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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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장제가 사자를 보냈다?”
마등은 뜻밖의 내방에 다소 놀랐다. 장제는 제갈찬이랑 충실하게 붙어먹는 중일 텐데 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한중까지 사자를 보낸단 말인가. 만나보지 않을 이유는 없기에 그는 사자 호거아를 안으로 들였다. 서량의 투박한 예법이 낯 간지럽게 자리를 권하고 차를 따라주는 법이 없어서, 마등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알은체만 할 뿐이었다.
“소장의 주군이 대장군을 뵙고 서찰을 전달하라 명하셨기에 이렇듯 찾아뵈었습니다.”
자칭 대장군을 호거아가 인정해주니 마등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호거아가 공손히 건넨 서찰을 받아들었다.
“잘 읽어보겠네. 사흘 안으로 답신을 줄 터이니 쉬면서 술동이나 축내다 가시게.”
“이거, 과분한 환대입니다.”
마등은 호거아를 물리고 서찰을 읽었다. 필치는 삐뚤빼뚤하고 이따금은 오자(誤字)가 있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못 배워먹은 장제의 친필이 분명했다. 도리어 신뢰가 생겼다. 서투른 문장으로 쓰인 글은 주장만큼은 명확했다. 제갈찬과 천자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으니 비밀동맹을 맺어 달라. 제갈찬은 점점 몸집을 불릴 것이고 그대 또한 그렇게 할 것이니 언젠가는 둘이 격돌하는 때가 올 것이다. 만일 이 장제가 유총과 제갈찬에게 가담하여 장안을 굳게 걸어 잠그고 그대를 압박하면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대의 편에 서면 승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는 잇몸이 이빨을 지탱하고 입술이 잇몸을 덥히는 계책이니 모쪼록 물리치지는 마시라. 마등이 따져보기에도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마등은 호거아에게 응낙의 답신을 써서 돌려보냈다. 장제는 그저 그런 제후이지만 장안을 꿰차고 있다는 것만큼은 두려웠다. 자신과 제갈찬은 언제고 격돌할 것일 테고, 만일 그렇다면 장안에서 무수한 병력과 군량을 소모시킬 장제의 존재는 불편 그 자체였다. 만일 장제가 이쪽에 붙어 유총의 전력을 상쇄시켜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쓸모가 있는 것이었다.
장제가 관중(關中)에 붙기로 했다면 아마 격전지는 상용(上庸)이 될 것이었다. 상용은 장안의 남쪽, 양양의 서쪽, 한중의 동쪽에 위치한 요충지로 세 개의 세력 사이에서 위태롭게 서있었다. 상용은 신탐(申耽)과 신의(申義) 형제라고 불리는 독립 군벌에 의해 점유되어 있었다. 신탐 등은 본디 한중의 장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마등이 한중을 점령한 후에는 어정쩡한 태도를 견지했다. 지금까지야 합비공 측에서는 형주 북부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느라 상용을 신경 쓰지 않았고, 마등 또한 이제 막 한중에 발을 들여 상용을 쳐다볼 계제가 아니었다. 대제후들의 무관심 속에 상용의 신씨는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퍽 달라졌다. 한중을 안정적으로 장악한 마등은 남쪽의 유장을 경계하는 한편 동쪽의 요충인 상용을 호시탐탐 노렸다. 형북의 민심을 잘 가다듬은 노숙도 대국적인 안목으로 상용이 훗날 중요한 역할을 해낼 것이란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서량의 억센 사내들이 상용을 얻는다면 크나큰 위협이 될 것이기에, 사전에 상용을 포섭하고자 했다. 상용은 이제 서부전선 돌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형북의 군권과 정사를 온전히 위임받은 노숙은 합비에 보고하지 않고 독단으로 상용에 갔다. 신탐은 공손하게 노숙을 맞이했다. 합비가 이역만리 먼 곳에 떨어져 있는 터라, 신탐에게는 노숙이 더 무서웠다. 바로 근처 양양에서 강병을 조련하고 내정을 착실하게 다지는 노숙은 불편한 이웃일 수밖에 없었다.
“노형주께서 친히 상용까지 오시다니요……”
신탐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노숙을 맞이했다. 예의가 몸에 밴 노숙은 자신보다 지체가 낮은 신탐에게도 깍듯했다.
“상용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궁벽한 곳을 중요하다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노숙은 싱긋 웃었다.
“중요하기 때문에 난처하게 되셨습니다.”
신탐은 땀을 삐질 흘렸다. 노숙의 말대로 신탐은 난처했다. 얼마 전에는 마등의 상장인 방덕이 직접 기병 오백 기를 이끌고 상용에 내방했다. 서량의 억센 사내들은 어르고 달래는 법이 없었다. 탁자를 쾅쾅 내리치며 협조하지 않으면 병력을 대거 몰아 쑥밭을 만들어놓겠노라고 한바탕 협박한 뒤 돌아갔다. 그러다가 이제는 형주자사 노숙이 직접 방문하니, 그야말로 난처했다. 노숙이 웃는 낯으로 사근사근 말하지만 그도 방덕과 다를 것이 없었다. 협조하지 않으면 엄혹히 대우하는 것은 방덕이나 노숙이나 매한가지였다.
“마등은 이제 막 중원에 발을 걸쳤을 뿐입니다. 게다가 관중십장 중 우두머리일 뿐이지 관중의 장수들을 거느린 군주는 아니지요. 그러나 합비공은 어떻습니까. 화평의 기치 아래 그를 흠모하는 영걸들이 허다히 모여드니 합비공의 세력은 패업에 가장 근접했습니다. 둘 중 어느 쪽을 바라볼지는 어린 아이도 알 것입니다.”
노숙의 말은 아주 당연한 이치였다. 마등과 제갈찬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다. 추운 땅의 촌뜨기와 천하제일의 전국제후를 어찌 함께 놓고 비교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천하를 놓고 봤을 때의 일이다. 상용의 좁은 땅에 앉아 천하를 내다볼 까닭은 없었다. 상용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오백 리의 정세만 살피면 된다. 그러면 얘기는 퍽 달라지거든.
신탐은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원론적인 인사치레만 늘어놓다가 노숙을 돌려보냈다. 노숙은 막대한 재물을 상용에 놓고 돌아갔다. 너희가 우리에 붙으면 이것은 훌륭한 착수금이 되지만, 만일 우리를 등진다면 너희의 목숨 값이 되리라. 노숙은 불편한 마음으로 양양으로 복귀했다. 노숙 본인이 직접 상용을 찾았는데도 신탐 정도의 소군벌이 저렇듯 고자세로 나오는 것은 결코 기꺼운 신호가 아니었다. 뒷배를 마련해놓지 않고서는 저리도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조만간 난리가 날 수도 있겠다. 형남의 장사공과 합비의 합비공께 이를 알려라.”
노숙은 급히 동쪽과 남쪽으로 전령을 띄워 서쪽의 판세가 결코 녹록하지 않음을 알렸다. 그의 본능이 불안을 부채질했다. 노숙은 등진 상용성을 찜찜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아버지 마등이 한중에 둥지를 튼 이후로 그의 맏아들 마초도 한중에 머물러야만 했다. 내심 내키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초원을 땀이 밸 정도로 내달려야 성미가 풀리는 마초였다. 인구의 밀도가 높은 한중에서는 그럴 만한 땅이 없었다. 말의 젖으로 담근 술을 옆에 끼고 초원의 풀을 베개 삼아 눕고 싶었다. 그런 낭만을 찾기엔 한중은 너무나도 번화했다.
“천만(千萬), 서량이 그립다.”
양천만(楊千萬)은 양씨 저족의 적장자로 양씨 저족을 대표하여 마등의 한중 원정에 동행했다. 그는 마초와 동년배로 절친한 사이였다. 양천만은 저족의 젊은이답지 않게 몸이 허약한 편이었는데, 대신 머리회전은 빨라 마등이 가까이 두고 아꼈다. 제 아들을 문무겸전의 재사로 만들기 위해 마등은 마초에게 잡다한 숙제를 많이 내줬는데, 마초는 그것을 죄 천만에게 넘겨주고 대행하게 했다. 양씨 저족의 수장 역시 제 아들을 문무겸전의 재사로 만들기 위해 달포에 한 번은 잡은 사냥감을 저족의 막사로 보내도록 했는데, 사냥에 영 서투른 천만 대신 마초가 그것을 대신해주니 그야말로 상부상조였다.
“나는 한중이 오히려 좋은데? 맹기(마초의 字), 어제는 성 밖 오십 리에 있는 양잠시설에 다녀왔는데 누에가 어찌나 많던지……”
천만이 또 흰소리를 늘어놓으려 하자 마초는 푸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관둬, 관둬. 누에 따위 관심 있을까보냐.”
“누에가 얼마나 신기한데? 자자, 들어봐……”
둘이서 투닥거리려는 와중에 한중의 정청에서 급사가 나와 마초와 천만을 모두 찾았다.
“아버님의 명이냐?”
“그렇습니다요.”
“나는 그렇다 치고 천만은 왜?”
“요즘 정사를 논의하는 데 양 공을 많이 찾으십니다.”
“으잉? 나는 안 찾으시던데?”
천만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초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근육덩어리를 불러다가 뭘 해? 머리가 좀 말랑말랑해야지.”
“흥.”
마초와 천만은 나란히 서서 마등의 정청을 찾았다. 정청에는 마등 말고도 이질적인 복장의 사내 서넛이 서 있었다. 마등이 마초와 천만에게 그들을 소개해주었다.
“유익주(유장)의 중신들이다. 인사 드려라. 법 공, 내 맏아들 맹기와 저족의 자제인 양천만이라 하오.”
“마초, 자는 맹기입니다.”
“양천만이라 합니다.”
두 젊은이가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자 유장의 사자들도 일어나 예를 갖췄다. 그들의 필두는 다소 험악한 인상이었다. 짙은 눈썹과 긴 수염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유익주를 섬기는 법정(法正), 자는 효직(孝直)이라 하오.”
마등이 마초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 법 공은 팔략인지 뭔지 하는 여덟 명망가 중 하나라더구나. 그런데 이분이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어서, 너희의 생각을 물어보려고 한다.”
기실 마초야 구색 맞추기고 실질적으로 마등이 바라는 인물은 천만이었다. 개중에 그나마 머리가 휙휙 잘 돌아가는 인물이었으니까. 그의 지혜를 빌려보고자 한 것이었다. 법정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희 주군께서는 한중의 골칫거리였던 장로를 제거해주신 대장군의 은공에 감사드리며, 장로가 축출된 지금에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밝히셨습니다.”
천만은 마등을 한번 흘끗 보고 말했다.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죠.”
천진난만한 반응에 딱딱한 법정도 풋 웃었다. 순진한 말투였지만 실은 교활한 말이었다. 아쉬운 것 하나 없으니 아쉬운 네 입으로 먼저 말하라는 것. 법정은 그런 자질구레한 일로 입씨름하는 것은 피로한지라 먼저 용건을 꺼냈다.
“주군께서는 대장군과 동맹을 원하십니다.”
마등은 슬그머니 천만을 바라봤다. 그의 대답 여하에 따라 마등의 입장이 결정될 것이었다. 대국적인 안목으로 일을 살필 수 있는 인물은 마등에게 한수와 천만, 둘밖에 없었다. 현재 한수는 마등을 대신하여 서량을 관장하고 있으니 마등의 상담역으로는 천만이 유일했다. 천만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대장군, 유익주와 동맹하시지요.”
“오래 고민하지 않는구나.”
천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찬이라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익주와 겨룰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익주와 싸우기에는 검각(劍閣) 등 천험의 요새들이 겹겹이 있어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우리 서량으로서는 버겁습니다. 마땅히 힘을 합쳐 동쪽의 숙적 제갈찬을 견제해야 마땅합니다.”
쉽게 풀리는 얘기에 법정은 씩 웃었다.
“명석한 젊은이로군요.”
마등은 천만을 슬며시 바라봤다.
“너, 그 선택이 옳다고 자신하냐?”
천만은 미소를 띠었다.
“물론, 물론입니다.”
“좋아.”
마등은 법정 쪽으로 몸을 틀었다.
“유익주께 전하시오. 우리는 이제부터 한 마음으로 제갈찬의 마수를 차단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라고.”
임무를 완수한 법정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허리를 굽혔다.
“영명하신 판단에 감읍합니다.”
“유익주께서는 동쪽으로 나아가 형남의 무릉을 치고, 나는 양양의 지척에 있는 상용을 얻을 것이네.”
마등은 그렇게 말하고 잊었던 소식이 생각 나 법정에게 말했다.
“얼마 전 남양의 장제가 사자를 보내어 우리와 힘을 합치고 싶다고 전해왔소이다.”
법정의 눈이 빛났다.
“장제가 제갈찬 중심의 동맹에서 벗어난다는 겁니까?”
“그렇소. 아무래도 제갈찬을 더 신뢰하지 못하는 듯하더이다.”
“남양의 장제마저 우리 쪽에 붙는다면 제갈찬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형주의 불만세력을 책동한다면 제갈찬의 서쪽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질 수도 있겠습니다.”
마등은 흡족하게 웃었다.
“이른바 관서동맹(關西同盟)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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