끝내야만 했다. 게다가 눈속임을 당한 것을 깨달은 오군의 병력들이 회계를 돕기 위해 출병할 터이니 그들이 당도하기 전에 낙성시키지 못하면 꼼짝없이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손책은 심복 정보로 하여금 회계 일대의 민가를 약탈하게 하여 병량을 벌충하고, 갖가지 쇠붙이 등, 그러니까 쟁기나 낫 따위의 농기구를 포함하여 수저 따위의 잡동사니 쇠 모두를 거두어 병장기로 활용했다. 여기에 더하여 주유는 냉혹한 명령을 내렸다. 산월과 내통할 염려가 있는 산월 출신의 사내들은 모두 붙잡아 참살하고 그 수급을 회계성에서 잘 보이는 곳에 늘어놓도록 했다. 몸뚱이를 잃은 채 가느다란 장대에 꿰어져 햇빛에 점점 쪼그라지는 동포의 대가리들을 보면서, 농성하는 병사들은 짐승처럼 울면서 전의를 다졌다.
“대체 어느 쪽이 오랑캐인가……”
표정 없는 수급들을 보면서 하제는 주먹을 쥐었다. 반림은 증오가 서린 눈빛을 수급 너머의 적진을 향해 쏘았다.
“반드시 앙갚음하리라……”
새왕들은 주먹으로 바닥을 치면서 크게 분개했다.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손책은 장대 끝에서 풍겨오는 옅은 시취를 맡으며 주유에게 물었다. 주유는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짐승들은 가혹하게 대해야 옳지.”
여염에 머물던 산월을 그야말로 가혹하게 학살한 것은 오로지 승리를 목표로 두는 주유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산월의 언어와 습속이 중원과 달라, 그들을 살려두었다가는 어떤 기이한 방식으로 후방을 교란할지 알 수 없었다. 오로지 죽여 후환을 다스리는 것만이 유일한 정답이었다.
또한 농성에 돌입하여 지구전을 다짐한 적을 도발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산월에게 유리했다. 주유로서는 적을 성벽 밖으로 끌어내어 일망타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때문에 그들 동족의 머리를 베어 전시하는 것은 그들의 전의를 끓게 하고 멧돼지의 마음으로 성벽 밖으로 돌진하게끔 유인해내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수! 이대로 웅크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당장 달려 나가 손책과 주유의 목을 베어 저들이 한 것과 똑같이 갚아줘야 합니다!”
새왕들은 마구 울부짖으며 반림을 채근하여 요격을 주청했다. 그러나 주유의 심산을 꿰고 있는 반림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촘촘한 군(軍)의 그물에 뛰어드는 것은 스스로를 가련한 메추리로 전락시킬 뿐이니……
“참으로 간교하도다……”
반림은 속으로 분한 눈물을 삼켰다.
서전(緖戰)부터 피가 개울이 되어 흐르게 만든 주유는 찝찝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대야에 물을 받아 세 번 손을 씻고 막사 안에 들어가 밤새도록 거문고를 뜯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장대 위의 대가리들, 그것들의 듣지 못하는 귓구멍으로 아름다운 주악이 파고들었다.
날이 밝고 손책은 회계성의 성문을 두드렸다. 반림은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거짓 후퇴하며 그를 꾀어내려는 속임수에는 응하지 않았다. 주유는 반림을 회계성에 묶어놓는 동안 여범에게 병력 이천을 맡겨 회계산으로 보냈다. 회계산에는 본디 반림이 회계성을 접수하기 전까지 그의 근거가 되었던 산채가 있는 곳이었다. 일개 도적집단의 어설픈 산채가 아니었다. 산월 족속 모두를 통할하였던 총본산이었던 만큼 산채보다는 산성(山城)이라 부르는 것이 옳게 느껴질 정도로 견고했다. 그곳을 아주 버리기는 아까워 남녀 오백 여와 병력 백 여를 두었는데, 산채의 주인으로 열 명의 새왕 중 하나이자 반림의 아우인 반구(潘區)를 삼은 터였다.
반구는 회계산을 향해 몰려오는 여범의 병력을 굽어보았다. 그리고는 산채의 원로이자 산 근처에서 오백 마리 염소를 치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여보 할아범, 적들이 여기로 몰려오는구려.”
노인은 노인 특유의 멍한 시선을 밖으로 던지며 대꾸했다.
“우리를 죽이겠지.”
“나와 백 명의 전사들은 산채를 의지하여 싸우겠소. 그러는 동안에 할아범은 창칼이 없는 남녀를 거두어 피란하시구려.”
노인은 의례적인 만류나 위로 따위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구태여 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젊은 나이에 먼저 명도(冥途, 저승)로 보내는 마음이 불편하군. 곧 만나도록 합시다.”
노인은 지팡이를 짚으며 남녀 오백을 불러 모으고 휘파람을 길게 불어 제가 기르는 오백 마리 염소를 불러 모아 부랴부랴 산채의 밖으로 피란했다.
“형님, 이 원수는 반드시……”
반구와 백 여의 병력은 여범에게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이내 무너지는 산채와 함께 명을 다했다. 산채는 불타고, 백 명의 병사들은 그 불길에 자연 화장되었다. 반구는 여범의 조롱어린 몇 마디를 듣고 참수되었다. 반구의 목은 베어진 다음 꿀에 절여져 회계성의 반림에게로 보내졌다. 반림은 눈물을 꾹 참으며 머리만 돌아온 아우를 내려다보았다.
“아우야, 얼마나 분하였느냐? 원수의 손에 죽으니 얼마나 분하냐? 나도 나와 너의 원수에게 같은 분함을 맛보게 해주겠다. 원수의 손에 처절하게 죽도록 하겠다……”
새왕 추림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반림에게 간청했다.
“더 참지 마십시오! 더 이상 적이 오만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당장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손책과 주유의 목을 베도록 하십시오! 이 추림, 죽을 때 죽더라도 손과 주 둘 중 하나의 목은 반드시 베도록 하겠습니다!”
“안 된다! 멍청한 소리는 관두어라!”
반림이 크게 꾸짖자 추림은 얼굴을 감싸고 몸을 무너뜨린 다음 서럽게 울음을 짜냈다.
그 날 밤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새왕 화당과 추림이 둘끼리만 작당하여 성문을 개방하고 휘하의 병력을 내몰아 멋대로 야습을 감행했다. 화당과 추림은 병력의 맨 앞에 서서 진두지휘했다.
“쳐라! 원수를 멸망시켜라!”
두 새왕은 포효하며 손책의 진으로 뛰어들었다. 반림에게 야습의 보고가 들어간 것은 이미 화당과 추림이 성문 밖으로 뛰쳐나간 뒤였다. 반림은 벌떡 일어나 절규했다.
“이런 바보 같은! 어째서 멋대로 구는 것이냐! 어째서!”
반림은 성벽 위의 누대로 급히 나아갔다. 벌써 화당과 추림의 병력이 손책과 주유의 진에 닿았다. 하제가 반림에게 진언했다.
“차라리 병력을 모두 출병하여 적을 치는 것이 어떨는지요!”
반림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화당과 추림이 손책의 진을 뒤흔들려는 찰나, 어둠 속에 잠겨 고요하던 손책의 진이 일순 밝아졌다. 무수한 횃불들이 화당과 추림의 병력을 감싸버렸다. 반림의 몸이 스르르 힘없이 쓰러졌다. 그는 양 팔로 성벽을 간신히 의지한 채 주먹으로 마구 성벽을 내리쳤다.
“간교한 주유가 도발한 당일에 야습을 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느냐……”
반림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역시 짐승은 짐승들이구나. 이토록 멍청하구나. 쳐라! 놈들을 모두 격멸하라!”
손책은 환호성을 지르며 화당과 추림의 병력을 포위했다. 황개가 철편을 들고 화당에게 달려들고, 한당이 창을 꼬나 쥐고 추림에게 덤볐다. 급작스런 공수 전환에 두 새왕의 병력은 혼돈에 빠져버려 불능이 되었다. 화당과 추림도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멍청한 자식!”
황개는 그대로 철편으로 화당의 목덜미를 내리찍었다. 화당은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알이 튀어나온 채로 낙마하여 나뒹굴었다. 한당이 내지른 창을 몇 번 막아냈던 추림은 그런 대로 선전하였으나 그뿐이었다. 한당이 창을 찌르는 척을 하자 그것에 반응했던 추림은 한당이 이내 다른 쪽으로 창날을 뻗자 그대로 옆구리가 찔려 낙마했다. 낙마한 추림에게 한당의 부곡 여럿이 달려들어 창칼로 마구 짓이겨 죽였다.
화당과 추림의 야습은 완전한 대실패로 결착이 났고, 반림은 두 명의 새왕과 전 병력 일만 중 이천을 잃었다. 사람을 계속 잃기만 하는 반림의 마음이 위태로웠다. 처음에는 원수를 갚겠노라 전의를 불태우던 산월의 병사들도 거듭되는 환란에 무한의 실의를 느끼고 오랫동안 잠자리에 들지 못한 사람처럼 몽롱한 심리가 되었다.
“원병의 소식은 아직 없는가.”
반림은 힘없이 하제에게 물었다. 하제는 최대한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반림의 물음에 답했다.
“아직입니다. 적이 오군에서 회계로 넘어오는 다리를 끊어 에둘러 오는 바람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반림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자꾸만 아래로 꺼지는 고개를 벽에 기댔다. 본래 강남을 침략하는 침입자들은 풍토병에 크게 당해버리고 패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었다. 그러나 주유는 공기가 차가워 병균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계절에 침입하니 풍토병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산월이 갖가지 질병과 독에 밝은 탓으로, 독충과 독쥐를 풀어 적을 괴롭히고자 방책을 고심했지만 이미 그것을 예견한 주유의 진중에는 고양이 우는 소리가 소란스럽고, 벌레가 꺼리는 계피 태우는 냄새가 진동했다. 반림은 밖으로 풀려던 독충과 독쥐를 무기력하게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기가 뚝 떨어진 회계성을 손책과 주유는 더욱 가열하게 두들겼다. 반림은 응전을 명했지만 병력의 사기가 예전만 못하는지라, 결국 손책에게 옹벽과 본래 성벽의 이중구조로 되어있는 회계성 서쪽의 옹벽을 내주게 되었다. 손책과 주유는 더욱 사기가 끓는지라 반림은 속으로 적에게 수급을 빼앗기지 않는 죽음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반림도 점점 실의에 젖어가려는 때에, 하제가 한 장의 편지를 들고 반림을 찾아왔다.
“수, 북쪽에서 누군가 화살을 쏴 북문 누대의 대들보를 맞혔는데, 그 화살에 이 편지가 묶여있었습니다.”
“…편지?”
반림은 하제가 건네는 편지를 받아 펴보았다. 짧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전옹(猠翁, 염소 전 할아비 옹. 즉 염소 할아범)이 아직 죽지 않았다.(猠翁未卒, 전옹미졸)’
반림은 주술에 걸린 듯 그 글을 중얼거렸다.
“전옹이 아직 죽지 않았다……”
반림은 무기력하게 널브러뜨렸던 몸을 천천히 다시 일으켰다. 아무렇게나 부려놓았던 사지에는 다시 힘을 주어 팽팽하게 했다. 탁하게 흐려졌던 눈에는 다시금 그 날카로운 총기를 심었다.
“아직 죽지 않았다, 나도.”
반림은 보검을 지팡이 삼아 완전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회계성을 둘러싼 적진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우뚝 바로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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