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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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예주 여남성.
관우는 열흘 간 여남에 머물렀다. 진등은 사재를 털어 점령군을 후하게 대접했다. 장비는 그 대접에 만족하는 눈치였으나 관우는 내내 잔뜩 짜증이 번진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참모 진군을 채근했다.
“합비에서 소요가 일 것이라더니, 어째서 아무런 난리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관우가 그렇게 물을 때면 진군은 진땀을 빼면서 그를 다독였다.
“이제야 막 합비에 소식이 닿았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시지요.”
“닷새 후까지 합비에서 소식이 없다면 계속 진군하겠다.”
“예예, 그때까지 별 소득이 없으면 소인이 먼저 도독께 진군을 주청하겠습니다.”
“음.”
관우는 찬바람 쌩쌩 부는 표정으로 진군을 지나쳐갔다. 진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팍 쉬었다. 내가 제 명에 못 죽지!
진등은 은밀히 설주와 접촉했다. 원래대로의 계획이라면 관우가 여남에 입성하고, 경계가 다소 느슨해지면 휘하의 부곡을 부려 성내의 점령군을 급습하여 궤멸시켜야 했다. 그런데 관우가 성내의 규율을 엄히 유지하고 진등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니 섣부르게 거사를 감행하지 못하는 터였다. 장비와 진군은 진등을 호의로 대하며 그를 중용하여 여남의 민심을 다독이고 여남을 완전한 유비의 세력권으로 삼으라 관우에게 누차 진언했지만, 관우는 진등을 유별날 정도로 의심하고 압박하고 홀대했다.
“합비의 우려가 클 것이다. 관우가 여남을 점령한 지 벌써 여러 날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거사를 성사시키지 못하고 내내 묶여있으니……”
진등이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초조함을 드러내자, 설주가 그에게 말했다.
“합비의 밀서를 받았습니다. 당분간 은인자중하며 관우의 환심을 얻는 데만 주력하라는 지침입니다.”
진등은 의아한 빛을 띠었다.
“어째서? 구태여 시일을 끌 까닭이 있는가.”
“관우가 더 남하하지 않고 여남에 머무는 까닭을 아시지요.”
진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합비의 소요를 이끌어내기 위함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특히 여 태위의 반란을 염두에 두고 있지요.”
“그렇다.”
설주는 진등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이며 속닥거렸다.
“곧 여 태위의 밀사가 관우를 만날 것입니다.”
“뭣이.”
진정 여포가 합비에 반기를 들 참인가! 진등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설주가 급히 그의 속내를 진정시켰다.
“합비에서 꾸민 계책입니다.”
“백각의 잔머리쟁이들이 또 무슨 꿍꿍이를 획책하는 게야.”
관우는 여남의 정청에서 여포의 밀사와 접촉했다. 밀사 자격으로 여남에 온 자는 여포의 딸인 여춘군(呂春君)이었다. 춘군은 아비를 닮아 건강미가 느껴지는 여인이면서 성미마저 아비를 닮아 괄괄한 구석이 있었다. 한참 혼기를 넘긴 나이에도 독신으로 있으면서 아비를 보좌하던 터였다. 관우는 춘군의 제법 묵직한 젖무덤에 시선을 두었다가 춘군이 그를 올려다보는 까닭으로 급히 딴 곳을 바라봤다.
“음.”
춘군은 관우에게 절을 올렸다. 다시 관우의 시선이 잔뜩 그늘진 그녀의 가슴골로 향했다가, 춘군이 몸을 일으키자 다시 딴청을 피웠다.
“음.”
춘군은 최대한 공손한 말씨로 관우에게 말했다. 공손하다는 것은 그녀의 주관이었고, 워낙에 걸걸한 목소리인지라 생면부지의 남이 듣기에는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소녀 여 태위의 여식인 춘군이라고 합니다. 오늘 태위의 밀명을 받들어 연주도독을 뵙게 되었습니다.”
관우는 고개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물었다.
“온후와 나는 얽힌 일이 없거늘 어찌하여 온후가 귀한 여식을 이곳에 보냈는가.”
기실 염두에 둔 일이 있지만 관우는 모르는 척 잡아뗐다. 춘군은 고개를 조아리며 아뢨다.
“밀명이란 말 그대로 은밀합니다. 태위의 근신(近臣)을 보내면 합비에서 의심하는 마음을 품을 것이기에 태위께서는 정사에 얽힌 바가 없는 춘군을 밀사로 낙점하여 도독과 의논하라 하셨습니다.”
관우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다시 물었다.
“온후는 제갈합비(제갈찬)와 의기투합한 관계가 아닌가. 그런 합비의 눈을 피해 나와 접촉한 까닭이 무엇인가.”
“이미 진원룡이 도독과 내통하였으니 저간의 사정을 모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관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본디 고작 대장군부의 늠가연사를 지내던 제갈량이 합비공의 종제라는 까닭만으로 합비의 정사를 농단하는데다가 심지어는 태위의 권세를 심히 탄압하는 고로 태위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럴 터.”
“태위께서는 합비공을 흠모하기는 하지만 합비공의 핏줄마저 흠모하지는 않습니다. 합비공의 유고 시에는 마땅히 동렬의 관위를 지녔고 한때는 합비공의 주군이셨던 태위께서 그 세력을 인수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합니다. 더군다나 합비공께서는 슬하에 자식을 두지도 않으셨습니다.”
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여 태위께서는 몸소 군사를 일으키셔서 잘못된 것을 바루려하시니 오늘 춘군이 도독을 뵙는 것입니다.”
여춘군의 말을 듣고 관우는 여포의 의중을 깨달았음에도 애먼 곳을 바라보며 물정 모르는 척 화제의 변두리만 맴돌았다.
“그것과 오늘 그대가 나를 만나는 것과 무슨 관계인가? 합비의 일은 합비의 일이다.”
관우가 부러 속을 내비치지 않자 괄괄한 성미의 여춘군은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
“다 아시면서 딴청을 피우실 참입니까!”
그 기백에 관우도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관우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그녀의 말대로 깊이 논의에 들어갔다.
“오군에는 제갈합비의 종형 오군공 제갈근이 있고, 형남에는 그의 부친 장사공 제갈현이 있다. 형북에는 제갈합비의 고굉(股肱)인 형주자사 노숙이 있다. 온후는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춘군은 조금의 오류도 용납하지 않았다. 관우의 말을 대개 수용하면서도 마지막 말을 굳이 수정했다.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대국적인 판단에서 눈엣가시로 여기고 계신 겁니다.”
그거나, 그거나. 관우는 춘군에게 퉁을 놓으려 했지만 귓전을 뒤흔드는 고함을 듣기 싫어 말을 삼켰다. 춘군은 말을 이었다.
“진원룡이 유사군께 정보를 흘린 까닭으로 손책과 주유가 이끄는 수군이 오군공 제갈근과 맞서고 있어 강동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다만 노형주(노숙)와 장사공은 신경이 쓰입니다. 관 도독께서 그들을 제압하심이……”
관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철천지원수인 우리에게 형주를 넘기려는가?”
“안의 적이 밖의 적보다 미운 것은 당연합니다. 형주는 합비공의 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온전한 합비공의 영토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태위께서는 합비 일대를 포함한 양주만을 석권하길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형주에서 그들과 아웅다웅하는 동안 온후가 양주를 평정하면 이후 기진맥진한 우리를 쳐서 형주마저 독식하려고 들 것이다.”
여춘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동맹이 유지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관 도독께서는 형주를 끝내 지킬 수 있다고 여기지 않으십니까?”
관우는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물론이다!”
“그때에는 형주를 두고 여 태위와 겨루시면 됩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계책이다. 그대의 말을 듣자하니 합비는 당장에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당장 합비로 들이치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헌데 내가 구태여 얻기 어려운 형주를 노릴 까닭이 있겠는가?”
춘군은 풋, 희롱하는 웃음을 지었다. 관우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불쾌감을 표했다.
“도독께서 합비를 치시면 여 태위께서는 우선 제갈공명에게 협력하여 합비를 사수할 것입니다.”
관우는 눈빛을 날카롭게 벼렸다.
“그것은 모순이다. 그대는 방금 안의 적이 밖의 적보다 더 밉다고 하였거늘.”
“그렇습니다만, 당장 도독께서 합비를 쳐 점령하시면 태위께서는 전범이 되어 목이 잘릴 것입니다. 태위께서는 우선 제갈공명을 도와 도독을 물리친 연후에 거사를 감행하실 겁니다.”
관우는 헛기침을 뱉고 말했다.
“우리가 온후를 후대하여 양주를 맡기겠다고 제의하면?”
춘군은 푸 웃었다.
“그걸 누가 믿습니까? 유사군의 간교함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어허, 무례하다!”
엄한 꾸지람에도 춘군은 주눅 들지 않았다.
“부정은 못하시겠지요.”
춘군은 관우에게로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관우는 춘군의 가슴골에 흘끔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춘군과 시선이 맞닿아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모로 고개를 돌렸다.
“도독께서는 이미 여남을 얻으셨습니다. 도독께서 합비로 오신다면 그 좁다란 땅덩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실 터, 그러나 합비를 태위께 양보하고 형주로 눈을 돌리신다면 그 너른 영토를 손쉽게 얻으실 수 있습니다.”
“형주를 친다고 하여 바로 형주가 얻어지겠는가? 형주에도 제갈찬의 정병이 득시글대고 있다.”
춘군은 지체 없이 답을 내놓았다.
“형북을 책임지는 노숙은 합비에 소환된 처지입니다. 노숙을 제외한다면 형북이 마냥 합비공의 세력권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요. 아직 명문 채씨와 괴씨의 입김이 상당하며 폐출된 유기가 근방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도독께서 형북으로 들어가신다면 그들이 일치단결한 모습을 보이지 못할 것이기에 손쉽게 형북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또한 유배된 유기는 유사군의 족척이니 그를 내세워 형북의 민심을 다독인다면 금세 형북이 유사군께 귀의할 것입니다. 형남은 비록 장사공 제갈현이 꽉 쥐고 있지만 땅이 척박하고 교통이 험하며 병력이 적으니 힘이 약하다 하겠습니다. 도독께서 이기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형주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관우가 주저하자 춘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거야 원, 관운장은 장부라고 세인들이 추켜세우더니 이제 보니 영 글러먹은 평판이었군요.”
“허황된 도발을 지껄이지 마라.”
춘군은 지참한 궤짝을 열어 관우에게 보여주었다. 관우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궤짝에 보냈다.
“이것은 형주 전역의 세세한 지형을 다룬 지도입니다. 또 이것은 형주의 병력 배치와 물자 현황입니다. 도독께 드리지요. 적의 사정을 낱낱이 알고 있으면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습니다.”
관우가 형주 출신의 선비를 불러 이것의 진위를 물으니, 선비는 제 고향의 지리가 자세하고 정확하게 구현돼있다며 옳은 것이라고 진언했다. 춘군은 거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음.”
관우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관우와 여포 사이의 밀담이 성사되었다. 춘군이 관우의 침실에 들어 그와 교합하니, 원활히 소통하였다는 증거가 되었다. 관우는 심히 흡족해했다.
설주는 진등을 만나 그에게 아뢨다.
“출정은 사흘 뒤, 주장은 관우, 선봉은 장비, 참모는 진군입니다. 본대 삼만과 주공의 부곡과 그리고 장예주·고여남에게서 얻은 부곡 이만을 더하여 도합 오만 병력을 동원, 형주를 향한다고 합니다. 소인은 주공의 부곡을 이끌 부장으로 임명되어 관우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진등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설주는 덧붙여 아뢨다.
“여남은 서주자사 미축의 아우이자 유비의 중신인 장군 미방이 맡으며, 그가 원정군의 보급을 담당하기로 되었습니다.”
진등은 무릎에 손을 올리고 무릎을 꽉 쥐었다.
“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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