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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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유비는 산문의 사천왕상처럼 눈을 부릅뜬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선 채로 얼어붙었다. 닷새 전, 손책과 주유의 주사가 산월을 이기지 못하고 전몰했다는 보고를 받고서는 덤덤하게 넘기던 그였다. 정확히 말하면, 전몰은 아니고 주유와 손책의 주석지신(柱石)인 황개, 한당, 정보 등이 주인의 수급도 챙기지 못하고 패잔병 오백 여 명만 대동하고 돌아왔다. 주유가 울면서 유비의 휘하에 종군하면서 백부(손책의 字)의 원수를 갚겠노라 서럽게 선언하던 것도 별 감흥 없는 시선으로 멀거니 바라봤을 뿐이었다.
“이, 익덕이……”
뻣뻣하게 굳은 혀를 겨우 내저어 유비는 조금씩 발음했다. 발음할수록 혀의 조금 남은 물기도 뻑뻑하게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생각할수록 생각이 사라졌다. 그것은 생각이란 것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본능의 판단이었다. 익덕이, 나의 정겨운 셋째 아우가 절명하였다. 이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유비마저 절명케 할 수 있다는 본능의 판단이었다. 유비는 생각의 극심한 정체를 겪으며 뜨거운 물을 끼얹은 듯 오르는 두통에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 익덕……”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유비는 숨을 헐떡거렸다. 좌우의 근신들이 우려스럽게 바라봤다. 그러나 섣부른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의 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탓이었다. 유비는 눈을 홉뜨고 첫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위태롭게 두 발짝 걸었다.
“크윽……”
유비는 격통에 상체를 숙이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에 더 보다 못한 근신들이 나서 그를 부축하고 장중경을 불렀다. 그는 컥, 컥 소리를 내다가 진득한 핏덩이를 토했다. 그리고 곧장 혼절했다. 혼절하는 와중에 유비의 입술이 익덕, 익덕, 여러 번 발음했다.
장비의 전사 소식이 들리고 관우가 단기필마로 귀환할 때까지 유비는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관우는 형언할 수 없이 참담한 심정으로 술을 동이채로 마시고 내내 취해있었다. 유비는 손책과 장비, 그리고 진군과 미방, 부사인을 잃고 병력 칠만을 고스란히 잃어버렸다. 치명상이었다. 활달한 사내아이가 징검다리를 두세 개씩 건너뛰듯 하던 유비가 그만 발을 헛디뎌 얕지 않은 물에 빠지고 말았다. 당분간은 허우적거릴 수밖에.
산월은 초토화됐다. 회계성에서 농성을 택하는 바람에, 성 밖의 모든 기간시설은 파괴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화전(火佃)으로 살아가던 산월이었는데 전쟁은 화전마저도 못 쓰게 만들었다. 계책의 그야말로 희생양(羊)이 돼버린 오백 마리의 염소도 있었다. 무수한 남녀가 죽고 그 썩어가는 주검에서 시작된 전염병이 또 다시 무수한 남녀를 죽였다. 비축해놓은 식량은 손책의 약탈로 모조리 소모되었다. 질긴 나무껍질을 벗겨먹고 아린 풀뿌리를 씹어 먹는 것도 사흘이면 못할 짓이 돼버렸다. 반림이 어떻게 해보지 못할 정도로 산월의 상황은 나날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심지어는 새왕 홍명마저 전염병에 걸려 고열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수, 합비로 등성(登城)하시지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하제가 반림에게 진언했다. 반림은 하제를 바라봤다.
“합비공에게 도움을 청하란 말인가?”
하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와 합비공은 돈독한 사이인데다 이번 손책과 주유의 침입을 수께서 모두 감당하셨으니 합비공이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림은 눈을 감고 고민에 빠졌다. 하제가 그런 그를 채근했다.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수. 지금도 산월의 인민이 하나둘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수 말고는 효험이 있는 방법이 없는 탓으로 반림도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반림은 하제에게 회계를 맡기고 급한 걸음으로 합비를 향했다. 수행원도 많지 않았다. 모조리 마술(馬術)에 능한 자들로 열댓만 추렸다.
“산월수께서 합비로 오신다고?”
대충 그 속사정이야 짐작할 수 있었다. 산월이 도탄지경이라는 소식을 얼핏 들어 알았다. 게다가 제갈근이 수행해야 할 손책과의 전쟁을 단독으로 치렀으니 그 전비(戰費)를 요구할 명분이 충분했다. 합비의 중요한 우방으로서 나도 그를 대우해줄 생각이었다. 만일 회계가 무너졌다면 나는 등 뒤에 손책이라는 혹을 달고 유비와 맞섰어야만 했으니까. 산월과 합비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사자성어가 꼭 맞는 관계였다.
내가 그를 속히 맞이하라 명하자, 백각교위 가후가 나섰다.
“합비공, 제가 먼저 산월수를 접견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있겠소? 어차피 산월수와는 격의 없는 관계라 자질구레한 의전은 생략해도 좋소. 게다가 산월수께서는 급한 용무로 오시는 터.”
가후는 허리를 살짝 숙였다.
“부디 백각 가후가 먼저 산월수를 접견하게 해주십시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오? 들어나 봅시다.”
가후는 태연한 표정으로 무시무시한 말들을 털어놨다. 나는 혼란스러워 그에게 재차 물었다.
“그것이 가능하겠소?”
“합비공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섣불리 말할 수가 없구려……”
나는 주저하면서 왼쪽의 량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명실 공히 현재 백각에서 확실한 두뇌는 가후와 량이었으니까. 만일 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다면 내게 확신이 없어도 밀어붙일 작정이었다. 량이는 내 시선을 느끼고 뺨을 긁었다.
“아, 저 보고 말하라고요?”
“빨리 말해.”
량이는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건드리기만 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마치 홍시 껍질 벗기는 일과 같습니다.”
웬만하면 퉁바리를 놓을 량이의 말장난이지만 워낙에 절묘하여 나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가후의 제안은 홍시의 얇디얇은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다. 용케 벗기면 입에 걸리는 것 없이 달콤하고 무른 과육만 탐할 수 있지만, 교묘하게 하지 못하면 손톱 사이에 과육이 끼고 알맹이가 터져버려 바닥에 흘러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운용의 묘(妙)가 필요했다. 나는 가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껍질 잘 까시오?”
가후는 제 손톱을 내려 보다가 대꾸했다.
“사실 저는 터트리는 게 더 재밌긴 한데요.”
“변태.”
나는 눈을 흘겼다.
반림은 합비에 당도하자마자 의관을 정제하지도 않고 합비의 정청으로 곧장 나섰다. 바람에 날려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지도 않고 성큼성큼 성내로 진입했다. 합비의 동문으로 들어오는지라 동부교위 허저가 그를 정청까지 인도했다. 반림의 마음이 어찌나 급했는지 반림의 잰걸음을 허저가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쪼, 쫌만 천천히 가셔유―”
“일이 급하다. 굳이 안내하지 않아도 된다. 내 알아서 정청으로 나아가겠다.”
반림은 숨을 헐떡이며 따르는 허저를 따돌리고 합비의 정청으로 진입했다. 정청의 바로 앞에 다다르니 백각교위 가후가 장읍을 올리며 그를 맞이했다.
“백각교위 가후가 산월의 수를 뵙습니다.”
반림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합비공을 봬야겠네.”
“잠시 저와 말씀을 좀 나누시지요.”
가후의 제안에 반림의 얼굴에 불쾌감이 번졌다.
“그대와 나눌 얘기는 없네. 합비공을 뵐 것이다.”
“합비공께서 허여하신 일입니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잠깐 시간을 허락하시지요.”
결국 반림은 가후의 말을 받아들여 그와 마주앉았다.
“속히 말하게.”
반림의 뜻대로 가후는 서론을 거치지 않고 본론으로 곧장 내질렀다.
“산월수께서는 합비공께 산월을 재건하는 데 소요되는 경비를 청하기 위해 등성하신 것이지요?”
반림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네.”
“합비공께서도 산월을 적극 원호하고자 하실 것입니다. 합비공께서는 산월수를 지극히 흠모하고 계시며 합비와 산월 사이의 오랜 우호관계를 기껍게 여기고 계신 탓입니다.”
“합비공이 나를 흠모하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네.”
가후는 미소를 띠고 단호한 투로 전환했다.
“그러나, 무작정 돕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반림은 미간을 좁혔다.
“문제라니.”
“그간 합비와 산월이 끈끈할 수 있었던 것은 공적(公敵) 손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손책이 죽은 마당에 산월의 용맹한 힘이 어디로 향할지 모릅니다. 그렇다 보니 합비공께서 산월수를 아무리 흠모한다 한들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림은 그 말을 잠자코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탁자를 쾅 내리쳤다.
“그것은 심히 모독적인 말이다, 가후! 손책을 물리쳤어도 산월과 합비의 우호는 계속될 것이다. 나를 그토록 용렬한 자로 보고 있는 것인가! 지금 그 말은 그대의 말인가, 아니면 합비공의 말인가!”
“오늘이야 산월수께서 친히 합비로 등성하시면서 원호를 구하신다지만, 세월이 지나고도 산월수께서 이러하시겠습니까? 혹 국경을 드나들면서 민가를 약탈하지는 않으실는지?”
반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입 닥쳐라!”
반림은 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화월지맹을 그대는 모르는가? 이미 상호불가침과 상호협력을 서로 맹세했거늘……!”
가후는 눈을 번뜩였다.
“아, 그러십니까? 그걸 아시는 분이 어째서 맹을 위반하셨는지요?”
“…뭐라?”
가후도 반림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오군이 위협에 빠진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회계에 머물러계셨는지요? 소 뒷발질로 쥐 잡았기 망정이지, 손책과 주유가 오군으로 들어왔다면 아군을 구원하지 않은 위반사항을 무엇으로 해명하려고 하셨는지요?”
반림은 이를 악물었다.
“허나 결과적으로는 산월의 전력만으로 손책을 죽이고 주유를 궤주시켰느니!”
“허면 산월수께서는 손책의 진로를 미리 아시고 오군으로 원병을 파견하지 않으신 겁니까?”
반림은 멈칫하며 답하지 못했다. 가후는 논의의 주도권을 끌고 왔다.
“그건 아니셨겠지요. 만일 그걸 아셨다면 오군으로 급사를 보내 원병을 청하셨을 테니까. 그렇다면 산월수께서는 다만 운이 좋으셨을 뿐입니다. 산월수께서는 맹을 위반하셨습니다.”
반림에게 남은 것은 구차한 발목잡기 뿐이었다.
“맹에는 다만 화월 간의 영원한 친교를 적시했을 뿐, 어려움에 빠졌을 때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나의 전략적 판단에 의해 회계에 체류한 것을, 그대가 화월지맹을 들어 힐난할 권한은 없다.”
가후는 잠깐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곧장 받아쳤다.
“아, 그러십니까? 허면 합비공께 방금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아뢰지요. 아마 이렇게 답을 내놓으실 터.”
가후는 합비공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뭐야, 산월수가 그렇게 말씀했어? 완전히 실망이군…… 허면 우리가 산월을 도울 의무도 없잖아? 군사적 협력이 영원한 친교에 들어있지 않다면 물자 지원 역시 영원한 친교에 해당되지 않겠지, 뭐.”
반림은 입술을 악물었다.
“내가 맹을 위반했다는 것을 따지고 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맨입으로는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방금 산월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영원한 친교라는 애매모호한 낱말로 이루어진 화월지맹은 개정되어야만 합니다.”
반림은 눈빛을 날카롭게 갈았다.
“원하는 바를 말하라.”
가후는 씩 웃으며 말했다.
“첫째, 산월의 강역은 월주(越州)로 이름 붙여 한(漢)의 영토가 될 것.”
반림은 가슴이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둘째, 월주자사는 산월수가 맡아 월주의 정사를 처리하되, 월주도독은 합비공이 지명하는 인사가 맡아 월주의 정사를 자문할 것.”
반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후의 말을 들었다.
“셋째, 월주자사는 사촌 이내의 족척 일인을 합비에 보내 합비와 월주 사이의 원활한 교통을 도모할 것.”
가후는 마지막에는 당근을 던져주었다.
“넷째, 산월수는 본디 합비공과 동렬이므로 월주자사는 자연히 회계공의 작록에 동시에 취임하여 그 위상을 공고히 할 것.”
가후는 모든 조건을 말하고 반림에게 패를 넘겼다.
“이를 받아들이신다면 합비에서는 물심양면으로 산월, 아니 월주의 재건을 도울 것입니다.”
가후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닫았다. 반림이 무어라 대답을 내놓을 때까지 그 굳은 입술은 열리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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